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해지지 않아도 살기가 너무 버거운 시절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엄숙’이란 낱말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그에 합당한 인물을 하나 골라보도록 하자. 누가 떠오르는가? 만약 인물의 범위를 고대 중국인으로 한정한다면, 동아시적 권위의 상징인 공자를 떠올리는 이도 꽤 될 것이다. 여기서 문제 하나. 그렇다면 공자는 농담을 했을까 안했을까?
제자에게 무안당한 공자
하루는 공자가 제자 자유(子游)가 현령으로 있는 무성이란 곳을 방문했다. 학문의 성취도 높고 예법에 밝았던 제자였던 까닭에 과연 고을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내심 궁금해 하던 차였다. 성문을 지나 자유가 묶고 있는 관사에 이르자 청아한 거문고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공자는 빙그레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어찌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쓰는가?”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어찌 예악(禮樂)과 같은 큰 도를 사용하느냐는 소리였다.
스승의 갑작스런 방문과 당혹스런 훈계에 자유는 다소 맘이 상했다. 그렇지만 예법의 대가답게 진지한 태도로 스승께 말씀을 올렸다.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듣기로, 통치자가 도를 배우면 백성을 사랑하게 되고, 백성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하여 예악으로 다스리는 중이었습니다.” 경쾌하게 던진 한 마디에 제자가 정색하고 나오자, 공자도 얼른 진지 모드로 돌아섰다. “애들아, 자유의 말이 맞다. 좀 전에 한 말은 농담이었다.”
순간 공자의 머리엔 공숙문자(公叔文子)란 인물이 스쳤을 법하다. 위나라의 대부였던 그는 허투루 웃지 않고 진정으로 즐거운 다음에야 웃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아부하거나 이익을 취하기 위한 거짓 웃음 따위는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여 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전혀 싫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언젠가 이 이야기를 들은 공자는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정녕 그럴 수 있는가?” 하며 거듭거듭 찬탄했다. 그러더니 그는 스승의 경쾌한 농을 진중하게 받아들인 제자 앞에서 그만 경솔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웃음은 혼자의 힘만으로는 유발되지 않는다. 손바닥 둘이 마주쳐야 손뼉이 울리듯, 웃음도 쌍방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된다. ‘생(生)의 철학자’ 베르그송이 “이른바 인간적인 것 바깥에는 웃음거리란 없다.”고 선언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웃음은 오로지 ‘사람 사이[人間]’의 일이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가 공자의 가벼운 농담을 웃어넘기지 못했던 것은 그가 진지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그와 공자 사이에 형성된 사회적 관계, 곧 사회적 권위로 매개된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 때문에 그렇게 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아내 죽음 앞에서 웃은 장자
장자(莊子)는 스승의 해학조차 근엄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유가의 그런 엄숙한 관계를 신랄하게 조롱했다. 당시는 공자가 훨씬 앞서서 잘못에 대해 일갈했듯이, 상(喪)을 당하면 그 슬픔에 충실하기보다는 상례(喪禮)와 같은 형식에 치중했던 시대였다. 예법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관계가 이미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광대의 뻣뻣한 몸짓이 폭소를 자아내듯, 웃음은 부자연스러움에서도 유발된다. 신체만 그런 게 아니라 정신도 그렇다. 진정성이 간데없고 경직된 정신만이 드러나는 예법은 맥락 없이 그저 삐걱거릴 따름이다. 풍차를 공격하는 돈키호테의 모습처럼, 시대의 변화를 뻣뻣하게 정면 돌파하는 모습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형식을 고수하며 슬퍼하는 척하는 모습 역시 웃음거리로서 그만이다. 그렇다고 조문하러 가서 웃을 수도 없는 일. 장자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빈소 앞에서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애절한 노래로 극한의 슬픔을 대신하고자 했음이 결코 아니었다. 보다 못한 한 친구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따져 물었다. 그럴 정도로 장자는 정녕 기뻐하며 노래하였다. 물론 장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신봉자답게 자신도 많이 슬프지만, 따져보면 아내가 자연으로 돌아간 것이기에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이와는 무관하게 빈소에서 내보인 장자의 기쁨은 특히 유가(儒家)들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죽음-기쁨’의 배치는 단지 한 개인의 괴팍한 행위로 치부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기쁨은 웃음으로 이어지게 마련이기에 ‘죽음-엄숙-기쁨-웃음’이란 배치가 조성되면, 장례를 넘어 예법 전체가 희화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유가들은 웃음에 내장되어 있는 기성질서로부터 이탈할 수 있는 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고대 로마의 수사학자인 퀸틸리안이 “웃음은 언어적으로 전혀 정의내릴 수 없는 감정을 기초로 한다.”고 지적했듯이, 웃음은 사회적 이성과 무관하게 작동하여 그것의 기초 위에 구축된 예법을 송두리째 부정할 수도 있게 된다. 하여 공자는 감정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 그런 고도로 수련된 내면적 즐거움에 기초한 웃음만을 긍정하였다. 