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한국인들은 동학의 신앙 대상을 한울님으로, 그 핵심 교의를 인내천(人乃天)으로 알고 있다. 물론 이런 상식이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사실 19세기의 동학, 특히 최제우가 세운 교리만 놓고 보면 동학의 신앙 대상은 ‘하늘님’이고, 중심 교의는 ‘하늘님 모심’이었다. 얼핏 보면 이 차이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양자의 차이는 적지 않다. 한울님은 범신론에 가까운 데 비해 하늘님은 우선은 인격신이면서도 범신론의 신 관념까지 아우르고 있고, 인내천은 신의 내재성만을 인정하는 데 반해 하늘님 모심은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긍정하기 때문이다. 동학·천도교의 발전사를 훑어보면 신앙 대상과 중심 교의의 이런 변화는 동학이 천도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교단을 근대적 종교조직에 걸맞게 재편한 20세기 초엽에 나타나는데, 그런 변화가 생겨난 데에는 복잡한 역사적, 사상적 배경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다루도록 하고 여기서는 19세기 동학의 하늘님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그것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만 이야기하려고 한다.
최제우가 저술하고 후에 최시형이 주도하여 발간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보면 하늘님은 한자로는 천주(天主)로, 한글로는 ㅎㆍㄴㆍㄹ님으로 각각 표기되어 있는데, 이 두 명칭에서 사람들은 상고시대 한민족의 신앙 대상이었던 하늘님과 천주교의 신앙대상인 천주를 동시에 떠올리곤 한다. 그런데 오늘날 동학의 신 관념과 관련된 연구를 보면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학의 신이 한민족이 예로부터 믿어온 하늘님만을 가리킬 뿐, 천주와는 관련이 없는 듯이 이야기한다. 일부 소수 학자들의 견해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최제우의 하늘님 관념은 고래의 무속적인 하늘님 신앙과 연관될 뿐만 아니라 천주교의 천주 관념과도 일부 공통점을 지니며, 심지어 전통 유학의 하늘(天) 관념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최제우의 하늘님 관념은 무속적, 천주교적, 유학적 요소들이 융합되어 형성된 것이다. 하늘님에 관한 최제우 자신의 설명과 최제우의 행적에 대한 역사기록 등은 이 점을 증명해줄 것이다.
2.
최제우의 하늘님 관념은 1860년 4월의 신비로운 종교체험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형성되는데, 이 체험 기록을 보면 그가 조우한 하늘님의 성격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증상을 알 수 없고 말로도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묻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 부르거늘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이렇게 나타나신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셨다. “나 또한 공이 없어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고자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물었다. “그러면 서도(西道)로 사람들을 가르칠까요?” 대답하셨다. “아니다. 나에게 영험한 부적이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고 그 형상은 태극이며, 또 형상은 궁궁(弓弓)이니, 나의 이 영험한 부적을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들을 가르쳐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펼치리라.” (<동경대전> 「포덕문」)
온몸이 심하게 떨리는 병을 앓은 끝에 신과 조우했다는 점, 신이 부적으로 사람들의 병을 치유하라고 했다는 점은 무속의 무병·접신·부적 처방과 매우 흡사하며, 이로부터 최제우가 만난 상제를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환인이나 부족국가 시대의 제천의례에서 섬기던 하늘님과 충분히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 또 위에서는 외재적인 신의 음성이 밖에서 들리는 것으로 묘사했지만 다른 곳에서는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는 영과 접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말씀을 내려주시는 가르침이 있었다”(<동경대전> 「논학문」)고 한 대목을 근거로 들어, 이것이 무당이 신의 말씀을 받는 것과 유사함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유사성에 대한 주목만 가지고는 해명되지 못하는 점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최제우도 무당처럼 신의 말씀을 받기는 하지만 무속처럼 “신령이 직접 무당의 몸으로 들어와 무당의 입을 통해 말씀을 전하는 것”(최준식 외, <한국적 정신과 문화의 심층>, 2013)은 아니라는 점이다. 최제우는 분명히 인격신인 상제와 대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하고 있고, 이 점에서 그의 종교체험은 기독교적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도 몸의 떨림과 이를 계기로 한 성령의 임재 체험이 자주 목격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한편 다른 한 가지는 최제우가 상제에게 다른 것이 아닌 서도, 즉 천주교로 가르칠 것인지를 묻는 대목이다. 민간에 무속적 신앙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고 유교국가에서 성리학 교육을 받은 그가 무속이나 유교가 아닌 천주교를 언급한 까닭은 이 종교체험 이전부터 그의 머릿속에 천주교의 천주 관념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예상케 한다. 이런 추측이 무근거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정황증거가 최초의 동학 교단 역사 기록에 보인다. 이 기록을 발췌하면 아래와 같다.
