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개인주의적인 공리주의를 주창한 사상가이면서 이를 통해 전통적인 권위주의와 대결한 사상가라고 소개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그는 막부시대 말기의 저작인 『서양사정』에서 영국의 챔버스사가 출판한 중등교육용 경제학 교과서의 일부를 번역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록을 남긴 바 있는데, 이러한 문장이 후쿠자와를 이기주의 옹호론자로 보게 만든 원인이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이 세상을 위해 공을 세우고 그것으로 인해 보수를 얻는다는 목적이 없다면 도대체 누가 굳이 노력을 하려 들겠는가? 만일 세상에 공을 세우는 자가 없어진다면, 이는 곧 사회 전체의 손실이 아니겠는가? 혹시라도 이러한 논의는 단지 사욕 추구를 권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자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러한 비판은 전적으로 사실무근인 망언일 따름이며, 굳이 그러한 비판에 변명을 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위해 공을 세우도록 만들고 (세운 공에 따라) 당연한 보수를 받도록 하는 데 도대체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러니 결코 이를 사욕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서양사정 외편』「사유(私有)를 보호할 것」, 1867년)
특히 밑줄 친 부분은 Chambers’s Educational Course, Political Economy for Use in Schools, and for Private Instruction,(1852년) “it is useless to say, that this is an appeal to a selfish motive: the motive that makes a man perform services for a suitable reward is not always selfish, in the bad sense of the term”라는 부분을 설명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사회에 대한 공적에 보수가 따른다고 해서 그것이 이기적인 동기를 조장할 수도 있다며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후쿠자와가『학문을 권함』에서 경제적인 자립을 ‘유형(有形)의 독립’이라 일컬으며 정신적인 독립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독립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유형의 독립이요 또 다른 하나는 무형의 독립이다. 말하자면 이는 물질과 관련한 독립과 정신과 관련한 독립이다.
물질과 관련한 독립이란 세상 사람들이 각각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각자가 근면하게 일을 하여 다른 사람들의 신세를 지지 않도록 자기 한 몸, 자기 한 집안의 일은 스스로 처리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말해 타인에게서 물질적 도움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을 권함』16편, 1876년)
그런가하면 전통적인 통치계급이 품고 있는, 금전에 대한 경멸을 틀린 생각이라고 주저 없이 비판한다.
우리나라의 귀족들은 대대로 금전을 경멸하여, 금전 사용에 조심하지 않고 (금전을) 빌리는 데에도 빌려주는 데에도, 그것을 남에게 주는 데에도 남에게서 취하는 데에도 지금껏 치밀하게 생각하는 법이 없이 늘 금전을 남용하여 오기만 했다.
예를 들어 학문하는 자가 있어... 일신을 고요하게 하고 정신의 자유를 방해받지 않으면서, 자유로이 생각하고 자유로이 말하며 또 자유로이 행동하여, 타인을 책망하거나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타인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자기 혼자 마음의 고상한 아름다움을 길러, 물질적인 관심의 바깥에서 여유롭게 자연의 안락을 즐기려 한다면, 이때 금전만큼 도움 되는 것도 없다. (「금전은 독립의 기본이니」지지신보 1891년7월15일,『수업입지편修業立志篇』1898년, 27쪽)
이기적인 동기가 인간 정신을 발전시켜 사회를 좋게 만들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후쿠자와의 이러한 주장은 도발적인 주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후쿠자와는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말 자체 그대로를 긍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의 욕망이 행복을 목표로 할 때 근면함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는 이러저러한 욕망이라는 것이 있다. 욕망에 의해 심신의 활동이 일어나고, 이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일신의 행복이 달성된다. 가령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마다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좋은 옷, 좋은 음식이란 저절로 생겨나는 법이 없다. 이를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활동이 없으면 안 된다. 고로 인간의 활동은 대개 모두가 욕망의 재촉을 받아 그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이 욕망이 없다면 인간의 활동이 없고, 인간의 활동이 없으면 안락과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선승들은 활동도 행복도 없다고 운운할 터. (『학문을 권함』제8편, 1874년)
