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광부와 이야기하다 나는 언제부터 그가 사는 지역에서 주택 부족이 심각해졌는지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할 때부터”였으니, 최근까지는 사람들의 기대 수준이 워낙 낮아서 아무리 과밀해도 당연지사로 받아들였다는 뜻이었다. 그는 또 자기가 어릴 때는 한 방에 식구 열한 명이 자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는 아내와 함께 구식의 등 맞댄 집에 살았는데, 화장실에 가려면 몇 백 미터를 걸어야하고 서른여섯 명이 함께 쓰는 화장실이라 줄을 서야 할 때가 많았다고도 했다. 병을 얻어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는 200미터의 장거리 여행을 해야 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 소리를 할 때부터” 그들이 으레 참던 게 그런 생활이었다고 했다.
그의 말이 정말 맞는지는 모르겠다. 단, 확실한 것은 ‘이제’는 그 누구도 한 방에 열한 명이 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오웰이 1936년에 어느 진보단체의 청탁을 받아 잉글랜드의 북부지역 탄광지대를 현장취재하면서, 생생하게 그 지역의 문제를 포착한 글들이 담긴 근사한 에세이집이다. 인용된 글은 생활에 필수적인 주거문제를 다루면서 당시 과밀화되고 슬럼화된 주거환경의 문제점에 대한 고발의 내용이다. 하지만, 그 ‘어느 광부’의 엉뚱해 보이는 대답은 사회 문제의 시작이 객관적 조건 자체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바꿔야할 문제적 상황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상당히 흥미로운 점을 시사하고 있다. 사람이 관여된 세상일들을 판단내리는 데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사실을 문제적 상황으로 평가할 것인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변에서 우리가 흔하게 보게 되는 ‘질병’은 어떠할까?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객관적인 실체적 존재일까? 아니면 그것은 오로지 ‘질병’으로 판단할 때에만 비로소 질병이 되는 가치적 성질을 가진 것일까? 질병의 반대 개념인 정상은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일까? 혈압이 얼마에서 얼마까지 정상이고 혈당이나 간수치도 참고치에 해당하는 정상치가 있으니, 그에 해당하면 정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현실에서 임상의사의 대다수는 질병이 실체적이며 객관적이라고 생각하며, 주관적인 요소가 있다든지 합의를 통해 결정할 수 있는 약속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2.
조르쥬 깡길렘의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은 바로 이런 정상과 질병 개념이 만들어지는 생물학사의 중심부로 들어가,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속성을 파헤치는 책이다. 깡길렘은 푸코의 스승으로, 또 바슐라르와 함께 20세기 프랑스의 과학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력이 특이하게도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통과한 후에 다시 의학 공부를 시작하여 1943년, 이 책의 앞부분에 실린 논문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확하게는 책의 본문 중에서 의학박사 학위 논문이 앞부분 3/4를 차지하고 나머지 부분은 20년 후에 일부 내용을 보강하여 단행본으로 엮은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생리학과 병리학이라는 특정 영역에 대한 학자들의 의학 이론을 세밀하게 검토하고 있는 전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읽기가 까다로운 전문서에 가깝다. 게다가 물리학이나 수학처럼 논란의 여지가 없이 깔끔하고 우아하게 맞아 떨어지는 학문과는 달리, 잡다하고 상이한 기술들의 복합체에 가까운 의학을 중심 주제로 했기 때문에 다소 난해함에 난삽함을 더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희귀한 오솔길 같은 구불구불한 논지를 잘 따라가면 철학과 의학을 동시한 제대로 관통한 사람의 상당한 통찰과 만나는 보람을 얻을 수 있다.
깡길렘은 의학이 엄밀한 하나의 과학이라기보다는 여러 과학이 교차하는 기술이나 기예로 보인다고 말한다. 그리고 치료라는 뚜렷한 도구적 목적을 가진 특성은 그 자체를 지향하는 순수 학문성 보다는 기술성이 더 우위라는 것을 암시한다.
의학의 본질적인 부분은 순수한 학문성이 아니라 정상의 확립과 회복의 기술인 임상과 치료이며, 이들은 단순히 하나의 인식 패러다임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저자의 이 연구는 이러한 복합성과 뚜렷한 도구성을 띠는 의학의 방법과 성과들을 좀 더 큰 틀의 철학적 사색으로 되짚어 보려는 노력이다.
3.
먼저 오래전부터 이어온 질병에 대한 2가지 관점을 상기해 보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다. 하나는 질병을 ‘실체적 존재’로 보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개체와 환경 사이의 ‘관계의 불균형’으로 보는 관점이다.
