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노자는 [도덕경]의 곳곳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도(道)가 대도(大道) = 천도(天道)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으니, 노자에게 있어서 최종 목표는 바로 대동의 사회로 돌아가는 것이 된다.
이제 그동안 앞에서 설명했던 개념들을 바탕으로 하여, [도덕경]의 모든 의미가 응축되어있는 제1장을 풀어서 읽어보기로 하자.
1-1: 道, 可道,非常道;名, 可名,非常名。
도라는 것은, 말할 수 있으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라는 것은, 부를 수 있으면,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처음 이 글을 집필하기 시작하면서 필자는 [도덕경]이나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논어] 등 옛 중국전적들의 공통점이 바로 연역법으로 서술되고 있다는 점이고, 이에 각 전적의 핵심은 첫 장 나아가 첫 구절에 응축되어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노자는 바로 여기서 우선 ①상(常)과 도(道)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으니, 중간에 변하면 그것은 노자가 추구하는 대도(大道) = 천도(天道)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도자는 초지일관의 자세로 변치 않고 도(道)를 행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자는 ②도(道)라는 것이 말로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으니, 도(道)는 바로 ‘사랑’과도 같이 언어만으로 그 의미를 완벽하게 형용해낼 수 없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추상명사인 것이다. 생각해보자.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로만 표현한다면 그것이 사랑이겠는가? 즉 이는 반드시 행동으로 보이는 실천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③이러한 도(道)와 명(名) 즉 ‘이름’이 심지어 동등한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자에게 있어서 ‘이름’은 과연 어떠한 것을 지칭하는 것일까?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이제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32-4: 始制有名,名亦既有,夫亦將知止,知止可以不殆。
통제하기 시작하면 이름이 있게 되고, 이름이 이미 있으면, 무릇 장차 멈출 줄 알아야 하니,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
백성들의 천성을 따르지 않고 억지로 통제하려 하니 법과 제도들이 생기게 되고, 자꾸 법과 제도들을 만들어 통제하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세분화된 법과 제도들을 만들어 통제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처럼 세분화된 법과 제도들을 만들어 백성들을 통제하지 않고 그들의 천성에 따라 다스리게 되면, 백성들이 지도자를 따르게 되어서 나라를 오랫동안 평안하게 유지할 수 있다.
노자는 이 문장을 통해서 ‘유명(有名)’의 개념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니, “통제하기 시작하면 이름 즉 통제의 명분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노자에게 있어서 ‘명(名)’과 ‘제(制)’가 동일한 것이고, ‘제(制)’는 법과 제도를 세분화하여 통제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노자는 이 문장을 통해서 명확하게 “질박함, 소박함”의 도(道)로 통치한 대동의 사회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자는 뒤이어서 “이름(통제의 명분)이 이미 있으면, 무릇 장차 멈출 줄 알아야 하니,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니, 이제 [도덕경]의 첫 구절인 1-1을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동(大同)사회의 통치이념은 말로 형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삼가고 노력하며 몸소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쉽게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변치 않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통치이념이 아니다. 대동사회의 나라를 다스리고 유지하는 제도는, 말로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만약 이를 오늘날과 같이 보편타당한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변치 않고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다.”
1-2: 無名, 天地之始;有名, 萬物之母。
무명은 천지의 시작이고; 유명은 만물의 근원이다.
지도자가 법률과 제도를 세분화하여 통제하지 않고 백성들의 천성에 따라 다스리는 대동사회의 통치이념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존재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바라는 바나 구하는 바가 생기게 되자, 오늘날과 같이 지도자가 세분화된 법률과 제도를 만들어 통제하기 시작했으니, 이렇듯 세분화된 법률과 제도로 나라를 통제하는 것이 세상의 만물을 하나로 만들지 못하고 흩어지게 하는 근원이 되었다.
1-3: 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
그러므로 항상 바라는 바가 없어, 그럼으로써 무명의 오묘함을 살피고; 항상 바라는 바가 있어, 그럼으로써 유명을 구함을 살핀다.
그러므로 대동의 사회에서는 늘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백성들의 천성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지도자가 그 통치이념의 오묘함만을 살피면 되었다. 하지만 대동사회가 끝나고 사리사욕을 탐하는 마음이 싹트기 시작하자, 이를 통제하기 위해서 인위적으로 세분화된 법과 제도들을 만들게 되었다.
