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4-17 10:02
[안재원 노트] 서양인의 눈에 비친 임진왜란
 글쓴이 :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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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원의 잊혀진 문헌 (1): 서양인의 눈에 비친 임진왜란

안재원 (서울대학교 인문연구원 HK 부교수)

1.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을 소개하고자 한다.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고문헌 자료실에 보관된 것이고, 서명은 다음과 같다.  

貴 H200 43, De Rebus Iaponicis, Indicis et Pervanis epistolae recentiores, 1605.

책은 1605년 벨기에의 안트베르프에서 출판되었다. 책의 표지는 나무판에 돼지 가죽을 입혔고, 겉은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다. 서명은 <이아포니아(일본), 인디아(인도), 페르바니아(원래 이 지명은 남미 페루의 라틴어식 명칭이나, 이 책에서는 아마도 필리핀의 섬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임)에 대해 서술한 새로운 편지 모음>이다. 

2.
편지들을 모아서 책으로 엮어 출판한 이는 요한네스 하이우스(Iohnannes Hayus, 1540-1614)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고향에서 정치적 이유로 추방된 사람이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와 같은 북구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다가 오늘날 벨기에의 루뱅 대학에서 신학 교수로 활동했다. 예수회 소속의 신부였던 그는 동양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고 이 지역의 정치, 학문, 문화, 특히 종교를 소개하는 일에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하이우스는 당시 동양에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편지들을 수집하였고, 이것들을 엮어 책으로 묶었고, 이를 루뱅 성당의 신부였던 미카엘 드 몽키(Michael de Monchy)에게 헌정했다. 벨기에의 루뱅 대학이 신학과 성인학 분야에서 큰 권위를 가지게 된 것도 하이우스와 같은 선각자들의 학문 활동에 힘입어서였을 것이다. 약 50여 편의 편지로 구성된 이 책은, 1577년과 1601년 사이에 쓰여진 것들이다. 대부분은,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신부들이 보낸 편지들이다. 편지의 제목들은 아래와 같다.

6-8쪽, Brevis Iaponiae Insulae descriptio (<이아포니아 열도에 대한 간략 보고>, 1581년 
1월 24일에 쓴 편지)
9-45쪽, De Iaponia Insula (<이아포니아 섬에 대하여>, 루드비쿠스 프로이스가 1577년 
6월 6일에 오늘날 사카이도 (西海島)에서 쓴 편지). 
45-46쪽, Narrationes Indicarum (<인디아에 대한 보고>, 루드비쿠스 프로이스가 1586년 10월 15일 시모노세키에서 쓴 편지)
46-52쪽, Organtinus Brixiensis ad Visitatorem Indiarum (<오르간티누스가 인디아 시찰관에게 보내는 편지 두통> 1577년에 작성된 편지들)
53-58쪽, Franciscus Cabralis ad reverendum Patrem Generalem (<프란키스쿠스 카브랄리스가 예수회 총장에게 보내는 편지>, 1577년 9월 1일에 보내는 편지)
59-116쪽, 이아포니아 왕이 교황청에 파견한 사절단이 행한 연설들과 인디아와 필리핀에 대한 문서들   
118-202쪽, Realatio historica de statu Japoniae (<이아포니아의 역사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보고>, 루드비쿠스 프로이스, 혹은 알로이스 프로이스가 1595년 10월 20일에 나가사키에서 보낸 편지) 
262-288쪽, De morte Quabacondoni (<콰바콘도누스(도요토미 희데쓰구)의 죽음에 
대하여>, 알로이스 프로이스가 1595년 10월 이아포니아에서 보내느 편지)
