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5-06-03 14:28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3)]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리엔탈리즘 (2)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147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3)] 후쿠자와 유키치와 오리엔탈리즘 (2)
 
“배신, 엄청난 말이다. 무엇이 배신인가? 한 사람이 조국과 친구, 연인을 배신했다고 하려면 먼저 그와 그들 사이에 도덕적 유대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 조지프 콘래드, 『서구인의 눈으로』(1911) 
 
1. '탈아론'은 아시아에 대한 배신인가?
 
'탈아론'(1885)이라는 신문 논설(1)때문에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을 진보한 서양의 입장에 두고, 그 입장에서 아시아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에서 1950년대에 유포되었는데, 당시 일본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나 중국 공산당 정권에 동조했던 역사가 사이에서는 후쿠자와가 ‘부르주아’ 역사가일 뿐 아니라 제국주의를 고취하는 자라고 하는 비난이 항상 불거지곤 했다.
 
그러나 뒤에서 기술하겠지만 오늘날 사상사 연구에서는 '탈아론'을 썼던 당시의 후쿠자와의 의도에 대해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지 않으려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오늘날 일본에서도 전문적인 사상사 연구자가 아닌 사람이 코멘트를 할 때나 통사적인 근대사를 기술할 때에는 종전과 같이 단순히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를 멸시한 사람이라는 견해를 보이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다. 뿐만 아니라 한국이나 중국 등지에서는 예전에 일본이 생산된 학설만을 그대로 받아들여 그것이 최종적인 후쿠자와의 이미지로 굳어져 재이용되고 있는 경향도 있다. 또 고교 교과서 중에는, 좀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저작 가운데 '탈아론'만을 소개하는 교과서도 있다.
 
이미 지난 회에 기술한 바와 같이 나는 후쿠자와의 중국관, 조선관 및 그가 일본의 옛 제도에 관해 가졌던 엄격한 비판적 사유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했다. 내 생각에 후쿠자와가 1880년대에 비판했던 아시아적인 결점 가운데에는 오늘날 우리들로서도 옹호할 수만은 없는 것들이 있다. 후쿠자와가 아시아의 전통적인 정치 제도나 사회 질서에 점수를 박하게 준 점에 관해 그를 변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또 1880년대 후쿠자와 유키치나 그가 이끌었던 신문 <지지신보時事新報>의 사설에 실린 중국론, 한국론 가운데 그 나라들의 (권력자만이 아닌)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후쿠자와 유키치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사상적으로 지도했다는 견해만은 틀렸다고 해야겠다. 이제 지난 회에 이어 후쿠자와에게 아시아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살펴볼까 한다.
 
우선 오늘날 연구 수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을 살펴보자. '탈아론'은 1884년 12월 김옥균 등이 계획했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 간 이후, 그들 개화파에 대해 혹독한 처벌이 가해지자 그 처벌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쓴 논문이다. 이 당시 <지지신보>에는 그와 관련된 조선론이 몇몇 실리기도 했지만, 최근에 이다 신야井田進也, 히라야마 요平山洋 등이 <지지신보>의 무기명 사설 가운데 사용된 어휘나 문체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탈아론'은 최종적으로는 후쿠자와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것의 초고로 보이는 것은 다카하시 요시오高橋義雄라는 게이오의숙 출신의 기자가 쓴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지지신보>에 실린, 조선 및 청국 정부 비판 글의 다수는 신문에 표기된 필자와 실제 집필자가 달랐다. 그래서 게이오의숙이 편찬한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에 수록된 <지지신보>사설 가운데 몇몇은, 후쿠자와가 쓴 것으로 되어 있더라도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야스카와 주노스케安川寿之輔와 같은 사람은 이다 신야, 히라야마가 요가 수행한 <지지신보> 사설 집필자 확인 작업이 사실은 후쿠자와를 미화하려는 의도를 깔고 있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쿠자와를 침략주의자 또는 천황제 옹호론자와 동일시하면서 그를 사악한 사상가로 묘사하는 야스카와 역시 사상가로서의 후쿠자와를 그다지 깊이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2)
 
이 글에서 나의 관심은 후쿠자와가 아시아를 멸시했는지가 아니라, 후쿠자와에게 이른바 ‘아시아적 문제’로 비춰진 결점이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후쿠자와의 이상과는 어떻게 상충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2. '탈아론'에는 무엇이 쓰여 있는가?
 
먼저 '탈아론'의 중심 주장을 확인해둘까 하는데 다음에서 나는 그것의 핵심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현대어로 고쳐 인용해 보겠다. 
 
