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노자의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어느 누구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가 함께 하는 상생(相生) 공생(共生)의 화(和), 솔선수범(率先垂範)의 자세, 법을 세분화하여 일일이 통제하려들지 않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자세, 계곡(谷)과 물(水)를 메타포로 하는 자애로움(慈), 나를 버리고 타인의 뜻을 따르는 겸손함(謙), 사리사욕에 집착하지 않는 검소함(儉), 함부로 말하지 않고(不言) 원숭이와 코끼리를 메타포로 하는 신중함(愼), 그리고 오직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걱정하는 순일(純一)함의 덕(德). 그렇다면 노자는 지도자가 이것들만 행하면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노자는 [도덕경]의 첫 장 첫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1: 道, 可道,非常道;名, 可名,非常名。
도라는 것은,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라는 것은, 부를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도덕경]이나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등 모든 옛 중국전적들의 공통점은 바로 연역법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니, 각 전적의 핵심은 첫 장 나아가 첫 구절에 응축되어있다. 그리고 노자는 바로 여기서 常(상)과 道(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중간에 변하면 그것은 노자가 추구하는 도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常(상) 즉 ‘변치 않음’의 구체적인 함의는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 노자는 16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16-5: 復命曰常,知常曰明;不知常,妄作,凶。
복명을 “상(변치 않음)”이라고 하고, “상”을 아는 것을 “명(덕을 밝힘)”이라고 하는데; “상”을 알지 못하면, 경거망동하게 되고, 불행해진다.
복명(하늘이 부여한 천성에 따르는 것)을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일관하는 변치 않음이라고 하고, 이러한 일관하여 변치 않음의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바로 덕을 밝히는 것이다. 변치 않고 일관되게 덕을 밝히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백성들을 평안하게 다스리지 못하여 나라를 장구히 보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에는 나라와 지도자의 끝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16-6: 知常容,容乃公,公乃王,王乃天,天乃道,道乃久。
“상(변치 않음)”을 알면 포용하고, 포용하면 이에 공정하고, 공정하면 이에 군주가 되고, 군주가 되면 이에 하늘에 순응하게 되고, 하늘에 순응하면 이에 도를 따르게 되고, 도를 따르게 되면 이에 장구하게 된다.
변치 않고 일관되게 덕을 밝히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모두를 포용하여 함께 하게 된다. 어느 누구하나 버리지 않고 함께 하게 되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게 된다.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게 되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된다. 공정하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면, 하늘이 부여한 천성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된다. 하늘이 부여한 천성에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되면, 대동의 통치이념을 따르게 된다. 대동의 통치이념을 따르게 되면, 나라를 오랫동안 평안하게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가 강조하는 常(상)의 ‘변치 않는 자세’란 바로 지도자가 위에서 열거한 道(도)의 구성요소들을 변치 않고 일관되게 행하는 것을 뜻하니, 이는 다름 아닌 초지일관의 자세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관련하여 강의를 할 때, 이렇게 설명하곤 한다.
“여러분들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 ‘그래, 이제 부모님이 그토록 원하는 대학에 들어왔으니, 이제 나는 내 방식대로 살 것이다. 이젠 나도 마음껏 삐뚤어질 테다!’라고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이제 나도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으니, 대학생답게 성숙해지고, 보다 진취적으로 살아야겠다.’라고 결심했습니까? 설마하니, 여러분들 중에서 전자와 같은 마음을 가졌던 학생은 없었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처음의 그 마음을, 지금도 오롯이 간직하고 있나요?”
처음부터 일을 그르치고자 하는 이는 없다. 그저 처음의 그 마음가짐을 끝까지 가져가지 못하는 사람들만이 있을 뿐.
