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3-17 09:40
공자 다시보기(8). 도(道)의 실천 내용과 형식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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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다시보기(8). 도(道)의 실천 내용과 형식

앞에서 덕(德)을 구성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중(中)과 화(和)이고, 화(和)는 조화로움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공자에게 있어서 화(和)는, 구체적으로 도대체 무엇과 무엇의 조화로움을 뜻하는 것일까? 이제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먼저 살펴보자.

위(衛)나라 대부 극자성이 말하기를: “군자는 도(옛 성현들의 통치이념)의 내용만을 중시하면 될 것이지, 굳이 도의 형식까지 중시할 필요는 없다!” 자공이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어른께서는 군자를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네 마리 말이 세치 혀 하나를 따르지 못하듯, 내용이 때로는 형식을 따르지 못합니다. 형식은 내용과 떨어질 수 없고, 내용 역시 형식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도는 내용과 형식을 함께 병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에 화려한 무늬의 털이 없다면, 개나 양의 털을 뽑아놓은 가죽과 구별할 수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

이미 앞에서 누차 강조한 것처럼, 군자는 도(道)를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하는 올바른 지도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극자성은 참된 지도자는 도(道)의 내용만을 중시하면 된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자공은 도(道)의 내용과 형식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고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도(道)의 내용이 되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고, 또 그 형식이 되는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 것일까?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기록을 살펴보아야 한다.

어질음이라는 것은, 의로움의 근본이며 순응함의 격식이다. [예기(禮記)] <예운(禮運)>

이 문장을 통해서, 인(仁) 즉 어질음은 의(義) 즉 의로움의 바탕이 됨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의(義)는 인(仁)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어질음을 두터이 하는 이는, 의로움에 박하므로, 백성들이 가까이 하지만 공경하지는 않는다. 의로움을 두터이 하는 이는, 어질음에 박하므로, 백성들이 공경하지만 가까이하지는 않는다.” [예기(禮記)] <표기(表記)>

인(仁)은 부드러움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가까이 하지만 공경하지는 않는다. 반면에 의(義)는 엄격하고 강함이기 때문에, 백성들이 공경하지만 가까이 하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는 이를 통해서 부드러움과 엄격함의 화(和) 즉 조화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부드러움의 인(仁)은 엄격함의 의(義)의 근본이 되는 것이고 나아가 윗사람에 순응하는 틀이 되지만, 의(義)가 없으면 인(仁) 역시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이를 정리하자면, 부드러움의 인(仁)과 엄격함의 의(義)는 어디까지나 따로 존재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함께 해야 만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仁)과 의(義)만으로는 도(道)에 도달할 수 없다. 반드시 예(禮)가 함께해야 만이 온전한 도(道)를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

도와 덕 그리고 어질음과 의로움은, 예가 아니면 완성시킬 수 없다. [예기(禮記)] <곡례상(曲禮上)>

그렇다면 인(仁)과 의(義) 그리고 예(禮)는 도의 형식과 내용 중에서 과연 어떠한 부분에 해당하는 것일까?

의로움의 이치는 예로서 채색하는 것이다. 근본이 없으면 확고하게 설 수 없고, 채색함이 없으면 행할 수 없다. [예기(禮記)] <예기(禮器)>

자하가 묻기를: “[시경]에 ‘어여쁜 미소가 환하고, 아름다운 눈은 흰색과 검은색이 분명하네.’라고 하였는데, 이는 흰색으로 밝게 비춘다는 것이니, 무슨 뜻입니까?” 공자가 이르시기를: “흰 바탕이 있은 후에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이네.” 자하가 말하기를: “흰 명주를 갖춘 다음에 그림을 그릴 수 있듯이, 먼저 내용을 실천하고 그 다음에 형식인 예로서 그것을 수식해야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것입니까?” 공자가 이르시기를: “자하 네가 새로운 연상능력으로 나를 일깨우는구나. 이제 비로소 너와 함께 [시경]을 말할 수 있겠구나.” [논어(論語)] <팔일(八佾)편>