1-4: 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이 두 가지는 같은 곳에서 나오지만 외형이 다른데, 다 같이 그것을 일컬어 심오하다고 하니, 심오하고도 또 심오하여, 수많은 오묘함의 문이 된다.
천성에 따르는 대동사회의 통치이념인 도(道)와 지도자가 세분화된 법률과 제도를 인위적으로 세분화하여 나라를 통제하지 않는 무명(無名) 이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의미이지만 단지 표현만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이 둘을 모두 같이 일컬어서 심오하다고 하니, 심오하고도 또 심오하여, 나라를 오랫동안 평안하게 유지하는 수많은 오묘함을 이해할 수 있는 비결이 되는 것이다.
나오면서
노자는 [도덕경] 1장부터 81장까지의 서술을 통해서 이상향인 대동사회로 복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하고, 나아가 그 방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앞에서도 간단하게나마 언급한 바 있듯이, 노자는 [도덕경]에서 31차례에 걸쳐 성인(聖人)에 대해 언급한 반면, 군자(君子)에 대해서는 31장에서 겨우 2차례에 걸쳐 말했을 뿐이다. 더욱 더 재미있는 것은 [논어]에서 군자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무려 107차례나 되는 반면, 성인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은 겨우 4차례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이에 우선 공자가 [논어]에서 성인에 대해 언급한 다음의 두 구절을 살펴보자.
7-25: 子曰: "聖人,吾不得而見之矣。得見君子者,斯可矣。"
공자가 이르시기를: “성인은, 내가 만나볼 수 없구나. 군자를 만나볼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좋겠다.”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는 세 가지 두려워함이 있다. 천명을 두려워하고, 대인을 두려워하며, 성인의 말씀을 두려워한다.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니, 대인을 업신여기고, 성인의 말씀을 조롱한다.”
공자는 성인과 군자가 결코 같은 개념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성인은 군자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최상위의 개념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노자 역시 [도덕경]의 71장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 있다.
71-3: 聖人不病,以其病病,是以不病。
성인은 결점이 없는데, 그 결점을 결점으로 여기기에, 이 때문에 결점이 없다.
대동사회를 이끈 지도자들은 백성들이 기민함과 얕은꾀를 쓰지 않도록 했는데, 그러한 것이 결국 지도자의 잘못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삼가여 순일한 덕을 베푼 것이다.
결국 노자가 [도덕경]을 집필한 의도는 대동사회의 통치이념인 도(道)를 설명하기 위해서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자는 [도덕경]의 31장에서만은 유독 군자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니, 이제 31장에서 군자가 출현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31-1: 夫佳兵者,不祥之器。
무릇 훌륭한 전쟁이라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기구이다.
대동의 통치이념은 만물에 퍼져있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세상의 만물은 각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성이 있다. 물론 전쟁이라는 것 역시 하늘로 부여받은 천성이 있으나, 이는 그 본성이 상서롭지 못하여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다.
31-2: 物或惡之,故有道者不處。
세상만물이 그것을 싫어하기에, 그러므로 도가 있는 이는 머물지 않는다.
전쟁은 세상 만물이 모두 꺼려하기 때문에, 대동의 통치이념을 이해하는 성인은 이러한 무력을 멀리하는 것이다.
31-3: 君子居則貴左,用兵則貴右。
군자는 자리함에 곧 왼쪽을 귀히 여기고, 전쟁을 쓰는 이는 곧 오른쪽을 귀히 여긴다.
상고시대의 예의와 풍습에서 왼편은 양(陽: 삶)을, 오른편은 음(陰: 죽음)을 나타냈다. 따라서 대동의 통치이념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지도자는 길함을 나타내는 왼편을 중시하고, 전쟁을 일삼는 지도자는 불길함을 나타내는 오른편을 중시한다.
31-4: 兵者,不祥之器,非君子之器,不得已而用之,恬淡為上。
전쟁은, 상서롭지 못한 기구이니, 군자의 기구가 아니라서, 부득이한 경우에 그것을 씀에, 사리사욕이 없음이 상위에 있게 된다.
전쟁이란 상서롭지 못하여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이니 대동사회의 통치이념으로 나라를 이끄는 성인들은 쓰지 않는데, 군자는 아주 부득이한 경우에 전쟁을 하지만, 설혹 전쟁을 하더라도 설혹 최소한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쳐야지, 이겨서 사리사욕을 채우거나 공을 세우려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즉 [도덕경] 31장의 주제는 바로 무력을 통한 전쟁이니, 이 점에 대해서는 공자(孔子) 역시 언급한 바 있듯이 성인은 결코 무력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노자는 부득이한 무력을 언급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주어를 군자로 대체한 것이니, 공자 역시 이 점에 대해서 동의한 바 있다.