하늘이 명한 것을 性(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道(도)라하며, 도를 닦는 것을 敎(교)라고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를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바를 두려워한다. 숨기는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따라서 군자는 그 홀로 있음을 삼가는 것이다. [禮記(예기)] <中庸(중용)>
常(상)은 道(도)를 이루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구성요소이기에, 공자 역시 이처럼 강조했던 것이다. 이제 계속해서 노자가 常(상)에 대해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7-3: 是以聖人常善救人,故無棄人;常善救物,故無棄物。
이 때문에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여, 그러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항상 사물을 잘 바로잡아, 그러므로 버려지는 사물이 없다.
이처럼 태평성대를 이끈 성인들은 어느 누구하나 버리지 않고 함께 했기 때문에, 모든 백성들이 조화롭게 살았다. 또한 하늘이 부여한 천성에 따라 다스렸기 때문에, 만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28-2: 為天下谿,常德不離,復歸於嬰兒。
세상의 개울이 되면, “상덕(영원한 덕)”이 흩어지지 않으니, 순수함을 지니는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모든 백성들이 그를 지지하고 따르게 되면, 변치 않고 영원한 덕이 흩어지지 않고 머무르게 되니, 순일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대동사회가 실현되는 것이다.
참고로 앞에서 설명한 樸(박)과 관련하여서 이제 다음 기록을 살펴보면, 노자가 왜 “순수함”을 이처럼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바로 “사심이 없이 정성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강고>에 이르기를 “갓난아이를 보살피듯 하라.”고 하였다.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여 구하면, 비록 맞추지 못해도, 멀지 않을 것이다. 자식 기르기를 배운 후에 시집가는 이는 있지 아니하다. [禮記(예기)] <大學, 傳(대학, 전)>
28-4: 為天下式,常德不忒,復歸於無極。
세상의 규범이 되면, “상덕(영원한 덕)”이 지나치지 않게 되어, 무극으로 돌아가게 된다.
백성들이 지도자의 뜻을 따르게 되어 세상의 기준으로 삼게 되면, 영원한 덕이 오차 없이 제자리를 찾게 되어, 나라가 오랫동안 평안해진다.
無極(무극)이란 양 끝단으로 치우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결국 德(덕)이라는 것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버리지 않는 즉 中(중: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태도)과 和(어느 하나 버리지 않고 함께 하려는 태도)를 뜻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28-6: 為天下谷,常德乃足,復歸於樸。
세상의 계곡이 되면, 상덕이 이에 충족되어, 가공하지 않은 목재로 돌아가게 된다.
백성들이 모두 그를 자애롭다고 여겨 신뢰하고 지지하여 따르게 되면, 영원한 덕이 이에 조건을 만족하게 되어, 순수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태평성대가 실현되는 것이다.
32-1: 道常無名,樸雖小,天下莫能臣也。
도는 영원히 이름 지을 수 없으니, 질박하여 비록 미약하지만, 세상이 굴복시킬 수는 없다.
태평성대를 이끈 지도자들의 통치이념이라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영원히 정의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인데, 이는 소박하여서 비록 작게 보이지만 세상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큰 도는 두루 미치기 때문에, 그가 지배할 수 있다. 만물은 그에 의지하여 발생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을 이루지만 있다고 일컫지 않는다. 만물을 기르지만 스스로 주재한다고 여기지 않고, 늘 욕망이 없으니,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다. 만물이 따르지만 스스로 주재자가 되지 않으니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태평성대의 통치이념은 모든 만물에 퍼져있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들을 다스릴 수 있다. 만물은 이러한 통치이념에 기대어 각자의 천성에 따르기 때문에 원망이나 불평하지 않고, 나라를 오랫동안 평안하게 유지하지만 자신의 공로라고 자처하지 않는다. 세상 만물을 이끌지만 각자의 천성에 따르는 것일 뿐이기에 자신이 이끈다고 자만하지 않고, 오직 삼가고 노력하여 변치 않고 늘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미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세상이 모두 태평성대의 통치이념을 따르지만 또 자기가 통제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진정 위대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7-1: 道常無為而無不為,侯王若能守之,萬物將自化。
도는 항상 행하는 바가 없으나 행하지 않는 바도 없으니, 천자와 제왕이 만약 이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장차 스스로 변화할 것이다.
