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1-07 20:45
[러시아 문학노트] 법치와 휴머니티: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죄와 벌」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8,515  


[러시아 문학노트] 법치와 휴머니티: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죄와 벌」

1. 세상은 톨스토이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나름 책을 좀 읽는다는 분들, 특히 러시아 문학작품을 좀 안다는 분들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질문 하나를 꼭 여쭈어 봅니다. 그 질문이란, “당신은 톨스토이를 좋아하는가,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가”입니다. 물론 사람들을 나누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취향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한다는 것이 좀 조악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톨스토이냐 도스토예프스키냐」라는 책도 있듯이, 두 작가는 세계관이나 출신, 취향, 그리고 살아온 삶의 궤적이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두 사람 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합리적 이성에 대한 믿음이 절정에 달하던 19세기 중반에 자리한 근대인의 삶을 그려냈지만, 그래서 이들은 소위 러시아의 위대한 사실주의(심리적 사실주의)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손꼽히지만,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시각과 관점은 전혀 달랐고 따라서 작품을 통해 조명된 인간의 모습 또한 많이 달랐습니다. 그래서인지, “톨스토이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인가”에 대한 대답은 나름대로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해주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저 나름대로 ‘아마도 저 사람은 ○○를 좋아할 것 같아’라고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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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러는 너는 누구를 좋아하느냐구요? 저는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 모두를 다 좋아하구요. 작가로서 꼽으라면 단연 저는 도스토예프스키입니다. 그가 작품에서 다루는 작고 보잘것없는 고통받는 사람들, 그리고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사랑은 가장 인문학적 주제이니까요. 톨스토이를 딱히 싫어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저의 정체성이 톨스토이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더 닮아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제가 솔직히 고백하자면, 현실에서 두 작가를 만나면 누구와 친하게 지낼 것 같은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확답을 내리기 힘들것 같기도 합니다. 교황님께서도 가능한 한 모두와 잘 지내라고 하셨다는데, 저도 뭐 그다지 성격이 모난 편은 아니라서, 물론 두 사람 다와 잘 지내려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내면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동질감을 더 느낍니다만, 이상한 것은 두 사람이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면 아마도 톨스토이에게는 빌려주고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좀 되도록 안주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으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가 진실하지 않다거나 남의 돈을 떼먹는 사람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작가, 사상가로서 톨스토이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게다가 무언가 맛있는 게 생긴다던가 하면 톨스토이 백작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나누어 먹고 싶을 것 같습니다. 또 제가 돈을 꾸어야 한다면 러시아의 대귀족인 톨스토이 백작보다는 평생 글쓰는 일로 밥을 벌어먹고 살았던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갈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횡설수설했나요. 제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입니다. 저 스스로의 이런 모순적인 모습은 어떻게,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아마도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한 설명하기 힘든, 합리적 이성과 논리의 틀로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모순적이고 다면적인 인간의 모습을 인식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 너머에 있는, 이성과 직관이 결합된 보다 넓은 통각(統覺)적인 사고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을요...

2.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세요....”

2.1
여러분은 혹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시는지요... 아니면 제가 학부시절 수없이 들었던 말처럼, 뭔가 죄다 “~스키”(-ский)로 끝나는 이름들이 너무 길고 헷갈려서 읽다 말아버리셨는지요... 사실 “~스키”는 성(姓)인데, 이렇게 러시아 사람 이름의 성이 다 “~스키”로 끝난다고 말씀하시면 억울해할 러시아 성들이 많습니다. 어미가 “-오프”(-ов)이거나, 그냥 여러 자음들 중 하나이거나, “-오”(-о)로 끝나는 경우도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성에 쓰이는 것으로는 또 다른 어미들도 많습니다. 혈통이 어디인가에 따라 굉장히 다양합니다. 요즘 가장 유명한 러시아인 블라디미르 푸틴(러시아식 발음으론 ‘뿌찐’이 가깝습니다만)도 그냥 자음 “-엔”(н)으로 끝나는 성이니까요. 사실 “~스키”는 혈통적으로는 폴란드 계통의 성입니다. 그리고 사실 “~스키”라기보다는 “~키”(-кий)로 끝난다고 해야 맞습니다. 덧붙이자면, “~오프"가 정통 러시아 성이라나요...   

2.2
아무튼 저는 여러분이 지금 이후로, 아니 당장 지금, 부디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시기를 아니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싶어지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 중에서 분명히 톨스토이를 더 선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양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그리고 더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아마도 제가 여기서 아무리 오래 씨부렁거려봐야, 직접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시고 여러분만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를 구성해보시는 것만 못하니까요.  

혹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신 분이 계신지... 만약 계시다면, 예를 들어, 「죄와 벌」에서 무슨 이야기를 읽으셨는지요... 살인죄를 저지른 한 죄인의 심리... 그리고 그에게 내려지는 벌 혹은 그의 참회에 관한 이야기? 뭐든 좋습니다. 사실 작품은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읽는 이들의 것이고 읽는 이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새로이 구성되는 것이니까요. 