289-290쪽, De morte 26 crucifixorum (<십자가에 못박힌 26명의 죽음에 대해서>, 루이스 프로이스가 예수회 총장 아쿠아비바에게 보낸 편지, 연도는 알 수가 없음) 
291-343쪽, De statu, in quo Iaponii Christiani fuerunt ante hanc persecutionem (<26명에 대한 박해 상황 이전에 대한 보고>, 루이스 푸로이스가 1592년이 후에 보낸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이는(연도는 기록되어있지 않음) 예수회 총장 아카아비바에게 보낸 편지) 
344-383쪽, De legatione Regis Cinensium ad Taicosamam (<키나 왕이 타이코사마
(관백), 도요토미 희데요시에게 보낸 사절단에 대해서>, 루두비쿠스 프로이스가 1596년 12월 28일에 나카사키에서 보낸 편지)
384-492쪽, De rebus a PP. Soc. Jesu gestis durante persecutione (<박해 기간에 
예수회 활동에 대한 보고>, 루두비쿠스스 프로이스가 1596년 12월 13일에 나카사키에서 보낸 편지)
493-504쪽, De Morte Taicosamae (<타이코사마(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프란키스쿠스 파시우스가 나가사키에서 1598년 10월 3일에 작성한 편지)
505-512쪽, Relatio Rerum in Iaponia Gestarum (<이아포니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보고>, 페트루스 고메즈가 예수회 총장 아쿠아비바에게 1597년 보낸 편지)
513-515쪽, Ornantissimo Viro D. Ferdinando (<페르디난두스에게 보내는 편지 두 통>, 요한네스 하이우스가 1603년에 보낸 편지>)
516-539쪽, Litterae Iaponiae (<이아포니아 보고>, 알렉산더 발리그나누스가 클라우디우스 아쿠아비바에게 일본에서 1599년 10월 10일에 보낸 편지)
540-544쪽, Illustrissimo Domino Don Gastoni, (<가스투누스에게 보내는 편지 두 통>, 
요한네스 하이우스가 1603년에 보낸 편지>)
545-583쪽, Iaponiae Commutatio (<이아포니아의 변화>, 알렉산더 발리그나누스가 클라우디우스 아쿠아비바에게 나가사키에서 1601년 2월 25일에 보낸 편지)
584-586쪽, Illustrissimo Domino Don Gervonville, (<게르폰빌레>에게 보내는 편지>, 요한네스 하이우스가 1604년에 1월 1일에 보낸 편지>)     
587-641쪽, Literae Annuae Iaponicae (<이아포니아 연례보고>, 프란키스쿠스 
파시우스가 클라우디우스 아쿠아비바에게 1580년 7월 10일에 보낸 편지)
642-649쪽, Epistola P. Alexandri Valignani (<알렉산더 발리그나누스의 편지>, 
알렉산더가 예수회 총장에게 1584년 1월에 보낸 편지)
650-655쪽, Reverendis In Christo Patribus (<루뱅 대학의 신부들과 신학자에게 보낸 편지>,요한네스 하이우스가 1589년에 보낸 편지>)
656-690쪽, Rereum Indicarum (<인디아에 대한 보고>, 페트루스 마르티네즈가 1586년 12월 9일에 보낸 편지) 
691-725쪽, Historia Relatio de Magno Rege Mogor (<모고르(무굴) 대왕에 대한 보고>, 
에마누엘 피네루스가 1595년 9월 3일에 보낸 편지)
726-859쪽, In India Orientali (<인디아에 대한 보고), 니콜라우스 피멘타가 1600년 12월 1일에 고아에서 보낸 편지>, 이탈리아에서 라틴어로 옮긴 이는 요하넨스 부사이우스임)
860-862쪽, Serenissimo et reverendissimo Domino D. Ferdinando (<페르디난두스 공작에게
보낸 편지>, 요한네스 하이우스가 1601년 10월 15일에 보낸 편지>)
863-878쪽, Narratio Regni Mogor (<무고르 왕국에 대한 보고>, 예수회 신부 히에로니무스
사비에르 신부의 1598년 편지와 에마누엘 피그네이루스가 1598년에 보낸 편지)
879-881쪽, Illustrissimo et clarissimo Domino D. Vincentio (<빈켄티우스 공작에게 
보낸 편지>, 요한네스 하이우스가 1605년 10월 7일에 보낸 편지>)
883-901쪽, Admiranda Regni Sinensis (<놀라운 나라, 키나>, 프란키스쿠스 사비에르의 편지로, 요한네스 하이우스가 이탈리아에서 라틴어로 번역함)
902-834쪽, 중국과 인도에 대한 여러 보고문들
935-968쪽, 페르바누스인, 지나로아나, 필리피나 제도에 대한 보고 
969 -1024쪽, 색인 및 편지 목록 소개