그래서 그런 웃음에 싫증내는 사람이 없었다. 장자가 기성 질서와 통념의 전복을 통해 웃음을 유발했다면, 공자는 평정의 경지에서 지속되는 웃음을 제시했던 것이다. 물론 공자의 웃음은 제자 자유의 웃음을 유발하지 못했고, 장자의 웃음은 사람을 불편케 하고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공자나 장자의 웃음이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자유를 웃게 하는 사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웃음은 누구의 것일까? 공자의 웃음? 아니면 장자의 웃음? 웃음은 웃긴다고 하여 늘 웃어지는 것이 아니다. 웃음에는 그것이 피어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면, 웃겨도 웃을 줄 아는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웃음은 머쓱함을 초래할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웃음은 공자의 것도 장자의 것도 아닌 자유의 웃음인 듯싶다. 해학을 해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관계를 맺지 못했던 자유, 웃길 수 있고 웃을 수도 있는 만남에 놓이지 못했던 자유. 어쩌면 그 모습 그대로가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자유를 웃을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일 수 있다. 비록 함량 미달의 권력층이 시민의 삶을 된통 옥죄고 있지만, 그럴수록 웃을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야 하리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웃을 줄 아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베르그송은 “인간은 웃게 만들 줄 아는 존재”라고 했다. 곧 사람에게는 웃을 수 있는 능력과 웃길 수 있는 능력 모두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어느덧 묶은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떠올랐다. 웃을 수 있고 웃길 수 있는 관계가 사회적 위계질서를 가로지르는 그런 유쾌한 시공간을 꿈꿔본다.
【관련 원문과 해석】
❍ 공자가 무성에 갔을 때 악곡 소리가 들려왔다. 선생께서는 빙긋이 웃음 지으며, “어찌 소 잡는 칼을 닭 잡는 데 쓰는가?”라고 하셨다. 자유가 답했다. “예전에 제가 스승님께 듣기로, 통치자가 도를 배우면 백성을 사랑하게 되고, 백성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쉬워진다고 하셨습니다. 하여 예악으로 다스리는 중이었습니다.” 공자가 말씀하셨다. “애들아, 자유의 말이 맞다. 좀 전에 한 말은 농담이었다.”(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 曰, “割雞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者!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 - <논어(論語)> 「양화(陽貨)」.
❍ 공자가 공명고에게 공숙문자에 대해 묻기를 “참되도다! 그대의 스승께서는 말씀하시지 않고, 웃으시지 않으시며, 취하지도 않으신다고 하시더군요.” 공명고가 대답하였다. “말을 전한 자들이 지나쳤습니다. 제 스승께서는 적절한 때가 된 후에 말씀하셔서 사람들이 그 말씀을 싫어하지 아니하고, 참되게 즐거우신 다음에야 웃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웃음을 전혀 싫어하지 않았으며, 의롭게 한 연후에 취하였기에 사람들이 그의 취함을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과연 그럴 수 있는가? 정녕 그럴 수 있는가?”(子問公叔文子於公明賈曰, “信乎, 夫子不言, 不笑, 不取乎.” 公明賈對曰, “以告者過也. 夫子時然後言, 人不厭其言. 樂然後笑, 人不厭其笑. 義然後取, 人不厭其取.” 子曰, “其然. 豈其然乎.”) - <논어> 「헌문(憲問)」.
❍ 장자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혜자가 조문하러 갔는데, 장자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자가 말했다. “저 분과 함께 살았음에 아이를 다 길렀고 늙은 연후에 세상을 떠났으니, 울지 않음은 또한 그 것으로 그만이지만, 이제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함은 정말 심하지 않습니까?” 장자가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막 죽었을 때 내 어찌 홀로 슬프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시작을 살펴보니 본래 삶이란 없었던 것이더군요. 아니 삶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형상도 본래 없었습니다. 비단 형상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도 본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만물로 분화되기 전의 상태에 섞여 있다가 변하여 기가 생겨났고, 기가 변하여 형상이 생겨났으며, 형상이 변하여 삶이 생겨났다가 지금 또 변하여 죽음으로 갔으니, 이는 봄여름가을겨울 사 계절의 흐름과 더불어 함께한 것입니다. 곧 저 사람은 우주에 편안히 잠들은 것입니다. 내가 엉엉 울며 이러저리 다니며 곡을 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천명을 깨닫지 못한 이로 여긴 것이 되어 그만두었던 것입니다.”(莊子妻死, 惠子弔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 惠子曰, “與人居, 長子老身, 死不哭, 亦足矣, 又鼓盆而歌, 不亦甚乎.” 莊子曰, “不然. 是其始死也, 我獨何能無槪然. 察其始而本無生, 非徒無生也而本無形, 非徒無形也而本無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人且偃然寢於巨室, 而我噭噭然隨而哭之, 自以爲不通乎命, 故止也.”) - <장자(莊子)> 「지락(至樂)」.
* 이 글은 <사과나무> 2007년 1월호에 게재된 글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이 저술에 대한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도란도란]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1, 2016년 1월,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