죄인의 범죄 심리와 정신적 동요, 참회에 관한 이야기 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 물론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여러 주제들 밑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생각은 무엇보다도 당대에 승리를 구가하던 과학적 세계관과 합리적 이성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었습니다. 합리적 이성에 의해 인간의 행위와 정신세계를 설명하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재고는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세계 전체에 깔려있는 전제이자 결론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는 모두 궁극적으로는 근대인에게 강요된 과학적(수학적)인 합법칙적 세계관과 합리적 사고에 의해 ‘조정’, 혹은 ‘조종’되는 삶에 대한 의심과 회의로 귀결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활동하던 시대는 19세기 가운데 토막의 시기, 즉 1840년대~1880년대 시기였습니다. 이때 유럽에는 생시몽과 푸리에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다는 사실은 여러분께서도 다 잘 아실 것입니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실증과학의 눈부신 성공에 힙입어 승리를 구가한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중심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러한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 중심의 세계관이 공상적 사회주의를 낳았고 나아가 니힐리즘과 무신론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주인공 바자로프는 1840년대 러시아의 이러한 과학기술의 신봉자이자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니힐리스트의 형상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또한 완벽하게 합리적이며 투명하게 조절되는 세계, 즉 유토피아에 관한 생각과 바로 직결되어 있습니다. 당시 도스토예프스키는 처음으로 떠난 유럽여행에서 과학기술이 집결된 파리 만국박람회장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통제되는 완벽한 세계, 유토피아의 모습을 박람회장에서 본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을 “수정궁”이라 표현하며 그러한 세계에 대한 공포를 작품에 담아냈습니다. 그는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에 반대하는 자신의 생각을 예의 유명한 명제, “2×2≠4”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명제는 「죄와 벌」 이전에 쓰여진 중편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서 등장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들을 통해, 자신의 주인공들을 내세워 신이 존재할 수 없는 과학의 세계, 인간에게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부분인 감정과 정서가 인정될 수 없는 유토피아의 세계에 숨겨진 폭력성과 야만성을 폭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 말고 다른 무엇으로 인간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성과 합리 너머에 통제와 통일을 불가능하게 하는 자신만의 것, 다른 사람과 나를 구별짓는 고유한 무엇이 있고 그것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로 당사자를 설명해줄 수 있는 가장 타당한 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합법칙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누구에게나 공통되며 동일한 것이니까요.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러한 소위 자기 정체성, 자기의식(자의식)이 “고통”이라는 범주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현출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고통은 자의식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스토에프스키의 주인공들은 모두 엄청나게 ‘자의식적’입니다. 

‘자의식’이라는 말을 하고 보니 좀 딴 얘기가 하고 싶어지는데, 제가 학부를 다니던 시절에는 다들 자신의 자의식으로 인해 힘들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그때의 저희와는 좀 다른 듯도 합니다. 언젠가 대학신문에서인가 어떤 교수님이 “과거 대학생들은 자존심은 없고 자의식이 과도했는데, 요즘 대학생들은 자의식은 없고 자존심만 비대하다”는 언급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그렇게 본다면 요즘 학생들은 다들 상처받고 자존심이 상해 힘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학생들에게, 저는 조심스럽게 조언해보고 싶습니다. 혹시 그러한 상한 자존심을 자의식에 비추어 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나를 성찰하는 나”라는 자의식 속에서 혹시 주변세계로부터 내가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 내가 주변 세계에 상처를 주었을 수도 있다는 역발상이 이루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2.3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과 사람의 연대는 공상적 사회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통과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공감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것을 “소-스트라다니예”(со-страдание)라는 용어로 말합니다. 러시아어로 ‘소-’(со-)는 ‘함께’, ‘공동으로’, 그리고 ‘스트라다니예’(страдание)는 ‘고통’, ‘고통받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소-스트라다니예’는 우리말로 하자면 ‘공동의 고통’, ‘함께 하는 아픔’ 정도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아파함’은 바로 우리의 ‘지금, 여기’에서 허공에 떠돌고 있지만 실천되지 않는 사회적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소설들에서 최종적으로 삶에서 승리하는 사람, 삶의 부조리함으로부터 파멸하지 않고 구원받는 사람으로 생각한 이들도 바로 ‘소-스트라니예’를 실천하는, 다른 이의 고통을 끌어안는 사람입니다. 「죄와 벌」의 소냐가, 「백치」의 므이슈킨 공작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알료샤가, 바로 그러한 인물입니다.  

“나는 생각/사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가 이성 중심의 세계관을 설명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식의 존재론은 “나는 고통한다 혹은 고통과 공감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doleo ergo sum)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떠십니까, 이러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생각이 맘에 드시는지요. 그래서 저는 세상 사람들에게 솔직히 “톨스토이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세요”가 아니라, 그냥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세요...?”라고 여쭈어보고 싶기도 합니다.  

