펄쩍 뛸 사람이 아마도 꽤 있을 것이다. 유가 최고의 경전인 논어더러 공자가 쓴 자신의 실패한 삶에 대한 보고서라고 한다면. 그러면 논어를 ‘성공보고서’라고 할 수 있을까? 널리 알려져 있듯이 공자는 늙어서까지도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 천하를 떠돌다 귀향, 후학을 양성하다가 상서로운 신물인 기린이 붙잡히자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죽음에 접어든다. 그렇다면 논어가 최소한 득의한 삶에 대한 ‘성공보고서’가 아님은 분명하지 않은가?
1. 삶과 괴리된 말들
흔히 공자는 성인다운 삶을 살았다고 믿어진다. 하여 사람들은 논어에 나오는 아래 구절에 공자의 삶이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고들 한다.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바로 섰다.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는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그리고 나이 일흔! 마음대로 행해도 도무지 법도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그러나 쉰 살에 “천명을 알았다[知天命]”는 공자는 예순 여덟이 되어서야 천하 떠돌기를 그치고 고향에 정착했으며, 수제자 안회가 죽자 일흔의 몸으로 대성통곡하다 제자의 비아냥댐을 듣기도 했다. 그전에도 몇 차례 명분 없이 반란을 일으킨 사람에게로 가려 하다가 제자 자로의 빈축을 산 적이 있었다. “미혹되지 않는다[不惑]”는 나이 마흔을 훨씬 넘긴 예순 두 살 때의 일이다. “교언영색” 운운하며 여색을 경계했건만, 제후의 총애 속에 정사를 주무르던 남자(南子)라는 여인이 부르자 이에 응하려고도 했다. 물론 제자들의 만류에 그만두었지만. 사정이 이와 같다면 위의 말을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는 것일까?
혹자는 그래서 이 말은 공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훈계를 한 것이라고 여겼다. 정말이지 성인다운 말씀인 듯싶다. 조기교육이니 선행학습이니 하여 자기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학문의 세계로 내몰리는 우리는 열다섯은 고사하고 스무 살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어서 공부를 한다. 그러니 “열다섯에 학문의 가치를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그것에 뜻을 둔다[志于學]”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불혹(不惑)은 또 어떤가? 에이브러햄 링컨도 40세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지만, 현실은 가장 미혹에 시달릴 때가 40대라고 하고 있다. 이런 여건에서 서른 살에 “세운 바[而立]”를 굳건하게 밀고 나가면서 미혹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빼어난 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그러한 성인의 경지를 일깨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그런 훌륭한 말을 하는 공자의 삶이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구나 당시는 제자가 스승의 집에 거주하면서 가르침을 받던 시대였다. 공자의 삶은 누구보다도 제자들이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그런 제자들 앞에서 삶과 괴리된 말을 했다면 그 말의 효능은 어느 정도나 됐을까? 설령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말일지라도 제대로 먹혀들어 갔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공자가 이 점을 몰랐을 리 없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에서 말해야 제자들의 공명을 끌어내며 발화의 목적을 잘 일궈낼 수 있을까?
2. ‘직시한다’는 것의 힘
그동안 참으로 많은 학자들이 공자와 논어에 대해 연구해왔지만, 아직까지도 공자가 어떤 상황에서 이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정된 바가 없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추론해보자. 자신의 삶과는 괴리된 내용이지만 꼭 알려줘야 하는 교훈을 어떤 상황에서 말해야 비로소 제자들이 절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건 아마 공자가 삶을 마감할 즈음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회한조로 이 말을 했을 때가 아닌가 싶다. “최소한 나이 열다섯에는 주체적으로 학문에 뜻을 두었어야 했는데, 서른에는 자율적인 공적 존재로 우뚝 섰어야 했는데, 그리고 마흔에는 미혹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깨달아 헛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았어야 하는데…….”처럼.
물론 꼭 이렇게 봐야만 하는 필연적 근거는 없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고실험이 그저 관념의 유희에 그치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위대한 성인 공자’라는 상도 알고 보면 공자 사후 그의 후학들의 세속적 필요에 따라 가공되었음에 비추어본다면, 살면서 범한 실패를 긍정하며 거기서 삶의 교훈을 추려내는 공자의 모습은 한층 사실에 근거한 성인다운 풍모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공자는 모름지기 잘못을 고치는 데에 추호도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고 권계했다. 안회가 참으로 훌륭한 까닭은 남 탓하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반복치 않은 데 있다고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못을 보고는 외면치 말고 자신을 먼저 성찰하라고 주문했다. 한마디로 잘못은 짐짓 대며 감출 바도 또 남에게 전가할 바도 아니라는 것이다. 니체가, 자율적 인간 그러니까 ‘초인’은 부정적인 사태서도 자신을 강화해주는 긍정의 계기를 찾아내는 이라고 했듯이, 잘못은 인정하고 가슴에 품을 때 오히려 나를 강화해가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선 먼저 ‘부정적인 사태’를 직시하는 활동이 요청된다. 그랬을 때 자신이 범한 잘못도 직시하며 거기서 스스로를 제고해갈 수 있는 긍정의 계기를 발굴해낼 수 있게 된다. 이런 이들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실패를 뭉개다 세상을 뜨는 대신 그것을 직시하며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밑천으로 전화시킬 줄 안다. 그렇게 공자가 사심 없이 실패를 마주하며 성찰하였기에 후학들은 스승의 명예에 해가 될 수 있음에도 스승의 허물을 ‘성인(聖人)’의 이름으로 후세에 전할 수 있었으며, 공자 자신도 돌아갈 곳 잃은 개 꼴이라는 조롱 속에서도 가고자 했던 길을 평생 꿋꿋이 걸어갈 수 있었다.
