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4-16 17:03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2):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리엔탈리즘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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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2):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리엔탈리즘
 
1.개국 시기 일본의 ‘아시아’ 문제
 
‘아시아’라는 개념이 일본 지식인에게 알려진 것은 17세기에 중국어로 번역된 서양의 지도나 지리서 등을 통해서였다. 서양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아시아’에는 독특한 풍토와 정신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19세기 도쿠가와 체제 말기에 널리 소개되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어로 지리학을 공부한 미츠쿠리 쇼고(1821-1847)는 ‘중국의 정치는 일종의 아시아 풍이라 할 수 있어서 제대로 된 규칙이나 법률이 아니라 요순시대부터 전해지는 법을 모범으로 하여 제도를 행하고 있다. 황제는 그의 행적이 하늘을 우러러 공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는 하지만, 행차할 때 길가에 엎드려 있지 않은 자를 모두 사형에 처해 조금이라도 용서하거나 긍휼히 여김이 없는데, 이는 아시아 공통의 살벌한 폐해이다.’(미츠쿠리 쇼고 『곤여도식보坤輿圖識補』1847)라고 기록하고 있다.
 
『곤여도식보』는 얼마간 네덜란드의 지리서를 편집한 것이기도 하면서 ‘동양적 전제’라고 하는 사고 방식을 비교적 일찍 언급한 서적이기도 하다. 또 비슷한 시기에 독일어를 배운 가토 히로유키(1836-1916)는 ‘실로 중국의 결점이라고 해야 할 것은 공회(公會)가 없다는 것이다. 당우삼대(역자주: 요, 순에 하, 은, 주를 더하여 이르는 명칭)로부터 이 공회라는 것을 세우지 않은 탓에 후세에 어리석고 난폭한 군주가 출현하거나 간신배, 탐관오리가 정권을 훔치게 되었고 아니면 군주 혼자서 권력을 독점하여 결국 천하국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라고 말했다. 유학의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당우삼대에서조차 ‘공회’(여기서는 의회와 같은 합의제도를 가리킨다)가 부재하였다는 것은 대단한 결점이다. ‘인정仁政을 베풀 수 있고 또 인화人和를 얻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 ‘공회’는 전제를 막아내기 위해 유용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가토는 표면적으로는 중국의 전통적 체제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중국 이야기는 하나의 구실일 뿐 본래는 일본의 정치체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기후와 정치제도의 관련을 강조하면서 ‘동양적 전제’와 유럽의 자유라는 도식적 비교에 기초를 두는 사고 방식이 일본에 전해지게 된 것은 몽테스키외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미츠쿠리 린쇼우(1846-1897)는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제3부, 제17편에서 발췌, 번역한 것을 『명육잡지』에 게재해, 기후적 조건 때문에 유럽에서는 ‘자유’가 아시아에서는 ‘노예적 예속’이 정치적 원리가 되었다는 생각을 소개했다.
 
이 책에서 몽테스키외는 유럽에서는 서로 대항하여 싸우는 나라들의 국력이 비교적 균형 잡혀 있어서 ‘인민자유권’이 강했지만, ‘아시아’에서는 강국이 약소국의 인민을 노예화 해온 탓에 ‘자유’의 원리가 아닌 ‘전제’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츠쿠리는 『법의 정신』의 원문에는 없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의 한 구절을 번역문에 삽입하고 있다. (『법의 정신』의 다른 곳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대개 아시아인은 기지가 있고 기예가 교묘하지만 지기志氣가 없어 항상 순종적이고 자유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다.’는 구절이다. 이 인용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7권 제7절(1327b)에 실려 있는데, 이에 따르면 추운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기개(티모스thymos)가 넘치고,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지능과 기술은 가지고 있지만 기개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전제군주의 지배를 받는다. 그리스는 바로 그 중간쯤에 위치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몽테스키외처럼 중국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생각은 18세기 서양이 아시아를 바라보는 관점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2. 후쿠자와 유키치와 ‘동양적 전제’
 