3. 「죄와 벌」

3.1
이제 본격적으로 「죄와 벌」(переступление и наказание)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앞에서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렇게 단순히 결론만을 이야기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광기에 사로잡힌 바쿠스적인 천재였던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야말로 열심히 노력하며 ‘쓰는’ 작가였지, 그야말로 마치 소설이 스스로 그냥 ‘쓰여지는’ 천재 유형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갑자기 신이 오신 것처럼 소설이 그냥 ‘쓰여지는’ 쪽은 톨스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번역으로는 감지하기가 힘든 일이지만, 톨스토이의 문장은 가히 명문장이라고 할 법합니다. 그에 비해 도스토예프스키는 담긴 사상은 극히 심오하지만 문장 자체는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았고 형식미 따위는 별로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을 쓰기 위해 주로 신문과 잡지 등의 자료를 뒤졌던, 그야말로 물적 현실에 철저히 기반을 둔 노력형 작가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도스토예프스키를 키운 것은 “팔할이”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의 토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1821년에 출생하였으므로 1840년대에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 그는 당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계층에 폭넓게 침투되어 있었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공상적 사회주의, 니힐리즘 등의 사상에 스스로 깊이 몰두해 있었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근대사회로 발전하던 시기 전근대적 사회의 맹목과 낭만주의를 비판하고 무엇보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의한 사고를 추종하던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사고 방식을 스스로 깊이 체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2   
여기서 잠깐 약간만 옆으로 새 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인텔리겐치아’(интеллигенция)라는 용어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인텔리겐치아’는 영어의 ‘인털렉츄얼’과는 다른 특별한 러시아적 뉘앙스를 가집니다. 이 용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대, 즉 19세기 가운데 토막 시기에 형성된 특정한 사회계층을 의미합니다. 좀 더 정확히 시대좌표를 말씀드리면, 러시아가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이후(1812년의 조국전쟁), 1820년대 낭만주의의 시기를 지나, 러시아가 서구에 엄청나게 후진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는 비극적인 인식이 시작된, 대강 1840년대 정도부터 시작을 잡을 수 있겠습니다.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사회는 점차 시스템 지향적이 되어가고 이에 따라 신분보다는 개인의 능력과 교육 등에 의해 사회에서 한 몫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신분 자체는 귀족은 아니지만 적당한 중류가정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공부하여 전문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 사회의 한 계층을 이루게 되었고, 이들을 소위 ‘잡계급 지식인’(разночинцы)이라고 합니다. ‘잡계급’이란 그들이 여러 다양한 계층 출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러시아식으로 말하면 저도 ‘잡계급 지식인’ 셈이죠. 아무튼 이들은 귀족처럼 혈통에 의해 부여된 지위가 아니라 교육과 노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었고 따라서 근대적 사상에 매우 민감하였습니다. 또한 이들은 사회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반골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혁명세력도 이들과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작가들은 물론 말할 것도 없구요. 도스토예프스키의 시대 이전에는 푸슈킨이나 투르게네프와 같은 귀족들이 작가였지만, 이 시기부터 잡계급의 출현에 의해, 말하자면 직업작가, 즉 글을 팔아먹고 사는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러시아 문학에서는 이러한 직업작가로 도스토예프스키에 조금 앞서 고골이 있습니다.)  

3.3
이야기가 좀 멀리 갔습니다만, 아무튼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을 통해 서구의 합리적 이성을 비판했지만, 사실 어느 면으로 보나 그는 오히려 후진 러시아를 극복하기 위한 근대적 제도와 교육, 계몽사상 등 이성과 합리주의 문화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선대 러시아인(보통 러시아에서는 “조국전쟁”이라고 불리는,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있었던 때에 젊은이들이었던 낭만주의 세대)보다 훨씬 이성적, 합리적이며 물질과학적 논리를 선호하는 세대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작가로서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철저히 논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반테제에 의해 비판하고 검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문학을 업으로 하는 저로서는 이처럼 도스토예프스키의 세계에서는 언제나 정과 반이 서로 교호하는 있다는 점에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밑에서 다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제가 방금 전 「죄와 벌」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겠다고 하고 아직도 배경 이야기만 하고 있네요.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이야기하기 위한 전초전이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_1.png
                                                                  라스콜리니코프

3.4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앞서 말씀드린 러시아 잡계급 지식인이자 인텔리겐치아의 전형입니다. 여기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법과대학 학생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법치란 사회의 근대화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법치란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규율하는 보편타당한 원칙을 마련함으로써 권력의 자의적 군림을 막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근대적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근대적인 사회 체제, 그리고 이성적, 논리적, 합리주의적 사고의 화신이 법 체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주인공에게 법과대학 학생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한 것은 주인공의 가장 중요한 속성을 유표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논리와 합리주의의 인간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리와 언변은 그야말로 화려합니다. 그는 충동이나 원한에 의해서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는 초인주의 사상을 전제로 하여 다른 사람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범인(凡人)들에 대한 비범인(非凡)인의 지배와 통제를 합리화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러한 논리는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살인행위를 초인이자 비범인이 가진 천부적 권리로서 그리고 합리적 이기주의의 원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정당화합니다. 

