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6-02 16:30
동학 다시보기 (2): 전통 유교에 대한 최제우의 태도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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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다시 보기 (2): 전통 유교에 대한 최제우의 태도

1.
조선시대의 대다수 사대부 엘리트들에게 유교는 한 치도 의심할 수 없는 절대적 신념이었고 그 신념을 기반으로 형성하고 발전시킨 유교문화 역시 절대로 흔들릴 것 같지 않은 ‘철옹성’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종교·근대학문·정치이념·근대문물 등이 차례로 한반도에 유입되면서 조선 엘리트들의 유교적 신념에 대한 확신과 유교문화에 대한 자부심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전통에 대한 조선 엘리트들의 태도에 차이가 생겨난다. 그 차이는 앞서 살펴본 서구적 근대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대체로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우선은 전통을 무조건 긍정하거나 지나치게 비판하는 두 가지 대립된 태도부터 살펴보자. 

첫째는 서구문화 일체에 맞서 전통문화를 고수하려는 태도로 19세기 중후반, 대다수 유교 지식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 이들은 조선이 서구화로 오랑캐 국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 속에서 주자학적 신념을 더욱 확고히 했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문화적으로는 신분적 예속을 전제로 한 유교윤리를 불변의 가치로 여기고 유교문화를 꽃피운 국가만이 문명국인 것으로 간주했다. 언뜻 보면 이들은 전통의 가치와 전통문화를 뜨겁게 사랑하여 옹호하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전통에 대한 반성적 태도를 결여함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전통을 근대와 단절시키는 데 일조하고 말았다.  

둘째는 서구적 근대문화의 적극적 수용을 외치되 전통 유교사상과 유교문화 일체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는 태도로 이른바 초기 개화파 인사들 및 문명개화론자들이 주로 이러한 입장을 취했다. 이들은 전통을 맹렬히 비판했다는 점에서는 첫 번째 태도보다는 진일보한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급진 개화파의 정신적 지주였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전통 유교는 상하귀천을 엄격히 구분하여 하급무사 출신 아이들이 귀족 자제들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야 하게 만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사상’이라고 평가했다. 또 조선이 멸망한 후에는 망국의 책임이 유교에 있다는 유교망국론이 대두되기도 했다. 조선이 망한 원인이 사대주의와 당파싸움에 있다는 인식으로, 이는 일제에 의해 제기되었고 조선의 민족 지도자들 또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들의 전통유교 비판은 유교적 이념의 경직성과 봉건성을 지적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전통사상과 문화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취급했다는 점에서는 전형적인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 할 만하다. 또 유교문화가 현대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과 단절하려 했던 이들의 태도는 대단히 공상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전통에 대한 세 번째 태도는 전통 유교사상의 일부 가치를 정신문화의 핵심으로 삼을 것을 주장하며 이를 서구적 근대와 절충 혹은 융합하려는 경향인데, 초기에는 온건개화파에 의해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절충적 입장으로 구체화되었다가 망국 직전부터는 전통 유교사상과 사회진화론·계몽주의 등 서구 근대사상을 융합하는 방향으로 전환된다. 이 세 번째 태도가 지니는 의의와 한계는 무엇인가? 동학의 전통에 대한 태도는 이 세 번째 태도와 어떤 점이 다르고 이로부터 재조명되는 동학사상의 의의는 무엇인가? 아래에서는 세 번째 태도를 보이는 대표적 인물인 박은식과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의 전통에 대한 태도를 비교·분석함으로써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2.
박은식과 최제우는 모두 전통유교에 대해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계승할 것은 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그 비판적 계승의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두 인물은 모두 전통 유교의 봉건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유교의 대중화 혹은 민중화를 통해 전통 유교를 혁신하려 했다. 

예컨대 박은식은 전통사회에서 유학자들이 군주의 주위를 맴돌며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일에만 힘썼지 인민들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던 점을 통렬히 비판했고(「유교구신론」), 최제우는 집안의 여종들을 수양딸로 삼음으로써 유교적 신분 차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항했다. 또 이들은 유교의 대중화 혹은 민중화를 종교화를 통해 이루려 했다는 점에서도 공통된다. 박은식은 근대사회에서 민중들은 주로 근대학문을 익히고 산업발전을 위해 애써야 하는데 그런 이들의 정신에 유교가 핵심 가치로 자리 잡을 수 있으려면 교리가 무엇보다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영혼을 울리는 진리를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는 유교의 대중화를 위한 유효한 수단으로 종교화를 기획했다. 

