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과학책이 아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나오는 엔트로피 개념을 석유에너지 위기와 관련시켜 일종의 문명 비평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엔트로피 법칙을 과잉 확대 적용할 뿐만 아니라 추가적으로 제시하는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도 너무 조악한 편이다. 그런 허술함이 지식인 집단 특히 과학자 집단에게서 이 책이 맹폭을 당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도 괘씸한 천재적 소양을 보이는 핑커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소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굴드마저 이 책은 과학적으로 한심한 반지성적 프로파간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손꼽히는 과학 고전으로 분류되어 널리 읽히는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감동을 주며, 심지어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는데 영향을 준 인생의 책이었다는 얘기를 듣곤 한다. 이 책은 주류적 흐름을 의심하고 동요될 준비가 이미 된 반골기질의 사람들만을 선동할 수 있는 팜플릿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이런 경우 한걸음 더 나가기 위해서는 리프킨의 주장 중에서 옥석을 가려보고, 그의 주장에 동요되는 일군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의 의의를 분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러 과학자들이 구체적이고 꼼꼼한 분석을 통해서 이 헐렁한 책의 잘못된 유명세를 난타한 글은 여럿 있는 것 같다. 여기서 그의 과학적 허술함을 하나하나 비판하는 것은 의미가 별로 없을 것이다. 단지 그가 너무 단순하고 절대적인 방식으로 적용을 하고 있는 엔트로피 개념의 심화된 의미를 소개함으로써 그가 놓친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2.
우선 리프킨이 엔트로피라는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보존 법칙이다. 우주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총량은 일정하며, 변환이 될 뿐 결코 새롭게 발생하거나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열역학 제2법칙이 엔트로피와 연관이 있다. 이 법칙은 소위 엔트로피 법칙이라고도 하는데,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즉 이용이 가능한 것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혹은 질서 있는 것에서 무질서한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2법칙의 의미를 우주가 체계와 가치에서 시작되어 끊임없는 혼돈과 황폐로 향하는 것이라고 리프킨은 설명한다.
닫힌계에서는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무질서도에 해당하는 엔트로피는 계속 상승하게 된다. 우주가 그러하고, (태양에너지라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물질적 자원적으로는) 지구도 거의 닫힌계에 가깝기 때문에 지구의 엔트로피도 궁극적으로 상승하는 방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구 내에서 철이나 구리 금 아연 등의 필수적인 광물은 제한되어 있다. 그것을 쓰고 버리다보면 유한한 자원은 어느새 탕진될 것이다. 지구는 열린계라는 일반적 주장은 태양에너지의 유입 때문인데, 아무리 대단한 태양에너지의 결집으로도 인간에게 필요한 금속들을 새롭게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필수적인 금속들을 지구 밖의 우주에서 가져올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가져오는 우주항공 비용은 너무나 막대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지구는 물질적으로 닫힌계에 가깝다고 리프킨은 주장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구가 실질적으로 닫힌계이기 때문에 엔트로피 증가는 불가피하다. 이러한 불변의 원리인 엔트로피 법칙이 시사하는 바는, 역사는 진보하며 과학과 기술에 의해 더욱 질서 있는 세계가 이루어진다는 근대적 기계론적 세계관의 신화를 타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엔트로피 법칙을 충분히 이해하면 사람들의 인생관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고, 현대인의 고에너지소비 문화가 지속 불가능한 환상이었음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라 말한다. 결국 엔트로피에 의거해 인류 문명 전반에 문제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세계관 수립을 촉구하는 것이다.
3.
이제 리프킨이 말하는 엔트로피의 특징을 좀 더 구체화해보자. 리프킨은 엔트로피 법칙이 열역학 제2법칙에서 나왔음을 말하면서 물질이 사용가능한 것에서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질서에서 무질서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그는 엔트로피 법칙을 우주와 사회의 경향성에 대한 객관적인 법칙으로 보는 것 같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대한다는 것은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가 증가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런 점에서 공해란 엔트로피에 주어진 별명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계’ 내에서는 사용이 불가능한 에너지인 공해의 양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고 본다.