제목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일본, 인도, 중국과 필리핀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관찰한 아시아의 정치, 경제, 학문 및 종교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이다. 자세한 연구를 해보아야 알겠지만, 제목들만으로도, 이 책이 동서 교류의 초기 상황을 보여주는 문건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다음에 있다. 물론, 이 책이 수 십 편의 편지들을 모아 엮은 책이기는 하지만, 이 편지들을 관통하는 역사적 사건이 하나 있다는 점이다. 이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Bellum Corai)”이다.

3.
우선 이 전쟁의 명칭부터가 흥미롭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이 전쟁을 “코라이 전쟁(Bellum Corai)” 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예수회 신부들이, 이 전쟁이 발발하게 된 이유와 전쟁의 진행 상황 및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부분도 어쩌면, 이 전쟁에 서양 신부들의 평가일 것이다. 물론 보다 자세한 분석과 연구가 요청되지만, 이에 대해 궁금해 할 독자들을 위해서 원문과 번역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와 관련해서 번역에서 사용하는 지명 및 인명 혹은 관직명은 라틴어식 명칭을 그대로 음차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현대적인 명칭을 사용하게 되면,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그러니까 “코라이 왕국(Regnum Corai)”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를 담고 있는 보고에서부터 시작하자. 

174쪽, Corai quanta sit longitudo? (코라이는 얼마나 큰 나라인가?) (1)  
코라이 왕국은 길이에 있어서 대략 100레우카 (1레우카는 약 6km임)이고, 폭에 있어서 70레우카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어와 힘에 있어서 키나인들과 구별되었다. 키나인들은 이들을 무서운 사람들로 여긴다. 그럼에도, 코라이는 키나 왕에게 조공을 바쳤고, 키나 왕을 섬기는 신하들과 교역을 하였다. 코라이인들은 키나의 법률, 의복, 제도, 통치 방식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국경의 일부가 타르타로스인(만주인)의 지역에 접해 있고, 다른 종족들과도 경계를 이루고 있다. 가끔은 이들과 평화를, 가끔은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키나인들과는 언제나 평화를 유지하였다. 코라이인들은 활을 탁월하게 다루었고, 다른 무기들에 있서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코라인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여타의 다른 무기들은 위협적이었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코라이인은 이아포니아인에게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쟁을 상시적으로 치러야 했던 이아포니아인은 항상 훈련을 하고 있었고, 천성적으로도 드세고 용감했으며, 또한 철제 총포와 긴창과 검으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수군에 있어서는 이아포니아인이 코라이인과 키나인에게는 적수가 되지 못했다. 코라인이 바다에서 사용하는 함선은 일단 규모가 크고 목재가 더 단단했기 때문에, 만약 바다에서 싸운다면, 이아포니아인이 코라인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먼저, “Corai quanta sit longitudo?”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색인 목록에서 끌어온 것임을 밝힌다. 이하의 진술에서 소제로 부친 제목들도 마찬가지로 색인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책은 참고로, 목차가 없다. 아마도, 이 책이 편지 모음집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을 편집한 하이우스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책의 마지막에 목차에 해당하는 내용을 색인으로 만들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 색인의 목록에는 “Corai” 표제가 있고, 이 표제 아래에 “코라이 전쟁”에 대한 여러 내용들이 발제되어 있다. 아래의 기술에서 소개하는 내용들은 모두 “코라이”에 대한 표제 목록에서 취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위의 인용과 관련해서, “코라이” 에 대한 보고가 서양의 일반 독자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어쩌면 최초의 문서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루이스 프로이스가 포르투칼어로 소개한 <임진난의 기록> 이 있다.(2) 이 기록은 프로이스가 지은 <일본사>에 포함된 것이다. 이 책은 1549년에서 1594년 사이에 벌어졌던 일본의 주요 사건들과 예수회 신부들의 포교 활동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임진왜란이 한창이었던 1594년까지만을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책을 출판하게 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야 가능했다.(3) 

따라서, 서양의 정치인들과 학자들에게 “Corai”가 체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하이우스가 편집한 이 책에 기록된 “코라이”에 대한 보고 덕분이라고 추정한다. 그도 그럴것이, 이 책을 편집한 하이우스가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스페인, 독일, 벨기에와 로마 교황청의 주요 인사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결과적으로 이 책은 서구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읽혔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책이 동양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서적이었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코라이”라는 말이 서구 유럽에 소개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코라이”라는 명칭은, 이에 대해서는 언어학적으로 보다 자세한 연구를 요청하지만, 당시 일본 사람들이 고려를 “코라이”라 부른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4)  

4.
“코라이”의 소개에서부터 전쟁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데, 흥미로운 점은 양국의 전투 능력에 대한 설명이다. 지상전에서는 이아포니아가 코라이에 앞서지만, 해전에서는 코라이가 앞선다는 점이다. 물론,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소문에 대해서 일본에 있었던 선교사들도 들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선박의 목재가 더 단단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인데, 어쩌면, “거북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코라이의 배들이 사용하는 목재가 실제적으로 더 단단했음을 말하는 언급으로도 보인다. 참고로, 당시 코라이 인들이 목재들 다루는 전통은 대장경 목판을 다루는 기술에서 그 유래를 두고 있고, 그러니까, 목판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서 나무를 바닷물에 오래 담궈 두었던 기술이 선박의 제작에도 이용되었기에, 코라이의 배들이 매우 단단했을 지도 모르겠다. 

주목해야할 점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이아포니아인들이 “총포”를 사용하고 있고, 이런 이유에서 이야포니아인이 코라인보다 지상전에서는 더 강하다는 언급일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당연한 언급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이아포니아인이 총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동서 교류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서양인이 제공한 총포 덕분에 이아포니아 전체가 통일되었고, 조-일 전쟁(임진왜란)을 벌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과련해서, 총포의 위력에 힘입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아포니아를 통일하고, 그 여세를 말아 코라이를 거쳐서 키나를 정벌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고 전하는 예수회 선교사의 보고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Coraianis cur belllum fecit Taicosoma (타이코사마는 왜 코라이인들과 전쟁을 벌이려 했는가?)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 이아포니아에 통일왕국(Monarchia)을 세우고 그것을 자신의 후손들에게 물리주는 것이 타이코사마(太合)의 유일한 관심이자 숙원이었다. 그러나 왕국을 이어받아 자신의 명예를 영원하게 키워주고 보살펴 줄 자식들이 없었다. 그러자 전적으로 생각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그가 쉽게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숙고를 거쳤다. 그에게는 자신의 형의 아들들인 조카가 세 명 있었는데, 이들에게 최고의 지위를 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중략) 이 계획을 실행하는 중에 코라이 왕국을 복속시키기 위해 전쟁을 선포해야겠다는 계획을 품게 되었다. (중략) [콰바콘도누스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의 상황을 정비하고 나자, 드디어 그 동안 마음 속으로 오랫동안 궁리하고 있었던 생각을 펼칠 시기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즉 코라이와 전쟁을 벌이기로 말이다.(5)   