이를 통해서 막연하게나마 의(義)는 도(道)의 내용이 되고, 예(禮)는 형식이 됨을 알 수 있는데, 이미 앞에서 설명했듯이 인(仁)은 의(義)의 근본이 되므로 결국 도(道)의 내용은 인(仁)과 의(義)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는 도(道)의 내용이 되는 인(仁)과 의(義)를 먼저 실천하고, 다시 그것을 형식인 예(禮)로 완성시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예를 어떻게 하겠는가? 사람이 어질지 못하면, 음악을 어떻게 하겠는가?” [논어(論語)] <팔일(八佾)편>

또한 이 문장을 통해서 어렴풋하게나마, 도(道)의 형식에는 예(禮) 이외에도 악(樂)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예(禮)와 악(樂)은 또 어떠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인(仁)은 악(樂)에 가깝고, 의(義)는 예(禮)에 가깝다. [예기(禮記)] <악기(樂記)>

음악이라는 것은, 같이하여 다스리는 것이고; 예라는 것은, 달리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같이한다는 것은, 곧 서로 가까이 하는 것이고; 달리한다는 것은, 곧 서로 정중한 것이다. 음악이 지나치면, 곧 번져서 퍼지게 되고; 예가 지나치면, 곧 흩어진다. 이치에 맞게 하고 표면(형식)을 수식하는 것이, 예악의 기능이다. 예악이 확고히 서면, 곧 귀함과 천함이 구별된다. 음악(형식)과 文(문: 내용)이 같이하면, 위와 아래가 조화롭게 된다. 좋아함과 미워함이 드러나면, 곧 현명함과 못나고 어리석음이 나눠진다. 제어하여 난폭함을 누르고, 벼슬을 주어 현명한 이를 추천하면, 곧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고르게 된다. 어질음으로써 역성들고(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무조건 따르고), 의로움으로써 바로잡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곧 백성들을 다스림이 행해지게 된다. [예기(禮記)] <악기(樂記)>

위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듯이, 도(道)의 내용이 되는 인(仁)은 부드러움이 되는 반면 의(義)는 엄격하고도 강함이 된다. 그런데 그런 인(仁)이 악(樂)에 가깝고, 의(義)는 예(禮)에 가깝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이제 이들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도표(필자의 저서 [논어, 그 오해와 진실]에서 인용함)로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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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도(道)의 내용이 되는 부드러움의 인(仁)과 강함의 의(義)가 조화를 이뤄서 떨어질 수 없듯이, 도(道)의 형식인 예(禮)와 악(樂) 역시 상호 불가분의 관계에 놓임으로써 진정한 화(和) 즉 조화로움을 이뤄야하는 것이다.

도(道)의 형식이 되는 예(禮)와 악(樂)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악제도(禮樂制度) 즉 오늘날의 전례(典禮) 혹은 의전(儀典)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자는 도(道)의 구체적인 내용이 되는 인(仁)과 의(義)라는 것이, 형식이 되는 국가 통치에 있어서의 예악제도로 절제되고 통제되어야 화(和)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자는 [논어]를 통해서 끊임없이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그 취지는 다름 아닌 내용이 없으면 형식 역시 존재할 수 없고, 형식이 없으면 내용 역시 온전하게 제 역할을 다 할 수 없다는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따라서 군자가 어질음과 의로움의 도를 살피는 데는, 예가 그 근본인 것이다. [예기(禮記)] <예기(禮器)>

비록 공자는 도(道)의 내용을 먼저 실천한 후에 도(道)의 형식으로 그것을 보필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실천의 순서일 따름이지 결코 경중(輕重)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다소 뜬금없기는 하지만, 사자성어 하나를 소개해보자. 우리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성어를 자주 쓰고 있는데, 이 성어는 본디 어떠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을까?