또한 식물이나 동물 같은 생명체에서 보이는 분자의 훌륭한 조직화도, 얼핏 보기에 열역학 제2법칙을 넘어서는 것 같지만, 생물의 구성에서 보이는 엔트로피 감소는 생물 주변의 보다 큰 엔트로피 증가와 결부되어 있다는 블럼의 주장을 소개한다. 생명 활동은 다른 화학반응과 달리 외부의 환경에서 새로이 에너지를 취하는 힘을 스스로 갖고 있기 때문에, 생명반응은 ‘열린 계’이며 물질과 에너지를 외부와 교환함으로써 자신의 엔트로피를 낮출 뿐이라는 것이다. 엔트로피에 의하면 진화란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를 모두 소비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고도로 진화된 생물은 진보가 아니라 사용이 가능한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로 변환시킨 것이다. 엔트로피와 생물이 관련된 이런 예에서도 엔트로피는 마치 모든 동물식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앞서의 ‘공해’라는 표현처럼) 객관적이고 실체적인 성질을 가진 것으로 리프킨은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이렇게 엔트로피 개념을 마치 질량이나 에너지와 같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물리학적 양처럼 기계적으로 적용해도 되나 싶은 의문이 든다. 가령 어떤 사람이 ‘엔트로피가 낮고 에너지가 높은’ 맛있는 코스요리를 먹었다고 치자. 그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필요한 영양분을 흡수하고 시간이 지나면 남은 찌꺼기인 대변을 배출할 것이다. 대변은 리프킨이 보기에 당연히 높은 엔트로피를 가진 물질이다. 인간의 세포가 증식하고 체온을 유지하는데 쓰고 남은 공해물질인 것이다. 그러나 그 공해물질은 구더기나 어떤 식물들에게는 좋은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구더기는 거기서 영양분을 흡수해 파리가 될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구더기에게는 인간이 배출한 높은 엔트로피 물질이 자신의 에너지원이 되는 낮은 엔트로피 물질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엔트로피를 객관적 실체로 보려고 하는 리프킨의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예시한다.
4.
텍스트에서 리프킨은 엔트로피에 대한 볼츠만이라는 물리학자 연구를 간단하고 애매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그러나 볼츠만의 엔트로피에 대한 역학적 해석은 물리학에서 불멸의 업적 중에 하나이다. 그의 업적은 열역학 제2법칙의 비가역성을 역학의 입장에서 통계역학적으로 정식화한 것으로, 엔트로피 증가의 필연성을 확률적 법칙으로 설명해낸 것이다. 볼츠만의 연구는 계승 발전되면서 엔트로피 개념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더 뚜렷하게 제시하게 된다. 엔트로피에 대한 볼츠만의 통찰이 위의 예에서 대변에 대한 인간과 구더기의 입장차를 이해 가능하게 해줄 단서를 제공한다.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와 시원한 오렌지주스 한 캔을 사서, 같은 봉지에 넣어 가져오면 커피는 식고 오렌지주스는 미지근해질 것이다. 클라우지우스는 이 경험을 엔트로피로 수량화했다. 그러나 볼츠만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다. 엔트로피는 열량 나누기 온도이다. 왜 그럴까. 그 비율은 무엇을 의미할까.
간단한 실험 예로서 볼츠만의 통찰의 일면을 살펴보자. 모양이 같은 유리그릇 쌍이 있다고 해보자. 그 그릇들은 뚜껑을 닫아 밀폐할 수 있다. 한 그릇에 색깔이 적갈색인 브롬 기체를 넣고 다른 그릇은 공기로 채운다. 두 기체의 온도와 압력은 동일하게 맞춘다. 이제 두 그릇을 연결하고 통로를 개방하면, 두 기체가 섞이기 시작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두 그릇은 브롬과 공기가 골고루 섞인 혼합기체로 채워질 것이다. 두 번째는 동일한 온도와 압력의 브롬 기체로 두 유리그릇을 채우자. 두 그릇을 연결하고 마찬가지로 통로를 개방하면, 어떤 변화도 관찰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실험 모두에서 기체 분자의 무작위한 확률적 배열이 두 그릇내의 기체들을 섞이도록 만들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현상에서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두 번째에서는 엔트로피가 일정하게 유지된다. 두 번째 브롬 기체끼리 연결한 상황에서도,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한 그릇에 있는 기체는 다른 그릇으로 분산되어 섞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간의 인식이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증가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이 엔트로피의 본성과 관련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엔트로피는 무게나 조성 같은 사물의 절대적인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엔트로피는 바로 우리 인간이 사물에 관하여 아는 것(인지하고 있는 정보량)과 관련이 있다.
