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인가요,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와 김대중 대통령 간에 이 논쟁이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지요. 리콴유는 문화는 숙명이다, 라고 말하며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가치를 들면서 서구적 가치와는 다르므로 미국식 모델을 무조건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 즉 아시아사회는 서구와 다른 정치적 문화적 차이 때문에 서양식 민주주의 제도를 다른 동아시아에 적용할 수 없다는 거죠.
즉 서양과 동양에서 생각하는 옳음과 기준도 같지 않다. 서양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지만 아시아는 가족과 집단이라는 공동체의식이 강하다. 이러한 동양과 서양의 차이 때문에 동양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등등.
헌팅턴은 여기에 거들어서 한국, 일본, 싱가포르, 타이완, 월남 등에서 발견되는 유교적인 전통으로 개인보다 집단주의, 자유보다 권위주의, 권리보다 책임, 국가에 대항한 권리의식의 결여, 경쟁보다는 조화와 협력, 위계의 존중, 분파에 대한 위험의식, 국가와 사회의 통합, 국가수준에서 사회기구의 자율성 불인정 등을 들었죠.
이에 대해, 민주주의자인 김대중은 이런 식의 주장에 대해, 유교의 민본주의와 과거제도라는 보편주의적 관료임용체제와 동학사상 등을 소개하면서, 아시아적 전통 내에도 이미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저런 책들과 고전을 탐독하면서, 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바로 리콴유가 말한 ‘아시아적 가치’에 해당하는 것들이 수많은 서양의 여러 나라들의 경험을 얘기하는 책들에서도 반복적으로 발견된다는 겁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혁명을 이룬 영국과 정치혁명을 이뤄낸 프랑스가 최초의 ‘서구’였습니다. 18-19세기만 해도 독일은 ‘서구’가 아니었고,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당시 근대성을 선취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그 외 나라 지식인들의 콤플렉스는 ‘독일적 가치’, 혹은 ‘러시아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명명되면서, 저 의기양양한 산업화된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개인주의적 가치에 대한 일종의 안티테제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기초하고자 합니다.
각박한 도시문명 아닌 어머니의 품과 같은 자연과 땅과의 조화롭고 유기적인 삶, 개인에 대한 강조가 아닌 공동체의 집단화된 삶에 대한 가치 부여 등등. 가히 서구적 가치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작동하는 그 ‘고유의’ 국가적 정체성이란 것이, 나라마다 다양하지 않고, 오히려 천편일률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 인상적 경험이었습니다. 이런 식의 패턴이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침탈당한 아시아 다양한 국가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저 가공할 근대적 산업사회와 사회적 체계에 대한 질투와 공포가 겹쳐질 때 나타나는 감정들. 그것은 때로는 위축감과 콤플렉스로, 동시에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나라별 지식인들의 고뇌는 아마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마 문화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저 ‘서구적 가치’에 대한 안티테제는 너무나도 닮아 있게 되는 것이죠.
2.
판카지 미슈라의 <분노의 시대>를 나름대로 해석하자면, 그는 (리콴유적) ‘아시아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헌팅톤의 <문명의 충돌>식의 오류를 반복한다는 것인데, 오직 현재적 차이에만 근거해서 문명의 특징과 구별점을 소급해서 설명하고 갖다 붙이는 식의 주장에는, 반대한다는 것이죠. 개별 문명이 보여 온 사상적 다양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한다면, 헌팅톤의 작업은 얼핏 첫인상은 그럴싸해 보이나, 지적 성실성을 철저하게 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겁니다.
저자는 주장합니다. 동양과 서양, 종교와 이성이라는 멍청한 이원론에서 벗어나려면, 물질주의적 부상이라는 인류사에서 가장 운명적인 사건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근대성의 성취’라는 과제야 말로, 농촌과 소규모 공동체에 근거한 전근대적 세계를 통째로 뒤흔드는 격변이며, 인류문명사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는 겁니다. 그 과정 또한 평화로운 수렴의 역사라기보다는 대체로 대학살과 아수라장의 역사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근대화에 뒤떨어진 나라들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히스테리, 절망의 정치가 결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혹은 공산주의 러시아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근대화에 뒤처진 19세기 유럽지역에서 나타난 그 좌절과 혼란의 양상이 이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같은 구세계와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같은 신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그 혼란이 재현되고 있다는 것이죠. 저자는 이 관점에서만 현 시기의 기이한 혼란들을 이해할 열쇠고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3.
9.11 사태 이후로 서구 도시를 표적으로 한 공격이 반복되자 <왜 그들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일까?>,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라는 의문 제기됐다고 합니다.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The Islamic state of Iraq and Syria, ISIS)는 신속한 군사적 승리와 과시적인 잔혹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유럽과 미국의 도시 젊은이들을 선동하는 유혹으로 서구 사회에 깊은 위기감을 심어 주었죠.
ISIS는 많은 이들에게 알카에다보다 훨씬 복잡하고 당혹스런 의문을 제기했는데, ‘아랍의 봄’이 시작된 곳이고 무슬림 사회에서 가장 서구화된 국가인 튀니지 출신이 이라크와 시리아를 찾아간 90개국 외국인 지하드 전사 중에서 가장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겁니다. 또한 ISIS 남성들이 여성을 노예로 삼고,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여자아이까지 강간하다는 사실에도, 학업 성적이 우수한 여학생들을 포함해 수십 명의 영국 여성이 ISIS에 가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뉴욕의 지적인 잡지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어느 평론가는 <우리는 겁먹을 정도로 충격을 받고 당혹감에 빠졌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사건 이후로 그처럼 전격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은 없었던 듯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하고 당혹스런 현상이란 거겠죠. 하지만 이 책을 읽으시면 이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은 이러한 현재의 위기가 특수한 것이 아니며, 인류 역사에서 있어온 ‘보편적 위기’라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슬람과 종교적 극단주의에 씌워 놓은 무거운 짐을 덜어 내고자 시도 합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산업 자본주의 경제가 발흥하며 전례 없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무질서가 뒤따랐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후 사민주의의 발흥으로 그런 위기가 감추어져 있다가, 사민주의 퇴색과 신자유주의의 발전에 따라 그런 무질서가 이제 훨씬 더 광범위한 지역을 뒤덮고,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악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전근대적 유기적 공동체 사회(충만하고 안정적이지만 답답하고 구속적인 사회)에서 자유를 찾고자 근대적 혁명을 인간들이 성취해 냈을 때, 지불해야 했던 비용인지도 모릅니다.
토크빌은 이미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동요와 변화와 위험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데 익숙해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무제한의 자유로부터 무제한 폭정에 대한 갈망으로 신속히 옮겨 간다. 주변의 모든 것이 끊임없는 동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불안에 시달리고 기진맥진하게 된다. 지적인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더라도 적어도 물질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견고하고 안정적이기를 바란다. 인간은 과거의 신념을 되찾을 수 없을 때 어떤 주인에게 종속된다.”
이런 숙제는 발전된 국가에 해당하는 OECD에 속하는 지역에서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의 3/4의 나라들에서는 문명의 뜨거운 감자에 해당하는 숙제, 바로 그 ‘근대화’의 문제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야, 작금의 기이한 현상들을 보편적 혼란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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