인용은, 전쟁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인 야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코라이 전쟁은 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의 정치적 야망의 관점에서만 해명될 수 없는 면도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코라이 전쟁에 참여한 이아포니아의 주력 부대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점도 어떤 식으로든 해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라이 전쟁에 주로 그리스도 신자로 구성된 부대를 파견했는데, 이에 대해 예수회 신부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Bellum Sinensibus facere cogitat Quabacodonus (관백은 중국과 전쟁을 벌이려고 준비했다.) 
이아포니아의 정치적 상황 전반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콰바콘도누스[관백]가 이아포니아 전체에 통치와 지배를 선포하려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자리에서 기술했다. 진실로 통치 영역을 그토록 넓은 지역에 선포해 본 적이 없었다. 왕권을 완벽하게 세울 수 있도록 또한 불멸의 명성을 후세에 남길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는 새로운 성공을 통해서 권위를 강화해나갔다. 최고의 지위에 오르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양식(빵)을 구하기 위해 매일 장작을 패고, 어깨로 져 날라 시장에 내다 팔았던 이로,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부터 시작한 사람이었음에도 말이다. 이는 콰바콘도누스 스스로가 자주 한 말이었다. 그는 대규모의 전쟁을 통해서 왕국의 권위와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기억을 영원히 심어주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 해(아마도 1591년)에 그는 키나인에게 전쟁을 선포하려는 마음을 먹었고, 이아포니아의 모든 장수를 이끌고 자신이 친히 전쟁터로 나갈려고 마음 먹었다. 비록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그는 이를 능수능란하게 실천에 옮겼다. 코라이 왕국을 정복하는 일을 말이다. 모든 크리스티아누스(그리스도교 신자) 주군(主君)이 하나의 군대를 이루어 키나로 원정을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러나 불길한 소식이 흘러 들어왔다. 그가 시모(규슈, 九州지역)의 질서를 뒤바꾸고, 코라이(조선)를 크리스티아누스 신자인 장군들에게 맡기려는 계획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콰바콘도누스가 자신의 계획을 이 시기에 완수할 수 없고, 이런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것도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우리는 알게 되었다.(6) 

인용은, 관백 그러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이아포니아의 통일 왕국을 공고하게 만들기위해서, 또한 이아포니아의 여러 정치 세력의 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해 전쟁을 계획하고 있고, 이를 위해서 코라이 왕국의 정벌을 준비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는, 시모 지역 출신의 부대를 코라이에 파견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보고에서 명백하게 확인된다. 그런데, 동서 교류의 관점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은, 시모 지역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리스도 신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코라이 전쟁은 단순하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개인적 야망과 이아포니아의 내부적 정치 사정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해석되는 역사 사건이 아니라, 이미 이 전쟁은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함을 시사한다 하겠다. 적어도 서양에서 총포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런데 그 총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대개는 서양과 접촉을 많이 한 지역의 사람들이고, 이들이 한편으로 이아포니아의 통일 왕국 수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그들이 이아포니아 왕국의 수립 이후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한에서는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거되어야 할 세력으로 간주되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방법이 코라이 전쟁이었는데, 그런데 그 세력이 대부분은 서양의 정신과 종교를 숭배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임진왜란은 이미 소위 “대항해 시대”(7)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전쟁이고, 바로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의 전체 질서가 재편되었다는 점에서, 이 전쟁은 지역사의 관점이 아니라 세계사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단적으로, 이 전쟁의 영향을 받아서, 대륙에서는 명나라가 청나라로 넘어가는 단초가 이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동양과 서양 세계는 이 때부터 서로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로 다시 재편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재편”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이 이전에 “흉노”의 이동이나 “몽고”의서방 원정(8)이, 혹은 그 이전에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이 동서 세계의 판도 변화에 큰 영향을 이미 끼쳤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주지하다시피, 이아포니아가 코리아 정벌의 명분으로 내새운 것이 소위 “정명가도(征明假道)”였다. 이에 대한 예수회의 보고는 아래와 같다.
 
전쟁의 명분은 다음과 같았다. 코라이 왕국에게 키나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코라이 왕국은 섬과 비슷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 키나에 맞닿아 있었고, 거의 단절된 왕국이었다. 비록 키나 왕에게 종속되었고, 조공을 바치는 왕국이었지만 말이다. 이 왕국의 한 면은 바다에 의해서 이아포니아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콰바콘도누스는 코라이 왕국을 복속시키려고 결심했다. 코라이 왕국은 물자를 보급함에 있어서 풍요로운 곳이고, 키나로 넘어감에 있어서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9)  

예수회 신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코라이 전쟁의 명분으로 소위 “정명가도”를 내세우고 있다고 전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런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던 자신감은 어쩌면 서구에서 들어 온 총포의 위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총포라는 서구의 새로운 무기와 서구의 종교의 힘을 빌어서 이아포니아는 코라이를 침략했고, 그들이 내세운 전쟁 명분에 응해서 명나라는 5만의 군대를 파견했고, 코라이 전쟁은 조-명 연합군 대 이아포니아 군대의 대결로 발전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회 신부의 표현대로, 코라이 전쟁은 동아시아 전쟁으로 격상되었다. 물론 소위 전면적인 혹은 명시적인 전쟁은 아니지만, 서양 문물과 종교를 기반으로 해서 벌이게 된 전쟁이라는 점에서,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전쟁의 성격을 다시 논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와 같은 편지 기록을 통해서 “코라이 왕국”은 서구에 소개되었고, 중요한 점은 이 전쟁이 서구 유럽에 그대로 보고 되고 있다. 전쟁의 초기 상황에 대한 보고는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이 완료되자, 음력 3월이 시작하는 즈음에 그는 나고야를 향해 여행을 나섰다. 아우구스티누스(고니시 유키나와, 小西行長, 1555-1600)에게 명하여 코라이 왕국으로 선발로 출정시키고, 다른 장군들은 쓰시마 섬에서 대기하라고 명했다. 마침내 음력 3월 26에 나고야에 도착했다. 그곳으로 다른 장군들이 소집되었고, 그곳에 다른 네 명의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를 제외한 20만 군사가 집결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군사와 함께 80척의 배를 이끌고 코라이로 진격하였다.  이 부대에서 프로타시우스(아리마 하리노부, 有馬晴信, 1562-1612)가 다른 장군들보다 뛰어났다. 비록 단지 2000명의 군사를 이끌었지만, 무기와 함선의 화려함으로 모든 이들을 감탄케 만들었다. 코라이 왕국의 침범하면서 두 번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들에 대해서 코라이인들은 용감하게 맞섰다. 높은 성벽의 보호를 받고 있었고, 군대의 힘과 성벽에 설치된 두 뼘 반 정도로 긴 화살의 위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환 대신에 나무로 된 화살을 날렸고, 양날로 된 화살을 쏘아댔는데, 큰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이렇게 날리는 화살의 공격은 모두 무위로 끝났다. 총으로 무장한 이아포니아인들이 있는 곳에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총에 대해서 코라이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자 이아포니아인들은 곧장 코라이인들을 성벽으로부터 몰아내었고, 단단한 모래 바닥에 단단하게 사다리를 고정했으며, 성벽에 걸쳐놓았고, 곧장 성벽으로 타고 올라가서 깃발을 꽂았다. 잠시 코라이인들이 잠시 저항했다. 하지만 곧장 줄행랑을 놓았고, 약 그들 가운데 5000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군사는 약 100명 정도의 군사를 잃었고, 400명이 부상을 입었다.(10) 

