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뒤표지에 나란히 쓰여진 여러 매체들의 찬사처럼, 이 책은 빈틈없이 치밀하고 잘 짜인 능수능란한 프로의 소설이다. 덧대거나 토 달기 힘든 매끈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미국드라마 과학수사대 CSI의 시리즈물 같은 탄탄함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들이 흥미롭고 까다로운 사건을 접하고, 이런저런 노력과 요령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다음 사건, 다음 에피소드이다.
<칠드런 액트>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은 수사대원 대신에, 영국 고등법원 판사 피오나 메이가 나온다. 그녀는 번스타인 부부의 결별과 자녀 양육의 방향성에 대한 다툼, 가만 놔두면 둘 다 죽을 위험에 처하게 된 샴쌍둥이의 분리 수술 여부 논쟁 등등의 여러 사건을 판결하면서, 이 책의 핵심 소재인 백혈병에 걸린 소년(애덤 헨리)의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그 소년은 항암 치료 중에 혈색소와 백혈구수, 혈소판 수치가 급속하게 떨어져, 적절한 치료 지속을 위해 긴급하게 수혈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소년의 부모와 곧 성인을 앞둔(18세가 되기 3개월 전) 본인도 여호와의 증인으로 독실한 신앙인이다. 그들은 그들 내부의 교리적 지침상 수혈을 거부하는 것이 성경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리로 표명되는 가치관은 그들에게 양보할 수 없는 숭고하고 때로는 목숨마저 양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 미성년 소년의 부모와 그 자신의 뚜렷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병원 측에서는 수혈을 통해 얻는 이익이 막대함으로, 미성년 환자의 이익에 부합하게 그에게 강제로라도 수혈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법원에 긴급하게 요청한다.
그 긴박한 문제에 대해, 당직 판사였던 피오나는 여호와의 증인인 부모 측과 병원 측의 팽팽한 의견을 듣고 나서 신중한 판결을 위해, 부러 시간을 내어 그 소년을 직접 만나러 간다. 시를 쓰고,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어릴 때부터 익숙하던 자신의 신앙심에 대해 견고한 견해를 갖고 있는 소년과 얘기하면서 판사는 그가 미래를 기대하고 있음을, 계속 시를 쓰고 싶고 바이올린으로 좋은 곡을 연주하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국 판사는 병원 측에 강제 수혈의 권한을 주는 판결을 내린다. 소년의 존엄성(현재의 신념과 가치관)보다 소중한 것은 그의 생명이라는 차원에서다.
이후 그 소년은 다행히 병에서 회복을 하고, 자신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겪는다. 자신이 수혈을 받으면서 회복하는 중에, 부모님의 크게 우는 것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 우는 이유가 종교적 교리를 따르지 못함에서 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법원이 개입해서 아들이 살 수 있게 되는 기회가 생겨서 너무 기뻐서 우는 것이었다는 점에 충격 받는다. 이 점에서 소년은 자기가 굳건히 믿어온 것에, 어처구니없고 어리석은 요소가 있음을 느끼고, 이후로는 부모와 대결하면서 탈종교적 태도를 보인다.
동시에 너무 상식적이고 올바른 판결을 통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 된 판사에게 마음을 크게 끌리고, 약간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피오나 판사에게 접근하려 한다. 그러나 공적 문제가 아닌 사적 차원에서 사건과 관련된 사람과 친분을 쌓은 것은 도리가 아니었고, 몹시도 바쁜 일정에서 가능한 것도 아니어서, 피오나는 간접적으로 그 소년의 근황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 학교에서 적응하고 잘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개인적 관심을 접는다. 소년이 보낸 편지에도 답장을 따로 하지 않는다.
소년은 순회 재판을 위해 뉴캐슬로 원거리 파견을 갔던 피오나를 좇아가기도 하지만, 피오나는 친절하지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쪽으로 행동하면서, 소년을 실망 시킨다. 이후 시간이 지나, 상처를 주며 갈등 했던 남편과 다시 화해 모드가 되고 연말 법원에서 하는 공연을 준비하고 성공리에 연주를 마치면서 보람 된 마무리를 하려 한다. 그러다가 소년의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병이 재발을 했고, 치료 중 혈구감소증의 비슷한 위기에 처했지만 이번에는 수혈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결국 그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년이 된 사람의 선택이라 누구도 말리지 못하고 법원이 개입하지도 못했다. 피오나 판사는 슬픈 회한을 느끼면서 자신과 소년 사이에 있었던 일을 복기해 보면서 작품은 끝난다.
작품은 진지하면서, 우리 삶과 사회와 공동체에 주요한 이슈들을 부각 시키며 생각할 여지를 던져준다. 개인의 생명과 가치관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국가의 적극적 간섭은 어디까지 일까. 한 사람의 죽음의 선택에 대한 책임과, 사람이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하기 위한 적절한 경계선은 어디쯤 일까 등등.
이 작품은 흥미로운 문제를 치밀하고 솜씨 있게 다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왠지 뭔가 부족한 점을 느꼈다. 서두에서 말한 바, 이번 작품 자체는 어떤 시리즈물의 에피소드 같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윌 스토가 <이야기의 탄생>에서 좋은 소설 작품은 사건들의 플롯 보다, 인간의 변화에 대한 탐구에서 온다고 주장했다. 인지적 내로남불의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자명하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기존 가치관에 대해, 특정 사건을 통해 결여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개인의 변화하는 모습이 가장 소설적 매혹의 핵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에서 주인공 집사가 자신의 유능함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감정 절제가 이제 시대적으로 유효 기간이 끝났음을 경험하면서 힘들어하고 무너지는 모습 속에서, 바로 그런 것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도 그런 결에서 빛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결여를 깨닫기, 자신의 병신성을 알게 되기, 그것의 우아한 표현은 ‘실존의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칠드런 액트>는 흥미롭고 세련되지만, 윌 스토가 지적한 바로 그 관점에서 보자면, 소설적 활력이 부족해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주인공 판사는 사건을 다루고 나름 성실하게 임하고 이후에 적절히 거리를 유지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소년을 생각하면서 눈물도 흘린다. 하지만 다음 해가 되면, 또 수많은 사건에 둘러싸여 지지고 볶으면서, 소년과의 에피소드는 흐릿해질 것이다. 거기에는 탁월한 소설들이 모범적 공유하는 것, 즉 실존이 드러내는 자리가 없다. 피오나 판사는 여러 일 겪고 다양한 사건과 접하지만, 자신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정년이 될 때까지 판사 일을 계속할 것이다.
적당히 좋은 작품인데, 평가 기준들 중에 하나를 너무 (임의적으로) 절대적인 양 들이대서, 괜찮은 작품 하나를 괜히 과하게 저평가 하는 거 같아서 덧붙인다. 이 작품은 잘 읽히고, 짜임새 좋고, 세련되다. 그리고 간접경험이라도 지긋지긋한 법조계의 분위기와 빡빡한 판사의 일상 업무와 건조할 수 밖에 없는 무자식의 부부관계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다. 가치관이 전혀 다른 사람들 사이의 긴장감 높은 대화는 훌륭하다. 마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걸작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밀도 높은 대화를 연상시킨다. 소설적 솜씨와 작가의 관찰력과 유사 상황을 밀도 있게 연구한 덕일 것이다. 깊은 울림은 덜하지만 미덕이 많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