1855년 3월, 최제우가 울산에 있을 때 집으로 한 노승 복장을 한 이가 찾아왔다. 금강산 유점사 중이라 소개한 이 노승은 불공을 드리다 탑 아래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책을 한 권 발견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다 최제우가 박식하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한다. 책을 훑어본 최제우는 그것이 유교나 불교로는 그 글의 이치가 풀리지 않는다는 점을 간파하고 사흘 후에 다시 오라고 한다. 사흘 후에 노승이 다시 찾아오자 최제우는 그 책의 내용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노승은 그 책은 최제우가 갖고 있어야 할 책이라 하면서 자신은 그저 전하기만 할 뿐이라고 말한 뒤 사라진다. 이에 최제우는 그 노승이 신인(神人)임을 알아차렸으며, 그 책을 다시 살펴보고 그것은 “기도의 가르침이 담긴 책”임을 알게 된다. (<최선생문집도원기서>에서 발췌)
노승을 낮잠을 자다 비몽사몽간에 만났다고 할 정도로 신비스럽게 서술되어 있는 이 사건을 천도교 측에서는 ‘을묘 천서(天書)’ 사건이라고 일컫는다. 1855년에 최제우가 신비로운 천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용옥이 지적하듯이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신비한 천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는 최제우가 입수한 책을 여러 정황근거를 대며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였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데(김용옥, <도올 심득 동경대전 1>, 통나무, 2004, 201~212쪽 참조), 그 책을 천주실의라 단언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한역 천주교 교리서 중 하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우선 유교나 불교의 지식으로는 글이 이해되지 않았다는 점, 기도의 가르침이 담긴 책이었다는 점 등에서 그 책이 천주학 관련 책이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다. 또 승려라는 사람이 어찌하여 불경도 아닌 책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도처를 헤매었으며, 그 책의 의미를 최제우가 알겠다고 하자 자신은 그 책을 전하기만 할 뿐이라고 하고 사라졌는지도 석연치 않다. 김용옥의 추측대로 그 승려는 어쩌면 승려로 가장한 천주교 선교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신인(神人)이라는 말이 노장 철학적 용어이지만, ‘신의 뜻을 전하는 사람’을 은밀하게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추정일 뿐이지만 당시 조선사회의 상황을 생각할 때 매우 개연성이 높은 추정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에서 천주교는 18세기 중엽부터 일부 남인 실학자들에 의해 학습되고 신앙되기 시작했으며, 18세기 말엽부터는 제사를 필두로 여러 문제들이 유교적 가치와 충돌하고 서인과 남인 사이의 권력투쟁 문제까지 뒤얽혀 약 100여 년 가까이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 최제우가 살았던 시대는 바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등으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하고 교회는 지하로 숨어들어 은밀히 신앙되던 때였다. 그런 의미에서 천주교 하면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불온한 사상으로 여겨지던 이 때에 자신이 세운 가르침의 종지를 ‘시천주(侍天主)’라 천명한 것은 결코 범연히 넘길 일이 아니다. 천주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그는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히 그 글자를 사용했다. 또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이 천주교와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물음에 동학과 천주교의 “운(運)은 하나요, 도(道)는 같다”(<동경대전> 「논학문」)고 하여 동학과 천주교가 똑같이 성행할 운명에 처해 있고 근본적인 진리, 즉 천주를 믿는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하기도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최제우를 비롯한 초기 동학도들을 서학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믿는다고 하여 이들을 사형에 처한 조선조정의 조치는 편협한 생각에 근거한 마녀사냥이었다고 할 수는 있어도 이들이 서학과 비슷하다는 판단마저 완전히 오판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3.
