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형(1827~1898)은 최제우가 세운 동학 교단을 이어받아 수 십 년 동안 조직의 재건과 확장에 힘쓴 인물로, 그의 사상 역시 기본적으로는 최제우가 정한 ‘하늘님 모심(侍天主)’의 교의를 충실히 계승하였다.
전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최제우에게 하늘님은 우선은 초월적 인격신이었으되, 종교체험을 교리화하는 과정에서 천주의 내재성이 강조되었고 이로부터 하늘님은 인간의 내면에 영(神靈)의 형태로, 자연의 영역에서는 기화(氣化)의 생명운동으로 존재한다는 동학 특유의 신관이 정립되었다. 그런데 이를 계승한 최시형에게서는 하늘님의 초월성보다는 내재성이 더욱 강조되며 특히 자연의 영역에서 생명운동을 하는 하늘님이 크게 부각된다. 바로 이 점으로 인해 우리는 최제우의 저작과 최시형의 어록을 비교해 읽다 보면 마치 최제우는 인격신으로서의 천주를 말하는데 최시형은 동양 전통철학의 천지(天地) 개념으로 회귀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최시형의 천지 개념이 최제우의 천주 관념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음의 짤막한 발언 한마디를 음미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늘은 만물을 짓고 만물 안에 있다. 그러므로 만물의 정기는 하늘이다.”(<해월신사법설> 「기타」, 이하에서는 편명만 기재) 이 말은 ‘초월적 인격신으로서의 하늘님이 만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은 하늘님 자신의 기운이다. 그러므로 만물이 지닌 기운은 곧 하늘님의 기운이다.’라는 뜻이다. 실제로 최시형은 최제우가 세운 하늘님 관념 중에서 자연의 영역에서 기화 운동을 하는 하늘님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사유했을 따름이지,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하늘님을 전통 유학의 비인격적 천지로 되돌린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점에 유의하며 최시형의 어록에 자주 등장하는 천지-부모 관념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것 역시 전통 유학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있지만, 최제우의 ‘하늘님 모심’ 사상을 종지(宗旨)로 삼음으로 인해, 천지-부모에 대한 논의의 중심점이 전통 유학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천지를 부모에 빗대는 것은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중국의 가장 오래된 전적 중 하나인 <상서>에 이미 “천지는 만물의 어머니”(「태서」)라는 말이 보이고, <역경>을 해설한 「설괘전」에도 “건(乾)은 하늘이다. 그러므로 아버지라 칭한다. 곤(坤)은 땅이다. 그러므로 어머니라 칭한다”라고 하고 있다.
왜 옛 사람들은 이렇게 천지를 부모에 빗대었을까?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천지와 만물은 모두 자연에 해당되지만, 옛 사람들에게 이 둘은 분명히 구분되었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존재는 그 자신의 힘만으로는 태어날 수도 없고 성장할 수도 없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다른 생명의 도움을 받아야만 비로소 탄생·성장·성숙이 가능하다. 옛 사람들은 모든 자연존재의 탄생과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를 바로 천지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천지는 만물을 생육하고 만물은 천지에 의해 생육된다고 간주하였다.
최시형은 이런 동양 전통철학의 천지-부모 관념을 계승하고 있다. “하늘이 덮고 땅이 실으니 덕(德)이 아니고 무엇인가? 해와 달이 비추니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천지부모」) 하늘과 땅에서 생명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해와 달이 교대로 밝게 비추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과 땅, 해와 달은 생명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사유할 줄 아는 인간에게 그것들은 ‘덕’을 지닌, ‘은혜로운’ 존재로 다가온다. “사람은 하늘을 떠날 수 없고 하늘은 사람을 떠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한번 호흡하고 한번 움직였다 정지하며 한번 입고 먹는 것은 사람과 하늘이 함께하는 기틀이다”(「천지부모」) 사람과 하늘, 즉 사람과 대자연은 한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대자연은 사람이 호흡할 수 있는 공기, 운동할 수 있는 힘,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재료들을 제공해준다.