3.5  
러시아문학 전공수업에서는 「죄와 벌」을 배울 때 “죄”의 러시아어, “페레스투플레니예”(переступление)의  의미를 통해 라스콜리니코프의 ‘죄’를 해석하기도 합니다. 러시아어로 접두어 “페레-”(пере-)란 ‘넘어섬, 초과’ 등을 의미합니다. “스투플레니예”(ступление)란 ‘나서다, 나아가다’라는 의미의 동사 “스투피찌”(ступить)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페레스투플레니예”란 ‘어떤 한계를 넘어서 나아감’, ‘초과하여 나감’이라는 뜻이 되지요. 그래서 러시아어로 “죄”란 무언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넘어선 행동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면, “죄”(페레스투플레니예)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 그리고 그 살인을 뒷받침하는 초인사상 모두,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합리화된다고 해도, 바라보는 우리에게 사람에게 허용되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 있음,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음을 직감하게 합니다. 상황이 어떠하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판단, 일상적으로 우리가 많이 하는 ‘그러면 안되는데...’라는 판단은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이러한 윤리적, 도덕적 판단은 논리적 추론에 의해서 이루어지진 못합니다. 이기주의적 합리주의에 의한 추론은 바로 라스콜리니코프가 ‘버러지만도 못한’ 전당포 노파를 죽이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오는 사상적 도구로 쓰입니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합리적으로 보면, 살아있어 봐야 아무에게도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탐욕스러운 전당포 노파의 죽음은 라스콜리니코프 자신을 포함하여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그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지요. 

여기서 또 잠깐 옆으로 살짝 새어, 저는 여기서 얼마 전 보았던 아가사 크리스티 극장의 명탐정 포와로 시리즈에서 마지막 편에 등장하는 포와로 자신의 살인행위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포와로는 중병으로 살날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희대의 악인인 살인교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직접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교묘하게 유도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합니다. 정말 나쁜 것이, 이 악인은 자신이 죽이고 싶은 사람을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죽이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이 어떤 누구에게 원한이나 미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아채면 그러한 증오의 감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죽이도록 합니다. 자신은 재미로 그러는 것이죠. 그렇게 하여 주위 사람들이 파멸하는 것을 즐깁니다. 아무도 그가 그러한 악인임을 모르지만 포와로만은 그의 야누스 같은 얼굴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살인의 교사의 증거를 찾기도, 증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포와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악인을 스스로 제거하고 떠나기로 마음먹습니다. 자신의 살인에 관해서는 몇 년이 지난 후 친구에게 배달될 편지에 기록을 남깁니다. 그 편지에서 포와로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이것이 옳은지 확신할 수는 없네. 다만 내 영혼을 신에게 맡길 뿐...”이라고 말입니다. 딱히 따져보자면 포와로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원리를 생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자신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 포와로의 이 말은 라스콜리니코프의 오만한 초인사상에 비교해보면 ‘정서적으로’ 너무나 다르게 울립니다.           

적어도 이 소설 안에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언변과 논리를 넘어설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자극하여 그가 살인행위 뒤에 숨기고 있던 동기를 내보이도록 하지만,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만큼 ‘똑똑한’, 즉 ‘논리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포르피리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문을 읽고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죄를 저지를 법 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찾아와 그와 논쟁을 하는 가운데 범죄를 확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현대에 와서 이야기하는 심리 프로파일링이 아닐까 싶은데,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문제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리에 대적할 다른 논리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틀렸음’은 어떻게 논증해야 하는 것일까요? 

3.6
그릇된 가치판단을 하는, 혹은 가치판단 불능인 초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문제점에 대해서 그의 이름은 러시아 문화 콘텍스트를 통해 또 다른 암시를 주고 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_2.jpg
                                                                  라스콜리니코프

주인공 이름 “라스콜리니코프”에 들어있는 어근 “라스콜”(раскол-)은 원래 ‘분리’, ‘분열’을 의미하는 단어로 러시아 정교사에서 17세기 정도에 등장하는 “분리파”라고 불리는 일단의 종교적 집단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들은 러시아 정교의 세속화를 반대하였고 종교적 순수주의를 주장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든 물질적인 것을 거부하고 상당히 극단적인 고행을 통해 신앙심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들은 온 몸을 쇠사슬로 묶고 생활한다던가, 몇시간 동안 자기 몸에 채찍질을 한다던가,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스스로를 화형에 처하는 등의 기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분리파에 대해 이슬람의 근본주의를 생각하시면 좀 너무 나가시는 것이고, 중앙의 러시아정교 세력을 비판하며 러시아의 오지, 특히 시베리아로 나아가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꾸렸던 이들은 당시 문명과 너무 격리되어 있던 시베리아 오지에 러시아정교를 전파하고, 교육과 계몽 운동을 했던 긍정적인 면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오지에 농사기술과 과학적 지식을 또한 전파하기도 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이러한 분리파는 정치에 비판적이었던 인텔리겐치아, 그리고 그들이 전개했던 바 지식과 삶의 결합을 실현하는 “브 나로드”(в народ: ‘민중 속으로’라는 뜻) 운동과 결합되기도 하였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라스콜’은 이처럼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지만, 주인공의 범죄행위와 관련시켜 본다면, 분리파 교도들의 도그마, 궤변 등과 연관된다고 할 수 있고 또한 본질적으로 이러한 사회로부터의 분리, 고립은 곧 어렵지 않게 이들이 소통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가진 초인사상이 도그마임은 바로 여기서 암시된다고 생각됩니다.  