인용에 따르면, 코라이 왕국을 침범한 이들은 물론 이아포니아 군대였지만, 예수회 신부의 눈에 따르면, 이 군대는 서양의 총포로 무장한 그리스도교 신자로 구성된 부대였다. 그들을 이끌었던 장군이었던 고니시 유키나와와 아리마 하리노부는 독실한 그리스도 신자였다. 전자의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누스였고, 후자는 프로타시우스였다. 물론,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지만, 인용에 따르면, 서구의 문물과 서구의 종교가, 비록 무력 침략의 방식을 통해서였지만, 코라이 왕국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하겠다. 또한 이 전쟁 시기에, 이아포니아를 통한 간접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이미 코라이 왕국이 은둔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세계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나라로 편입되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단적으로 예수회 선교사의 보고는, 아마도 동래성 전투로 보이는데, 이 전투에서 코라이 군대가 서양에서 들어온 총포의 위력에 놀라서 도망쳐 버렸다고 전한다. 서양의 문물인 총포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서양의 무기로 무장한 이아포니아 군대는 거의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단숨에 한양으로 진격했고, 도성을 장악했다고 전한다. 

자신이 적에게 포위되었다는 것을 파악한 코라이 왕은 왕국의 여러 지역으로 장군들을 급파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성을 버리고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키나의 내륙 지역으로 도망칠 생각을 하였다. 코라이에는 말이 많았기에 이는 쉽게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날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무런 저항 없이 도성에 입성했다. 도성에 남아있던 사람들이 군수 물자와 선물을 가지고 달려왔다. 그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다른 부장들의 함께 도성의 통치자가 되었다. 모든 전공을 자신의 것으로 취했다. 다른 나머지 장군들이 나고야로부터 이 시기에 도착했는데, 그들은 모든 상황이 완료되었음을 알게되었다.(11)     

인용은, 코라이 왕국이 그러니까 조선 왕국이 서양의 무기를 무장하고 나타난 이아포니아 군대에게 얼마나 무기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키나 그러니까 중국의 내륙 지방으로 피난하려했다는 지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찌되었든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아우구스티누스라 불린, 고니시 유키나와가 도성을 장악하고 거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까지가 코라이 전쟁의 초기 상황에 대한 보고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전쟁의 막바지 혹은 결과에 대한 보고이다. 예수회 신부는 코라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Coraini vincunt Iaponios  (코라이인이 이아포니아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세 번째 재앙이 찾아왔다. 왜냐하면 불리한 새로운 소식이 코라이 왕국으로부터 많이 날라왔기 때문이다. 코라이인들이 정신을 다시 가다듬고 이아포니아 군대를 무찔렀다. 거대한 함선으로 이아포니아 배 300척을 가로막아 버렸고, 선원들을 도륙했다. 콰바코도노스의 조카가 차지하고 있었던 8개의 성도 다시 회복하였다. 이때 많은 이아포니아 군사가 살륙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물자 보급이 끊긴 이야포니아 군대는 아주 큰 고생을 하였다. 또한 질병이 크게 돌았다. 그로 인해 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많은 군인들이 진지를 이탈해 이아포니아로 도망쳤다. 이 전쟁을 이길 수 없다는 생각으로 모든 군인들이 절망에 빠졌다. 이 사실이 콰바콘도누스에게 큰 수치와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12)    

5.
예수회 신부가 묘사하는 전투는, 그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장군이 마지막으로 지휘했던 노량해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든, 예수회 신부는, 이아포니아가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전쟁의 패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큰 치욕과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고 한다. 이 책의 편집자인 하이우스는 코라이 전쟁의 승리자가 “코라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데, 이런 표제를 달았던 이유는 전쟁의 결과에 대한 예수회 신부의 객관적인 기록에 의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어찌되었든, 코라이 전쟁은, 동아시아, 그러니까 이아포니아, 키나 그리고 코라이가 새로운 지정학적 질서로 짜이는 데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코라이 전쟁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동아시아를 새로운 질서를 여는 서곡이라 하겠다. 동아시아 삼국이 맞붙어 힘겨루기를 시작하는 시기가 바로 이 전쟁부터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구도도 실은 이 코라이 전쟁 때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본다. 

