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5-27 15:23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 (8): 후쿠자와 유키치와 유교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4,911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 (8): 후쿠자와 유키치와 유교

1.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교 비판

후쿠자와 유키치는 말년에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발언한 적이 있다.

한학과 양학 둘 다 학문이라고 하지만, 일상적 처세부터 문명국에 어울리는 독립과 부강까지를 논한다면,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행해져 온 한학은 학문이라 볼 수 없다. 내가 수년에 걸쳐 주창하고 있는 문명의 실학은 중국에서 도래한, 내용 없는 공론과 다르다. 이런 점에서 나의 주장은 낡은 학문과 완전히 반대되며, 그것을 신뢰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의 그릇됨을 폭로하고 그것의 망령됨을 밝혀서 부정하려는 노력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일본, 중국의 고금의 학자들은 물론이요, 공맹의 말씀이라 하여도 적당히 보아 넘길 수 없다. 나는 서양문명의 학문을 닦아 이를 절충하여 한학에 억지로 끌어다 대려는 학자가 아니다. 예로부터 전해 온 학설을 근본부터 전복하여 새로이 문명의 학문을 열고 싶은 것이다. 학문의 힘으로 낡은 학문을 뒤집어엎는 것이 진실로 나의 바람이다. 마음에 꾀하고자 하는 바는 다만 이뿐이다.(1)

후쿠자와에게 이 정도로 과격한, ‘한학’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후쿠자와는 서양을 숭배한 나머지 유교를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인 정치체제에서 보수적인 권위주의를 떠받치던 정신적 태도를 비난할 때,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러한 태도를 가진 대표적인 이들로 ‘한학자’를 가차 없이 지목하였다. 그렇다면 후쿠자와는 학문체계로서 혹은 사상으로서 유교를 공격한 것일까? 아니면 유교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행동거지나 사회적인 악영향을 문제시할 것일까?

후쿠자와는 자서전에서 젊었을 적에는 열심히 한학 서적을 읽고, 한학에서 상당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했다. 즉 후쿠자와는 유교에 대해 무지하고 편견을 가졌기 때문에 유교를 비판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10대 후반, 고향인 나카츠에 있을 무렵, 히라이시 쇼잔이라는 유학자에게 배웠다. 히라이시는 절충적인 입장으로 주자학과 오규 소라이의 학문을 받아들였고 병학(兵學)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히라이시의 사숙(私塾)에서 한학서는 어떤 책을 읽었는가 하면 오로지 경서만을 읽었는데 『논어』, 『맹자』는 물론이요, 대개 경의(經義) 연구에 힘썼다. 특히 히라이시 선생께서는 『시경』과 『서경』을 선호하시어 이를 강의 해주셨기에, 곧잘 이 책들을 읽곤 했다. 그리고 『몽구(蒙求)』, 『세설신어(世説新語)』,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전국책(戰國策)』, 『노자(老子)』, 『장자(莊子)』와 같은 서적도 곧잘 강의를 통해 듣고, 이후로는 나 혼자서 공부했는데, 역사는 『사기(史記)』를 시작으로 하여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진서(晋書)』, 『오대사(五代史)』, 『원명사략(元明史略)』, 『좌전통독(左傳通読)』[『춘추경전집해독(春秋經傳集解読)』을 말하는 것일까?]과 같은 것을 읽었으며, 특히 나는 『좌전』에 밝아, 대개 학생들이 『좌전』 십오 권 중에서 서너 권밖에 읽지 않는다고 한다면, 나는 십오 권 전부를 통독하면서, 그것도 대략 열한 번 반복해 읽어 흥미로운 부분은 암기할 정도가 되었다. 그래서 대강 전좌(前座)[=라쿠고나 만담에서의 신인. 주 공연 전에 무대에 선다.] 정도는 되었다. 학당의 학풍은 카메이 쇼우요[후쿠오카의 절충파 학자. 소라이학에 영향 받은 바 크다.]풍이었는데 나의 선생은 카메이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여 시작(詩作) 등을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냉소하였다.(2) 

자신을 ‘한학자의 전좌’라고 할 정도로 열심히 중국 고전을 배웠다고 한다면 후쿠자와의 ‘한학자’ 비판이 향한 지점은 그들의 사상체계 내용이 아니라 개개인 학자의 사상과 행동 양식이었을까?