3.7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인간 심리의 가장 깊은 심층부를 파고들고 있다고 평해집니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사회적,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건은 상당히 개인적, 가족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평가는 물론 전적으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제가 보기에는 사회학적 환원주의에 기울지 않으면서도 인간개인의 심리와 행동 저변에 있는 사회적 영향을 보여주며, 또한 반대로 개인을 통해 당대의 시대적 징후가 된 사회적 사건들과 현상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극히 사회적인 소설입니다. 「죄와 벌」만 하여도, 앞서 말씀드린 인텔리겐치아의 문제를 비롯하여, 공상적 사회주의와 니힐리즘의 유행,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과 자본가, 매매혼과 같은 당대 결혼풍습, 미성년자 착취, 빈곤 등 근대 산업사회로 진행하던 당대 러시아의 사회적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심리적 사실주의의 예술적 완전성은 사회적 문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조명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위고와 같은 경우는 도스토예프스키와는 다르죠. 그는 전적으로 다만 사회적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이 「죄와 벌」이라는 독특하고 고유한 작품도 러시아 문학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매우 사회적입니다.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제들은 지극히 도스토예프스키적이지만 다른 한편 그 이전 러시아 문학사가 다루었던 주제들이 그 밑텍스트로 들어와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대화와 일상을 통해 드러납니다.  

3.8
이처럼 「죄와 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지만, 시간상 이런 이야기를 다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고,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가장 중요한 주제, 즉 “소-스트라다니예”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오만한 초인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나이어리고 교육받지 못한 창녀 소냐입니다. 친구 라주미힌도, 예심판사 포르피리도 무너뜨리지 못한 그의 강한 논리를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다만 가족의 부양을 위해 비참한 생활을 견뎌야 하는 어린 처녀가 어떻게 논박할 수 있었을까요? 

소냐.jpg
                                                                          소냐

역설적으로 라스콜리니코프의 논리를 이기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며 논리의 내부가 아니라 논리의 외부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소냐는 논쟁이 아니라 논쟁하지 않음, 즉 무논쟁/비논쟁을 통해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백을 이끌어냅니다. 오만한 법대생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소냐의 고통에 공감하며 자신의 살인에 관하여 털어놓게 됩니다. 그는 소냐가 더 강력한 논리로 자신의 논리를 깨뜨리기 때문이 아니라 비논리와 무논리로서 자신의 고통에 공감해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살인이 죄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무논리적이며 비합리적인 소냐의 “소-스트라다니예”는 범죄를 밝혀내려는 아무런 의도 없이도 결국 라스콜리니코프의 그릇된 가치판단을 교정해냅니다. 여기서 또한 중요한 것은, 라스콜리니코프가 결국 자신의 살인이 결코 초인사상이라는 논리와 합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이 되고 싶은 욕망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깨닫는다는 사실입니다. 소냐의 “소-스트라다니예”를 통해 비로소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하찮은 ‘이’를 죽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해친 살인임을 인식합니다. 즉 이성과 논리적 추론의 인간은 비로소 “소-스트라다니예”의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써 자신과 세계를 충만하게 이해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라스콜리니코프에 관하여 「죄와 벌」에서는 “변증법 대신에 삶이 다가왔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죄와 벌」에서의 테제와 반테제가 무엇인지 밝혀집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판단의 오류를 폭로하는 것은 또 다른 논리가 아니라 비(非)논리/무(無)논리적인 “소-스트라다니예”입니다. 논리를 깨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비논리/무논리이며 합리를 극복하는 것은 비합리/무합리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제일 잘나고 똑똑한 법대생(러시아에서도 그렇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실존적 대자로 완전히 그와 반대인 인물, 교육받지 못하고 말도 잘 못하는 빈민가의 창녀 소냐를 내세운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입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초인론과 살인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만 합리주의와 논리적 추론을 밀고 나가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기를 원했습니다. 보다 깊숙이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같은 이기적 합리주의란 실상 비이성적인 욕망에 뿌리박은 도그마에 불과하다는 것을요. 그는, 이기적 합리주의와 논리적 추론이 ‘비합리’적이며 ‘논리적 근거 없는’ 윤리적 검증에 의해 성찰되지 못할 때 사회나 개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생각됩니다. 