이상의 분석과 추정을 통해 우리는 최제우의 하늘님 관념이 천주교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알 수 있는데, 사실 유학자로서 천주교의 천주 관념을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선교사로서 천주교의 신을 유교문화권에 이식시키려는 노력은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마테오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천주실의>(1583) 같은 교리서를 통해 천주교의 신 Deus를 중국 전통의 천(天) 관념에 인간을 비롯한 땅 위의 모든 존재를 주재한다는 의미에서 주(主) 자를 덧붙여 천주로 설명함으로써 토착화를 시도했다. 또 그 후에는 <시경>이나 <상서> 같이 중국의 오래된 전적에 출현한 상제(上帝)가 곧 천주교의 신과 일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격신으로서의 의미 또한 전달하려 했다. 이러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천주교의 신은 중국인들에게 그다지 생소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졌고, 이는 천주교를 주동적으로 받아들인 조선 천주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정약용은 공식적으로 배교하기는 했어도 여전히 상제를 밝게 섬기는(昭事上帝) 모습이 전제되어야 진정으로 경건한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할 정도로 그의 사상에는 천주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할 때 유교 교육을 받고 자라 동학의 교리를 성리학적 개념들로 설명하고 아울러 천주교의 천주 관념 또한 일부 수용한 최제우의 사상 또한 이 사상가들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최제우가 천주교의 천주를 자신의 하늘님과 동일한 것으로 인식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전면적 수용은 아닌 까닭은 다음 두 가지 근거에서이다.
첫째는 그가 천주를 최초에는 초월적 인격신으로 만났지만 점차 이를 내재화시키며, 그 내재적 측면을 훨씬 더 강조했다는 점이다. 우선 앞서 최제우의 종교체험을 묘사한 두 인용문의 미세한 표현 차이가 그렇다. 최초의 글인 「포덕문」에서는 상제가 최제우 밖에서 음성으로 들려온다고 묘사되어 있지만, 후에 쓰인 「논학문」에서는 상제의 말씀이 최제우의 내면에서 울려나온다고 되어 있다. <용담유사>에서도 최제우는 “나를 믿지 말고 하늘님을 믿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어찌 가까운 데 있는 것을 버리고 멀리 있는 것을 취한단 말이냐?”(「교훈가」)라고 하여 천주가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몸 안에 내재해 있음을 강조하였다. 또 천국에 천주가 계신다는 천주교인들의 믿음을 옥황상제가 옥경대에 있다는 도교의 관념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신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의 이치는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니겠는가?”(<용담유사> 「도덕가」) 이 역시 천주를 초월적인 존재로만 보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천주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데 최제우가 이렇게 천주의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을 훨씬 더 강조하는 까닭은 유교적 사고방식의 영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하늘이 ‘나’에게 선한 본성을 부여했으니 ‘나’는 이 본성을 따름으로써 수양을 잘 해나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인데, <중용>에서는 이를 “하늘이 명한 것을 본성(性)이라고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率性之謂道)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修道之謂敎)이라고 한다”고 했다. 최제우 또한 무위의 원칙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며 그 본성을 따르고(率其性) 그 가르침을 받는다(受其敎)”(<동경대전> 「논학문」)고 말한 바 있다. <중용>에서 초월적인 하늘보다 그 하늘에 의해 부여되어 내 마음에 내재된 본성에 관심을 집중하는 것처럼 그 역시 초월적 하늘님보다는 내 몸 안에 모신 하늘님의 마음과 기운을 더 중시한 것이다.
둘째는 그가 천주를 우선은 인격신으로 보지만 자연의 영역에서는 천주가 기화(氣化)작용을 하는 비인격적인 물리적 힘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고 여겼다는 점이다. 이 점은 천주교와 크게 다르다. 성서에서 자연은 물론 하느님의 창조의 산물, 즉 피조물이지만, 천주가 스스로 자신의 생명력을 운동하는 기운으로 전환시켜 피조물을 부단히 산출하고 양육한다는 관념은 없기 때문이다. 천주가 인간의 몸 안에 신령으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 자연의 영역에서 기화의 생명운동으로도 자신을 드러낸다는 최제우의 이와 같은 천주 관념 역시 전통 유학의 천지-만물 관계론의 영향이다. 유학에서는 천지 혹은 천(天)이 모든 자연물을 낳고 기르는 부모와 같은 존재이며, 음양의 기화작용을 통해 그 만물의 생육을 실현한다고 보는데, 이러한 관념이 최제우의 천주 관념에 큰 영향을 준 것이다.
요컨대 최제우는 천주교의 천주와 동학의 하늘님을 동일한 대상으로 인식하였지만 천주를 유교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함으로써 천주교의 그것과는 차이를 보였는데, 특히 천주를 기화작용을 하는 비인격적인 물리적 힘으로 본 점은 가장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천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후에 최시형의 ‘천지-부모’ 관념으로 계승, 발전되었는데, 다음 편에서는 이것을 주제로 이야기하려 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8, 201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