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제자 염구(冉求)가 고백했다. “스승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힘에 겹습니다.” 능가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바라보기에도 벅찬 큰 산 공자. 하필 그러한 이의 제자였던 염구의 처지가 이해될 만도 하나, 공자는 딱 잘라 말한다. “힘겹다는 것은 도중에서 그만두는 것이다. 지금 너는 출발하기도 전에 스스로 한계를 긋고 있다.”
‘역부족’과 ‘한계’의 차이
염구는 평소에도 말만 앞세우고 몸이 굼떠 늘 스승으로부터 주의를 받던 터였다. 공자 생각에 한결 중요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학문하기’, 곧 말만이 아니라 말과 생활이 함께 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염구는 학문을 ‘하기’로부터 떼어낼 위험이 컸던 인물이었다.
학문과 ‘하기’의 분리는 학문과 생활의 분리이다. 생활은 ‘하기’의 연쇄이다. 그것을 멈추는 순간 삶은 곧 죽음이 된다. 공자에게 생활과 분리된 학문은 곧 죽은 학문이었다. 그래서 학문은 먼저 “삶 주변에서부터 능숙하게 익힌 후 형이상에 도달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학리(學理)일지라도 언제나 삶 속에서 몸으로 익힌 후에야 비로소 머리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여 그는 삶의 요체를 묻는 제자들에게 개념의 정의 대신 생활의 구체적인 행위를 예시한다. 예컨대 그는 “인(仁)이란 우주만물의 근본이다.” 식이 아니라, “인이란 남을 용서하는 것이다.” 식으로 대답한다. 학문은 그저 머리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실제와 맞부딪치는 것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고 힘들겠다 싶으면 미리 발뺌하는 것, 이것은 ‘학문하기’도 또 학문 그 자체도 아니었던 것이다.
‘학문하기’――한계를 부정하는 힘
우리에게 익숙한 학문은 사변을 거쳐 뭔가를 추상화하고 개념화한다. 그렇다보니 학문이 되려면, 그 시작이 아무리 생동감 넘치는 삶 그 자체일지라도 늘 차가운 기호로 바뀌어야 했다. 그 결과 학문은 우리네 일상에서 ‘저만큼’ 떨어지게 되고, 그곳에서 학문은 전문적인 소양을 지닌 자들에 의해 고고하게 ‘연구’된다.
공자의 제자들 역시 학문을 연구하고 싶었다. 하여 그들은 끊임없이 개념을 물어왔다. 하지만 공자는 제자들에게 학문이 아닌 ‘학문하기’를 가르쳤다. 그가 보기에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은 학문이 생활과 분리된 결과였다. 따라서 더욱 시급한 것은 학문보다는 ‘학문하기’였던 것이다. 학문과 생활 사이의 분리를 메우는 것은 학문 연구가 아닌 ‘하기’를 통해 가능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공자는 삶 자체가 ‘학문하기’였다. 행할 수 있어야 참된 앎이라고 했듯이, 그에게 학문과 생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걸어 다니는 사전’으로 불렸던 공자. 그의 박식함 역시 아는 것을 몸으로 행하는 대목에서 빛났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경험했듯이, 이는 매우 힘든 일이다. 아는 것과 행동은 일치되는 경우보다는 따로 노는 경우가 더 일상적이다. 그 관성이 된 일상을 깨는 것, 그것의 지난함. 그래서 염구는 “스승님께서는 쉬운 듯 말하지만,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나도 힘든 일”이라고 투덜댔던 것이다. 그러나 공짜로 학문을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학문하기’가 힘들어 그만둔다면 그저 미리 쳐진 울타리 안에서 꼭두각시처럼 살아가면 될 따름이다. 나의 운명을 남에게 내맡겨둔 채, 그렇게 양순하게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하며 살아가는 길 밖에 없다.