전염성 질환에 대한 미생물 이론의 성공은 질병을 실체적 존재로 보는 관점의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생물은 독기와는 달리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개념에서 질병은 문을 통해 드나들 듯이 사람에게 들어왔다가 나간다는 관점이 자연스럽다.
이와는 반대로 히포크라테스의 저술과 그의 치료에 나타난 그리스 의학에서 질병은 존재적이 아니라 동적이며, 국소적이 아니라 총체적이며, 전체적 조화가 깨진 불균형을 떠올리게 한다. 조화와 균형의 파괴가 질병이며, 이러한 경우 질병은 사람의 안에 있는 어떤 부분일 수 없다.
의사들의 생각은 질병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견해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였으며, 매번 새롭게 밝혀진 발병기전에서 이러한 상태에 대한 적절한 이유를 발견해 왔던 것이다. 결핍으로 인한 질병이나 모든 감염성 혹은 기생충성 질환은 ‘실체적 존재’ 질병이론의 영향을 나타내고, 내분비 계통의 이상이나 질병명에 접두어 ‘dys’가 붙는 모든 질병은 ‘관계의 불균형’이론의 영향을 나타낸다.
4.
이 논문의 1부에서는 19세기에 활동한 오귀스트 콩트와 클로드 베르나르 그리고 20세기 초의 르네 레리슈의 주장과 개념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관계에 대한 여러 개념을 고찰하고 있다.
콩트는 병리적 현상과 그에 상응하는 생리적 현상이 사실상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병적 상태는 그 이전 시기(19세기 이전)에는 정상상태에 적용되는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에 의해 작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 관점에서 정상 상태에 대한 연구(생리학)는 병적 상태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었다. 하지만 질병의 현상들은 그 강도에서만 차이가 날뿐 건강 상태의 현상들과 본질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하게 되면, 병리적 상태는 각각의 현상에서 고유한 변이의 한계를 정상상태에서 단지 다소간 위아래로 연장시킨 것이지, 기이한 새로운 현상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이런 관점에서는 동맥경화증이 정상적인 동맥과 등가물이 되고, 수축하지 못하는 심장이 최고의 능력을 가진 육상 선수의 심장의 등가물 되는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 현상과 병적 현상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콩트의 의도는, 이 두 현상이 질적 차이를 가진 이원론적 관점을 보려는 19세기 이전의 전근대적인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병리적 현상과 생리적 현상의 실재적 동일성과 연속성은 베르나르의 연구에서도 반복하여 나타난다. 베르나르는 의학을 질병에 대한 과학으로, 생리학을 생명에 대한 과학으로 간주한다. 합리적 치료는 과학적 병리학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과학적 병리학은 과학적 생리학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질병은 어떤 실체로서 정상 생리와 무관하게 유기체에 부과되는 것이라는 당대의 많은 생리학자들의 생각과 대립을 했다.
베르나르는 건강과 질병은 본질적으로 다른 두 가지 양태가 아니며, 살아 있는 유기체는 건강과 질병이 별개의 원칙과 실체로서 서로 대립해 싸우는 장소가 아니라고 보았다. 사실 두 가지 존재 방식 사이에는 병리적 상태를 구성하는 정상 상태의 증폭, 불균형, 부조화와 같은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베르나르는 당시까지 인정되어 오던 광물질과 유기물, 식물과 동물의 대립을 부인하고 그것들 간의 물리화학적 현상들의 실체적 동일성을 주장했다. 그래서 물리화학적 관점에 따라 유기물계의 현상과 무기물계의 현상에 대한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생리학자인 베르나르가 철학자인 콩트와 다른 점은 병리학에 대한 그의 이론에 근거하여 확인할 수 있는 논거들인 생리학의 개념들을 수량화시키는 방법들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측정할 수 있는 결과인 글리코겐 합성, 혈당증, 당뇨, 음식물의 연소, 혈관 팽창에 의한 열 등을 말이다.
5.
의학은 사회 전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의학적 개념에서 일어난 변화는 그 시대사상의 변화를 반영한다. 19세기의 의학을 그 앞선 세기들과 구분하는 것은 일원론적 성격이다. 의기계론자와 의화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8세기의 의학은 정신론자(animiste)와 생기론자의 영향 하에 이원론적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즉, 세상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선악과 마찬가지로 건강과 질병이 인간을 차지하려고 다투었다는 것이다. 뛰어난 재능을 갖고 의학을 혁신시킨 학자들마저도 18세기에는 건강을 구원과, 질병을 죄악과 동일시하는 이원론적 태도를 가졌었다.
