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화의 인간관은 전 편에서 다룬 그의 우주관을 토대로 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그의 논의가 대부분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편에서는 주로 인간을 우주적 존재로 바라본 이돈화의 관점이 어떤 특징과 의미를 지니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2.
앞서 이돈화가 우주 혹은 한울은 스스로 창조적인 진화를 한다고 여김으로써 종교적 창조론과 과학적 진화론을 화해시키려 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화해는 엄밀히 말해 동학적 신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자연의 기화(氣化)를 하늘님의 기화로 간주한 최제우의 생각과 하늘님을 어머니-자연으로 간주한 최시형의 생각을 이어받아 우주의 진화를 한울 자신의 진화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양자를 화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신과 자연 혹은 신과 우주의 연속적 통일적 관계보다는 단절적 분립의 측면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경우에는 창조와 진화가 대립적으로 인식되기 쉽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믿음과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되었다는 사실은 대립되어 전자는 긍정되고 후자는 배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기 쉽다. 이돈화는 이런 경향을 이렇게 묘사했다. “진화론이 처음 나왔을 때 종교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격렬한 반대의 기치를 들었다. 그 까닭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같이 한 체계에서 분화되었으며 더욱이 인간이 다른 동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모욕이요, 인간의 신성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신인철학』, 70쪽) 이돈화는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진화론은 인간의 존귀함을 폄하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인간이 동물에서 진화되어 나왔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이는 인간 생명의 근원이 보다 저급한 것에 있다고 자인하는 꼴이라는 이런 생각은 전형적인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에 기초한 것이다.
이런 관점과 생각은 물론 생명중심주의적 관점으로 비판될 수도 있다. 예컨대 『장자』에서처럼 “도의 관점으로 보면(以道觀之) 사물에는 귀천이 없다”(「秋收」)고 반박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인내천(人乃天)을 근본 신념으로 하는 이돈화는 그런 식의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중심주의와는 다른, 동양 전통의 인본주의적 관점을 계승한 인내천주의에 근거해 인간은 확실히 우주 안의 다른 존재자들에 비해 더 존귀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진화론은 우주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존귀한 가치를 격하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증명한다고 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천지만물과 인간이 하나의 체계 위에 서 있으며 하나의 체계 위에서 분화되었다는 점은 진화론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실이다. 이 진화론에 근거하면 인간은 어떤 다른 생물보다 마지막 단계에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이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한 점이다.” (『신인철학』, 70쪽) 자연 안의 모든 존재자들과 인간이 하나의 체계 위에 서서 분화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이 그 분화 운동의 최후 단계에서 탄생되었다는 사실에서 어떻게 인간이 존귀하다는 가치론적 명제가 참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사실에 대한 인정과 가치에 대한 판단을 넘나드는 이러한 증명이 가능한 까닭은 전 편에서 언급했듯이 이돈화가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생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의 진화를 우주라는 거대한 생명이 자라나온 과정으로 간주했으며, 그 자연 진화의 최후 단계에서 인간이 탄생한 것을 그 우주의 자연에서의 생명운동이 최후의 결실을 맺은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이 점을 나무와 열매의 비유를 통해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진화론은 인간을 모욕하지도 않았고 인간의 신성성을 파괴하지도 않았다. 진화론은 오히려 인간의 고상함을 증명하며, 간접적으로는 인간의 신성성을 방증한다. 왜 그러냐 하면 진화론은 우주의 최후, 최고의 단계를 인간에서 종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주를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 비유한다면 인간은 우주의 열매라는 위상을 지닌다. 열매는 뿌리, 줄기, 가지, 꽃, 잎보다 가장 마지막에 생겨났다. 그러나 열매는 나무 전체의 정력(精力)을 모았다는 점에서 나무 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이 점에서 인간은 우주의 열매다. (『신인철학』, 70~71쪽)