이미 8회(‘후쿠자와와 유교’)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지만, 후쿠자와는 인간에게 욕망을 억제하는 ‘지성(至誠)의 본마음’이 있다고 했다. 후쿠자와는 ‘지성의 본마음’이 주희의 『논어집주』등을 전거로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의식하면서, 그것이 서양에서 말하는 conscience 및 dignity에 상응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에게는 각각 지성의 본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참된 마음(誠心)은 욕망을 억제하고, 그것의 방향을 바르게 하며, 그것이 그쳐야 할 곳을 정해 준다. 가령 인간의 욕망에는 끝이 없어서 좋은 옷, 좋은 음식도 이만하면 충분하다며 한계를 정하는 것이 어렵다. 해야 할 일은 내버려두고 오로지 자신이 욕망하는 것만을 얻으려 한다면, 타인에게 해가 되고 자신에게는 이익이 되는 바를 구하는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이는 인간으로서 행할 바가 아니다. 이럴 때 인간의 욕망과 도리를 분별해, 욕망을 떠나보내고 도리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을 참된 마음이라고 한다. (『학문을 권함』제8편, 1874년)
이처럼 후쿠자와가 욕구의 만족 극대화 자체를 ‘도리’로서 시인한 바 없다는 점을 여러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제는 후쿠자와가 욕구의 만족 극대화를 억제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것이 인간의 사회성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그것이 애당초 개인의 ‘행복’을 방해하기 때문으로 보았는지이다.
2. Happiness 개념과 도덕원리
애초에 ‘행복’이란 말이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중국의 고전에서 사용되기는 했지만, 인간의 정신적 만족을 효용으로 보아 그것을 개념화한 happiness란 말에 이 용어를 대응시킨 사람 가운데서는 후쿠자와가 선구자격이다. (『서양사정』을 참고할 것)(1) 또 후쿠자와는 John Stuart Mill, Utilitarianism (1874년 제5판)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이 바로 happiness이라는 개념에 대한 후쿠자와의 생각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게이오 대학에 후쿠자와가 메모를 남긴 장서가 남아 있는데 이 책에 남겨진 메모를 보면 후쿠자와는 이 책을 1876년4월4일부터 20일에 걸쳐 상당히 집중하여 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페이지에서 메모가 발견되지만 후쿠자와가 길게 코멘트를 기록한 부분을 모아 읽으면 그가 가진 관심의 초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가령 제2장 「공리주의란 무엇인가」의 어떤 페이지에 기록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진술되어 있다.
(the Greatest Happiness Principle을 기준으로) 행복의 성질을 판단할 때 自誠自存의 습관을 가지며, 사물의 실험을 풍부히 하고(=사물의 이롭고 해로움을 양적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해득실을 비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 결국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고 일반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 학문하는 자의 직분이다. 학문하는 자는 멍한 모양으로 있어서는 안 되고 행장(行狀)을 가지런히 하고 활동을 활발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사용된 ‘自誠自存’이란 말은 self-consciousness and self-observation을 번역한 말이다. ‘自存’이란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상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지만, ‘自誠’은 고전의 용례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 ‘自誠自存’은 ‘自省自存’(일본어에서 둘은 발음이 같다)의 의미에서 쓴 것이 아닐까 싶다. ‘自省’은 『논어』이래 다수의 용례가 있는데, 조선의 주자학자 퇴계 이황의 『自省錄』이 일본에서도 곧잘 읽히고 있다. 또 『荀子』「修身編」에서도 ‘見善、修然必有以自存也、見不善、愀然必以自省也’라는 문장에서처럼 ‘自存’, ‘自省’은 자기반성에 기반을 두어 善과 不善의 판단할 필요성이 있다는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메모는 후쿠자와의 개인적 메모이므로, (메모에 사용된 용어도) 독자의 이해를 구하기 위한 용어가 아니라 후쿠자와 본인이 유교에서 논의되어 온 도덕적 반성을 떠올리면서 이 부분을 읽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보아야겠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적 본성을 지니므로 종교적 권위나 물리적 강제에 의하지 않고도 자기 내면으로부터 moral sanction을 발동시킬 수 있다고 하는 메모가, 제3장 「공리라는 원리의 궁극적 sanction(승인)에 대하여」라는 장에서 발견된다.