후쿠자와 유키치 역시 서양인에게는 아시아를 ‘동양적 전제’로 보는 관점이 있다고 썼다. 후쿠자와의 『서양사정』 초편(1866) 중에서, ‘군주 정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 단지 군주 한 사람의 뜻에 따라 일을 도모하는 것을 군주독재 despot이라고 한다. 러시아, 중국과 같은 나라의 정치가 그러하다. 반면에 한 나라에 군주 둘이 있을 리는 없으나, 일정한 법률이 있어서 군주의 권위를 억제하는 것을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라고 한다. 현재 유럽의 여러 나라 가운데는 이러한 제도를 택하고 있는 나라가 많다.’고 기술하고 있다. 유럽의 군주제 가운데 다수는 입헌군주제이지만 러시아나 중국은 독재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구절은 챔버스사의 『경제학』 교과서를 번역한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을 ‘동양적 전제’로부터 이탈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동양적 전제’를 ‘아시아’인이 놓인 지리적 환경과 그들에게 스며든 성질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사람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저해하는 엄격한 사회적 의례와 그것을 감시하고 있는 강력한 관료제가 원인이 되어 생겨난 것으로 보는 분석을 도입했다. 하지만 후쿠자와만이 이런 시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우치다 마사오가 편찬한 『여지지략輿地誌略』(1874-1875)은 중국에 대해서 ‘옛날부터 예양礼譲을 중시하는 풍속을 가지고 있지만, 쓸데없이 허식에 치중하여 사소한 예절까지 고집하고, 또 수 천년 동안 이어진 군주정치에 기반하여 백성을 위협하기만 함으로써 개화풍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국민의 지각도 소멸하고 말았다. 더욱이 국민들 일반의 정서가 교활하고 완고하며, 과거를 숭상하고 현재를 천시하며, 스스로를 높여 중화중국이라 칭하고, 외국을 오랑캐, 금수와도 같이 보며, 그런 까닭에 나라의 권세가 뻗어나가지 못하고, 정부의 명령이 구석구석 도달하지 못하며, 수 천년 전에 있었던 개화의 수준에 머물러 더 나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퇴보함으로써 인정풍속이 쇠퇴하고 말았다.’라고 매서운 평가를 내렸다.
 
일본보다도 중국 쪽이 예礼라는 제도를 제대로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일본 유학자들의 오래된 열등감이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이를 장점으로 보려 하고 있다. 예礼가 잘 정비되어 있다는 것은 ‘전제’에 의해 관리되고 있기 때문이므로 따라서 ‘인정풍속’은 쇠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를 ‘문명’에 관한 이론과 연결 지었다. 『문명론의 개략』(1875)에서 그는 관리된 풍속과 강력한 통치기구는 ‘개화’의 실패로 이어진다는 문제에 대해 주도면밀히 검토했다. 지리적 조건이나 사람들의 성정, 혹은 과학의 진보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무언가 중요한 사회적 원리에 관한 문제가 여기에는 개입하고 있다고 그는 보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은 표면적으로는 ‘일계만대一系万代’의 권위가 지배하는, 자유가 없는 국가로서 그 점에서만큼은 중국보다도 ‘아시아’적이지만, 실제로는 ‘이설쟁론異説争論 의 역사를 지니며 ‘자유의 기풍’을 항상 지녀왔다고 주장한다. 황실을 지존至尊으로 하고, 무가정권을 지강至强으로 함으로써 이 두 요소가 정치적 권위에 관해서 ‘다사多事’를 구성하여 왔기 때문에 ‘중국인은 사상적으로 빈곤하나, 일본인은 사상적으로 풍부하다. 중국인이 무사無事라면 일본인은 다사多事이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문명화의 정도를 지리적 차이에 의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역사적 발전 가운데 서열화되는 것으로 보며, 일본은 서양보다 열등하지만 다른 아시아 여러 나라나 아프리카보다는 우월하다고 보아서 단선적인 발전단계론자의 선구가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하지만 후쿠자와의 생각은 이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다.
 
후쿠자와는 중국에도 예전부터 ‘이설쟁론’과 ‘자유의 기풍’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정치적 억압에 의해 중국 사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문명 삼천여 년 간 이설쟁론이 격하게 벌어졌고, 자신과 완전히 대립하는 입장도 세상에 병존할 수 있게 인정했던 시기가 바로 주나라 말기였다. 이 시기에 노장양묵老莊楊墨과 그 외 백가들의 주장이 등장하였는데, 공맹은 이를 이단시하였다. 하지만 이 이단들도 공맹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단이지 반대쪽에서 보면 오히려 공맹 쪽이 이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에는 이단이 남긴 서적이 별로 없는 탓에 좀처럼 알기는 어렵지만 당시의 인심이 활발하고 자유의 기풍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라고 후쿠자와는 말한다.
 