[서양의 새로운 문명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 우리 일본의 사인士人은 국가라는 것을 중히 여기며, 정부는 국가보다 가볍다고 하는 큰 뜻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리고 다행히도 황실의 신성존엄에 의지하여 도쿠가와 구舊정부를 타도하고 신정부를 세워, 나라 안의 관민이 따로 없이 합심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취하며, 단지 일본의 구습을 벗어버릴 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 가운데서도 새로이 하나의 축을 세워, 주의 주장으로서 정할 것은 그저 ‘탈아脫亞’ 두 글자이다. 
 
우리 일본의 국토는 아시아에서도 동쪽에 있지만 그 국민의 정신은 이미 아시아의 고루한 태도를 벗고 서양 문명으로 옮겨 갔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웃에 중국이란 나라와 조선이란 나라가 있다. 이 두 나라의 인민은 옛날부터 아시아적인 정교풍속政教風俗에 의해 길러진 점에서는 우리 일본 국민과 다르지 않지만은, 인종적으로 달라서 그런지, 같은 정교풍속 가운데 있으면서도, 유전 및 교육 방식이 달라서 그런지, 일본 ․ 중국 ․ 한국 세 나라를 서로 비교해 보면, 닮기는 중국과 한국이 서로 닮았으되, 두 나라가 일본과 닮기는 그보다 훨씬 덜하여서, 이 두 나라는 나라의 백성들이나 나라 전체로서나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르고, 사람과 사물의 교통이 편리한 세상 가운데 살면서 문명 사물을 보고 들음이 없지 않건만, 그 보고 들음으로써 마음을 움직이지를 못하고, 그저 고풍스런 구습에 연연해하는 마음은, 수천 년 전과 달라진 바 없이, 하루하루 새로워지는 세계의 활약상 앞에서도, 교육이란 하면 그저 유교와 인의예지만을 칭할 뿐, 하나에서 열까지 겉보기에 그럴 듯한 텅 빈 장식만을 둘렀을 뿐, 진리원칙의 식견이 부재한가 하면, 그들이 자랑으로 아는 도덕조차 땅에 떨어지고, 파렴치가 궁극에 달해, 그마저도 오만한 태도로서 일관하며, 자성自省의 염이랄 것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하겠다.
 
이러한 주장에는 지난 회에 소개한 1870년대의 <문명론의 개략>(1875)등에서 보이는 주장을 잇는 부분과 1880년대에 새롭게 추가된 생각들이 혼재해 있다. 그리하여 이것이 이른바 후쿠자와의 아시아관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문명론의 개략>에서는 전제적인 지배가 사회의 다양한 가치나 사상을 억압한 결과 아시아적인 정체가 생겨났다는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 반면「탈아론」에서는 정치적인 억압을 문제 삼기보다는 오히려 각각의 일반인들이 국가에 애착을 갖지 못하는 것과 사람과 사물의 자유로운 이동을 꺼리는 태도가 ‘진보’를 저해하고 있다는 점을 아시아적 결함으로서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탈아론」의 ‘정부는 국가보다 가볍다’는 말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부에 복종할 줄은 알아도 자신에게 국가 구성원으로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점을 아시아적 특성이라고 지적한 표현이다. 정부는 국가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관리하기 위한 기구에 지나지 않으므로 정부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수리하든지 교환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1870년대부터 제기해 왔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제시하는 근거에 변화가 생겨났다. 이제는 정부의 전제를 비판하는 쪽보다는 정부를 감시하는 국민의 책임을 묻는 쪽으로 주장의 근거가 바뀌었다.
 
다음으로 ‘사람과 사물의 교통이 편리한 세상 가운데’라는 표현을 들고 나온 것은 사람, 사물, 정보의 커뮤니케이션 양과 속도가 커짐에 따라 정치적인 권위가 상대화되고 사회 구성원 간의 연결이 다양해졌으며 또 전에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겼던 지역과의 관계가 강화될 수밖에 없음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시아는 커뮤니케이션의 양과 속도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정체한 것이 된다. 이러한 생각을 그는 1879년에 간행된 <민정일신民情一新>이란 저작에서 이미 자세하게 논한 바 있다. 즉 '탈아론'은 <문명론의 개략>의 발상이 <민정일신>의 발상에 의해 보강된 또는 수정된 결과라고 하겠다.
 