교의, 세론, 치욕, 영전이라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다. ‘성심성의껏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이유를 조물주의 명령이나 중인의 칭찬에서 찾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천명과 인심에 따르는 사람이라고 한다.’라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은 이른바 ‘타력(他力)의 성심’론에서 나온 주장으로 나의 생각과 다르다. 이런 주장이 주창하는 조물주의 명령이라는 것을 현실 세계에서 파악하려면 어찌 해야 하나? 짐승은 같은 짐승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 인류만이 이런 마음을 갖기 때문에 이는 ‘인력’이라 불러야 한다. 따라서 ‘인력’을 충분히 발휘하면 될 일이다. 이 ‘인력’을 부여하는 이를 조물주로 보려는 생각도 있지만, 그래도 이를 받아들여 살리는 자는 역시 인간이다. ‘moral sanction’이란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면 충분하다. 조물주를 상정하는 것은 상벌론의 입장인데, 상벌은 마음을 움직여 선을 행하고자 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여기서 후쿠자와가 ‘moral sanction’이라고 적은 부분은 Mill의 원문에서 “the ultimate sanction of the greatest-happiness morality”라는 부분을 아마도 가리키는 듯하다. Mill에 의하면, 교회와 같은 종교적 권위나 사회집단에 의한 강제가 아니라 ‘인간에게 깊게 뿌리내린 사상 즉, 개인은 사회적 존재로서 동포들과 감정이나 인생의 목적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품는 존재로 스스로를 본다는 사상’이야말로 ‘최대행복원리’라는 공리주의의 도덕적 구속 근거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2) 후쿠자와가 공리주의에서 발견한 것은 외적 권위에 의해 강제되거나 그것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성향이 아니라, 개개인에게 존재하는 사회적 공감의 본성이었다. 후쿠자와는 ‘행복’과 인간의 사회성이 본래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후쿠자와는 이러한 생각을 바꾸지 않고 ‘사회공공의 이해(利害)’에 관한 관심과 개인의 행복은 불가분한 관계를 맺고 있는다는 주장을 말년의 담화에서도 반복했다.
심산유곡에 은둔하는 선인이라면 또 모를까, 인류가 무리를 이루어 이 세상의 의식주를 함께 하는 만큼 자신과 자기 집안을 유지하는 한편, 또 같은 인류에 대한 의무를 면할 수 없다. 나는 독립된 몸이므로, 받지도 않고 또 주지도 않겠다고 한다면, 타인과 무관계하다고 하겠지만, 타인이 쓴 서적을 읽고, 타인이 발명한 기계를 사용하고, 그것을 가지고 편리함을 얻는다면, 실은 간접적이기는 해도 그 저자와 발명가의 덕에 힘입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처럼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고 한다면, 자신이 결코 선인이 아니고 사회와 어울려 사는 존재라는 점을 안다면, 체력을 강건히 하고, 정신을 활발히 하여, 우선 자신과 자기 집안의 생계를 꾸리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타인의 도움에 기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동시에 항상 시야를 넓게 가져, 사회공공의 이해에 주의하면서 사업을 운영하더라도, 결국은 사회를 이롭게 하는 방향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참뜻과 도리이다. (『복옹백화福翁百話』1897년)
하지만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는 ‘이익’을 다투는 일은 가차 없는 싸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익을 다툰다는 것은 옛사람들에게 금기사항이었으나, 이익을 다투는 일은 곧 이치를 다투는 일이다. 이제 일본은 외국인과 이익을 다투고 이치를 다툴 때이다.’ (『문명론 개략』1875년) 국가 간의 ‘이익’을 다투는 데에는 ‘사회 공공적’ 관심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었던 것일까? 이점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1) 다만 초기의 영일사전『諳厄利亜語林大成』(1814년)에는 happiness의 번역어로서 ‘행복’이 등재되어 있다.
(2) John Stuart Mill, Utilitarianism (London: Longman, 1874, Fifth Edition), p. 50. 후쿠자와는 “deeply rooted”라는 부분에 밑줄을 쳤다.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 2015년 1월, 마츠다 고이치로(松田宏一郎), 일본 릿쿄대학 법학부 교수; 고양국제고등학교 교사 윤채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