‘쟁론争論’이 문명을 발달시킨다는 사고방식은 후쿠자와가 『문명론의 개략』을 쓰기 위해 읽었던 몇몇 서구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저작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쟁론’이란 말에 상응하는 용어라면 존 스튜어트 밀의 『대의정치에 관한 고찰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1861)에 있는 ‘투쟁의 기능the function of Antagonism’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또 밀은 ‘제도화된 투쟁systematic antagonism’ 이라는 인상적인 표현을, 프랑수아 기조의 저작에 관한 서평적 성격을 띤 논문 「기조의 역사에 관한 논문과 강의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확인되지는 않지만 후쿠자와라면 이 서적도 한번쯤 훑어보았을 법하다.
 
후쿠자와가 읽었던 19세기 서구 자유주의 사상가들은 중국이나 러시아에서는 사회적 권위나 가치가 일원적이기 때문에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이는 지리적 조건에 의한 결정론도 아니었지만, 지식의 발전단계 문제도 아니었다. 사회 원리의 문제였다.
 
예를 들어, 후쿠자와가 숙독했던 서적 가운데 기조의 『유럽 문명사General History of Civilization in Europe』(1828)를 보면 이 책에는 유럽에서는 서로 다른 계급 간의 투쟁이 있기 때문에 ‘자유’가 발달했지만, ‘아시아’에서는 하나의 계급이 압도적인 승리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가 ‘정체상태’에 빠졌다는 기술이 있다. 사회를 정체시킨 것은 그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적 특질 바로 그것이었다. 또 밀은 『자유론On Liberty』(1859)에서 중국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비판하면서 이 나라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사회의 우수한 인재가 관료기구 이외의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1835-1840)에서 중국은 중앙집권이 지나치게 완벽해서 ‘행복 없는 평화, 진보 없는 산업, 힘 없는 안정, 공공정신 없는 정치질서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즉 문제는 중국이나 일본이 보편적인 인류사의 시간 축 위 어디쯤 위치해 있는가가 아니다. 후쿠자와는 서양의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이러한 중국관에 착목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을 ‘동양적 전제’ 라는 질곡으로부터 일본을 해방시키기 위한 계기로써 이용하려 했다. 일본은 중국보다 상위의 발전단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중국과는 다른 계단 위를 걷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것이 ‘일본은 다사多事이니’라는 주장이다. 즉 후쿠자와의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을 이상화하는 단선적인 진보주의사관이 아니라 자유주의 원리를 보지保持하는 조건에 대해 고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3. ‘봉건’과 자유
 
그런데 공교롭게도 기조나 토크빌의 중앙집권비판은 유럽의 봉건사회에 대한 재평가도 포함하고 있다. 후쿠자와는 이를 이용해 일본에는 ‘봉건’제도가 오래 지속된 탓에 ‘분권’적인 정치적, 사회적 관습이 정착하였고 그것이 ‘자유의 기풍’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후쿠자와는 19세기 서구 자유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이용함으로써 18세기 (몽테스키외와 같은) 오리엔탈리즘이 논한 ‘동양적 전제’의 운명에 일본만큼은 지배되지 않았다는 주장을 구축하려 했다.
 
다만 주의해야만 할 것이 있다. 일본에는 ‘봉건’이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그것이 사라졌다는 주장이 단지 서구 자유주의 사상으로부터만 영향 받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청나라의 ‘군현’ 제도에 비해 근세 일본의 ‘봉건’체제 쪽이 인민 일반의 협력을 기대하기가 용이하다는 생각은 이미 도쿠가와 체제 말기에 출현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아편전쟁 후, 쇼우헤이코우(역자주: 1790년 칸다 유시마에 설립된 에도막부 직할의 학문기관) 교수도 지낸 적 있는 아사카 곤사이(1791-1861)는 중국과 달리 도쿠가와 체제의 일본에는 ‘봉건’ 제도가 있기 때문에 대외적인 위기의 시기에 ‘군민’의 협력을 기대할 수 있다고 논하고 있다. (아사카 곤사이, 『방해防海』(1848)) 이는 후쿠자와가 『분권론』(1877) 또는 『통속국권론』(1878)에서 기술한 바 있는 주장과도 통하는 생각이다. (다만 후쿠자와가 이를 참고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일본이 가진 ‘봉건’시대 경험은 국민국가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은 후대에 이르러서도 학문적 정교함을 더하면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일본 이외의 사회에서는 ‘봉건’ 제도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중앙권력으로부터의 명령이나 은혜와는 관계없이 지역 ‘자치’를 발달시킬 수 있는 능력도 사라진 것은 아니겠는가 하는 주장도 아직까지 간혹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의 『탈아론』(1885) 역시도 그러한 자유주의적 동기에서 쓰이지 않았을까? 여기에 관해서는 관점을 달리하여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논해 보겠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마츠다 고이치로(松田宏一郎), 일본 릿쿄대학 법학부 교수; 윤채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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