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키아벨리와 같은 사람이 어떤 부분 또는 어떤 사실을 제자들에게 바치는 책에서 침묵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제자들의 부탁을 받고 책을 써 내려간 선생, 이들에게 자신의 책을 시간을 두고 읽어달라고 부탁했던 선생, 그리고 이들이 자신이 꿈꾸는 공화정의 지도자들이 될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었던 선생이라면, 말하는 것만큼이나 침묵을 통해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강의>에서 마키아벨리가 보여주는 혁명(revoluzione)에 대한 침묵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혁명적 소용돌이나 정치적 격변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강의>에서 마키아벨리는 그 누구보다 상세하게 집단적 기나 정치 체제의 변화를 설명했다. 다만 이러한 정치적 격변을 설명할 때, 마키아벨리는 의도적으로 revoluzione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폭동(tumulto), 혁신(novità), 정체변화(mutazione), 봉기(ribellione), 쇄신(rinnovazione), 그리고 음모(congiura)라는 단어들을 혁명적 사건의 묘사를 위해 사용한다.
혹자는 revoluzione가 1년마다 천체의 운행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했다고 주장하지만, 16세기 르네상스 시기부터는 기존 정치질서가 폭력적 방법이나 집단적 봉기로 인해 전복되는 것 또는 이와 유사한 정치적 격변을 지칭하는 단어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제로 14세기부터 revoluzione는 빈번하게 정치적 의미로 사용되었고, 마키아벨리 자신도 <군주>에서 revoluzione를 사용해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수많은 정치 변동을 묘사하기도 한다(Principe 26). 그렇다면 왜 마키아벨리는 <강의>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기피한 것일까? 만약 <피렌체사>(Istorie Fiorentine)에서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메디치 가문의 감독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제자들에게 바친 책에서는 무슨 이유로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선생으로서 마키아벨리에게 주목할 이유가 있다. 특별히 그가 책을 바쳤던 제자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그의 제자들은 지배하려는 욕구를 가진 귀족(i grandi)으로 분류된다. 마키아벨리는 사회를 두 집단으로 분류하고, 각 집단이 가진 정치적 경향성을 심리적 기질(umore)로 표현하곤 했다. 하나는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진 귀족(i grandi)이고, 다른 하나는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구를 가진 인민(il populo)이다(Principe 9; Discorsi 1.4). 이때 귀족의 지배하고자 하는 기질은 끝없는 야망과 같은 것으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이지만, 인민의 지배받지 않고자 하는 기질은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가 미래를 결정할 수 있을 때 만족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된다.
설사 인민이 소요를 일으킨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는 귀족의 오만함이 인민에게 자유롭고자하는 열망으로부터 지배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Discorsi1.5). 동시에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기질을 노예 상태와는 대립되는 자유(libertà)라고 불렀고, 인민의 자유를 통해 귀족의 야망을 견제할 수 있는 정치 질서가 바로 공화정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분류에서 본다면, 마키아벨리가 책을 바친 코지모(Cosimo Rucellai)와 자노비(Zanobi Buondelmondi)는 귀족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피렌체의 대표적인 유력자 집안의 자제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제자들은 마키아벨리에게 ‘대중 정치인’(popolari)이었다. 마키아벨리가 정의하는 ‘대중 정치인’은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중 지도자를 가리킨다. 특히 마키아벨리의 뇌리에 깊게 새겨진 대중 정치인은 로마 공화국에서 10인 위원회의 전제를 주도했던 아피우스(Appius Claudius)와 그의 친구들이다. 아피우스는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처럼 속여 10인 위원회의 임기를 연장하고, 귀족들의 예상을 깨고 스스로를 추천해서 재선된다(Discorsi 1.42). 마키아벨리는 모든 일이 끝난 후 인민의 적으로 돌변한 아피우스의 영민함(astuzia), 그리고 그의 사악함(malignità)에 물들어 탁월함과 선량함을 잃어버린 파비우스(Quintus Fabius)의 부패를 대중 정치인의 전형으로 묘사한다(Discorsi 1.43).