14-6: 子曰: "君子而不仁者有矣夫。"
공자가 이르시기를: "군자임에도 어질지 않은 사람은 있다."
성인은 삼황오제를 일컫는 것으로, 그들은 인류를 창조한 이래 태초부터 존재했으므로 어느 누구한테도 배우지 않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도(道)를 이해하고 자연스럽게 몸에 받아들여 실천한 대동사회의 지도자인 반면, 군자는 비록 성인과 같이 태어나면서부터 도를 이해하고 실천한 인물은 아니지만, 옛 성인의 도를 온전하게 배우고 부단히 노력하여 실천한 소강사회의 지도자를 일컫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자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오늘날에는 큰 도가 사라졌으니, 세상이 家天下(가천하)가 되었다. 각각 자신의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되고, 자신의 자식만이 자식이 되었다. 재물과 힘은 자신을 위해 썼다. 대인(천자와 제후)은 세습을 예의로 삼았고, 성곽을 쌓고 그 주변에 못을 파서 (적들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공고히 하였으며, 예의로 기강을 삼았으니; 그럼으로써 군신관계를 바로 하고, 그럼으로써 부자관계를 돈독히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형제간에 화목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부부 사이를 조화롭게 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제도를 설치하고, 그럼으로써 밭을 구획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용감하고 지혜로운 자를 존중하고, 공적을 자기의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권모술수가 이때부터 흥기하고, 전쟁이 이때부터 발생하였다. 우, 탕, 문왕, 무왕, 성왕, 주공은 이것(예의)으로 그것(시비)을 선별했다. 이 여섯 군자들은, 예의에 삼가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럼으로써 그 의로움을 분명히 하고, 그럼으로써 그 신의를 깊이 헤아렸으며, 허물을 드러내고, 형벌과 어질음을 꾀하고 꾸짖어, 백성들에게 항상 그러함을 보여주었다. 만약 이에 말미암지 못하는(이에 따르지 않는) 이가 있다면, 집정자(권세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물리쳐, 대중들이 재앙으로 삼았다. 이를 일컬어 소강이라고 한다. [禮記(예기)] <禮運(예운)>
따라서 군자란 대동사회가 끝난 후인 하나라와 상나라 주나라 3대 중에서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끈 여섯 명의 지도자-우, 탕, 문왕, 무왕, 성왕, 주공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노자가 왜 [도덕경]에서 성인만을 언급했는지 이해할 수 있으니, 바로 여기서도 노자는 오직 대동사회로의 복귀만을 소리 높여 외쳤던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간 단편적으로 설명해온 노자의 사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지도자가 ①사리사욕을 탐하지 않고 나라의 물자를 아껴 쓰는 검소함을 실천하고 ②백성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는 자애로운 태도로 ③백성의 밑에 처하여 백성의 마음을 지도자의 마음으로 삼으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추게 되면, 이에 ④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공변된 객관적이고도 공정한 태도와 ⑤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고 모두가 함께 하려는 조화로움을 갖추게 되며, 그렇게 되면 ⑥자기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한 강함과 부드러움으로 오로지 나라와 백성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순일한 덕치를 베풀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정도의 경지에서 멈춘다면 그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칠 것이니, 여기에 ⑦처음의 마음을 변치 않고 끝까지 견지하는 초지일관의 태도와 ⑧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신뢰와 성실함 ⑨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태도 ⑩신중하게 생각하여 판단하는 태도를 갖추게 되면, ⑪태평성대를 이끌었던 성인들의 통치법을 이해하려 실천하게 되므로, ⑫이에 세상은 다시금 법과 제도를 세분화하여 백성들을 통제하지 않고 스스로 그 천성을 누리게 하는 무위자연의 대동사회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자는 분명히 [도덕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동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으니, 이제 남은 과제는 우리가 과연 그의 뜻을 이해하고, 도(道)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조화롭게 실천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따름이다. 대동사회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묵묵하게 도를 이해하고 부단히 실천하는 지도자가 있는 한 그 자체가 대동사회일 뿐.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노자 다시보기]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6, 2016년 6월, 안성재, 인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