개인뿐만이 아니다. 한 사회나 국가 또한 잘못과 그로 인한 실패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동서를 막론하고 저 오랜 옛날부터 역사를 중시했던 까닭은 단적으로 말해 성공한 역사나 실패한 역사할 것 없이 그 가치가 꽤나 쓸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 속의 성공담이나 실패담은 그저 접한다고 하여 바로 ‘우리’의 자원이 되고 또 반면교사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려면 성공담이든 실패담이든 간에 먼저 그 사태 자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실(史實)이 우리에게로 와 자양분이 되어준다.
곧 역사를 접한다는 것은, 설령 역사가 날 불편케 하고 맘 상하게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를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활동인 셈이다. 그렇게 서둘러 잊고 싶은 잘못을 곧이곧대로 바라보는 힘을 지녔을 때 실패는 비로소 더는 실패가 아니게 된다. 논어가 결코 공자의 실패보고서 그 자체에 머물지 않는 것처럼.
【관련 원문과 해석】
❍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바로 섰다.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에는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에는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그리고 나이 일흔! 마음대로 행해도 도무지 법도에서 벗어나질 않았다.(子曰, “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논어(論語)> 「위정(爲政)」.
❍ 안영이 죽자 공자가 큰소리로 통곡했다. 모시던 이가 아뢨다. “선생님께서도 이리 통곡을 다 하십니까?” 공자가 답했다. “통곡해야 하리라. 이 사람을 위해 통곡하지 않는다면 그 누굴 위해 통곡한단 말인가?”(顔淵死, 子哭之慟. 從者曰, “子慟矣.” 曰, “有慟乎. 非夫人之爲慟而誰爲.”) - <논어> 「선진(先進)」.
❍ 공자가 남자를 알현하고자 하니 자로가 언짢아했다. 그러자 공자가 하늘에 맹세하며 말했다. “내게 부정한 바가 있다면 하늘이 탓하시리라, 하늘이 탓하시리라.”子見南子, 子路不悅. 夫子矢之曰, “予所否者, 天厭之, 天厭之.”) - <논어> 「옹야(雍也)」.
❍ 공산불요가 비 땅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킨 후 공자를 초빙하자 가려고 했다. 자로가 언짢아하며 아뢨다. “가지 마십시오. 하필 공산 씨에게 가시는 겁니까?” 공자가 답했다. “나를 불렀는데 어찌 허투로 그러했겠느냐? 나를 다시 등용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곳을 주공(周公) 시절의 주나라처럼 치세를 펼칠 것이다.”(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不悅, 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而豈徒哉. 如有復用我者, 吾其爲東周乎.”) - <논어> 「양화(陽貨)」.
❍ 필힐이 초빙하자 공자가 가려고 했다. 자로가 아뢨다. “전에 제가 듣기로 선생님께서 ‘직접 자신에게 선하지 않은 행위를 하는 자들 사이에 군자는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필힐이 중모 땅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생님께서 가시고자 하심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그렇다. 그런 말을 했었다. 그런데 ‘견고하도다, 갈아도 얇아지지 않는구나!’라는 말도 하지 않았느냐? 또 ‘희도다, 검은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구나!’는 말도 하지 않았느냐? 나는 정녕 박이 아니더냐? 어찌 먹히지 않은 채로 매달려 있기만 하겠느냐?”(佛肹召, 子欲往. 子路曰, “昔者由也聞諸夫子曰, ‘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肹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 <논어> 「양화(陽貨)」.
❍ 공자가 말했다. “군자가 신중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게 되며, 배워도 견고해지지 못한다. 신실하고 미더운 이를 군주로 삼고 자기만 못한 이를 벗하지 말라. 잘못했으면 기탄없이 고쳐야 한다.”(子曰, “君子不重, 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 則勿憚改.”) - <논어> 「학이(學而)」.
❍ 공자가 말했다. “끝이로구나, 나는 자신의 잘못을 보면서 스스로를 탓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子曰, “已矣乎, 吾未見能見其過而內自訟者也.”) - <논어> 「공야장(公冶長)」.
❍ 애공이 물었다. “제자 가운데 누가 배움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하여 아뢨다. “안회라는 이가 있는데 배움을 좋아하여, 분노를 남 탓으로 돌리지 않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단명하여 세상을 떠나 지금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그 후로 배움을 좋아한다는 이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 논어 「공야장(公冶長)」.
❍ 공자가 정나라로 갈 때에 제자들과 서로 떨어졌다. 공자가 성곽 동쪽 문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정나라 사람 중 혹자가 자공에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서 있는데 그 이마는 요임금 같고 그 목은 고요와 비슷하며, 그 어깨는 자산과 유사하고 허리 밑으로는 우임금보다 3촌 정도 작습디다. 풀 죽어 있는 모습이 마치 돌아갈 집을 잃은 개와 같더이다.” 자공이 이를 공자에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니 공자가 흔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양새는 그렇지 않으나 돌아갈 집을 읽은 개처럼 풀 죽어 있다고 한 말은 정말로 그러하구나, 정말로 그러해!”(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顙似堯, 其項類皋陶, 其肩類子產, 然自要以下不及禹三寸. 纍纍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 末也, 而謂似喪家之狗, 然哉, 然哉.” -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 이 글은 동일한 제목으로 <사과나무> 2006년 10월호에 게재한 것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11, 2014년 11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