볼츠만의 업적은 훗날 막스 플랑크에 의해 S=k logW 로 표기되었다. S는 엔트로피이며 k는 비례상수로서 볼츠만 상수이다(k=10의 -23제곱). W는 계의 ‘알려진’ 성질들을 변화시키지 않는 배열들의 수이다. 엔트로피는 계의 절대적인 성질이 아니라 상대적인 성질이다. 엔트로피는 관찰자가 갖고 있는 정보량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 엔트로피는 계를 이루는 분자들의 세부운동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나타내는 측정값이라고 볼츠만은 지적한다. 엔트로피는 온도나 압력, 부피 같은 객관적 양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대상에 대해 가진 정보의 결여와 관련된 양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리프킨이 엔트로피를 마치 절대성과 불변성을 가진 물리적 성질인 것처럼, 그 개념을 확장해서 적용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마치 기계적 세계관에 물든 채 고에너지 소비문화에 찌든 현대인이라는 악마에게, 공포영화에 나오는 만능의 십자가처럼 엔트로피 개념을 휘두르고 있지만, 개념의 남용이 설득력과 글의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 이런 방식의 인색한 평가는 이 책이 과학 카테고리 내에서 추천되는 고전급 책으로 분류된 탓도 있을 것이다. 시정되어야 한다. 이 책은 과학책이 아니며 환경주의 담론을 그런대로 설득력 있게 묘사하는 비평 에세이이기 때문이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저서와 자매품정도 되는 책이라고 보면 적절할 것이다.
5.
이처럼 이 책에서 엔트로피나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개념들을 엄밀하게 따져 평가하자면, 이 책은 처참한 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미덕은 개념적 정교함에 있지 않다. 지구라는 제한된 환경 속에서 지속가능한 삶을 촉구하고 호소하면서 실천을 이끌어 내려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일부 논지는 꽤 설득력이 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이행하면서 주로 목재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였고, 목재사용이 고갈되고 한계에 다다름에 따라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쓰면서 산업혁명의 시기를 도래하게 했고, 이후 석유 자원에 근거하는 현대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의 역사적 전환과정에서 에너지와의 관련성을 분석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모든 문명은 발전단계상 주된 에너지 자원 총량의 고갈에 의해 위기와 혼란이 오고, 그래서 그전에 비해 구하기 번거롭고 힘든 새로운 에너지 자원으로 필연적으로 이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주로 석유자원에 근거하는 현대문명도, 문제 많은 핵분열을 이용한 원자력 발전이나 요원한 핵융합을 차치한다면 그 자원의 한계를 인정하고 후세를 위해 미리 대처하자는 지당한 주장을 한다.
