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3-02 16:34
책 흔들기 (3):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5,550  


도서정보
저자명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저서명 나치 시대의 일상사
출판사 개마고원
연도(ISBN) 2003(9788985548021)
책 흔들기 (3): 포이케르트의 나치 시대의 일상사

Edelweißpiraten.JPG

Von Markoz - eigenes Foto, Bild-frei, https://de.wikipedia.org/w/index.php?curid=7937750. 쾰른의 에델바이스 해적단이 공개적으로 교수된 장소인 에렌펠더 휘텐스트라세에 그려진 그라피티.


1.
왜 '순응'하는 것일까? 나치의 독일 지배 12년이 부서뜨린 것은 유태인 만이 아니었다. 집시 만도 아니었다. 정신질환자나 동성애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 만이 아니었다. 보통의 독일인들도 속절없이 죽어갔다. 전선은 대책없이 확대되기만 했고, 결국 자신들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이 체제는 어느 날 갑자기 우주에서 날아와 뒤집어 씌워진 체제가 아니었다. 이 체제는 독일인들이 만들어낸 체제였다. 그들이 한때, 환호했고, 열광했고, 마지막으로는 침묵의 순응과 체념으로 파국을 기다렸다. 독일 내부의 저항은 암살 미수 사건을 제외하면, 소극적이고 산발적이었다. 마지막까지 징집되어서, 죽어갔다.

게다가 '순응'은 한국의 식민지기 및 이어지는 독재와 권위주의 체제를 이해하는 중요한 한 열쇠이기도 하다. 왜 그리고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서 '순응'했는가?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 혹은 못했는가? 백 년 후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해서도 안되고, 친일이냐 아니냐의 뜨거운 논쟁 속에서 과거를 말하기 주저해서도 곤란하다. 과거에 왜 그랬는지, 끊임없이 다시 질문하고, 다시 질문해야 한다. 그것이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파쇼와 제국이라는 상호 모순적이지만 한 덩어리인 근대의 괴물이자 이웃에게 먹이가 되었던 시절에 대해서.

포이케르트는 이 시대를 해명하기 위해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번역서의 제목은 『나치 시대의 일상사』라는 다소 낭만적인 느낌까지 나는 제목이지만, 독일어로 된 원제목을 직역하면, 다소 서늘해진다. 『민족의 동지와 공동체의 이방인, 나치 치하에서의 순응, 제거, 저항』. Volksgenossen und Gemeinschaftsfremde: Anpassung, Ausmerze und Aufbegehren unter dem Nationalsozialismus. 이 기나긴 제목을 요약하면 이런 뜻이 된다. 나치 시대는 결국 사람들을 '동지(Genossen)'와 '이방인(Fremde)'로 구분했다는 말이다. 겉으로 만이라도 동지가 되어 순응하든지, 이방인으로 분류되어 제거당하든지, 아니면 그게 저항일까 싶지만, 저항인 방식으로 저항하고, 분류되고, 또 제거 대상이 되든지.

책의 제목을 달리 쓰는 방법도 있다. "나치 시대의 근대성" 같은 논쟁적 제목을 붙이는 것이다. 포이케르트는 "나치즘을 독일 계급사회가 간전기(間戰期, 1919-1939)에 겪었던 위기의 증상으로, 즉 근대성의 병리와 왜곡이 각별하게 표출되었던 것으로 해석"(5)한다. 이런 시도는 한국에서 "식민지 근대화"를 말하는 것보다 훨씬 도전적인 실험이다. 그리고 물론 저자가 나치를 찬양하거나 나치의 효용성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는 나치, 다른 말로는 '제3제국'은 근대와 전근대의 충돌 내지는 근대의 폭주와 근대에 적응하지 못했던 이들의 당황스러운 반응이 낳은 충격과 파탄이고, 나치의 결과는 의도하지 않았던 1950~60년대 서독의 고도경제성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나치즘은 "근대의 병리현상"이다. 이 부분이 사실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 또는 "식민지 근대성"을 말하는 사람들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한국의 그들은 뭐랄까 너무 낭만적이랄까.

아래에서 다소 길지만, 역자해설을 요약하면서, 나치즘 연구사를 간략하게 따라가 보도록 하자. 지루하면, 건너 뛰어도 좋다.