옥은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되지 못하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옛날의 임금 된 자는 나라를 세우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가르침과 배움을 먼저 했다. [상서(尙書)] <열명(說命)>에 이르기를: “삼가여 처음부터 끝까지 배움에 종사한다.” 그것은 이를 일컫는 것일지니! 비록 좋은 안주가 있어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을 알지 못하고; 비록 지극한 도가 있어도, 배우지 않으면 그 선함을 알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배운 후에야 부족함을 알고, 가르친 후에야 어려움을 안다. 부족함을 알면, 그런 후에야 능히 스스로 돌이켜보고; 어려움을 알면, 그런 후에야 능히 스스로 힘쓴다. 따라서 이르기를: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한다.” [상서(尙書)] <열명(說命)>에 이르기를: “가르침은 배움의 절반이 된다.” 그것은 이를 일컫는 것일지니! [예기(禮記)] <학기(學記)>

예로부터 사람들은 군자를 언급함에 있어서 종종 옥(玉)으로 비유해왔는데, 이처럼 위의 기록 역시 어김없이 옥을 언급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이제 다음 기록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자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감히 묻습니다. 군자가 옥을 중시하고 옥돌을 경시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옥은 적지만 옥돌은 많아서입니까?” 공자가 이르시기를: “옥돌의 많음으로, 경시하고; 옥의 적음으로, 중시하는 것이 아니다. 무릇 옛날에, 군자는 덕을 옥에 비유했다. 옥이 온화하여 윤이 나는 것은, 어질음이다. 옥이 촘촘하여 단단한 것은, 지혜로움이다. 옥이 모나지만 상처를 입히지 않는 것은, 의로움이다. 옥을 오가는 길과도 같이 드리운 것이, 예이다. 드리운 옥을 두드려서, 그 소리가 맑게 흐트러져 나아가다가, 그 소리가 짧게 뚝 그치는 것은, 음악이다. 옥의 티가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하고, 아름다움이 티를 가리지 않는 것은, 정성스러움이다. 옥의 미더움이 널리 드러나는 것은, 믿음이다. 옥의 기운이 하얀 무지개와 같은 것은, 하늘이다. 옥의 성령이 산천에 드러나는 것은, 땅이다. 규장(옥으로 만든 그릇)이 특별하게 쓰이는 것은, 덕이다. 옥이 세상에서 귀히 여겨지지 않음이 없는 것은, 도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요컨대 군자를 생각하면, 온화함이 그 옥과도 같다.’고 했다. 따라서 군자는 옥을 중시한다.” [예기(禮記)] <빙의(聘義)>

여기서 공자는 옥의 특징으로 인(仁), 지(知), 의(義), 예(禮), 악(樂), 충(忠), 신(信), 천(天), 지(地), 덕(德), 도(道)를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다른 부분은 차치하고 이제 인(仁), 의(義), 예(禮), 악(樂)만을 비교 및 정리해보기로 하자.

 

2.jpg*[논어, 그 오해와 진실]의 도표를 내용에 맞게 재편집한 것임.

공자는 이처럼 옥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군자의 도(道)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예(禮)와 악(樂)을 옥의 내적인 성질(내용)이 아닌 외적인 효과(형식)로 표현하여, 다른 요소들과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상술한 내용을 토대로 다시 한 번 극자성과 자공의 대화를 살펴보면, 극자성은 도(道)의 형식인 예(禮)와 악(樂)을 반대하고 오로지 그 내용만을 중시해야 한다고 한 반면, 자공은 공자의 뜻을 이어받아서 형식인 예악(禮樂) 역시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에게 있어서의 화(和)란 다름 아닌 도(道)의 내용이 되는 인의(仁義)와 그 형식이 되는 예악(禮樂)의 조화가 되는 것이다. 이제 다음부터는 도(道)의 내용이 되는 인(仁)과 의(義), 그리고 형식이 되는 예(禮), 악(樂)의 구체적인 함의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4, 2014년 4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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