그는 시장주의나 사회주의 경제학 모두 경제를 가능케 하는 외부 환경이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점에서 둘 다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경제학의 한계는 사회 내부의 문제에 있지 않다. 경제학에서의 좌우다툼은 부차적이라는 것이다. 근본적인 것은 이 사회와 자연 사이에 있으며, 환경 인자를 가장 큰 비중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환경인자 즉 제한된 총 에너지양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다음 세대에게 에너지 없는 가혹한 혹성만을 남기게 되는 비윤리적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엔트로피 사회’, 즉 저에너지 소비 사회를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에너지 소비 사회라고 무조건 에너지를 줄이라는 얘기는 아니라고 한다. 너무 많이 내리면 사회가 경직화되고 부자유스럽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너지 소비 한계의 적정성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기본적인 원칙은 이렇다. 저에너지 소비사회에서는 에너지나 자본을 대규모로 집약한 기술보다는 ‘적절한 크기의 기술’ 또는 ‘중간 기술’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야 한다. 그것은 지역생산적 노동집약적 지방분산형이며 태양 등의 재생에너지로 연료를 공급하고, 환경적으로 건전하며 또한 지역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라야 한다. 그래서 저 에너지 소비사회는 가난뱅이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적절한 분배를 통해 과부족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이 일반적인 환경운동가의 표준적 생각과 다른 내용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렇듯 리프킨의 주장은 너무 당연하게 옳은 말씀이다. 석유자원 고갈 이후에 우려되는 혼란을 대비하고, 지속 가능한 친환경적인 생활로 전환하자는 취지는 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상한 수사, 근대성에 대한 너무 얄팍한 사상적 확대해석이라는 부분들을 제거하면 리프킨의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며, 언젠가 도래할 지구적 위기에 대해 방심하는 사람들에 대한 근사한 쓴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일부 사람들만 이런 요청에 귀 기울이고 행동할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리프킨이 비판하는 것처럼, 여전히 습관적으로 더 많은 것을 원하고 소비하길 바란다. 위기가 아주 멀지 않은데도 말이다. 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게 될까? 그 이유가 고에너지 소비사회의 달콤함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지박약 때문일 수도 있고, 과학기술이나 산업의 혁신이 뭔가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지 않겠느냐는 낙관주의적 관점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십 년 뒤의 ‘임박한 파국에 대한 무관심’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어쩌면 인간의 신체적 심리적 반응의 한계 때문일 수 있다.
우리가 암이나 중병으로 6개월이나 1년 혹은 2년의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다면 어떨까? 우리는 슬퍼함을 넘어, 인생을 되돌아보고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른 진지한 선택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모든 인간의 삶은 유한하긴 마찬가지이고,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잘해야 1세기 남짓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모든 인간의 삶은 시한부 인생인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30-50년 남은 자신의 시한부 인생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고 진지한 선택의 기로에 서려고 하지도 않고 별 동요 없이 일상을 살던 대로 산다. 인간에게 인생의 방향전환의 계기가 되는 ‘시한부 인생’의 절박한 느낌이 작동하려면, 그것은 ‘직접적 느낌’을 주는 특별한 시간적 역치 내에서라는 조건이 필요한 것 같다. 물론 인간이 미래에 자신을 투영하여, 죽음의 필연성과 존재의 유한성을 자각함으로써 범속함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식의 철학적 주장도 있지만, 그런 주장을 대중적으로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남은 인생이 10년이라면 어떨까? 아니면 5년이라면? 어떤 시간적 기준점에서 그것을 절실한 ‘시한부 인생’으로 판단하고 진지하게 다른 태도로 전환할 수 있을까. 그 기준은 실로 애매하고 사람마다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가까운 1년 내외의 죽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감정을 쏟고 행동도 달리하게 되지만, 대략 30년 이상의 남아 있는 시한부에 대해서는 태평할 것 같다. 중요한 변화나 파국의 임박에 대해 적절한 반응과 대처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것일지라도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변화를 유발할 정서가 작동하기 힘들게 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는 평균적 정서 패턴의 한계에 대한 추정일 뿐이지, 이성의 한계에 대한 규정은 아니다. 또한 역사적으로 보면 이성적 노력의 우위는 자명하지 않다. 그래서 미래는 알 수 없다고 하는 것 같다)
6.
