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인의 지적 오만 때문일까? 우리는 ‘말놀이’ 곧 수수께끼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누군가 “어디에서나 똑같으면서, 어디에서도 똑같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철학의 형식인 수수께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인 클레아르쿠스는, 수수께끼가 한때 철학의 주제를 다루는 형식이었음을 증명하였다. 가령 우리 인간은, 아이가 크는 모습을 보다 문득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고는 한다. 곧 시간이란 것이 있음을 인지한다. 그런데 우리가 인지한 것이 정말 시간, 맞을까?
막상 대답하려면 막막해진다. 자궁에 있는 태아가 엄마를 볼 수 없듯이, 시간 속에 존재하는 우리는 사실 시간 그 자체를 볼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그저 시간이 흐른 ‘흔적’을 인지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인지하지 못하는 시간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뭔가를 정의할 때 상용하는 수법의 하나는 그것의 가장 본질적 속성을 근거로 취하는 방식이다. 사람을 정의한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존재와 사람을 결정적으로 구별해주는 속성을 들어, 이를테면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다” 식으로 정의한다는 것이다.
시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시간만이 지니는, 다른 존재에는 없는 그런 속성(예컨대 이를 ‘x’라고 하자)을 찾아내어 “시간은 x(적인 것)이다” 식으로 정의하면 된다. 그렇다면 이제 그 x가 무엇인지만 알아내면 되는 셈이다. 자, x에 해당될 수 있는 것으로 무엇이 떠오르는가? 어쩌면 시간 그 자체를 인지해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역시 그저 막막하기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유의 문제를 사랑하는 이들인 철학자들은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여 나름의 답을 내놓곤 한다. 하여 클레아르쿠스가 내놓은 답변이 바로 ‘어디에서나 똑같으면서 어디에서도 똑같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식의 문답이 꽤나 이른 시기부터 행해졌고, 수수께끼는 그런 문답의 언어적 형식이었음을 주장했다.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어린아이의 영혼으로 장난을 쳐 인간 인식의 경계 그 너머를 넘나들었다. 하여 그들에게 수수께끼는 결코 가벼운 말장난이 아니었다. 스핑크스와 마주친 행인은, 스핑크스가 내는 수수께끼를 푸느냐 못 푸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렸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게 수수께끼 식의 문답은 ‘철학하는’ 형식이었다. “시간이란 이런 것이야.”며 훈계조로 주입하기보다는, “가기만 하고 오지 않는 것은?” 하며, 호기심을 자극하는 철학하기의 놀이었다.
정신의 놀이인 수수께끼
비단 철학적 주제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저 옛날 철학이 아직 신화로부터 독립되지 않았을 시절, 인류는 심오하기 그지없는 우주론적 물음을 수수께끼의 형태로 제기했다. 생겨먹기를 자기가 어디에, 왜 있는지를 파악하지 못하면 해소할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되어 있는지라, 인간은 존재의 근원부터 우주의 비밀에 이르기까지,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수수께끼라는 형식에 담아 표출했다.
까마득한 옛날, 누가 있어 그 때의 일을 전해주었을까? …… 밝은 것은 밝아지고 어두운 것은 어두워졌는데, 이는 언제 무엇을 위해서였을까? 음과 양이 정반합처럼 섞여 만물을 낳았다고 하던데, 무엇이 근본이고 또 무엇이 변이된 것일까? 하늘은 아홉 겹이라고 하던데, 누가 이를 설계했을까? …… 하늘 회전축은 어디에 매어 있으며, 하늘 기둥은 어디에 올려져 있을까? 땅의 여덟 기둥은 어찌하여 하늘을 이고 있으며, 하늘은 어째서 동남쪽으로 기울었을까? - 굴원(屈原)의 「하늘에게 묻노라[天問]」 중에서.
웬만한 문명 치고 천지창조와 관련된 신화가 없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신화를 현실에 대한 이해의 소산으로 본다면, 지구상의 거의 모든 족속이 우주와 자신들의 기원을 무척 궁금해 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호기심을 풀어줄 수 있는 이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굴원의 타당한 문제제기처럼, 딛고 설 땅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던 시절, 천지창조의 순간을 목도하고 후세에 전해줄 사람은 논리적으로도 또 실제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답변을 듣고 싶어 한다. 신처럼 될 수 있다는 꾐에 넘어 선악과를 따먹은 존재였기에, 또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오르고자 했던 존재였기에, 존재의 근원과 우주의 비밀을 향한 인류의 욕망은 쉽사리 진압되지 못했다. 그러나 굴원이 알고 싶어 하는 내용은 심사숙고나 논리적 서술로서는 풀어낼 수 없는 우주론적 질문이다. 그건 물음 자체가 이미 신의 영역을 넘보는 것이기에, 아무래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답변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난감한 딜레마였다. 답변되지 못할 것임을 빤히 알면서도 질문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상황, 이때 동원된 것이 말놀이 곧 수수께끼였다. 모든 놀이가 그러하듯, 그것은 답변의 제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형식이 아니라, 제시된 답변을 통해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끊임없이 환기하는 ‘열린’ 형식이었다. 비록 딜레마 자체를 명쾌하게 해소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알고자 하는 욕망과 답변 불가능한 현실을 유쾌하게 봉합해줄 수는 있었다.
게다가 아이들은 수수께끼를 통해 앎을 획득하고 세상을 알아간다. 어른들은 그것을 통해 잠시나마 통념과 상식의 바깥을 넘나든다. 태곳적 신화의 형식으로 던져진 수수께끼는 지금도 신비로우며, 역사상 수많은 철인이 던진 수수께끼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모든 신화적, 철학적 수수께끼를 종교적이고 윤리적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도 선인들이 낸 수수께끼를 풀며 그들과 즐거운 지적 놀이가 가능하다. 우주의 비밀과 인생의 섭리가 궁금하지 않은가? 지금 당장 아이들이 던지는 수수께끼에 귀 기울여보자.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것은?”(답: 물 혹은 시간).
【관련 원문과 해석】
❍ 까마득한 옛날, 누가 있어 그 때의 일을 전해주었습니까? 아직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은 무얼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까? 어둠과 밝음이 어둑어둑 뭉쳐있었는데 누가 이를 다 규명했습니까? 밝은 것은 밝아지고 어두운 것은 어두워졌는데 언제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음과 양이 정반합처럼 섞여 만물을 낳았다고 하던데, 무엇이 근본이고 또 무엇이 변이된 것입니까? 하늘은 아홉 겹이라고 하는데 누가 이를 설계했습니까? 이는 누구의 공로이고, 누가 처음으로 만들었습니까? 하늘 회전축은 어디에 매어 있으며, 하늘 기둥은 어디에 올려 있습니까? 땅의 여덟 기둥은 어찌하여 하늘을 이고 있으며, 하늘은 어째서 동남쪽으로 기울었습니까? (遂古之初, 誰傳道之. 上下未形, 何由考之. 冥昭瞢闇, 誰能極之. 馮翼惟像, 何以識之. 明明闇闇, 惟時何爲. 陰陽三合, 何本何化. 圜則九重, 孰營度之. 惟玆何功, 孰初作之. 斡維焉繫, 天極焉加. 八柱何當, 東南何虧. ) - 굴원(屈原), 「천문(天問)」
* 이 글은 <한국교직원신문> 2009년 3월 30일 자에 게재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9, 2015년 9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