2.
포이케르트가 서문에서 쇤봄(D. Schoenbaum)이 제시한 나치 시대의 사회사에서의 기능주의 입장을 활용해서 연구한다고 밝히고 있지만, 역자는 "나치즘과 근대화"라는 훨씬 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역자해설을 통해서 근대성을 더 이상 규범으로만 보지 않고, 규율과 억압으로 보는 미셸 푸코의 영향도 받아, 나치즘을 역사화하고, 근대성 혹은 근대화의 전망에서 해석하는 경향을 제시한다.(390) 역자는 나치즘을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해석하는 전통적인 견해와 달리하는 라우쉬닝(주지주의, 허무주의적 해석), 프랭켈(규범과 자의성의 뒤섞임)의 뒤를 잇는 마틴 브로샤트(『히틀러 국가』의 저자)로 이어지는 흐름을 지적한다.(392) 나치의 의도가 아니라 단기적 문제 상황이 가하던 압력이 나치즘을 이끌었다는 브로샤트의 해석은 '기능주의)로 불리고, "나치즘 이념의 은유적 성격과 나치즘 체제의 기능주의적 성격이 중첩되면서 전래의 규범이 무너지고 그에 따라 궁극적으로 부정과 파괴만이 남게 된 과정"으로 본다.(393) 영국 역사가 메이슨은 『노동계급과 민족공동체』에서 기능주의와 파시즘론 해석을 결합시키며, 나치즘 속에 "다른 자본주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합리와 동력, 즉 근대적 힘이 작동"하고 있다고 암시한다.(394-395) 나치 노동법을 "노동자들의 저항을 차단한 가운데 노동과정을 합리화시키려는 사용자들의 근대적 작전"으로 "1차대전 이후 독일 공업이 꿈꾸고 있던 기술주의적 자본주의의 비전이 나치즘에서 구체화"되었다는 이야기다.(395) 이런 연구의 흐름에 미국의 역사가인 쇤봄(David Schoenbaum, Hitler's Social Revolution)이 위치한다. 그는 1966년에 "나치즘이 추구하던 목적과 수단이 모두 혁명이었다고 선언하면서, 그 혁명의 논리가 한편으로는 나치즘을 "미친 개"로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적이고 민주적이며 산업적인 서독의 터를 닦았다고 주장했다."(396) 쇤봄은 나치즘은 현실을 재편할 프로그램이 없었기 때문에, 유토피아를 그렸고, 그것은 동지들로 이루어진 무계급의 세계로 유토피아적 규범에 걸맞게 행동하는 자만이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나치당과 기관 내부의 갈등과 현실의 계급구조 및 경쟁 사이에서 "한편으로는 총체적인 방향감각 상실과 감정의 혼돈"이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사회의 주관적 정체성"의 붕괴가 나타났고, 전자인 혼돈은 파괴와 아우슈비츠를, 후자인 계급 붕괴는 서독을 낳았다는 해석이다.(396-397) 여기에 랄프 다렌도르프는 『분단 독일의 정치사회학(Society and Democracy in Germany)』를 통해 근대화론과 전체주의론을 결합한다. 나치 체제의 전체주의적 파괴의 결과 "원자화된 개인의 사회"가 출현했고,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서독과 다른 전체주의인 동독으로 이어졌다고 연속성을 설명하는 방식이다.(397-398) 그리고 여기에 근대화론과 포스트모던적 일상사를 결합한 것이 저자 포이케르트다. 그러나 포이케르트의 일상사는 단순히 "체제"가 아닌 모든 것을 말하지 않고, 체제와 연관되는 일상사의 영역을 탐색한다.(400) "아래로부터의 역사(Geschichte von unten)", "작은 사람들(kleine Leute, little men)"의 이야기에서 출발하여 체제로 도달한다, 즉 일상사는 작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체제에 대한 역사이다.(400-401) 포이케르트는 저항(Widerstand)의 개념을 확장시켜 "체제의 요구에 불응하거나 체제의 규범으로부터 일탈하는 행위도 저항(Resistenz) 개념에 포함"시켜, 저항은 "체제의 한계"라는 측면을 갖게 된다.(402-403)

"포이케르트에게 일상은 나치즘과 관련된 본질적인 질문을 풀 수 있는 곳이다. 그는 작은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면서, 당대 독일인들이 나치즘에 보낸 지지와 기대가 무엇이고, 그 기대는 얼마나 충족되었으며, 그 충족의 정도에 따라 어떻게 저항이 나타나고, 그 저항은 어떤 면모를 띠었으며, 나치즘은 그에 어떻게 반응했으며, 그 반응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인종주의적 학살로 귀결되었는가를 묻는다."(403-404)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나치에게 기대한 것인데, 그것은 "정상성(Normalität)"에 대한 작은 사람들의 희구"였고, 일자리와 질서였다. 나치즘은 정상성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회복시켜 주겠노라고 약속함으로써 집권한 운동이다.(404) 반면 나치 집권의 계기가 되는 경제위기는 "구조적인 근대화 위기"로 "생산의 합리화로 인한 연속생산 체제의 관철과 기획·분절된 노동과정의 등장, 성적 노동분업의 변화, 사회 계층구조 및 사회적 지위체계의 변화, 담합주의적(corporative) 사회정책의 도입, 사회화 과정의 장기적 변화", 폭발적인 사회문화적 양식의 변화, 타락한 대도시의 삶 등이다.(404)  "포이케르트는 나치즘을 낳은 정상성의 위기가 서구 부르주아 사회의 일반적 위기였다"고 본다.(405) 그리고 근대가 가지는 해방과 규범의 측면을 미셸 푸코의 억압과 규율의 근대를 통해 해석해 나간다.(405-406)