태평성대를 이끈 지도자들의 통치이념은 항상 백성들이 원하는 바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억지로 그 천성을 거스르지 않는 “무위”로 다스리는 것이다. 따라서 언뜻 보았을 때 특별히 하는 것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 천성을 이해하고 삼가여 겸손하게 노력하는 것이니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지도자가 만약 이러한 대동의 통치이념을 실천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지도자를 믿고 따르게 되어 순박해질 것이다.
46-3: 禍莫大於不知足,咎莫大於欲得。故知足之足,常足矣。
재앙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환난은 얻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만족의 넉넉함을 알면 영원히 넉넉하다.
지도자가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지 않으면 전쟁과도 같은 엄청난 재앙을 일으키게 되고, 자꾸만 사리사욕을 탐하면 결국 백성들이 등을 돌려서 그 자리조차도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지도자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욕심을 가지지 않게 되면, 백성들이 믿고 따르게 되어 오랫동안 변치 않고 나라를 평온하게 다스릴 수 있다.
배움에 종사하면 날로 늘어나고, 도에 종사하면 날로 줄어든다. 줄어들고 또 줄어들어, 무위에까지 도달하는데, 무위하지만 행하지 않은 것이 없다. 세상을 다스림에 늘 일을 만들면 안 되니, 일을 만들게 되면, 세상을 다스리기에 부족하다.
작은 앎이나 얕은꾀를 추구하게 되면 점점 백성들을 통제할 궁리가 많아지게 되어, 더 많은 제도를 만들고 강화하여 통제하려 든다. 하지만 태평성대의 통치이념으로서 다스리면, 백성들을 통제하는 제도가 갈수록 필요 없게 된다. 스스로 그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기만 하면 되므로, 명령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되어 결국 무위의 통치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위의 통치는 천성에 따라 스스로 그러하도록 하는 것이라서, 지도자가 행하는 바가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항상 삼가여 노력하는 것이라서 행하지 않는 바도 없다. 이처럼 억지로 작위하여 제도로 백성들을 통제해서는 안 되니, 억지로 통제하려 들면 백성들이 지도자를 따르지 않는다.
49-1: 聖人常無心,以百姓心為心。
성인은 늘 의지가 없어서, 백성의 마음을 의지로 삼는다.
태평성대를 이끈 성인들은 주관적인 생각이나 의지를 주장하지 않고, 백성들의 뜻을 깊이 헤아려서 실천하였다. 이처럼 백성이 바라는 바를 본인이 바라는 바로 삼아서 그들의 뜻에 따르는 것이 바로 주어진 천성에 따르는 것이다.
51-3: 道之尊,德之貴,夫莫之命而常自然。
도가 존숭 받고, 덕이 귀히 여겨지니, 무릇 명령하지 않고 항상 스스로 자연스럽게 한다.
이처럼 태평성대의 통치이념이 숭상을 받고 순일한 덕이 중시되니, 성인들은 함부로 말이나 명령을 하지 않고, 만물이 항상 타고난 천성에 따라 스스로 그러하도록 한 것이다.
52-6: 用其光,復歸其明,無遺身殃,是爲習常。
그 광채를 발휘하고, 그 밝음으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재앙을 남기지 않으니, 이것이 변치 않음을 익히는 것이다.
모든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들의 기세를 조화롭게 하여 발휘하고, 순일한 덕을 밝혀서 천성에 따라 다스리게 되면, 백성들이 그 지도자를 믿고 따르게 되어 오랫동안 나라를 평안하게 다스릴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변치 않고 오랫동안 평안하게 나라를 다스리는 태평성대의 통치이념을 따르는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노자 다시보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2, 2016년 2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