이와 관련해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1492년이다. 그 이후 딱 100년 뒤에 코라이 전쟁이 발발했다. 그런데, 이 전쟁이 발발하게 된 근본적인 배경에는 코라이를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려는 이아포니아와 그들이 받아들인 서양에서 수입된 무기의 위력과 종교적 염원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기본적으로, 동양 세계와 서양 세계가, 그 형식이 어떤 모양을 취하든 간에, 한바탕 힘겨루기를 벌였던 최초의 사건이 코라이 전쟁이라 하겠다. 이 힘겨루기는, 이후 역사적으로 중요한 여러 후속 변화를 만들어냈는데, 대표적으로 키나의 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교체되었고, 이아포니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서 도구가와 이에야스 막부 정권으로 권력이 이양되었고, 코라이는 또 다른 전쟁의 위험(병자호란) 앞에 놓이게 되었다. 

물론, 코라이 전쟁이 미친 여러 영향은 거시사적인 측면에서만 관찰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선, 현대적 의미에서 본다면, 오히려 더욱 중요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는 미시적인 변화도 함께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쟁으로 인해 이아포니아에 포로로 끌려간 코라이인들이 그리스도교 신자로의 개종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는 것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지면관계상 이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겠다. 하지만 이 개종이 의미 있는 것은, 이아포니아가 서양의 물질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다면, 이 전쟁을 통해서 코라이는 서양의 정신문명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물론, 이아포니아가 지정학적인 이유에서 서양 정신문명의 제도적 실체인 그리스도교를 먼저 받아들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아포니아는 도쿠가와 이에아스(徳川家康, 1543-1616) 막부의 박해를 받고 나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확산하지 못했다. 

사실, 이아포니아인이 받아들인 물질문명의 정도를 생각해본다면, 그들은 정신문명보다는 물질문명의 수용에 더 치중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론이 그들이 주창한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일 것이다. 하지만, 서양의 정신, 그러니까 종교에 대해 코라이인이 보여준 태도는 이아포니아인이 보여준 태도와는 처음부터 크게 달랐다. 이는 코라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이아포니아로 끌려간 코라인들에 대한 예수회 신부의 보고에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다.    

Coraini ad fidem accipiendam idonei (코라이인들은 [그리스도교]신앙을 받아들이는데에 있어서 적합한 이들이다.)  
성(聖) 금요일 저녁이었다. 성당의 문을 닫고 다음 날인 사바투스 날(토요일)에 있을 세례식을 준비하고 있는 즈음에, 성당의 문 옆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창문을 열고 무슨 일로 그러는지를 묻자, 코라이인들이 무릎을 끓고 이렇게 아주 겸손하게 이렇게 답했다. “신부님, 이곳에는 우리 코라이들만 있나이다. 어제, 전쟁 포로인 우리에게는 “십자가 행진”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나이다. 해서 이곳으로 찾아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코라이인들은 이렇게 말을 하면서, 피를 토하듯이 절실하게 간청했는데, 이 말을 듣는 이는 그 어느 누구도 흐르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이 코리아인들은 참으로 강했고, 진실로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신들은 결코 이아포니아인들에게 뒤지지 않다”고 주장했다. 코라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새로운 수확의 첫 결실이 하느님께도 기쁨이 되었고, 또한 그들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아포니아를 통해서 코라이에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된다면, 코라이 왕국에 복음이 널리 전파될 것이라는 믿음이 모든 사람들이 가지게 되었던 공통의 확신이었다.(13)

우선, “코라이인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적합한 이들이다”라는 표제에 주목하자. 물론, 하이우스가 이렇게 표제를 만든 것은 예수회 신부의 기술에 토대를 둔 것인데, 편지는 예수회 신부가 코라이인들을 매우 동정어린 시선으로 맞이했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다고 전한다. 어쩌면, 코라이인이 서양의 정신세계 혹은 종교세계를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쟁 포로라는 점에서 구원이 절실했다는 것이 한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이유는 아닐 것이다. 왜나하면, 나중에 소개하겠지만, 18세기와 19세기에 이르면 전쟁이 아님에도 종교적인 이유로 자발적으로 순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14)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연구가 요청된다. 물론, 이 글에서는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았지만, 코라이 전쟁 시기에 이아포니아로 끌려가서 순교한 코라이 신자들도 이 책에서는 많이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주로 세례명으로 언급되기에 추적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어서, 이에 대한 보고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자. 어찌되었든, 이에 대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탐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하지만, 코라이 전쟁은 결론적으로 코라이를 서구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코라이인에게는 새로운 정신 세계를 소개해 준 사건이라는 점만큼은 확실하다 하겠다. 물론, 코라이 본토가 아니라 멀리 바다 건너 이아포니아에서였지만 말이다. 이런 사실들을 고려할 때에, 코라이 전쟁이 코라이 왕국은 물론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새로운 역사의 시대를 알리는 서곡이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겠다. 

