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출퇴근길이라 할지라도 한창 붐빌 때 오가는 것과 한가할 때 그러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크다. 무엇보다도 몸으로 느끼는 피로도가 다르다. 앉기는커녕 비좁은 공간에서 이리 저리 한참을 부대끼다 보면 십중팔구 녹초가 되기 일쑤다. 그런데 분명 한가한 때에 출퇴근을 했건만 갓 ‘지옥철’을 빠져나온 듯한 피로감이 밀려들 때가 있다. 출퇴근 길 내내 핸드폰 통화 소리와 싸우며 왔을 때이다.
사용자를 변화시키는 미디어
캐나다의 언론학자 마샬 맥루언은 미디어(media)의 발달을 ‘인간의 확장’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미디어는 단순히 ‘어떤 작용을 다른 곳으로 전해주는 도구’ 역할에 머물지 않고, 뭔가를 실현하는 한결 능동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사람의 힘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미디어에 의지하여 수행하곤 한다. 망치라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여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는다. 또 아주 작은 것이나 꽤 멀리 있는 것은 현미경이나 망원경에 의지하여 손바닥 보듯 훤하게 들여다본다. 단지 어떤 힘이나 작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들로 인해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단순히 도구가 아니라 미디어라는 것이다.
연장이나 기기뿐만이 아니다. 핸드폰이나 인터넷 등도 틀림없이 미디어이다. 전파에 목소리를 실으면 수천 리 떨어진 이와 정담을 나눌 수 있게 되고, 인터넷에 접속하면 정보의 바다라는 사이버 공간을 휘젓고 다닐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고속철도가 깔림으로써 전국은 일일 생활권이 되었고, 비행기가 발명되고 날로 진보됨으로써 ‘지구촌’이 형성되었으니, 주변에 널린 각종 교통 수단 역시 어엿한 미디어인 셈이다. 이처럼 미디어를 통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획기적으로 확대되었으니 미디어는 곧 ‘확장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맥루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디어는 단순히 무엇인가를 실현하는 데에 사용되는 도구에 머물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자기 의사대로 미디어를 선택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미디어를 맘대로 부린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주의하지 못해서 그렇지 미디어는, 자신이 지닌 ‘메시지message’를 은연중에 삼투시킴으로써 사용자를 변화시킨다고 한다.
가령 동일하게 시각을 기반으로 할지라도 사진이라는 미디어와 만화라는 미디어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르다는 것이다. 사진은 화면 전체에 어떠한 정보를 가득 담고 있다. 그래서 사진에서는 여백조차도 뭔가를 전해준다. 이에 비해 만화는 상대적으로 듬성듬성하다. 같은 크기의 사진보다 보는 이에게 전해주는 정보의 양도 그만큼 현저하게 적다. 따라서 만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몰두하게 된다. 주어지는 정보량이 적은 탓에 독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내용 파악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여 아무리 주위가 산만한 아이일지라도 만화를 보는 순간만큼은 집중력 있는 아이로 변화된다. 만화라는 미디어가 사용자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용자를 소외시키는 핸드폰
그렇다면 미디어로서의 핸드폰은 사용자를 어떻게 변모시킬까? 핸드폰은 청각을 기반으로 하는 미디어이다. 설령 영상통화를 한다고 해도 청각 의지도는 여전히 절대적이다. 송화기를 통해 내 말을 상대에게 보내고, 수화기를 통해 상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다보니 내게 전해지는 정보는 상대의 목소리가 전부이게 된다.
이는 예컨대 같은 청각 기반의 미디어인 라디오와 매우 다르다. 전화에 비한다면 라디오가 청취자에게 전해주는 정보의 양은 무척 많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라디오 청취자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으로 변이돼도 된다. 라디오는, 청취자가 행여 집중하지 않을까봐 정보를 최대한 친절하게 제공하려 노력한다. 하여 청취자는 딴 일을 하면서 띄엄띄엄 들어도 충분히 라디오를 이용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핸드폰은 사용자를 훨씬 더 적극적이고 집중하게 한다. 사용자가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상대의 목소리 하나뿐인지라, 다시 말해 주어지는 정보가 제한적이어서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성공적으로 통화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핸드폰 사용자가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통화에 열중하는 까닭이다. 기본이 안됐기 때문도 아니요, 교양이 없어서도 아니다. 핸드폰이란 미디어가 사용자를 그렇게 변이시킨 결과일 따름이다. 핸드폰은 같은 장소에 있지 않은 쌍방이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미디어다. 마주보며 대화를 나눌 때면 상대의 표정도 살피고 몸짓도 보아가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다. 그만큼 서로에게 전해지는 정보량이 많아진다. 그러나 핸드폰으로 대화를 나눌 때는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상대 목소리가 유일한 정보가 된다. 하여 자연스럽게 상대의 목소리에 집중하게 된다. 한층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해야만 통화가 지속되므로 통화자에게는 주위를 신경 쓸 틈이 없게 된다. 핸드폰이란 미디어가 사용자를 오로지 통화 그 자체에만 몰두하게끔 만든 것이다.