후쿠자와가 커뮤니케이션의 밀도와 문명의 진보를 관련짓고 거기에 다시 아시아적 정체를 관련짓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후쿠자와는 1870년대에 읽은 존 스튜어트 밀의 <정치경제학 원리>(1848)에서 어느 정도 힌트를 얻은 것은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다. 밀은 이 저서에서 전신이나 이동, 전송수단의 비약적인 발전이 경제활동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곳곳에 기술했다. 그런가 하면 ‘동양 사회는 아직도 과거의 모습에서 변화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제국은 지금도 여러 가지 면에서 봉건시대 유럽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하겠다.’, ‘동양이나 중세 유럽과 같이 변변찮고 뒤처진 사회’에서는 ‘커뮤니케이션(사람, 사물, 정보의 이동)의 불안정’에 의해 지역마다 물건 가격의 차이가 심하고, 이것이 사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고 했다. 밀은 인포메이션에 정부가 간섭하는 것(과세나 검열)은 곧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3) 커뮤니케이션이 ‘진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발달한 사회를 ‘뒤처진 동양’과 대비하여 묘사한 밀은 사회적 차이를 제도나 문화의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닌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후쿠자와가 여기에 착안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민정일신>에서 후진국으로 언급된 가장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러시아였는데 이는 줄리우스 에카르트의 <현대 러시아>(1870)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밀도 러시아의 후진성을 강하게 비판하였는데 후쿠자와는 여기에 자극을 받아 에카르트의 책을 읽어보려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러시아는 궁정생활은 서양풍이었으나 국민의 생활은 ‘아시아적’인 나라였다. (4) 후쿠자와에게 아시아 문제라면 물론 구체적으로는 청나라와의 관계, 조선과의 관계가 중요사항이었지만, 러시아나 동유럽을 포함한 후진국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탈아론'에서 그 점을 적절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3. 자유와 아시아는 양립가능한가?
 
지금부터 제기하려는 주장이 혹시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로서는 전제정치(아시아의 경우든 서양의 경우든 간에)에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또 법이나 정치적 절차에 관한 규칙에 대해 합의한 한, 그 법이나 정치적 절차가 완전히 실행되도록 노력할 책임은, 그것들에 합의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신 그 법이나 절차에 대해 합의 절차가 부정되는 사회에서는 국민에게 어떤 책임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주적 절차가 없는 국가가 불행한 상태에 빠진다면, 그것은 위정자가 저지른 과오 탓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한 과오가 발생하면 피해자는 항상 일반 국민이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법이나 절차에 관한 합의는 공동체적 감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누구도 신호기나 차선 방향을 오른쪽 왼쪽 어느 쪽에 둘 것인지 애착을 가질 이유가 없는 것과 같다. 기본적으로는 왕권으로부터 말단 관료기구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갖는 책무는 신호기와 같기 마련이다. 고장이 나면 수리하든지 폐기하면 될 일이다. 공동체적 감정과는 어떤 관계도 없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자면,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주장에는 어딘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것은 후쿠자와가 중국이나 조선을 ‘나쁜 벗’이라고 부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쁜 벗과 친하게 지내는 자는 그와 함께 오명을 면하기 어려울 터. 우리는 마음으로 아시아 동방의 나쁜 벗을 사절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기껏 ‘정부는 국가보다 가볍다’라는 논의를 이끌어 내고도, 기능부전에 빠진 도쿠가와 정권을 쓰러트린 것은 ‘국민정신’이라고 기술했다는 점에 있다. 또 중국과 조선이 일본과 다른 정치체제를 선택한 것이 ‘인종’과 ‘유전’ 때문이라고 하는 서술은 왜 나왔던 것일까?
 
사실 후쿠자와는 '탈아론'을 발표하기 4년 전에 <시사소언>(1881)이라는 저작에서 이미 개인만이 아니라 국민이나 계급에도 유전적으로 형성된 집단적 성질이 있다는 견해를 표명한 바 있다. 1870년대의 <학문을 권함>에서는 아메리카 독립선언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본래 평등하며 다만 ‘학문’에 노력을 기울이거나 그렇지 않거나에 따라 차이가 생겨난다는 주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사소언>에서는 ‘교육은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같다고 보고, 그 능력이 발달할 수 있을지는 가르치는 자의 잘하고 못함과 배우는 자의 부지런하고 게으름에 달린 것으로서 장려해 오긴 했으나, 이는 사실 사람들을 유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실제로 인간의 능력에는 항상 타고난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즈음 후쿠자와는 우생학euginics을 주창한 프랜시스 골턴의 <유전하는 천재Hereditary Genius>(1869)을 읽었는데, 여기서 얻은 아이디어를 그는 <시사소언>에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탈아론'의 ‘인종’이나 ‘유전’이란 개념도 여기서 가져온 것이 아닌가 싶다.
 
'탈아론'은 커뮤니케이션의 자유를 존중하고, 그것의 발달을 존중함으로써 진보가 달성된다고 보는 생각에 기반을 두면서, 그것을 억압하는 정부는 퇴장하도록 해야만 한다고 하는 지점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즉 자유와 진보의 조건에 관해서 아시아적인가 어떤가하는 문제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가 왜 종국에는 ‘유전’으로 형성된 ‘국민정신’의 좋고 나쁨이 문명화의 조건이라고 하는 이야기로 이어졌을까? 후쿠자와는 논의의 전반에서는 자유주의를 논하였다가 나중에 유전에 의한 자질결정론으로 후퇴하고 말았던 것일까?
 