<주>
(1) Regnum hoc Corai patet in longum plus minus centum leucas, in latum vero sexanginta, et licet eius incolae natione, lingua et robore corporis(quod eos Chinensibus reddit formidabiles) sint distincti a Chinensibus, tamen quia tributum pendunt Regi Chinensi et cum eius subditis agitant commercia, videntur leges vestitum, instituta gubernationemque Cinensium sectari. Confines sunt ex una parte Tartaris aliisque gentibus, cum quibus nunc pacem colunt, nunc bella gerunt. Cum Cinensibus vero perpetuam habent pacem. Valent arcu et sagitta, caeteris armis quae pauca vel vitiosa habent, minus. Itaque aequari non possunt Iaponiis, quibus ob bella continua in armis exercitatio est, et natura magis sunt animosi et fortes, fistulus ferreis, lanceis, machaeris praestantibus instructi. Tantum re navali Coraianis atque etiam Chinensibus cedere coguntur, ob magnitudinem et robur lignorum, quibus in mari utuntur. Itaque si mari classibus certandum esset, non dubium est, quin utrisque inferiores essent futuri. 
(2)<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정성화-양윤선 옮김, 살림, 2008년.
(3)<일본사> 필사본의 운명에 대해서는, <임진난의 기록: 루이스 프로이스가 본 임진왜란>, 198-202쪽을 참조하시오. 
(4)“Corai”라는 명칭은 아마도 “고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마테오 리치는 조-일 전쟁을 언급하면서, “Coria”라고 표기하고 있고, 그 다음 세대인 아담 샬은 “Corea”라고 표기하고 있다. 어찌되었든, 여러 표기 가운데에서 “Corea”가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이는 아마도 리치가 Coria를 언급하는 것이 단 한 번밖에 없지만, 소현 세자의 편지를 담고 있는 아담 샬에 대한 책이 유럽에 널리 유통되었고, 그 결과 아담 샬의 Corea가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5) 263 쪽: Haec una semper fuit cura Taicosamae, hoc unum stadium, firmare Imperium suum et Iaponiae Monarchiam in suae stirpitis propagare posteros. Cum vero liberis careret, quorum in regnum successione apud posteros perpetuam sui alere possit memoriam; cogitationes omnes convertit in eam viam et rationem, qua commodissime praestare posset, quod tamdiu in animo agitasset, nemper ut tres nepotes, quod ex uno germano fratre habebat, ad summas dignitates eveheret. Atque hoc occasione in consilium venit indicendi bellum Coraianis, ut regno illo sub jugum misso, (…) . Cum ergo modo supradicto res Iaponicas instituisset, opportunumque tempus adesse judicasset, consilia ista sua diu animo pressa exequendi, patefecit Dominis, se cogitare de bello movendo Coraianis.
(6) 121쪽: Quod ad vniversalem Iaponiae statum attinet, alias scriptum est, Quabacondonum ve[sic]ndicare Imperium in totam Iaponiam. Et certe nunquam vllus tam late fine[sic]s imperii sui propagavit, ac iste; ac in dies illos novis auget sucessibus, ut perfectam constituat Monarchiam, ut posteris nomen relinquat immortale. Neque enim ei satis est ad fastigium omnis dignitatis conscendisse, ex abiectissimo vitae statu, qui erat, secare ligna, humerisque ea in forum deferre, vaenum exponere, ut haberet panem quotidianum; (quemadmodum ipse suo ore non semel confestus est) verum etiam amplificatione regni gravissimisque bellis conatur aeternam sui relinquere apud omnes memoriam. Itaque hoc anno prorsus constituit bellum mouere Sinensibus, secumque in aciem educere omnes Iaponiae Pricipes: et Quamvis id videatur paene impossibile, dexteritate tamen sua id effecit, ut omnes, repugnante nullo, se compararint ad rxpugnandum regnum Corai, ut inde cum omnibus Dominis Christianis uno cursu transmittat in Sinas. Et quod peius est, dicitur cogitare de mutandis statibus ditionis Scimo et status Corai relinquere velle dictis Principibus Christianis; sed, ut ante paucos dies cognovimus, non poterit hoc tempore Quabacondonus haec sua consilia perficere, talemque mutationem instituere. 
(7) 이와 관련해서는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 출판부 2007년을 참조하시오. 
(8) 중국학자 주겸지(朱謙之, 1899-1972)는 13세기 몽고가 유럽을 정복할 당시 그들이 전파한 중국 문명이 사실상 유럽 문예 부흥의 물질적 기초를 이룬 것이라 주장한다. 또한 16세기 이래 예수회 선교사가 중국에 와서 교리를 전도하는 과정에서 소개된 중국 문화가 18세기 유럽 계몽 운동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아울러 주장한다.(≪중국이 만든 유럽의 근대-근대 유럽의 중국문화 열풍≫, 전홍석 옮김, 서울;청계, 2003. 24-25쪽 참조) 물론, 중국 문명이 유럽 문명에 끼친 영향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하겠다. 그러나 주겸지의 주장은 일면적이다. 유럽 문명이 중국 문명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애써 눈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화의 과정에서 서양으로부터 당한 시련의 역사를 감안한다면, 그의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는 하겠으나 전적인 동의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중국의 근대화에 토대를 마련함에 있어서 학문적 기초를 닦아 준 이들이 실은 서양에서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기 때문이다.  
(9) 170 쪽: Ordo autem hic praescriptus erat, ut iter institueretur per regnum Corai, quae est quasi insula, cuius unum caput contiguum est Cinae, et licet separatum regnum, Cinensi tamen regi est subiectum et tributarium. Et quoniam hoc regnum uno bracchio maris a Iapone avulsum est, constituit Quabacondonus regnum Corai sibi subjecere, quod abundet commeatu, ut inde facilius trajicere posit in Cinam. 