예를 들어 『학문을 권함』에서 그는 서양 학문을 배운 자들이 관직에 오르기만을 바라고, ‘모두 관(官)이 있는 줄만 알았지, 사(私)[=민간사회]가 있는 것은 모른다. 정부의 일원이 되어 위에 오르기 위한 술수만 알고, 정부 바깥의 민간에 있는 도는 알지 못한다. 이는 결국 한학자와 같은 자들이 갖는 악습에서 이제껏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마치 한학의 몸에 서양학의 옷을 입은 것과도 같다.’(3)라고 한탄하는 구절이 있다. 문제는 유교를 신봉하는지 여부가 아니다. 서양의 학문을 배운 신지식인조차 학문을 탐구하고 민간에서 그 학문을 살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구래의 ‘한학자’와 마찬가지로 권력에 편입하기만을 바라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즉 후쿠자와는 학문의 내용 자체보다는 학문이 권력욕, 명예욕의 도구가 되어가고 있는 점을 문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양학을 배운 자들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쿠자와는 유교가 낳은 고유한 정신적 경향도 비판한다. 이에 대해서는 『문명론 개략』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유학자는] 옛 것을 신봉하고, 옛 것을 사모하여 결코 자신의 공부를 더하지 않고, 이른바 정신의 노예(‘멘탈 슬레이브mental slave’―후쿠자와 자신이 보충 기록함)가 되어 자신의 정신을 완전히 옛 도(道)에 바쳐, 지금의 세상을 살면서도 옛 사람의 지배를 받아, 그 지배를 또 다음 세대에 전달함으로써 지금 세상을 지배하고, 인간의 교제 전체가 정체되도록 만드는 근본 원인을 만들었다. 이는 유학의 잘못이라 해야 할 것이다.(4)  

정신의 노예라는 비판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On Liberty)』(1859) 제2장에 있는 mental slavery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문명론 개략』에서 했던 유교 비판은 이런 ‘정신의 노예’와 같은 경향이 물리적인 강제 없이도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사회 분위기에 동조하도록 만들고, 이어 정신의 자유를 포기하게 만들 위험을 낳는다고 경고한 것이라 하겠다. 후쿠자와는 또 유교가 그러한 태도를 생겨나게 했다고 비판했다.  

다만 후쿠자와가 유교의 역사적 역할을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인용한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진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예전에 우리나라에 유학이란 것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태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양의 ‘리파인먼트’ [=refinement]란 말처럼 인심을 단련하여 청아하게 만드는 일에 관해서는 유교의 공덕이 결코 적지 않다. 다만 옛날에 유교의 공이 주효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유교는 무용할 뿐이다. 가령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에 왕골로 이불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거나, 쌀겨를 식량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듯이 말이다. 유교도 그런 옛날에 있었던 것이니 그릇된 요소가 있다고 유교를 무조건 비난할 일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유학으로써 옛날 일본인을 교육했던 것은 시골 처녀를 어전에 봉공케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골 처녀가 어전에서 가져야 할 몸가짐을 배우는 것은 그녀가 자연스럽고 청아한 방식을 모방케 하고 재능과 지혜를 어떤 의미에서 예민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활발한 기력을 몽땅 잃어버리게 만들 따름이며 일이나 경제활동에는 무용할 따름이다.

야만상태에서 벗어나 문명화됨으로써 획득되는 refinement라는 개념은 H. T. Buckle, 『History of Civilization in England』(1857-1861)에서 시사점을 얻은 듯하다. 후쿠자와가 보았을 때 사회가 아직 빈곤하고 사람들의 지적 수준이 낮은 시대에는 사람들의 행동을 세련되게 만들고 그들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데 유교가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문명이 더욱 발달한 시대에는 이제 그 역할이 끝나 버렸다. 이는 소위 진보사관이란 관점에 국한된 평가이며, 유교란 일종의 역사적 정치체제가 낳은 이데올로기라는 견해를 담고 있다.

유교는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이용가치가 있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며 보편적인 정당성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주장은 결국 후쿠자와에게 논리적 가치 일반을 역사적으로 상대화하는 논자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이와 관련해 마루야마 마사오는 초기의 후쿠자와가 했던 유교비판이 ‘전형적인 『이데올로기 비판』의 형태이며……새로운 사회층이 발흥하던 시기에 그들의 사상적 대표선수로서 구래의 사회질서에 내재한 여러 가지 이념을, ……그것을 채용한 주체적 인격의 특정한 의욕으로부터 설명하고, 그 사회적 역할을 지적한’ 것으로 분석했다. 즉 후쿠자와는 이념의 좋고 나쁨과 관계없이 그것을 주장하는 자가 어떤 이익을 취하려고 하는가를 밝혀냄으로써 과거 사회의 규범과 위선을 강조하려 했다는 것이 마루야마의 해석이다.(5)

마루야마의 해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후쿠자와 자신의 논리 자체가 어떠했는지는 좀 더 검토해봐야 할 여지가 있다.