한편 최제우 역시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창도해 ‘천주 모심’의 중심 교의를 담은 몇 가지 간단한 주문으로 민중들이 쉽게 동학의 교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유교의 근대적 전환에 대한 최제우의 시각은 박은식의 그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다. 최제우는 “유도(儒道) 불도(佛道)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용담유사󰡕 「교훈가」)라고 하여, 유교나 불교 같은 전통적 사유의 낡은 틀로는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대응도 전통의 현대적 전환도 제대로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종교를 한낱 대중화를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았으며, 서구의 천주학과 전통사상을 모두 비판적으로 수용 혹은 계승한 동학사상이라는 새로운 틀로 전통을 묵수하지도 서구적 근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는 새로운 근대화의 길을 모색했다. 

3.
다음으로 박은식과 최제우는 전통 유교 중 일부 핵심적인 사상 혹은 관념을 당시에도 여전히 보편타당하고 유효하다고 보았다는 점은 공통되지만, 그들이 비판적으로 계승한 전통사상의 내용에는 차이가 있다. 

박은식은 유교사상 중 제왕학적 색채가 짙은 순자학이나 번쇄한 주자학이 당대에 더 이상 타당하거나 유효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 양명학은 간단하고 쉬우며 단도직입적이어서(「유교구신론」) 유교를 대중화하는 데 그것만큼 적합한 것도 없다고 판단했다. 또 그는 종종 양명학적 유교사상과 서구적 근대화를 긴장관계 속에서 바라보아 서구적 근대 중에서 수용할 것은 수용하되, 서구적 근대화로 이룩되어 가는 현실의 폐단에 대해서는 양지(良知)로 비판하고 감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예컨대 그는 왕양명의 만물이 한 몸을 이룬다(萬物一體)는 관점에 근거해 백인종의 유색인종 차별과 인간의 자연 지배를 반대한다. 그리하여 상제는 “하늘이 덮고 땅이 실은 것· 나는 것 · 뛰는 것 · 움직이는 것 · 심은 것 등 모든 사물과 황인종 · 백인종 · 홍인종 · 흑인종 등 여러 인종으로 하여금 모두 함께 살게 하고 함께 길러지게 하여 서로 해치거나 해롭게 함이 없게 하신다”고 했다.(「몽배금태조」) 심지어 그는 양지를 잣대로 서구 근대의 과학기술 자체를 비판하기도 한다. “소위 문명화된 민족들이 그 생각과 지력을 다해 지극히 교묘한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은 오직 살인하기 위한 무기나 나라를 도둑질하기 위한 간사하고 능청스러운 책략을 얻기 위함이었다.”(「몽배금태조」)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박은식은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적 경쟁이 필연적이고, 서구 근대 과학기술의 적극 도입과 이를 통한 민족경제의 발전 역시 필수적임을 훨씬 더 강조했다. 그리하여 인간이 양명학적 양지의 발현 주체이면서 도구적 이성의 사용 주체인 점, 자연이 과학적 탐구 및 기술적 이용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양지의 발현 대상인 점 등이 그의 사상 속에서는 분열된 채로 남아 더 이상 진전된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최제우도 박은식과 동일하게 전통 유교의 몇 가지 핵심 관념을 수용하지만 유교만을 고집하지 않고 천주신앙과 유교적 관념을 융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상적 스케일은 훨씬 넓고 이런 동·서 융합적 사유로부터 도출된 생각 역시 창의적이다. 1860년 4월에 그가 조우한 하늘님은 우선은 초월적인 인격신이었는데, 그는 이 신비로운 종교체험을 바탕으로 ‘천주 모심(侍天主)’이라는 중심교의를 세우고는 이 교의에 대해 지극히 유교적인 설명을 한다. 

‘시(侍)’라는 것은 안으로는 신령(神靈)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氣化)가 있어 일세의 사람들이 각기 변치 않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동경대전> 「논학문」) 

천주가 저 멀리 하늘 너머 어딘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몸속에 ‘신령’의 형태로 내재되어 있기도 하고, 사람의 몸에서, 나아가 전체 자연에서 기화, 즉 물리적 운동으로 표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천주교에도 천주가 초월적일 뿐만 아니라 내재적이기도 하다는 관념은 있다. 성령의 임재라는 관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제우가 활동했던 19세기 중엽, 조선 천주교에서 그러한 천주의 내재성을 얼마나 강조했는지는 의문이다. 천주가 모든 사람의 몸속에 ‘신령’의 형태로 내재되어 있다는 최제우의 관념은 천주학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유교적 사유방식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예컨대 <중용>은 “하늘이 명한 것(天命)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率性)을 도(道)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修道)을 가르침(敎)이라고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데, 후대의 성리학자들은 첫 구절을 ‘사람마다 지닌 선한 본성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고, 주자에 이르면 이는 외적인 리(理)가 만물에 품부되어 내재된 것이 성(性)이라는 의미로 개념화된다. 천주가 초월적일 뿐만 아니라 내재적이기도 하다는 최제우의 관념은 바로 이런 성리학적 관념을 변용한 것이다. 