이돈화에게 우주는 거대한 생명이다. 따라서 그것은 살아 움직이며 성장하는 한 그루의 거대한 나무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주의 모든 존재자들이 하나의 체계 위에서 분화되어 진화한 과정은 거대한 나무의 생장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뿌리, 줄기, 가지, 꽃, 잎, 열매가 모두 나무에 매달려 있듯이 우주 안의 모든 존재자들, 예컨대 지구상의 무기물, 식물, 동물, 인간은 모두 우주진화의 체계 안에 서 있다. 또 나무가 뿌리를 내린 후에 줄기와 가지를 뻗고, 그 후에 잎을 펼치고 꽃을 피우며, 마지막으로 열매를 맺는 것처럼, 우주의 자연에서의 진화도 무기물, 식물, 동물, 인간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뿌리, 줄기, 가지, 꽃, 잎의 생장에 힘입어 열매가 맺혔다는 점에서 열매는 나무 전체의 정력을 모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우주의 자연에서의 진화는 무기물에서 식물, 동물로의 진화에 힘입어 인간의 출현을 보았고,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우주 내 다른 존재자들의 정력을 모아 지닌, 우주 전체를 가장 잘 표현한 존재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인간이 우주 전체, 종교적 언어로 말하자면 한울을 가장 잘 드러내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우주의 다른 어떤 존재자들보다 존귀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인간이 우주라는 거대한 생명나무의 ‘열매’에 해당된다는 위와 같은 생각을 이돈화는 인간격(人間格)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철학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그가 인간격이라는 신조어를 내놓은 까닭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표시하는 기존의 인격(人格) 개념으로는 인간이 진화하는 우주생명 안에서 ‘열매’의 위상을 갖는다는 함의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인간격에 대한 설명을 그것과 인격 개념이 다름을 천명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인간격은 보통 말하는 인격을 칭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은 개인의 ‘격(格)’을 가리킨다.”(『신인철학』, 51쪽) 그는 인간격이든 인격이든 격(格)은 기준, 품격을 뜻한다고 했다. 그런 후에 인격 개념이 두 측면의 함의를 갖고 있다고 했다. “인격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생물학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학적 측면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격 개념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된다. 반면 윤리학적으로 그것은 개인이 갖춘 도덕적 품성의 높고 낮음을 가리키는 데 쓰인다.” (『신인철학』, 51쪽)
전자의 예로 우리는 사람들이 생리적 욕구만 채우고 오륜(五倫)의 도덕교육을 받지 않으면 사람은 금수에 가까워진다는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겠다. “사람이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가르침이 없다면 금수에 가까워진다.”(『맹자』 「공손추상」) 도덕교육을 받아 인격을 갖추지 않으면 인간은 금수와 구별되지 않는다는 맹자의 말에서 우리는 인격 개념이 생물학적 함의를 지녔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편 후자의 예로는 고매한 인품을 갖추었다고 생각한 성군을 칭송하는 공자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들 수 있다. “위대하다! 요의 임금 됨이. 높고 크다! 오직 하늘이 큰데 요임금이 그것을 본받았으니, 넓디넓어 백성들이 그것을 형용하지 못하는구나.”(『논어』 「태백」) 모두 똑같이 인간이지만 일반인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고매한 인품을 요임금이 갖추었다는 공자의 칭송에서 우리는 인격 개념이 윤리학적 함의도 갖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과 금수를 구분하기 위한 생물학적 인격 개념이든, 고매한 인격자와 보통 사람을 구분하기 위한 윤리학적 인격 개념이든 인격은 인간 혹은 고매한 인간을 기준으로 하여 그와 다른 것을 구별하기 위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돈화는 이런 인격 개념과는 달리 인간격 개념은 더 큰 기준, 즉 우주격(宇宙格)을 기준으로 삼는다고 한다. “인간격은 생물학적인 인격이나 윤리학적인 인격 개념보다 더 큰 기준이다. …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고상하다는 것은 우주격 중에서 인간격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고, 윤리학적으로 최제우가 보통 인간보다 고상하다는 것도 우주격 중에서 인간격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신인철학』,52쪽) 이렇게 인간이 아닌 우주를 기준으로 하는 인간격 개념이 갖는 강점은 인간과 다른 동물, 고매한 인격자와 보통사람의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우주라는 가장 큰 틀에서 인간과 만물이 지니는 공통점과 인간과 만물 사이의 긴밀하고 복잡한 연결 관계도 함께 볼 수 있게 한다는 데 있다.