2. Conscience과 본마음

마루야마와 같은 견해와 관련해 후쿠자와가 의외로 유교적인 윤리관을 계승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지적들이 요즘 들어 나오고 있다. 이런 지적들은 결코 후쿠자와 평가와 관련해 기발한 주장을 할 요량인 수정주의revisionalism 입장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종래의 정치사상사연구가 종종 과도하게 단순화된 유교관에 의존해 있어 그것이 후쿠자와 사상의 중층성을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학문적인 반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6) 

그렇게 볼 수 있는 몇 가지 단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문명론 개략』 제6장 ‘지덕의 변’이라는 장에서 후쿠자와는 ‘지혜’와 ‘덕의(德義)’의 작용에 대해 논하고 있다. 여기서 후쿠자와는 ‘지혜’와 ‘덕의(德義)’가 일본에서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은 탓에 ‘지혜’는 물질적 이익, ‘덕의’는 일상도덕이라는 잘못된 구분이 행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덕의란 후대로 갈수록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개벽한 직후의 덕과 오늘날 덕이 다르지 않다.’라고 하면서 ‘덕의’의 보편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러한 덕의의 하나로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들면서 ‘극기란 개인적인 욕심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고 복례란 자신의 본마음으로 돌아와 분수를 아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후쿠자와 연구의 일인자인 마츠자와 히로아키가 지적하고 있듯이 ‘극기’를 ‘본마음’과 연관 지어 이해하는 태도는 『논어』 안연편의 ‘顏淵問仁。子曰。克己復禮爲仁。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역자주: 안연이 어느 날 공자께 인(仁)을 여쭈었는데,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오는 것이 인이다. 만일 사람이 하루라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온다면 그 영향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인으로 돌아올 것이다.)’에 주희가 주석을 단 ‘仁者, 本心之全德(역자주: 인은 본래 마음이 갖고 있는 온전한 덕)’(주희 『논어집주』 6권)을 답습한 것이다.(7) 후쿠자와는 ‘본마음’에 의한 강한 자기규율을 보편적인 도덕 가치로 본 듯하다.

더욱이 후쿠자와는 ‘본마음’이라는 말을 인간의 본질적인 도덕적 의지라는 의미로 간주했다. 예를 들어 『학문을 권함』(1874)에서 ‘사람에게는 각각 지성(至誠)의 본마음이 있나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Francis Wayland, 『The Elements of Moral Science, Boston』(1835) 가운데 “the Authority of Conscience”라는 절의 개요이다. 본마음은 영어인 conscience의 번역이기도 하다. ‘지성(至誠)’이나 ‘본마음(本心)’은 주희가 종종 사용하는 개념으로, 미리 하늘이 사람에게 심어 둔 도덕성을 가리킨다. 가령 『논어』 제18편 미자(微子)의 ‘孔子曰, 殷有三仁焉(역자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은나라에 어진 사람이 셋 있었다.)’라는 구절을 주희는 세 사람의 인(仁)의 드러남이 서로 달라도 그것은 모두 본래적인 덕의 발현이라고 주해하였는데, 이런 해석에 ‘지성’, ‘본마음’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후쿠자와는 주희의 사상에서 자신의 도덕적 향상을 위한 노력과 자기규율의 장려라는 부분을 공감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겠다.

또 『문명론의 개략』 제6장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기술되어 있다.

