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5-23 16:56
[니꼴로 이야기] 말살과 망각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4,923  


[니꼴로 이야기] 말살과 망각

1.
연일 계속되는 정의기억연대와 관련된 보도로 마음이 편치 않다. 보수 언론들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 비난을 쏟아내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강제수사에 돌입했다.  

2.
정의기억연대의 부실 회계나 졸속 운영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잘못이 있다면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고, 잘못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어쩌면 지금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37개 여성단체가 분연히 일어났던 때의 초심을 되찾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때, 정치권조차 불편하게만 생각했던 때, 그 때로 돌아갈 기회일지도 모른다.   

정의기억연대는 운동의 시작이 망각되면 하루도 지속될 수 없는 단체다. 시민운동의 성격과 피해자 구제를 동시에 추구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역사적 부정의의 해결이라는 큰 그림을 제쳐두면, 운동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피해자들을 돕는 사람들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기에 운동가들은 운동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돌이킬 지속적인 동기가 필요하고, 피해자들은 운동가들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가 필요하다. 이들이 손을 맞잡은 날의 기억을 망각하면, 건강하게 유지될 수 없는 단체다.

3.
2006년 세상을 떠난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비달나케(Pierre Vidal-Naquet)가 쓴 '기억의 암살자'(Les Assassins de la memoire)라는 책이 생각난다. 그는 일찌감치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의 참상과 학살의 기억을 말살하려는 사람들에게 주목했다. 2차 대전의 참상과 아우슈비츠 학살의 기억을 없애려는 독일의 수정주의 역사가들과, '서구중심' 또는 '강자중심'의 역사에 대항했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평생을 통해 보여주었다. 전자는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집단을 위해 봉사하고, 후자는 지배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이래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학자들과 극우세력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 일본인들의 자기방어, 또는 국제정치질서의 냉혹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해왔다. 네트플릭스의 '도쿄재판'(Tokyo Trial)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보듯, 이런 주장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강자만의 정의'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4.
기억을 말살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정의기억연대의 사태가 길어질수록, 운동의 시작을 망각한 사람들보다 운동을 촉발한 그 기억을 말살하려는 사람들이 더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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