(10) 173 쪽: His peractis ad initium tertiae Lunae iter ingressus est per Nangoiam, cum iam mandasset, ut Augustinus transiret in Regnum Corai, et alii Praefecti expectarent in Suscima. Vigesimo ergo sexto die tertiae Lunae pervenit Nangoiam, ubi, annumeratis caeteris Dominis, inventa sunt ducenta hominum milia, exceptis iis, qui a Praefectis quatuor ducebantur. Interim Augustinus cum suis et octingentarum navium classe appulsus est ad Coraium. In cuius exercitu caeteris antecelluit D. Protasius, etsi enim bis mille tantum milites sibi adiunxisset, tamen armorum navigiorumque splendore omnes in sui admirationem concitavit. In ingressu regni Coraiani duo propugnacula vi expugnarunt, in quibus Coraiani magnam fiduciam collocarant, erant enim excelsis communita muris et robore militium et tormentis muralibus, binos palmos et dimidiatum longis, quae globorum vice ejiciebant sagittas ligneas ferro bifurcate cuspidatas fragore maximo, sed quoniam inanis ictus est huiusmodi telorum longius disiunctis, Iaponii instructi fistulis aereis, apud Coraianos ignotis, statim eos a muris abegerunt et scalis ex arundine crassa in hanc rem confectis, atque in moenia conjectis, statim conscendereunt et vexillum in iis constituerunt, repugnatibus quidem Coaianis ad breve tempus, sed mox turpi fuga dilabentibus, cum 5 milia hominum ex eorum parte cecidissent, ex Augustini vero 100 dumtaxat desiderati essent, quadringenti vero vulnerati. 
(11) 175 쪽: Rex Corai videns se ab hoste obsessum atque in varias regni oras multos alios irruere Dominos, acie infesta, cogitavit statione urbis cum suis militibus deserta recipere se intimam Cinam. Quod facile potuit per commoditatem plurimorum equorum, quos ibi habebant, perficere. Secundo ergo vel tertio die post Augustinus, nullo repugnante, urbem regiam ingressus est, occurrentibus qui remanserunt cum multo commeatu atque muneribus. Ita Augustinus, cum aliis Capitaneis comitibus suis, factus est Dominus regiae Vrbis, totumque victoriae honorem fecit suum. Etiamsi enim hoc ipso tempore advenissent reliqui Prafecti et multi e Nangoia, tamen invenerunt omnia iam esse confecta.    
(12) 196쪽: Tertius casus facit, quod multa mala nova nunciaparentur ex regno Corai, ut quod Corai resumptis animis praevaluerint contra Iaponios, immissaque in eos ingenti classe trecentas naves ceperint, vectores mactarint, et mox octo propugnacula quae cuidam Quabacondoni nepoti erant commisa, multis eorum contruciatis, recuperarint. Ad haec quod Iaponii magna laborent penuria commeatus, variis morbis affligantur et extinguantur, multi fuga elapsi Iaponem repetunt, omnes vero desperent de feilici exitu huius belli. Quae nova magno pudore et dolore Quabacondonum affecerunt.  
(13) 439-440쪽: Die Veneris Sancto sub noctem cum clausis Ecclesiae januis pararetur baptisterium, et alia in sequentem diem Sabbathi, ecce, strepitus auditur iuxta ostia Ecclesiae, aperta fenestra petitur quid rei sit, respondent nixi genibus magna humilitate. “Pater, nos Coraiani soli hic adsumus; nam quia ut mancipiis heri non licuit nobis processioni interesse, huc conveniendum putauimus, ut a Deo misericordiam et criminum nostrorum veniam impetraremus.” dumque haec dicunt, tantum sanguinem profudere, ut qui audierunt continere se a lacry[sic]mis non possent. Valet gens haec iudicio cum simplicitate quadam conjucto, et hactenus satis declararunt, nulla re se cedere Iaponiis. Placuit Deo, occasione belli Coraiani, has nobis suppeditare primitias frugum novarum, ad salutem animae ipsorum, omniumque ea communis opinion est, si praedicatio Euangelica, quod facile per Iaponiam fieri potest, aditum inveniat in Corai, faciles incolarum aures inventuram, lateque per illa regna manaturam.    
(14) 용기를 내어서 이야기한다면, 소위 “코라이”인들이 서양 종교를 수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당시 “코라이” 지식인들이 예컨대, 퇴계가 강조했던 하늘의 두려워하는 마음, 즉 경천(敬天) 사상을 숭배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아마도 당시 조선의 지배 사상이 신유학, 그러니까 성리학이었다는 점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어찌되었든, 서양선교사들은 내세웠던 포교를 위해서 성리학의 논리 구조와 설명 방식을 체계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는 특히, 천(天)에 이해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철학자 공자 혹은 중국의 학문(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inensis)> 서문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이 서문은, 흥미롭게도 “경천”의 문제와 관련해서 그리스도교의 논리와 성리학의 그것 사이에는, 인격화된 신인 천주(天主) 문제만 제외하면, 거의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유사성이 원래부터 양쪽 사상에 내재해 있었을 가능성도 높을 수도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가능성은 낮은데, 서양 선교사들이 포교를 위해서 체계적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높다 하겠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보면, 서양 선교사들의 이런 설명 방식과 논리 구조가 당시 그리스도교를 접했던 “코라이인들에게는 그리 낯선 사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사정이 이와 같다면, 성리학이 그리스도교에 어떻게 수용되고 변용되었는지에 밝히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고, 이는 또한 우리 역사에서 자주 논의되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야기된 단절 문제를 재검토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하겠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아포리아 칼럼]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9,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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