특히 아피우스가 대중의 지도자(uomo popolare)인양 행동했다고 말할 때(Discorsi 1.41), 마키아벨리는 루첼라이 정원(Orti Oricellari)의 모임에 참여한 유력자 가문의 자제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용례에도 없는 복수를 써가며 그의 제자들이 ‘지도자들’(principi)이 될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있다. 즉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졌기 때문에 귀족의 심리적 기질을 공유하지만, 지위는 인민일 수도 있고 귀족일 수도 있으며,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지만 민중의 정치 참여에 인색한 귀족적 정부(governo stretto)를 지지할수도 있는 대중 정치인으로 그의 제자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선생으로서 마키아벨리는 혁명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인간 사회에서 갈등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제도를 통해 잘 정비된다면 인민의 자유와 공화정의 위대함을 가져올 것이라고 믿었던 마키아벨리에게도 제자들에게 가르칠 최상의 방법이 혁명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원했던 바가 혁명적 참주의 출현이었다면 혁명에 대해 침묵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완전히 부패한 공화국의 개혁을 위해서는 제왕적 권력(podestà regia)을 가진 한 사람(uno solo) 또는 왕국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 권력의 행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Discorsi 1.17 & 1.18). 그러나 피렌체는 완전히 부패한 공화국이 아니었고(Principe 26), 심각한 불평등으로 군주정 이외의 어떤 것도 세우기 힘든 도시도 아니었다(Discorsi 1.55). 대신 로마 공화정과는 달리 상호 파멸로 치닫고 있는 귀족과 인민의 대결, 그리고 외국 군대와 참주를 옹립해서라도 상대를 제거하고자 갈망하는 환경 속에 있었을 뿐이다(Istorie 3.1). 이런 상황에서 대중 정치인 또는 잠재적 대중 지도자로 묘사된, 그리고 열정으로 가득한 그의 젊은 제자들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도 조심했건만, 자노비를 비롯한 루첼라이 정원의 젊은이들이 설익은 반메디치 음모사건에 연루되었지 않았던가 말이다.
2. 마키아벨리는 침묵으로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려고 했을까? 바로 민주적 리더십이다. 여기에서 민주적 리더십이란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지만, 인민과 귀족을 포괄하는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한 지도자의 능력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정치 개혁의 청사진으로는 참주 살해 음모와 외세에 대한 저항, 제도적으로는 인민의 폭넓은 정치 참여를 허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는 공화정이 <강의>와 관련되어 논의된다. 사실 이러한 논의에서 리더십은 상대적으로 간과된다. 그러나 제왕적 권력이나 혁명적 참주가 마키아벨리의 대안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리더십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리더십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과 유사한 귀족과 인민의 대립이 피렌체에서는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나는 현실을 경험했고, 인민의 폭넓은 정치 참여를 허용했던 로마 공화정의 실현을 꿈꾸었지만 무능한 지도자로 인해 정치적 실패를 맛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혁명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침묵은 혁명적 참주와 제왕적 리더십과는 다른 형태의 리더십을 찾아낼 수 있는 하나의 열쇠다.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제자들과 비슷한 기질과 열정을 가진 인물들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다. 이런 인물들은 1권에서 7로 끝나는 장마다 등장한다. 인민에게 잔인했던 로마 귀족의 자제 코리올라누스(Coriolanus)와 사보나롤라를 지지한 민중파였지만 민주적이라기보다 너무나 일방적이었던 피렌체의 귀족 발로리(Francesco Valori)가 탄핵(le accuse) 제도의 중요성과 함께 7장에서 언급되고, 스파르타에 의해 옹립된 참주에 저항한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가 17장에서 묘사되며, 율리우스 2세를 죽여 스스로의 부도덕함을 위대함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며 비난받은 용병 대장 발리오니(Giovanpagolo Baglioni)가 27장에서 등장하고, 37장에 그 이름도 유명한 로마 공화정의 그라쿠스(Gracchus) 형제와 47장에 카푸아의 파쿠비우스(Pacuvius Calavus)가 대중 정치인의 모델로 제시되며, 57장에서 대장(capo)이 없는 분노한 인민은 너무나도 약하다는 한탄으로 마무리가 된다. 