이를 후쿠자와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보수화된 탓이라고 단정 지으면 간단하겠으나, 좀 더 들여다보면 한 가지 다른 논점이 떠오른다. 1870년대 말부터 후쿠자와는 국민이 정치적 제도(예를 들면 헌법, 의회, 자유선거, 정권교체)를 단지 편리한 제도로서 승인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애착을 가질 수 있어야만 한다고 했던 것이다. 주로 1876~1877년경의 메모가 실린 '각서'를 보면 그가 국민이 공유하는 ‘믿음’의 기능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점에 착안했음이 드러난다.
 
일본의 인심은 국왕의 성덕聖德을 믿으며, 대신이나 장군의 현명한 재능을 믿으며, 선생을 믿고, 우두머리, 남편을 믿고, 부모를 믿는 단계에 있다. 서양의 인심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정치를 믿고, 법률을 믿으며, 조약을 믿고, 개혁을 믿어, 이른바 스테이트 머쉬네리(state machinery=국가기구)를 믿는 단계에 있다. 한 걸음 앞서거나 뒤서는 차이는 있겠지만, 어느 쪽도 경신혹닉輕信惑溺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큰 차이는 없다.
‘스테이트 머쉬네리state-machinery’라는 말은 스펜서의 <사회학 연구>에 나오는 말이다.(5) 
스펜서는 정치를 이해할 때 정치제도만을 보고 그것을 움직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치 어린아이가 증기기관차를 기계부품의 결합으로 움직이는 것으로만 생각해서 그것을 움직이는 동력의 원리나 연료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후쿠자와가 애장한 책에는 이 언급에 관해 그가 번역한 메모도 함께 남겨져 있다. 아마도 후쿠자와는 국가의 동력은 사람들이 국가에 애착을 가질 수 있을 때 생겨난다고 여긴 듯하다. 따라서 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는 ‘인종’, ‘유전’이란 말을 사용해 ‘당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사용하는 편이 ‘동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기능케 하려면 그 제도에 애착을 갖도록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자주 주장된다. (예를 들면 하버마스의 ‘헌정적 애국심’이 그러한 주장에 해당한다.) 후쿠자와도 1880년대 이후로 애국심을 함양하는 데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탈아론' 주장의 기반이 되는 이론도 여기에 있다. 후쿠자와는 입헌주의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인심’이 그것에 대해 애착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본인의 ‘국민정신’은 특별하고, 아시아의 ‘나쁜 벗’과 인연을 끊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자들이라면 아무래도 후쿠자와와 같은 논리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다음 회는 후쿠자와가 국민의 ‘인심’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고찰해 보려 한다.
 
[주]
(1) 이것은 후쿠자와가 창간한 <지지신보>(1885년 3월 16일자)에 실린 무기명 사설이지만, 사실상 후쿠자와가 집필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이다 신야井田進也 <역사와 텍스트, 사이카쿠부터 유키치까지歴史とテクスト 西鶴から諭吉まで> 光芒社、2001年;히라야마 요平山洋 <후쿠자와 유키치의 진실福沢諭吉の真実> 文春新書、2004年;야스카와 주노스케安川寿之輔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쟁론과 천황론-후쿠자와에 대한 새로운 미화 작업을 비판한다福沢諭吉の戦争論と天皇制論―新たな福沢美化論を批判する> 高文研、2006年.
(3) John Stuart Mill, The Principles of Political Economy, vol. 2, Preliminary Remarks; Id., Book IV Chapter II Section 4; Id., Book V Chapter Ⅳ. 후쿠자와도 ‘인포메이션’이란 말을 <민정일신民情一新>에서 썼다. 松沢弘陽 '<民情一新>  覚え書 : 官民調和論との関係において', <福澤諭吉年鑑> 24号, 1997을 참조.
(4) 글머리에서 인용한 콘래드의 소설은 서구의 눈에서 완전히 이질적인 전제국가라는 문제에 천착했던 지식인의 심리적 괴로움을 묘사한 소설이다.
(5) Herbert Spencer, The Study of Sociology, Chapter XI The Political Bias, London: Henry S. King & Co.), p. 273. 게이오의숙이 소장한 후쿠자와 애장본은 1874년 간행본이다.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 다시보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3, 2013년 11월, 마츠다 고이치로(松田宏一郎), 일본 릿쿄대학 법학부 교수; 윤채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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