이런 강점을 지닌 인간격 개념을 가지고 이돈화는 앞서 언급한, 인간은 우주의 열매라는 비유의 의미를 다시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격은 우주격 중에서 최종적인 격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인간격이라는 말에는 우주 전체를 일원적인 것으로 보아 우주의 전체 중심이 자연계를 경유하여 인간계에 솟아오른 우주의 중추신경의 열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신인철학』,52쪽)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닌 품격은 본래 인간이 우월해서 갖추게 된 것이 아니라, 우주가 진화하여 인간을 통해 최종적으로 이루어놓은 품격이라는 것이다. 우주는 그 안에 존재하는 만물이 복잡하게 연결된 통일체, 하나의 거대한 생명으로서 장구한 세월을 거쳐 자연 진화를 이루고 종국에는 인간이라는 우주의 가장 중추적인 존재로까지 진화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격 개념을 통해 이돈화는 인간이 우주 안에서 가장 중추적 존재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추적임이 우주의 장구한 진화로 인해 확보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돈화는 인간이 “우주의 ‘열매’로서 우주 전체의 정력을 모아 지니고 있다”는 비유의 의미 또한 인간격 개념을 운용하여 다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우주격의 중심은 자연계에 있지 않고 동물계에도 있지 않으며, 또는 자연계와 동물계를 벗어난 초자연적 신비계에도 있지 않고 오직 인간격에 의해 표현된다. 즉 우주 대생명의 중심은 인간으로부터 자연계로 내려가 초자연적인 어떤 경지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경지로부터 자연을 경유하여 인간계에서 비약을 이룬 것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격은 곧 우주격이다. 인간격 중에는 동물격, 자연격, 신비격이 아울러 포함되어 있다. (『신인철학』,52쪽)
엄밀히 말해 우주의 품격은 자연계, 동물계, 인간계에 모두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주의 품격의 가장 중추적인 부분, 즉 중심은 인간의 품격을 통해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초자연적인 신비한 그 어떤 것이 자연에서 오랫동안 자기를 전개시킨 뒤 질적 변화를 일으켜 탄생한, 자연 진화의 최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품격은 우주의 품격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인간이 인격뿐만 아니라, 동물성, 자연성, 신비성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 또한 인간이 우주의 중심, 우주의 열매임을 증명한다고도 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격뿐 아니라 동물적 본능도 지니고, 자연적 물질이기도 하며, 신비로운 생명이기도 하다. 바로 인간이 이런 다중적 품격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자연 진화의 최후 산물, 즉 열매로서 자연 진화 과정의 주요 성과를 자신 안에 응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
이돈화의 인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인간의 품격이 곧 우주의 품격”이라는 명제이다. 그리고 이는 동시에 천도교의 종지(宗旨)인 인내천(人乃天)의 의미를 현대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돈화의 인간관 및 인간격 개념에 대한 이해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더 유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이 명제가 인간이 우주와 완전히 같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점을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격은 이상에서 말한 것과 같이 개인의 격이 아니고, 인류 전체의 격도 아니며, 현재의 인간을 기준으로 한 격도 아니다. 우주격의 전 중심이 전 우주를 경유하여 인간에 의해 우주적 생활을 하는 격이므로 개인의 격에서는 우주격을 볼 수 없고, 현재 인류 전체에서도 우주격은 볼 수 없다.”(『신인철학』, 52~53쪽) 어떤 개인 심지어 현재 인류 전체에서도 우주격이 다 보이지는 않는다는 말에서 우리는 “인간격이 우주격”이라는 명제가 “현재 인간은 현재 수준에서의 우주를 가장 잘 드러낸다”는 의미임을 알게 된다. 둘째는 이 명제가 지닌 미래지향적 성격이다. 그는 이 성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주격은 영원한 신비로, 완전한 인간 혹은 미래의 인간을 통해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는 격이다. 우리는 이런 의미의 인간격을 가리켜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한다. (『신인철학』, 53쪽)
이돈화는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우주는 영원한 신비이지만 인간의 삶이 부단히 향상됨으로써 우주격을 집중적으로 체현한 인간격의 내용도 더욱 새로워지고 더욱 충실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이돈화는 자신이 새롭게 제시한 인간격 개념을 통해 우주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위상을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정립된 인간관은 다음 두 편에 걸쳐 다룰 사회관과 도덕·종교관의 토대가 된다. 다음 편에서는 노동 개념을 중심으로 한 이돈화의 사회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고전 다시읽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4, 2016년 4월, 황종원, 단국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