앞의 3개의 장에서 대중 정치인이 인민의 견제를 받을 수 있는 제도와 외세에 대한 저항을 조직할 수 있는 장군의 역할이 강조되었다면, 뒤의 3개의 장에서는 대중적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리더십의 구체적인 내용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그의 침묵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마키아벨리는 토지법을 부활시켜 인민과 귀족의 갈등을 증폭시킨 그라쿠스 형제들이 무질서의 시발점이었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들이 목도한 로마 공화정의 문제는 어떤 특단의 조치가 없이는 해결될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 그들의 의도를 옹호하는 데에는 주저함이없었다(Discorsi 1.37).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그라쿠스 형제의 의도를 지나친 욕심으로 몰아갔던 것에 비한다면 매우 관대한 평가다.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그들이 보다 많은 인민들에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주기 위해 시행한 시민권의 확대를 재선을 위한 빌미로 해석하는 입장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비추어 본다면, 마키아벨리는 인문주의자들의 고전 해석과 관련된 논쟁에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의 관심은 시민적 방식과 관습(ogni modo e costume civile)을 무시하면서까지 잘못 생각한 정책(partito male considerato)을 추진했던 그라쿠스 형제의 신중하지 못했던 처사에 집중되어 있다.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참주의 출현을 두려워해야 할 공화정의 인민의 대변인들이 참주가 권력을 획득하는 방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으로써 인민과 귀족들 모두가 무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1권 47장의 파쿠비우스는 피렌체에 필요한 리더십의 전형으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마키아벨리는 파쿠비우스가 기만을 통해 인민의 지지를 받고, 이러한 인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한 것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만약 마키아벨리가 리비우스의 <로마사>(Ab Urbe Condita)에 전적으로 의지했다면, 10인 위원회의 아피우스와 유사한 영민하고 악한 사람으로 기술했을 것이다(Livy 23.2). 그러나 마키아벨리에게 파쿠비우스는 초당파적이고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했던 민주적 리더였다. 파쿠비우스는 안으로는 혁명의 기운이 만연하고 밖으로는 한니발의 위협에 빠진 카푸아의 운명을 감지했던 신중한 리더였고, 귀족과 인민들을 화해시키는 계획을 성공시킨 대중 정치인이었던 것이다. 마치 자신이 유력 가문의 자제들에게 인민의 분노가 가져올 절망과 인민의 자유가 가져올 영광을 대비시킴으로써 인민과 더불어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설득했듯이, 파쿠비우스는 귀족들에게는 닥쳐올 혁명의 위험을 인지시켜 동의를 얻어내고 인민들에게는 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민주적 리더십에 대한 서술을 종합하면, 갈등을 통한 협력은 갈등을 제도 내에서 해결하려는 의지를 가진 신중한 리더십과 이러한 갈등이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묶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둘 중에 마키아벨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신중한 리더십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의 적극적인 정치 참여에 의지할수록, 그리고 인민의 정치적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체제일수록, 인민의 의지에 의해 창출된 통치와 인민의 새로운 형태의 통치에 대한 요구가 대립하는 경우가 잦아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절한 제도 아래에서도 결백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처벌을 당할 수 있고, 소데리니와 같이 적법한 절차만으로 악을 제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자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마키아벨리가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기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마키아벨리는 첨예한 당파적 갈등은 신중한 리더십이 없이는 새로운 제도를 창출할 수 있는 협력으로 갈 수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고, 도덕적 일관성을 요구했던 고전적 전통으로부터 끔찍한 위기 상황(casus dirae necessitatis)에서 필요한 지도자의 판단을 독립시킴으로 신중한 리더십이 획득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전적 전통의 윤리적 잣대는 버렸지만,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의사에서 출발하지만 인민의 이익을 넘어 전체를 조망하는 민주적 리더십을 골자로 하는 공화주의의 현실주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다.