덕이란 덕의라는 것으로 서양말로는 ‘모랄(=moral)’이라고 한다. ‘모랄’이란 마음가짐을 말한다. 마음으로부터 만족하여 집안 구석진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만족한다.’라는 표현은 주희의 『대학장구(大學章句)』의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如惡惡臭, 如好好色, 此之謂自謙. 故君子必愼其獨也(역자주: 이른바 그 뜻을 성실히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 것이니, 악을 미워하기를 악취를 미워하는 것과 같이 하며, 선을 좋아하기를 호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하니, 이것을 자겸(自慊)이라 이른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홀로를 삼가는 것이다.’에서 유래하였다. (여기서 ‘慊’은 ‘謙’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도덕적인 판단이 직감적, 본능적인 판단이나 다를 바 없도록 내면화된 상태를 가리킨다. ‘집안 구석진 곳에서 부끄러움이 없다.’라는 표현은 『시경(詩經)』 및 『중용(中庸)』에서 유래했고,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는 자기 방에서도 삼가는 것을 의미한다.(8) 후에 『일본남자론(日本男子論)』(1888년)이란 저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특히 사덕(私德)[일상적인 도덕]이 확실하여 이른바 ‘집안 구석진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라고 하는 의(義)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으로 그 덕의를 잘 닦아, 집안에서도 부끄러울 일 없고 문밖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는 자라면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재능이 있거나 없거나 관계없이 자신의 행동거지의 중요성을 생각해서 스스로 확신을 갖는다. 이를 군자 몸의 지위라고 한다. 서양말에 디그너티[=dignity]라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이 dignity라는 개념은 J. S. Mill, 『On Liberty』의 Chapter 2 「Of the Liberty of Thought and Discussion」을 참조한 듯 보인다. 밀은 여기서 공공적인 책임의식이 신앙이나 교회와는 관계없으며, 고대 그리스·로마에 연원을 두고 있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 동시에 사적인 도덕에 대해서도 그 연원을 purely human한(즉 종교적인 권위에 기초한 것이 아닌) 것에서 찾을 수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사적인 도덕 가운데 하나가 personal dignity이다. 즉 후쿠자와는 주희가 중히 여긴 용어와, 서양의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양심의 자유라는 권리로서 지켜져야 하는 conscience 및 dignity와의 공통점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를 사용해 기술한 셈이다.

이렇게 보면 후쿠자와는 내면의 의지로서 자기 욕망을 억제하고 사회적인 활동력을 강화하며 또 그 의지력 자체를 강화해 가는 것의 중요성을 주창하고 있지만, 그것에 관해 주자학적인 수양론으로부터도 많은 부분을 흡수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기 의지에 대해서는 그렇다 하더라도, 타인의 의지도 그러한 것으로서 존중할 수 있을까? 혹은 서양사상의 일반원칙인 right과 같은 관념으로 타인의 ‘본마음’을 보호할 수 있을까? 후쿠자와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살펴볼까 한다.

<주>
(1)『복옹백화(福翁百話)』, 제34장(1897). 이하 후쿠자와 주요 저작의 인용은 게이오의숙대학의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메이지 시기 간행본에 의한다. 단어로 검색 가능하므로 원어 인용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는 접속해 보기를 바란다. http://project.lib.keio.ac.jp/dg_kul/fukuzawa_about.html 2014년 5월 11일 접속 확인.
(2)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지지신보사, 1899). 게이오의숙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읽을 수 있지만, 마츠자와 히로아키 주해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福翁自伝)』(『신 일본고전문학대계 메이지편 10』, 이와나미서점, 2011)이 상세한 주석이 달려있다. 이 책에서는 14쪽 이하. 또 실제로는 소라이학도 카메이학도 시작(詩作)을 경시하지 않는다.
(3) 『학문을 권함』 제4편 (1874).
(4) 『문명론 개략』 (1875), 권5.
(5)  마루야마 마사오 「후쿠자와 유키치의 유교 비판」(1942), 마루야마 마사오저, 마츠자와 히로아키편 『후쿠자와 유키치의 철학 외 6편』 이와나미문고, (2001)에 수록.
(6) 가장 최근 연구로는 와타나베 히로시 「유교와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 협회편 『후쿠자와 유키치 연감』 39 (2012)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실제로 후쿠자와가 사사한 한학자 히로이시 쇼잔에 대한 연구와 에도시대의 사상 흐름과의 관계를 고찰한 연구도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7) 전게서, 마츠자와 히로아키 주해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보충 주해 17.
(8) 마츠자와 히로아키의 『문명론 개략』 주해에 의함. 마츠자와 히로아키 주해·후쿠자와 유키치 저 『문명론 개략』 이와나미문고(1995), 329쪽 이하.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6, 2014년 6월, 마츠다 고이치로(松田宏一郎), 일본 릿쿄대학 법학부 교수; 고양국제고등학교 교사 윤채영 옮김) 

 
   
 

사상노트/고전다시보기
  • 사회과학
  • 인문학
  • 자연과학
  • 논픽션
  • 픽션

월간 베스트 게시물

공지사항
  • 1 아포리아 북리뷰(Aporia Review of Books)
  • 2 궁금하신 사항은 언제든지 문의하여 주시기 바…
이용약관| 개인정보 취급방침| 사이트맵

Copyright (c) 2013 APORIA All rights reserved - www.apori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