3.9
그런데, 여러분께서는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구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즉 이러한 구도의 개연성, 소냐의 “소-스트라다니예”에 라스콜리니코프의 초인론이 굴복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이야기의 개연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입니다. 또 소냐는 어떠십니까? 소냐의 캐릭터가 여주인공으로서 맘에 드시는지요? 그리고 여러분은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중 누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사실 저는 좀 젊었을 때는 이러한 이야기가 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 같은 그러한 대단한 논리의 소유자가 나이어린 몸 파는 여자의 감상적인 말에 감동하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실존적 성찰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좀 억지스럽지 않나 싶었습니다. 혹은, 억지스럽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소냐가 주인공의 파트너로서는 캐릭터 상으로 좀 희미하고 개성이 약하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좀 나이가 들고 보니, 라스콜리니코프에 대한 소냐의 공감(“소-스트라다니예”)이 얼마나 강력한 인식력인지 조금은 알듯 합니다. 예전의 저는 공감하는 사람에게 공감하지 못했던 것이죠. 아무튼 강력한 논리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에 비해,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내세운 소냐는 그다지 임팩트가 강하지 못한 캐릭터임은 사실입니다. 도대체 왜 그는 파트너를 이렇게밖에 그려내지 못한 것일까요? 

하지만 또 바로 이러한 “희미함”, “강력하지 못함”, “무개성” 등등 좀 매력적이지 못한 소냐의 캐릭터는 바로 도스토예프스키가 그녀에게 부여하고자 한 역할이었습니다. 즉 소냐는 이상적 인간, 거의 절대적인 선인(善人)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입니다. 좀 우스갯말로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죠. 저는 사실 이것이 절반의 진실이라고 생각하는데, 여자들이 다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좀 철이 없는 여자가 그렇습니다.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아무튼 저는 이 말이 바로 소냐의 캐릭터에게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사람, 휴머니티가 있는 사람은 그다지 강력하거나, 매력적이거나, 멋지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좀 어딘가 비어보이고 개성도 없어 보입니다. 한마디로 좀 임팩트가 없어 보이는 것이죠. 소냐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데, 다른 이들과 달리, 라스콜리니코프와 한판 논리적 대결을 펼치지 못하는 소냐는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그녀가 라스콜리니코프의 파트너, 실존적 대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약하고 희미하고 개성 없는 캐릭터로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또 다른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설정됩니다. 여기서도, 러시아문학사상 가장 매력적인 주인공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반 카라마조프에 비해, 용서와 포용, 화해를 말하며 이반을 극복하는 인간으로 제시되는 동생 알료샤(알렉세이) 카라마조프의 형상은 정말 약하디 약합니다. 불신과 회의에 사로잡혀 신을 부정하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장광설에 대해 수도사 알료샤는 아무런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며 다만 “나는 형의 고통을 이해한다”라고 말합니다. 참 어처구니없기도 하지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미래를 책임질 인간형으로 모든 불화와 모순을 끌어안으며 “소-스트라다니예”하는 사람 알료샤를 택하였지만, 스스로 이러한 성인(聖人)에 버금가는 이상적 인간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참 알료샤는 매력은 없습니다. 좀 미안한 말이지만 바보 같지요. 소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에서 나타나는 소설의 주인공의 속성이란 메타포릭하게 보아야 하는 것이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들의 논리적 언어에 대항할 범주로, 비논리/무논리의 공감의 언어, 나아가 무언(無言)이라는 범주를 택하였습니다. 바로 「죄와 벌」의 소냐가 이러한 범주를 체현하는 인물입니다. 

3.10
이러한 무언가 좀 떨어지는 사람의 형상은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러시아어로는 ‘(현명한) 바보’를 의미하는 “유로디브이”(юродивый)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성과 논리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사의 “어려운 문제들”을 다만 끌어안고 감내합니다. 그는 추론하거나 논박하지 않고 다만 공감합니다. 러시아 문학에서는 항상 갈등의 최고조에 등장하는 유로디브이의 단순한 말을 바로 신의/신적인 판단으로 암시해 왔습니다. 소냐의 캐릭터는 바로 이러한 러시아 문학의 전통에 근거한 인물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무언가 바보스러움이 가장 높은 지혜와 통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하는 속담도 있고,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런 얘기도 있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보는 실제 현실에서 만나듯 무지로 인해 고집스럽거나 외부세계를 외면하며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바보가 결코 아니라는 점입니다. “유로지브이”인 바보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공감합니다, 즉 “소-스트라다니예”하는 인간인 것입니다. 

3.11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 사람과 사람의 연대는 “함께하는 고통”(소-스트라다니예)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고 앞서 말씀드렸는데, “소-스트라다니예”는 합리주의적 이기주의의 견지에서 보면 엄청나게 비합리적인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해야 할 마당에 “최대다수의 최대불행”이라니 이런 엄청난 부조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의 구도를 통해 “소-스트라다니예”는 결코 부조리가 아니라 이성과 합리적 추론을 넘어서는 보다 높고 종합적인 의미에서의 인식력을 의미하게 됩니다. 