따라서 주위를 배려하면서 핸드폰으로 통화하기 위해서는 ‘깨어 있어야’ 한다. 맥루언도 미디어의 메시지는 ‘부주의한’ 사람에게만 침투된다고 했다. 핸드폰의 편리함에 젖어 그것이 물들이는 메시지를 자각하지 못하면, 어느덧 사람은 핸드폰의 노예가 되고 만다. 겉으로는 사람이 핸드폰이라는 미디어를 주체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것에 포획되어 ‘더불어 사는 존재’라는 인간성을 망각하고 만다.
편하고자 하는 욕망, 그 끝엔…
이렇게 되면 핸드폰과 같은 미디어는 더는 ‘인간의 확장’이 아니다. 철학에서는 인간이 인간성을 제거 당했을 때를 일컬어 ‘소외’라고 한다. 그리고 소외된 인간은 대개의 경우 기계처럼 부림을 당한다고 한다. 핸드폰으로 인해 자신의 인간성을 망각한다는 것은 결국 핸드폰에 자신의 인성을 저당 잡혔다는 것이다. 결국 핸드폰 사용자인 인간이 도리어 휴대폰에게 부림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문명의 이기에 의한 인간의 소외는 꼭 현대문명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다. 2,500여 년 전, 자공(子貢)이란 이가 있었다. 공자의 제자이자 재테크의 달인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였다. 하루는 길을 가다 우연히 밭일을 하던 노인에게 눈길이 갔다. 노인은 꽤 깊은 곳에 있는 샘물과 밭을 오가며, 물동이로 연신 물을 퍼와 밭에 물을 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자공이 수고를 덜면서도 효율을 획기적으로 증진시킬 방안이 있다면서 용두레의 사용을 권했다. 용두레는 낮은 곳의 물을 손쉽게 퍼 올릴 수 있는 농기계였다. 순간 노인의 반응이 의외였다. 껄껄껄, 한 바탕 호탕하게 웃어젖히더니 이렇게 말했다.
기계를 쓰면 마음에 거짓된 일이 생기고, 거짓된 일이 생기면 거짓된 마음도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된 마음이 심중에 있으면 순수함과 깨끗함이 갖춰지지 못하게 되고, 순수함과 깨끗함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정신과 품성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정신과 품성이 안정되지 못하면 도가 깃들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몰라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계를 쓸 줄 몰라서 ‘못’ 쓰는 게 아니라 마음이 더럽혀지고 정신의 평정이 깨질까봐, 그래서 진리와 무관한 삶을 살 듯하여 ‘안’ 쓴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우화는 고지식하기 그지없는 이에 대한 풍자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이 피폐해지는지도 모르고 그저 효율만 추구하려는 윤똑똑이들에 대한 경계였다. 그런데 장자는 왜 기계를 쓰면 거짓된 일이 발생한다고 했을까?
장자가 보기에 사람은 ‘호모 라보란스(homo labolans)’ 곧 노동하는 존재였다. 노동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하여 사람에게서 노동을 분리해내면 사람은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노동을 기계에게 전가하고도 여전히 자신은 사람이라고 믿는다. 사람이기에 기계를 만들어 쓸 줄 안다며 우쭐 대기까지 한다. 이렇게 실제와 의식이 괴리된, 거짓된 사태가 생긴다는 것이다.
사람, 기계 그리고 좀비
그는 또한 이 때문에 사람이 진리와 무관하게 살아간다고 봤다. 노동을 진리 구현과 직결시켰던 것이다. 사람의 천성이 노동하는 존재라면 노동하는 삶은 본성을 구현하는 삶이고, 그런 의미에서 진리를 따르는 삶이 된다는 주장이다. 결국 그는 사람의 조건으로 ‘노동하는 삶’과 ‘진리를 따르는 삶’의 두 가지를 제시했던 것이다. 기계의 사용을 효율의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사람의 본성에서 진리의 구현 문제에 이르는 다차원적 관계 속에서, 복합적 사태로 바라봤던 것이다.