질병에 대해 실체적 존재(죄악)로 보는 비이성적 개념의 거부와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이 양적으로 동일하다는 주장은 무엇보다도 악의 존재를 인정하는 세계관에 대한 거부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콩트와 베르나르의 일원론적 질병 이론의 시도가 갖는 근대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상 상태와 병리적 상태의 연속성 개념은 감염 질환의 경우에는 현실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이들의 동질성은 신경계 질환의 경우에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생리학과 병리학이 양적 차이만 있는 하나의 동일한 학문이라는 관점은, 건강할 때와 병들었을 때의 생명이 동일하다는 지극히 단순한 추론을 유발하는 문제가 생긴다.
생명체가 정상적인 생명과 병리적인 생명 사이에 설정하는 가치의 차이는 규범적인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규범은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개체를 평가하여 교정을 가능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콩트와 베르나르의 양적 연속성으로서의 정상과 병리에 대한 관점은, 의학을 성립시키는 이러한 규범적 요소를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 정상과 병리와 관련한 규범의 의미는 2부에서 본격적으로 다시 논의 된다.
1부에서 마지막으로 다루는 학자는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다분히 현대적인 의학이론에 가까운 르네 레리슈이다. 하지만 깡길렘은 다소 이질적인 레리슈를 언급하고 소개할 뿐 충분히 분석하지 않는다. 마지막 결론에 이르러서도 레리슈의 담론을 포괄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편다.
질병에 대한 최근(20세기)의 이론에서는 환자의 질병에 대해 환자가 내리는 판단을 믿지 못하는 경향이 우세하다. 레리슈는 유기체 안에서 그 유기체의 생명을 위협하며 오랫동안 인식되지 않고 있는 병변이나 장애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질병을 제대로 정의하고자 한다면 질병을 탈인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런 관점에서 질병을 만드는 것은 통증이나 기능부전, 사회적인 결점이 아니라 해부학적 변화나 생리적 장애이다. 병리적 증상을 호소한 적 없이 살인이나 교통사고에 의해 죽은 사람을 예로 들어보자. 레리슈의 이론에 따르면, 만약 법의학적 의도로 행해진 부검 결과 죽은 사람에게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신장암이 발견되었다면, 암의 진행 단계상 증상에 의해 질병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질병이라고 결론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현대적인 질병의 실체성이라는 개념 하에서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질병은 의학이라는 과학 안에 존재하기 시작한다.
질병의 성립에서 환자의 자기 판단을 배제하는 이러한 레리쉬의 관점에 대해, 깡길렘은 이후에 ‘정상과 질병의 규범성’을 논하면서 이 관점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확장된 현대의학의 영역에서 레리슈의 다소 과도해 보이는 관점이 오히려 더 유효하게 작동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6.
이제까지의 1부가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에 양적인 차이만 있다고 보는 주로 19세기 학자들의 관점의 의미와 한계를 살펴본 것이라면, 2부에서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구분하는 기준이, 사실과 더불어 사실에 대한 평가라는 가치 개념까지 포괄하는 규범적 성격을 갖고 있음을 고찰하고 있다.
정상이란 무엇일까? 정상은 객관적 실체로서 규정 가능한 것일까? 정상을 정의내리고자 노력해 볼수록, 그것은 생각보다 상당히 까다로운 문제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신체적 질병을 연구하는 의학은 그 의미를 정확히 하는 데 신경 쓰지 않고 매일같이 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무관심은 특히 임상 의사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결국 대부분의 경우 환자들 자신이 스스로가 더 이상 정상이 아니라고 이미 판단하고 병원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보이는 개념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의사들은 진단하고 치유시키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원칙적으로 치유라는 것은 일탈된 기능이나 유기체를 다시 원래의 기준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의사는 기준이라는 개념을 소위 정상적 인간에 대한 과학이라는 생리학적 지식에서, 자신이 경험한 임상 경험에서, 어떤 순간에 사회적 환경에서 공동적으로 나타나는 규범의 발현에서 빌려온다.
정상이란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어떤 종에서 가장 흔하게 만나는 경우, 측정 가능한 성질의 평균을 의미한다. 정상이란 말은 어떤 사실과,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평가적인 판단에 따라 그 사실에 부여하는 가치를 동시에 지칭한다.
이와 같은 ‘정상’이라는 단어에 뜻에서, 생명은 규범적인 활동이라는 근본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규범적이라는 말은 철학에서 어떤 사실을 기준에 비추어 측정하거나 평가하여 내리는 모든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식의 판단은 사실상 기준을 설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규범적’이란 말은 규범을 만든다는 의미까지 갖게 된다.