동양의 전통철학, 예컨대 주역은 천지, 즉 대자연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이 생존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생명운동을 하는 존재라는 점을 사유할 수 있었으나, 거기에서 출발해 인간과 천지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내적인 생명의 신진대사를 행하는지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주역>의 저자들은 성인의 문화 창조 및 도덕적 교화가 천지의 생명운동과 상응관계에 있다는 인간과 자연의 외적인 관계에 대한 반성에 주력하고 있다. 예컨대 <주역> 「비」괘에 대한 「단전(彖傳)」의 해설 중에는 “강한 것과 부드러운 것이 교차하는 것은 하늘의 꾸밈(天文)이다. 꾸며 밝힘으로써(文明) 멈추는 것은 사람의 꾸밈(人文)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대자연이 음양의 기운으로 천상에 그려 넣는 천문과 인간이 자신의 기운으로 인간사회에 그려 넣는 문화적 창조물이 둘 다 창조적 활동의 결과라는 점에서 상응하며, 이로부터 문화 창조가 자연의 운동을 계승한 것이라는 점을 논증하려는 대목이다. 또 예컨대 <주역> 「계사전」에는 자연의 운동이 최종적으로는 도덕적 교화에 의해 완성된다는 발언도 보인다. “한번 음이 되었다 한번 양이 되는 것을 도라고 한다. 그것을 계승하는 것은 선(善)이고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성(性)이다.” 음양의 작용이 대자연의 만물을 생육하는 방법이라면, 인간의 문화 창조는 이러한 자연의 운동을 계승한 좋은 것, 즉 선이지만, 문화 안에는 여전히 반성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이 대자연의 운동 목적을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도덕적 역량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인간의 문화 창조 혹은 도덕적 교화와 자연의 운동이 지닌 외적인 상응관계에 대한 이러한 사유가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은연중에 인간과 대자연의 내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은폐하는 작용 또한 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 점은 최시형의 사유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
최시형은 인간과 대자연의 생명을 매개로 한 내적이고 본질적인 관계를 ‘먹음(食)’의 의미에 대한 사유를 통해 명쾌히 규명한다. 예컨대 음식을 매개로 자연과 인간이 내적으로 얽힘을 밝히고 있는 아래와 같은 발언이 그렇다.
사람은 음식에 의지해 그 생성을 돕고 하늘은 사람에 의지해 그 조화를 드러낸다. 사람이 호흡하고 움직였다 정지하며 굽혔다 펴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것은 모두 하늘님의 조화의 힘이니, 하늘과 사람이 함께하는 기틀은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 (「천지부모」)
사람은 하늘님이 자연의 영역에서 자신의 기운으로 내어주는 음식을 먹어야만 계속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획득한다. 그렇게 획득된 생명력으로 사람은 숨 쉬고 몸을 움직여 일하며 옷 입고 밥 먹는 활동을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대자연이 준 음식을 먹고 획득한 생명력을 노동력으로 전환시켜 대자연의 만물 생성을 돕는다. 대자연은 음식으로 사람의 생명운동을 돕고, 사람은 농사와 같은 생명노동으로 대자연의 생명운동을 돕는다.
3.