혹자는 말한다. “당신은 저 돼지를 보지 못했는가? 도망치려고 길길이 날뛰어도 결국은 붙들려 갈 수밖에 없으니, 그러한 몸부림은 공연히 힘을 빼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게야.”라고. 말인즉슨 비록 죽는다 해도 양처럼 그저 순순하게 굴어 피차 힘 빼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저 멧돼지를 보지 못하였는가? 송곳니 두 개로 노련한 사냥꾼마저도 도망가게 한다. 이 송곳니는 돼지우리를 벗어나서 산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얼마 안 있어 길게 나는 것이다.(노신의 「한 두 가지의 비유」 중에서.)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길들어지는 순간 사라졌던 송곳니가 야생으로 회귀하는 순간 예의 날카로움으로 다시 뻗쳐오른다. 그 변이의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먼저 내 안의 한계와 대결하는 일이다. 마치 외부에 있는 양 싶던 것이 실은 나의 내부에 있는 것이기에, 한계는 다름 아닌 나의 잠재력을 또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한한다. 그래서 집돼지의 송곳니는 멧돼지처럼 자라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울타리가 내 안에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안의 울타리를 부정하는 것, 이를 부정하면 할수록 송곳니는 자라날 것이요, 그 날선 송곳니에 우리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주희(朱熹)는 말한다.
힘에 겹다는 것은 나아가고자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계라는 것은 충분히 나아갈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이다.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땅바닥에 줄을 그어놓고 그 안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이렇듯 내 안의 한계를 부정할 줄 아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처한 삶의 조건을 바꾸는 일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내 안의 한계를 부정하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원천까지 될 수 있음이다. 한계는 스스로 긋는 순간 결정되는 것이요, 경계는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장벽이 된다. ‘학문하기’는 그러한 한계와 경계를 부정하는 힘을 기르는 것, 그래서 스스로가 능동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지향한다. 공자는 염구의 ‘입’이 아닌 ‘몸’이 강해지길 원했다. 이것이 공자가 생각한 학문과 생활이 분리된 시대에서 ‘학문하는’ 방식이었다. 이름 하여 “살아내기[쟁찰掙扎] 위한 학문하기!”, 이는 ‘인문적 시민사회’의 구축이 시급한 지금-여기의 우리들이 취해봄직한 포즈이리라.
【관련 원문과 해석】
❍ 염구가 아뢰었다. “선생님의 도를 달가워하지 않음이 없지만 힘이 부칩니다.” 공자가 말했다. “힘이 부친다는 것은 하다가 중도에서 그만 둔다는 것이다. 지금 너는 하기 전부터 한계를 긋고 있는 것이다.(冉求曰, “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子曰, “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 <논어(論語)> 「옹야(雍也)」.
❍ 공자가 말했다. “비유컨대 산을 만들 때 한 삼태기 분량이 부족한 상황서 멈췄다고 해도 내가 그만둔 것이고, 땅을 평평하게 다질 대 한 삼태기만큼만 덮어도 진전이 있는 것으로 내가 그만큼 나아간 것이다.(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 <논어> 「자한(子罕)」
❍ 달항 마을 사람들이 말했다. “위대하도다, 공자시여! 박학다식하심에 어느 한 가지로 이름나지 않으셨도다.(達巷黨人曰, “大哉, 孔子. 博學而無所成名.)” - <논어> 「자한」
❍ 안연이 장탄식하며 고백했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아지고, 파고들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바라보면 앞에 계시다가도 어느덧 뒤에 서 계시기도 한다. 선생님께서는 차근차근하게 사람들을 잘 일깨워주시고, 인문으로 우리를 넓혀주시며, 예로 우리를 단속하게 해주신다. 그만 두려 해도 그럴 수 없게 되어 내 능력을 다하고자 할 새, 세워주신 지표가 참으로 우뚝하여 따르고자 하여도 방도가 없는 듯하였다.(顔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如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 <논어> 「자한」.
❍ 공자가 말했다.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들을 탓하지도 않는다. 생활 주변에서부터 능숙하게 익힌 후 고상한 것에 통달하였으니, 나를 알아주는 존재는 하늘이리라!(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其天乎.)” - <논어> 「헌문(憲問)」.
* 이글은 <공자의 철학하기>란 제목으로 <사과나무> 2005년 1월호에 게재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copyrights@aporia.co.kr ([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8, 2014년 8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