생물학에서 이상(비정상)은 기능에 대한 장애의 형태나 곤란함, 해로움의 형태로 의식에서 느껴지고 난 이후에야 과학에 의해 인식된다. 과학자는 생물학자의 과학적 관심이 규범의 일탈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무시하며, 객관적인 관점에서 이상을 편차로만 본다. 그 과학은 자신이 과학이라는 사실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상에 대한 정의에서 주관적인 평가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 모든 것을 금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신체의 이상에 대해 말하며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변이에 불과한 통계적 편차가 아니라, 해롭거나 생명과 양립할 수 없는 유해한 상태이다.
독립적인 각각의 생명체와 환경은 정상적인지 여부를 따질 수 없다. 각자를 정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관계이다. 어떤 생물이 번식하고 그에 따라 다양한 변이가 생겨날 수 있는 환경은 정상적이다. 환경에 어떠한 변이가 일어날 경우 생명은 이러한 변이형들 가운데서 해결해야만 하는 절실한 적응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다.
이상은 평균의 관점에서 가장 빈도수가 많은 고유형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상과 유전적인 이상이라 할 수 있는 돌연변이는 단순히 그것이 이상이라는 이유만으로 즉시 병리적이 되지는 않는다. 그 자체로 정상적이거나 병리적인 사실은 없다. 이상이나 돌연변이는 주어진 환경 속에서 안정성, 번식성 등의 성공여부에 의해 사후적으로 병리적인지 정상적인지 판단될 것이다.
관찰된 집단에서 연구된 평균적 특성이 부분적인 정상성을 결정하는 데 있어 어느 정도의 객관성을 제공할 수 있더라도, 평균치 주위로 정상의 범위를 확정하는 것은 임의적 행위이다. 결국 모든 객관성은 개체군과 환경과의 관계에서의 안정성과 번식성으로 드러나는 총체적인 정상성에서 결정될 것이다.
프랑스의 선사시대에서 수천 구의 뼈들을 조사한 결과, 날것이나 거의 익히지 않은 것을 먹던 시대에는 비타민 D 결핍으로 인한 구루병의 존재조차 인지할 수 없었다. 또한 선사 시대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충치의 출현은 전분질의 음식물과 익힌 음식물과 관련되어 문명의 출현과 짝을 이룬다. 동시에 음식을 익힌 결과 칼슘의 동화에 필수적인 비타민 D가 파괴되어 구루병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예들로 봤을 때, 의학의 과제는 평균적 정상을 (개체 자체로만) 객관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고유한 규범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이 결국은 임의로 변경 가능하다거나 전혀 불가능하다고 속단 내리지 않고, 변화되는 환경을 포괄하는 총체적 정상성 안에서 (생명이 안정할 수 있는) 규범의 내용을 정확히 결정하는 것이다.
7.
이상과 병리적 상태, 생물학적 변종과 생명체의 부정적 가치를 구별하면서 생명체 자체에게 질병이 시작되는 시점을 판별할 임무를 맡긴다. 생물학적 기준은 항상 개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불가능한 일을 동일한 환경 속에서 해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통계적으로 얻어진 평균으로는 우리 앞에 존재하는 개인이 정상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정상적인 것이 엄격한 집단적 구속력을 갖지 않고 개인적 상태와의 관계에서 변화하는 기준을 가진다면,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경계는 불분명해진다. 동시에 고려되는 다수의 개인에서는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연속적으로 고려되는 한 사람의 동일한 개인에서는 그 경계가 분명하다. 질병은 위기이고 생존에 대한 위협이다. 따라서 질병에 대한 정의는 개체적 존재라는 개념을 출발점으로 요구한다고 본다.
그래서 깡길렘은 ‘정상의 개념은 자체로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한 어떤 실체 개념이 아니며 병리적인 것은 정상적인 것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도발적인 이 주장의 의미는, 정상을 개체 자체의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환경과 개체의) 관계적인 것으로 정의해야 하고, 개체들 간의 차이까지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비정상과 정상은 그 자체로서는 규정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더 분명해 진다.
가령 난시나 근시의 결점은 농경 사회나 목축 사회에서는 정상일지라도 항해사나 비행사에게는 비정상이다. 이처럼 동일한 기관을 지닌 동일한 인간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생명체의 배설물은 다른 생명체에게 음식이 될 수도 있으나 자신의 먹이는 될 수 없다. 음식물과 배설물을 구별지우는 것은 물리-화학적인 실체가 아니라 생물학적 가치이다. 마찬가지로 생리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을 구별지우는 것은 물리-화학적인 양식의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생물학적 가치라는 것이다.
8.