다만 생물학적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정신이 결합되어 있는 인간은 결코 이성과 논리적 추론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과 그의 세계는, 도식적으로 말해 한편으로 이성과 논리에 의한 사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직관과 감성에 의한 사고, 이렇게 두 가지의 상반된 사고 모두의 상호작용에 의해 인식되어져야 합니다. 지성사적으로 보면, 19세기에는 그 전세기와 당대를 풍미했던 이성주의와 과학주의에 대해 치열한 반성이 있었음은 모두가 아시는 바일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관념 소설 또한 이러한 지성사적 맥락에 또한 자리매김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이성과 논리 바깥의 영역, 직관이라던가 감성, 상상력, 무의식 등 비합리적 영역으로 치부되었던 범주들이 인식론적 영역으로 들어오게 된 사실 역시 많이 이야기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바로 이러한 범주들이 인간의 심리와 행위를 보다 충분히 설명해줄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이성과 논리적 추론은 다만 물질세계에 대한 사고에 적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이과 쪽 전공 친구들이 엄청 기분나빠하며 그쪽 분야들도 그 차원을 넘어서 궁극적으로는 직관과 상상력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더군요. 수학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우려가 정말 옳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3.12
이야기를 하다 보니, 제가 처음에 ‘법치와 휴머니티’에 대해 말씀드리겠다고 제목을 달았는데, 이제까지 이 두 단어는 한번도 쓰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이야기하는 중에 많은 분들이 이미 눈치를 채셨을 것 같아서 새삼 말씀드리기 민망합니다만, 그래도 제목에 썼으니 면피라도 하기 위해 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언뜻 보기엔 라스콜리니코프의 이성과 합리주의가 ‘법치’의 원리를, 그리고 소냐의 “소-스트라다니예”가 ‘휴머니티’의 원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이 글을 쓰다 중단하고 지난 밤에 한잔 하고 들어와 생각해 보니, 조금 부가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법 자체는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반한 규율의 원리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치’(治)의 부분인 것 같습니다. ‘치’란 원리의 적용, 즉 행위의 범주를 포함하고 있는 말이니까요. 법이 이성과 합리적 추론에 의해 인간세계를 규율하는 원리라면, 법을 적용하여 규율하고 조정하는 ‘법치’는 인간과 인간의 세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미 그 ‘치’의 행위 속에 휴머니티, 즉 여기서는 “소-스트라다니예”로 표현되고 있는 원리를 포섭해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법치와 휴머니티는 서로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죠. 어떻게 보면 역설일 수 있는데, 법치란 법에 의한 통치를 규정하면서도 법 자체를 넘어서는 개념, 즉 실정법이나 성문법 외부의 휴머니티의 범주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스콜리니코프가 왜 주인공인지 알 수 있을 듯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성과 합리주의 없는 다만 비합리적인 “소-스트라다니예”를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위에서 제가 소냐를 “소-스트라다니예”의 원리를 대변하는 캐릭터로 이야기했지만, 다른 한편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통해 바라본다면, 맹목적 자기희생이라는 “죄”(페레스투플레니예, 경계넘음)을 저지른 셈입니다. 이러한 “죄”의 개념은 라스콜리니코프 이외에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소냐를 비롯하여 사실 살인의 피해자인 전당포 노파 리자베타, 라스콜리니코프의 동생 두냐, 두냐의 약혼자 루진, 두냐를 욕망하는 스비드리가일로프, 예심판사 포르피리, 그리고 균형잡힌 이성을 가진 라주미힌까지도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임은, 동전의 양면처럼 사람의 사람에 대한 공감, “소-스트라다니예”라는 원리를 놓고 보았을 때 다시 분명해집니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하는 “소-스트라다니예”가 실천적이고 행위적인 개념임을 상기해본다면 말입니다. 이들은 진실로 “소-스트라다니예”를 행한 것입니까?

사실 「죄와 벌」은 처음부터 끝까지 ‘법’과 ‘법치’의 문제를 다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인공은 법대생이며 형법상 가장 무거운 살인죄를 고의를 가지고 저지릅니다. 그는 법에 의해 심판을 받고 벌을 받습니다. 또한 게다가 그의 살인행위 뒤에는 다른 이들을 다스리는 ‘치’의 원리로서 초인론에 기반한 새로운 법제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스스로 이러한 법제의 가능성에 대해 실험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릅니다. 오직 논리적 추론과 합리적 이기주의에 의한 라스콜리니코프의 새로운 ‘법치’가 왜 잘못된 것인지는 이미 이야기한 바를 통해 이해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법치’는 이미 법 외부의 것을 포섭하고 있어야 하니까요.