3. 선생으로서 마키아벨리는 한편으로는 즐겁고 한편으로는 처절해 보인다. 마키아벨리의 미소가 전자라면, 마키아벨리의 침묵은 아마도 후자에 가깝다. 침묵은 심약한 군주에게 용맹(audacia)을 가르치는 일보다도 더 많은 지혜가 요구되는 것이었고, 혈기와 야망으로 무장한 그의 제자들은 선생이 침묵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베토리(Vettori)에게 보낸 편지는 이런 침묵이 담아낸 처절함을 보여준다. “나는 프란체스코 구이치아르디니를 사랑하네. 그리고 나의 조국(patria)을 내 영혼(anima)보다 사랑하네. 내육십 평생의 경험으로 자네에게 말하네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articuli)은 없었네. 평화는 필요하지만 전쟁을 포기할 수는 없고, 평화든 전쟁이든 어떤 것도 잘 할 수 없는 군주를 우리가 모시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에서, 우리는 선생으로서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다(Lettere Aprile 16 1527). 친구처럼 생각했지만 14년 연하인 귀치아르디니에게 조국의 미래를 걸었던 것처럼, 정치적으로 의견이 달랐지만 자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유력한 가문의 자제에게서 조국의 희망을 발견했던 것처럼, 마키아벨리의 침묵은 그의 절망 속의 희망을 담는 수사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침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메디치 가문의 축출 이후에 닥친 위기 상황에서 당황하던 피렌체와 우리의 일상이 닮아가고있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당면한 개개인들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다가 위험만 더욱 가중시키는 사회,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불안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념적 도덕률만을 고집하며 회랑과 광장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선전하는 대중 정치인, 이러한환경 속에서 무능력하고 비효율적이라고 낙인이 찍힌 민주주의, 이 모든 것들이 그 시대를 아가던 마키아벨리를 침묵하게 만든 이유와 닮아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시대 ‘야망이 부른 방종’(una certa licenza ambiziosa)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런 혼란의 시대에 마키아벨리는 침묵을 수사의 방식으로 선택했다. 왜냐하면, 이런 시대에는 인민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민의 지지를 받다가 인민의 자유를 빼앗아갈 참주의 출현이 잦다는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이고, 혼란이 키워낼 악(male), 곧 로마 공화정의 시저와 피렌체의 코지모(Cosimo de' Medici)와 같은 참주를 열망하는 제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최근 대학도 마키아벨리의 침묵을 불러온 피렌체의 일상을 경험하고 있다. 극도의 긴장과 경쟁을 통해 성장한 학생들이 미래의 불확실성과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스로를 관리하는 일상 속에서 더욱 개인화되고 있는 것이다. 민주적 리더십은 이미 이들에게 있어 능력과 선택의 함수관계로 전락해 버렸다. 어느 시대나 능력과 선택의 함수관계는 존재했다. 그러나 능력만이 올바름을 평가하는 척도로 작용할 때, 품위가 물질만으로 구성될때, 경제적 풍요가 정치적 선택의 유일한 기준이 될 때, 능력과 선택의 함수관계에서 민주적 리더십은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타인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갖는 자기 열정과 스스로의 세계에 고립된 집착만이 무성한 사회에서 민주적 리더십이 배양될 토양을 발견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문제마다 즉흥적으로 형성되는 연대로 민주주의의 새로운 형태를 꿈꾸거나, 선택된 위험의 관리만으로 정치를 이해하거나, 아니면 실용이라는 름으로 변화에 적응하는 것만이 정치적 성취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선전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처사다. 민주주의를 통한 불확실성의 해소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오히려 바람직한 민주주의의 모델에 대한 질문들이 필요하고, 당면한 정치사회적 위험을 공유할 수 는 민주적 시민성을 배양할 방법을 논의해야 하며,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민주적 리더십의 내용을 토론해야 한다. 침묵으로 민주적 리더십을 가르쳤던 마키아벨리의 지혜가 필요한 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4, 2013년 12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윤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