사람이든, 그들이 모여 사는 사회든 간에 어느 하나 복합적이지 않은 게 없다. 인류는 기계의 진화를 인간 능력의 진보로 여기며 육체노동뿐 아니라 정신노동까지 기계로 대체해왔다. 이젠 ‘SMART’ 기능처럼 인간의 정신마저 기계적으로 구현하고, ‘biotechnology’처럼 생명현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기계마저 선뜻 반긴다. 사람다움의 핵심이라는 지식도 인간 내부보다는 기계적으로 구현된 사이버 공간에 훨씬 많이 존재하고, 그곳에선 지식의 연동과 융합이 사람보다 더 민활하게 ‘빛의 속도’로 구현되고 있다. 그렇게 사람다움의 요체를 열심히 기계로 이전한 덕분에 기계는 끊임없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인간처럼 학습하는 인공지능 알파고가 바둑의 세계 최고수를 압도하는 일이 다반사로 여겨지는 시절이 곧 올 것이다.
이미 기계가 기상과 스포츠 뉴스를 생산하고 있으며, 증권시장을 분석하여 리포트 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기계의 진화는 가면 갈수록 더욱 가속될 것이다. 그때 우리 사람에게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 더구나 우리사회처럼, 진리를 내 삶과 무관하게 여기도록 강요되는 곳에서는. 노동과 지성, 생명을 기계가 대신해준다면, 그런 사람 존재를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할까? 안 그래도 마뜩찮았던 좀비 영화가 더욱 보기 싫어진다.
【관련 원문과 해석】
❍ 자공이 남쪽 초나라서 유세하다가 진나라로 돌아올 때였다. 한 땅을 지나다가 한 어른이 밭을 갈고자 굴을 뚫은 후, 샘물로 들어가 물 항아리를 안고 나와 물을 주는 모습을 보았다. 끙끙거리며 힘은 매우 많이 쓰는데 효과는 적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에 기계가 있다면 하루 백 이랑의 밭에도 물을 충분히 줄 수 있습니다. 힘을 매우 적게 쓰면서도 효과는 크니 선생께서는 써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밭을 경작하는 이가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지요?” 자공이 말했다. “나무에 구멍을 내서 만든 기계입니다. 뒤는 무겁고 앞은 가벼운 것으로, 물을 끌어당기듯이 푸는데 마치 물이 끓어 넘치는 것 같습니다. 그 이름은 용두레라고 합니다.” 밭을 경작하는 이는 성난 듯 안색이 바뀌었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우리 스승님께 들었는데, 기계를 쓰면 마음에 거짓된 일이 생기고, 거짓된 일이 생기면 거짓된 마음도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거짓된 마음이 심중에 있으면 순수함과 깨끗함이 갖춰지지 못하게 되고, 순수함과 깨끗함이 갖추어지지 못하면 정신과 품성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정신과 품성이 안정되지 못하면 도가 깃들지 못하게 됩니다. 내가 몰라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공을 얼굴이 붉어지며 부끄러워하며 땅을 굽어본 채로 대꾸하지 못했다.(子貢南遊於楚, 反於晉, 過漢陰見一丈人方將爲圃畦, 鑿隧而入井, 抱擁而出灌, 滑滑淵用力甚多而見功寡. 子貢曰, “有械於此, 一日浸百畦, 用力甚寡而見功多, 夫子不欲乎.” 爲圃者仰而視之曰, “奈何.” 曰, “鑿木爲機, 後重前輕, 挈水若抽. 數如泆湯, 其名爲橰.” 爲圃者忿然作色而笑曰, “吾聞之吾師, 有機械者心有機事, 有機事者必有機心. 機心存於胸中, 則純白不備. 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吾非不知, 羞而不爲也. 子貢瞞然慙, 俯而不對.) - 장자(莊子) 「천지(天地)」.
* 이글은 “핸드폰과 더불어 살기”라는 제목으로 <사과나무> 2006년 6월호에 게재한 글과 “편하고자 하는 욕망, 그 끝엔?”이란 제목으로 <디지털타임즈>(2013년 10월 31일)에 실은 칼럼을 합쳐, 수정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5, 2016년 5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