3.13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소설에서 “죄”를 실정법이나 성문법의 차원을 넘어서 이야기했듯이, “벌” 역시 실정법과 성문법의 차원을 넘어서 생각됩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재판에서 선고받은 시베리아 유형 외에 그가 받은 벌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기 인생을 그렇게 무익하게 망가뜨린 것이죠.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 특유의 역설은 여기서 다시 발견됩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는 살인의 죄를 저지르지만 다른 한편 바로 이러한 죄인이 됨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바로 소냐의 “소-스트라다니예”를 알게 됨으로써 말입니다. 그런데 형법상의 죄를 저지르지 않아서 형법상 죄인이 되지 않고 형법상 처벌을 받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삶의 변화가 없이 살아갑니다. 

죄를 지어야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도스토예프스키 최대의 역설이자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 긴 소설에서 사실 라스콜리니코프의 새로 태어난 모습은 거의 그려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의 후속편으로 「위대한 죄인의 생애」라는 작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이른바 죄인의 갱생과 부활을 다룬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시 선인(善人)의 행적이란 소설로 다루기 힘든 소재인 것 같습니다. 결국 쓰지 못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4. 서로 갈등하지만 모두가 같이 공존하는 “다성악”(polyphony)의 세계

4.1
앞서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작가가 다루는 주제들도 마음에 들지만, 사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세계가 ‘다성악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여러 악기들이 서로의 선율을 연주하지만 하나의 전체로 어우러지는 음의 세계를 이루어내는 교향악처럼 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주인공은 물론 분명히 있지만, 그는 항상 자신의 목소리만큼 강력하고 설득력있는 다른 목소리들에 에워싸여 있습니다. 주인공의 목소리와 주변 인물들의 목소리는 서로 자신의 원리를 주장하며 논쟁합니다. 여기서 인물들은 각각 일정한 관념 혹은 세계관을 대변하므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그야말로 관념의 목소리들이 대결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은 지극히 비사실주의적이죠. 아무튼 모든 소설에 갈등구조는 존재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목소리들의 갈등구조는 작가가 어느 하나의 우위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에 의해 특별한 "다성악"(폴리포니)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특히 러시아의 유명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미하일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라는 저서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다성악을 연구하여 “대화론”이라는 자신의 세계관적, 철학적 원리를 구상하기도 했습니다.) 

4.2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라스콜리니코프가 분명히 「죄와 벌」의 주인공이고 그의 파트너는 소냐입니다. 그렇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소냐에게 여주인공으로서의 강력한 이미지를 부여하지 못했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초인론을 주장하는 목소리 역시 소냐와 라주미힌, 포르피리, 스비드리가일로프, 루진 등 모든 목소리들에 의해 논박당합니다. 또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는 상호 분신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라스콜리니코프가 위선자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위악자입니다. 그는 마음 속에 선을 행할 의지를 가지고 있고 그러한 실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악을 택합니다. 그래서 이 둘을 분신으로 보기도 합니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자살을 택하고 라스콜리니코프가 갱생의 길로 가는 것은 이러한 분신관계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와소냐.jpg
                                                             라스콜리니코프와 소냐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폴리포니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주인공의 목소리가 다른 이들을 압도하고 설득하고 판단하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목소리를 부르고 요청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죄와 벌」에서도 보셨듯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은 잘나고 똑똑하고 자기 의견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가만히 보면 보면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에 대한 대답을, 즉 다른 목소리를 청합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해주기를, 자신의 테제에 대해 반테제를 제시해주기를 절실히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제가 도스토예프스키에 공감하는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근원적 고독과 대화에의 요청이 저의 실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를 좋아하고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하는 상당수의 분들은 아마도 이 폴리포니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를 꺼려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도스토예프스키는 왜 그렇게 어둡고 복잡하고 지리멸렬한 모습들만 그려내냐고 묻습니다. 무언가 깔끔하고 명확한 답변이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러한 폴리포니가 대책없고 무질서한 혼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널리 보면 삶은 그러한 모습으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요? 삶에는 명확한 답변도 분명한 해결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삶에서 어느 순간 얻었던 답은 다시 새로운 답으로, 또다른 답으로 전화(轉化)해 갑니다. 어느 순간에도 종국적인, 최종적인 답변은 불가능합니다. 질문과 답변의 폴리포니를 통해 우리는 엄청난 모순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러한 폴리포니의 세계는 삶과 행위의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세계입니다. 작가는 어느 하나를 절대적 우위에 올리지 않으며 자신이 어느 하나를 선호한다고 하여도 반드시 그에 대한 반테제의 목소리를 다시 울리게 합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한 지점에서 어느 목소리가 우위에 있고 어느 다른 지점에서는 또 다른 목소리가 우위에 있습니다. 

저는 ‘위대한 죄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복수(複數)의 관념들의 세계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왜 제가 우아하고 자비로운 귀족 톨스토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하면, 그와 대조적으로 위대한 구도자 톨스토이의 세계는 자꾸만, 그가 인류에게 설교하고 싶었던 교훈의 말씀이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독백”의 세계, 우리 각자가 나름 생각해낸 반테제의 주장이 허용되지 않는 모노포니의 세계가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러시아 문학노트]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2, 2015년 2월, 차지원,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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