천주가 자연의 영역에서 물리적 운동으로 자신을 표현한다는 관념 역시 성리학적 기화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천주학에서 자연이란 천주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로 사유될 뿐, 자연이 천주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자연물 또한 천주처럼 경외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에 반해 동학은 자연물 역시 천주의 기운에 의해 산출되고 성장하는 천주의 기운이 깃든 생명이므로, 천주를 모시듯이 자연물도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최제우가 천주의 음성이라 하여 적은 아래 기록을 보면 이러한 생각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사람들은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는데, 귀신이라는 것도 나다.”(<동경대전> 「논학문」) 이 음성을 최제우는 아마도 “세상 사람들은 귀신을 무속적으로만 이해하는데 사실 귀신이란 천주인 ‘나’ 자신이 행하는 기화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귀신을 기화로 설명한 최초의 인물은 북송시대의 장재(張載)이다. 그는 “귀신은 왕래하고 굴신한다는 뜻이다. … 펼쳐 보이는 것은 복귀의 시작이고, 돌아가는 것은 옴의 종결이다”(<정몽> 「신화」) 라고 하여 귀신을 기의 ‘귀신(歸伸)’, 즉 기운의 펼쳐짐과 복귀함으로 이해했으며, 후대의 성리학자들도 대부분 이를 받아들였다. 최제우가 과거 성리학적인 교육을 받았다는 점과 기화를 자연의 영역에서 천주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생각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역시 귀신을 기화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렇게 최제우는 성리학적인 기화 관념을 계승했지만, 이 기화의 의미를 천주 자신이 행하는 생명 창조와 양육의 운동으로 이해함으로써 기화에 대한 인식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시도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주류 성리학에서 기(氣)는 만물의 존재론적 유한성과 도덕적 불선함의 기원을 설명하는 범주로 사용되곤 했는데, 최제우는 이기(理氣)론적 틀 안에 갇혀 있던 기(氣) 범주를 풀어 천주와 연결시킴으로써 자연운동의 신성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요컨대 성리학적인 심성론·이기론 중 일부 관념을 계승하면서도 인간 본성 개념을 내재적 천주 관념으로, 이기 범주의 틀 안에 묶여 있던 기를 천주의 기운이라는 관념으로 전환시킨 것이 최제우가 동·서 융합의 시도를 통해 도출해낸 창의적 생각이다. 

4.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최제우는 전통 유교에 대해 비판적 계승 및 창조적 전환의 태도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최제우는 전통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반대로 그것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보는 양극단을 모두 배격했다. 그의 태도는 전통의 일부 가치를 여전히 보편타당한 것으로 보아 전통과 근대의 융합을 꾀하는 세 번째 태도에 가깝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전통 유교와 서구적 근대의 일부를 수용함으로써 양자의 융합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박은식의 예에서 보듯이 그러한 융합의 시도는 그리 용이하지도 않고 성공적이지도 않았다. 전통 유교와 서구적 근대의 가치지향은 근본부터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전 편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최제우는 자신이 조우한 신을 천주와 동일하게 인식했으나 서구적 근대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이에 그는 전통 유교와 서구적 근대가 아닌, 천주신앙과 전통 유교적 관념의 융합을 시도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두 신념 사이에는 이질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예컨대 초월성과 내재성의 관계, 신과 자연의 관계 등에 대한 인식 차이가 그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최제우는 ‘천주 모심’의 교의를 중심으로 천주가 몸 안에 내재할 뿐만 아니라 자연 안에도 내재함을 강조함으로써 동·서 융합을 나름대로 훌륭하게 이루어냈다. 이러한 융합이 성공적일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전통유교가 지향하는 가치가 서구적 근대보다는 천주학에 훨씬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유교든 천주학이든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는 아직 이 세상에 전면적으로 실현된 적이 없는 미래를 선취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서학과 구별되는 동학의 중심 원칙인 ‘무위’ 개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6, 2014년 6월, 황종원,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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