저자는 생리학과 병리학의 구별은 임상적인 중요성만을 지니며, 그러한 이유 때문에 병든 장기나 조직, 병든 세포에 대해서 병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잘못으로 보자는 제안을 하고 있다. 병리학은 그 본래적 의미상 규범적이며 기술적인(technique) 기원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주관적인 기원이라는 것이다. ‘객관적 병리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객관적으로 어떠한 구조나 행동들을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병리적임이 성립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개체별 특이성 속에서 (병이라고 판단하는) 평가가 반드시 요청된다.
깡길렘의 이러한 날카로운 지적은 병리학의 시작점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첨단화 되어가며 확고한 사실들의 체계임을 주장하는 의학과 병리학에 대해, 그것을 떠받히는 있는 근본 뿌리에는 가치평가와 규범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깡길렘의 이러한 통찰은 점차 확장되고 있는 예방적 차원의 의학까지 포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레리슈가 이미 간파하고 있듯이 고혈압, 고지혈증, 초기의 암과 같은 현대의 주요한 질환들은 개인이 직접적 느끼는 증상이나 불편함에 대한 자기 판단과 무관하다. 누적된 임상 경험에서 그 무증상의 질환들을 방치했더니 뇌졸중이나 심장병의 발생이 현저히 증가되고, 초기 암은 불치의 병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들에 대한 추론에서, 개체의 증상과 무관한 예방으로서의 의학이 만들어 졌고 점차 커가고 있다.
정상과 병리의 기준에 대한 깡길렘의 주장은 직접적 증상으로 드러나는 의학의 분야(요통, 복통, 두통)에서 참으로 잘 들어맞는다. 그 영역에서 환자는 자신이 통증을 받아들이는 정도의 개별적 성향에 따라 병원에 가서 도움을 청할지, 견딜만해서 지켜볼지를 스스로 결정한다. 하지만 직접적 증상을 보이지 않는 의학의 영역인 암의 조기진단이나 성인병의 심혈관계 합병증 예방에서는 깡길렘의 주장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가령 고혈압은 대부분 아무런 자각증상이 없다. 적절한 관리를 위해서는 매일 약을 복용해야한다고 말해지지만 실제 그 약을 통해 합병증이 예방되는 혜택을 보는 것은 일부의 사람들이다. 어떤 특정한 개인에게서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심각한 합병증이 발생하지 않는 운 좋은 체질을 예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쓸데없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으며, 의료비도 절감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예측은 아직까지 불가능하고, 여러 이유들 때문에 요원해 보인다. 그저 통계적 유의함에 근거하여 유질환 그룹에게 위험을 피하는 평균적으로 나은 선택을 권고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다.
9.
우리는 음주운전자 중에 일부만이 교통사고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안다. 일부 음주운전자는 사고를 피해 무사히 귀가할 것이다. 하지만 고혈압의 경우처럼, 어떤 음주 운전자가 사고를 일으키지 않을 것인가를 개별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다. 끔찍한 사고를 피하기 위해서 과거의 통계를 참고하여 음주 운전자에게 법으로 강제된 제약을 하는 것이다.
병리학이 불편과 아픔이라는 개인의 가치판단에서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의료의 범위가 넓어져 예측을 통해 치명적 합병증을 사전 예방하는 영역에서는, (병리의 기원이자 시작점인) 주체적 가치 판단이라는 개별적 특성을 수용하기 어렵다. 고혈압군의 합병증의 위험도는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지만, 현실의 특정한 개인의 합병증 예측에서는, 정량화하기 불가능한 너무나 수많은 변수가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측은 개별화 불가능한 것이다.
깡길렘의 주장은 의학의 뿌리에 해당하는 ‘병리적인 것의 판단’에서 개인적 규범적 요소가 얼마나 근원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뿌리에서 비롯되었지만 새롭게 저 위쪽까지 뻗어 올라간 의학의 줄기와 가지 잎사귀까지 잘 적용되는지는 명백하지 않은 것 같다. 칸트의 용어를 빌어 설명하자면, 깡길렘은 감각 경험을 통한 병리인 오성의 병리학을 잘 보여주었지만, 비경험적인 추론에 근거한 이성의 병리학까지 포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잎사귀와 줄기만 알고, 그것이 시작된 뿌리를 모른다면 그 앎은 반쪽일 것이다. 깡길렘은 의학 또한 과학임을 자처하는 의과학자들에게 그들이 자리하고 있으나 간과하고 있던 뿌리를 보여주어, 더 큰 철학적 관점에서 ‘정상과 병리’라는 의학의 핵심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9, 2014년 9월, 이승범, 가정의학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