이제 반대쪽으로도 가보자. 왜 리프킨의 <엔트로피>처럼 과학을 빙자한 허술한 책의 상상력에 일군의 사람들은 끌리고 매혹될까? 그가 호소하는 자원 위기에 대한 이성적인 동의 때문일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평균적 사람보다 주류적 질서를 불편해하고 새로운 것을 원하는 반골기질 혹은 비판적 경향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다수는 아니고 평균 20% 정도로 추정이 된다(이 20%라는 대략적 수치는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 대한 복종’ 연구에서 (가학적인) 실험에 불복종한 사람들의 비율에 근거했다). 좋게 말하면 이들은 비판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고, 윤리적으로 옳아 보인다. 하지만 제한된 장소에서 행해진 밀그램의 심리 실험에서는 어느 정도 정답이 있었다. 가학적 행위에 불참함으로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는 ‘인도적 태도’가 옳다는 단순한 선악구분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 현실 속에서는 그런 선악구분은 모호하고 사후적이며 수많은 변수에 시달린다. 그래서 반골기질의 사람이 비판적 주체와 동격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그 20%의 사람들에 대해 주류적 질서를 의심하는 ‘비판적 경향성’이 있는 집단으로서 정의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비판적 경향성’이 있는 사람이 ‘비판적 주체’라는 윤리적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것이 필요하다. 제대로 ‘비판적’이기 위해서는 지적 성실성과 현실적 적절성이 필요하고, 대안적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더 복잡하고 사회적인 역학들이 얽혀있다. 단지 비판적 경향성은 비판적 주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다. 일단은 그 경향성을 잠정적으로 긍정하고 얘기를 진척시켜보자.
비판적 경향성의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의 핵심은 그에게 주어진 주류적 질서를 거부하고 스스로 새판을 짜보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극점에는 거듭남과 혁명처럼, 무엇인가에의 참여가 동시에 그것이 유의미하다고 결단하고 동시에 의미의 기준을 설정하는, 자기 관계적 성향을 갖는다.
‘자기 관계적’이라 함은 호프스테터가 <괴델, 에셔, 바흐>에서 인간 의식의 특질을 규정하면서 핵심으로 내세운 것으로서 주어진 형식체계에 매몰되지 않고 한발 물러서서 볼 수 있는 경향성, 그래서 자신의 위치를 지속적인 메타적 위치로 미끄러뜨리는 특이한 경향성에 대한 묘사이다(오래전에 헤겔도 이미 이와 유사한 주장을 했었다). 이것은 아마 일군의 인문학자들이 환원주의적 과학자들에 맞서, 지켜내고자 하는 ‘인간의 고유성’내지 ‘인문학적 가치’의 본질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것은 환원주의자에게는 이물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이물질이 때때로 불완전한 과학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활성화시키는 작인이기도 한 것 같다. 물론 그에 대한 이해를 위한 기회비용은 적지 않기 때문에 환원주의자는 인지적으로 일정 한도 내에서만 인정하고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인간의 특수성 때문에 뭔가 비주류적인 새로운 것을 원하고 대안을 바라는 사람들이 일정비율 존재하는 것 같다. 다수 의견에 따르지 않는 이질적인 집단의 적절한 비율은 진화심리학적으로도 긍정된다고 한다. 외부환경의 다양한 위기에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식으로 일정 비율 존재하는 비판적 경향성의 사람들에 의해 리프킨의 문명 비판적 견해가 매혹적 담론의 하나로 소비되는 게 아닐까 싶다.
7.
리프킨의 주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책이 출간된 미국의 1980년도에는 그의 주장이 호소하는 바가 더 절실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세계적인 2차 석유파동으로 1979년도에 석유 가격이 급등하고 인플레이션은 심각할 정도였다. 전국 각처에서 제한된 석유를 배급받다가 폭력적 사태(살인사건)까지 벌어지는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한때 대안처럼 생각되던 원자력 분야에서, 1979년 3월 스리마일 섬 원로자로의 노심이 융해되는 사고를 경험하면서 그 충격과 에너지에 대한 사회적 위기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이처럼 리프킨의 <엔트로피>는 석유파동의 심각한 사회적 위기와 새로운 에너지 대안 부재라는 상황 속에서 읽혀져야 한다. 이 책의 원 제목으로는 ‘에너지 위기시대의 사상의 전환’ 쯤이 적당할 것이나 그 위기의 절박성 속에서 우주적 단위로 인플레이션 되어 ‘엔트로피’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것 같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에서 쓰는 용어들은 대체로 과학적 엄밀성이 결여되어 있다. 아마 리프킨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중적인 설득력은 심오함이 아니라 명쾌함에 있다. 학문적 섬세함의 결여는 학자들에게는 환멸이겠지만, 시급한 윤리적 가치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행동을 이끌어 내려는 사회 비평가에게는 이것이 제대로 된 방식일 것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12, 2014년 12월, 이승범, 가정의학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