최시형이 노동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신진대사를 말하지만, 그가 훨씬 더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대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대자연이 인간의 생존과 활동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바로 이 점에서 최시형의 생각은 마르크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바로 천지를 부모에 유비하던 동양 전통철학의 관념을 ‘천지의 포태’, ‘천지의 젖’ 등의 어머니-자연으로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태이다. 사람이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의 젖을 빠는데 그것은 곧 천지의 젖이고, 자라서는 오곡을 먹는데 그것 또한 천지의 젖이다. 어려서 먹는 것이 어머니의 젖이 아니고 무엇이며, 자라서 먹는 것이 천지의 곡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천지부모」)
최시형이 동양 전통철학의 천지-부모 관념을 계승하고 있기는 하지만, 하늘님 혹은 대자연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그가 생각한 것은 하늘-아버지라기보다는 땅-어머니의 이미지였다. 인용문에서 천지를 ‘포태’에 비유하고, 천지가 주는 오곡을 ‘젖’으로 비유하는 것이 그러한 생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모가 뱃속에 형성된 얇은 막으로 태아를 감싸고 있듯이 모든 사람은 천지라는 보호막 안에서 살아간다. 산모가 끊임없이 그 얇은 막 안으로 태아의 성장을 위한 영양분을 공급해주듯이 천지 또한 자신의 보호막 안으로 끊임없이 먹거리를 제공해준다. 물론 산모의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는 엄마의 젖을 빤다. 하지만 엄마의 젖도 궁극적으로는 천지에서 나온 것이다. 어머니 역시 천지가 제공해주는 오곡을 먹어야만 젖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어머니가 물리는 젖은 곧 천지가 주는 젖이다. 또 아이가 성장해 먹기 시작하는 오곡 역시 어머니-자연이 사람에게 물리는 젖인 것이다.
이렇게 최시형은 사람이 천지가 물리는 젖, 즉 오곡을 먹고 자란다고 이야기했으나, 엄밀히 말해 천지가 먹이는 존재는 인간만이 아니다. 천지는 모든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 자신의 젖을 먹인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찌 사람만이 입고 먹겠는가? 해도 입고 입으며 달도 먹고 먹는다”(「천지부모」)라고 말하기도 했다. 먹음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우주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똑같이 천지가 주는 젖을 먹는 생명 가운데 인간이 가장 진화한 존재인 까닭과 가장 빼어난 존재임으로 해서 가져야만 하는 우주적 책임의식을 지적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만물 중에서 가장 영민한 자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만물의 주인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것만으로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오곡백과의 자양분을 받아 살아간다. 오곡은 천지의 젖이니 사람은 이 천지의 젖을 먹고 영민한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기타」)
서구적 사유의 전통에서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간주했던 것은 아니다. 동양의 사유 전통에서도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생각은 지배적이었다. 물론 동양 전통철학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근거를 인간이 도구적 존재라거나 이성적 존재라는 명제로 명확히 제시하지는 않았다. 유학자들의 경우,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의 특징으로 흔히 거론했던 것은 인간만이 예의염치 같은 것을 안다는 점이었다. 즉 전통유학에서는 인간이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다른 자연존재와는 구분되며, 따라서 예의염치를 모르는 금수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런 전통유학과 비교해보면, 사람이 가장 영민하다거나 사람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위 발언에 담긴 최시형의 인간에 대한 우월의식은 그리 크지 않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최시형은 ‘모든 사람이 하늘님을 자기 몸 안에 모신 존귀한 존재’라는 최제우의 가르침을 자연의 영역으로까지 확대 해석하여 모든 자연존재가 다 하늘님을 모신 귀한 존재임을 역설했다. 모든 자연존재가 하늘님을 모신 귀한 존재로 선언될 수 있는 근거는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모든 생명 안에는 하늘님의 기운, 즉 어머니-자연의 기운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유학에서 말하듯이 인간이 모든 생명 중에 가장 영민한 존재이고, 이로 인해 만물의 주인 행세를 해온 점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최시형은 그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바로 이어지는 발언에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는 전제조건을 따진다. 그러면서 인간이 만물의 영장일 수 있는 것 또한 인간이 오곡백과라는 다른 존귀한 생명을 먹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근거를 제시하여 만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감을 자극하는 대신, 그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어머니-자연에 대한 경외와 만물에 대한 책임의식을 사람들이 가져야 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최시형은 동양 전통철학의 천지-부모 관념을 계승하였지만, 최제우의 ‘하늘님 모심’ 사상을 종지로 삼아 이것이 자연의 영역에서 갖는 의미를 깊이 사유함으로써 인간과 천지의 외적인 상응관계를 논하는 데 머물러 있던 전통 유학과는 달리, 논의의 중심점을 인간과 대자연의 생명을 매개로 한 내적인 관계로 옮겨 놓을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는 최시형의 천지-부모 공경의 윤리의식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9, 2014년 9월, 황종원, 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