역자의 말대로 다소 어려울 법한 연구사를 다루는 해설이지만, 나치즘 연구에서 포이케르트가 가지는 위치와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앞에서 언급된 책 중 쇤봄을 제외하면, 역자의 노력으로 대부분 번역되어 있다. 또 유대인 학살 문제 연구의 전범인 라울 힐베르그의 『유럽 유대인의 파괴 1, 2』를 완역 소개했고, 『나치즘과 동성애: 독일의 동성애 담론과 문화』를 내기도 했다. 역자의 노력으로 나치즘 연구서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일찍 돌아간 포이케르트도 성소수자였다고 한다.


3.
포이케르트가 한 정점을 형성하고 있는 나치즘에 대한 기능주의적 관점은 세 가지 점에서 새로운 이해의 관점을 제시한다. 독일인들은 왜 나치즘에 동의했는가? 나치즘은 이전 시대(제2제정과 바이마르)의 근대성을 어떻게 잇고 있는가? 나치즘이 전후 독일 사회에 남긴 영향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작은 사람들(kleine Leute)의 관점으로 살펴보는 것이 이 책이다.

서론에서 포이케르트는 어쩌면 독일인으로서는 언급하기 껄끄러운 문제인 나치에 대한 동의와 순응을 살펴야 하는 이유를 밝힌다. 나치즘에 대한 성찰은 현대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한다. 그것은 "근대의 병리사"와 "상심"이다.

포이케르트는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病理史)로 경험하려는 해석 지평"으로 나아간다. 한국사의 특수성에 대한 지리한 논쟁을 연상시키는 "독일사의 특수성 논쟁"은 거꾸로 "독일의 많은 비민주적 경향들이 반동적 전통의 과잉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근대 문명의 구조와 문제 상황으로부터 기능적으로 비롯된 것이란 점을 날카롭게 인식"시켰다고 논쟁사를 인용한다.(11) 쇤봄과 다렌도르프의 주장은 제3제국에서 의도되었거나 의도되지 않았던 격변 덕분에 독일이 라인 강의 기적이라는 명백히 "근대적인 시기"로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12) 저자는 "나치즘을 근대의 병리사로 "경험"하려 한다"고 말하며, 이때, "나치즘의 경험"이란 1930년대와 1940년 사람들의  인지 및 행위 방식이면서, 그들의 행동이 낳은 결과와 그들이 자신의 시대를 이해한 특수한 방식이 남긴 증거에 대한 우리의 논의를 양자 모두를 가리킨다. 이 둘을 "완전히 분리할 경우 과거와 대면하는 역사가 자신의 상심(傷心, Betroffenheit)을 가로막게" 되며, "독일의 과거에 대한 우리의 물음이 현재의 경험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을 흐릴 것"(13)으로 본다. "파시즘에 대한 책임 있는 성찰은 반드시 현재와 대면해야 하고, 우리의 근대가 발전하면서 노정시킨 문제 지대들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하며, 근대성으로 인한 왜곡과 혼란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날카롭게 가다듬어야 하고, 우리의 부모와 조부모들이 겪었던 경험들을 필연성에 함몰되지 않은 채 준거로 삼아서 우리 자신의 생활세계가 제기하는 도덕적, 정치적 도전에 맞서야 한다."(14)

주목해야 하는 한 단어가 있다. "상심(傷心, Betroffenheit)". 다른 내용은 대부분 역자 해설에 정리되어 있다. 독일어 단어 Betfroffenheit의 뜻은 보통 '경악, 당황, 당혹, 낭패' 정도로 번역이 된다. Duden Online도 이 단어를 das Betroffensein; Bestürzung으로 정의한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상태, 정도가 아닐까. 독일에서 꽤나 오래 공부한 역자가 이를 '상심(傷心)'으로 번역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은 "상심"을 "슬픔이나 걱정 따위로 속을 썩임"이라고 되어 있다. 독일어와 한국어의 차이는 슬픈 마음이다. 독일어에서는 분노와 당황, 부끄러움 등이 강조된다면, 한국어의 의미에서는 걱정과 슬픔이랄까. 역주에서 "상심(Betroffenheit)"을 나치즘이라는 역사적 과거를 작업 및 극복하고자 했던 독일의 역사가들이 그를 위한 가장 중요한 기제로 내세운 것이 바로 상심, 즉 나치즘이라는 과거를 바라보는 개인이 그 과거에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상심은 과거에 대한 망각과 미화를 막아주고, 그 과거의 피해자들과 화해하게 해주며, 그 과거의 가해자들을 용서하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14) 독일어로 "die Betroffenheit", 즉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상태, 나치즘의 야만성과 파괴된 참혹한 결과 대한 직면, 그 과정에서 자신과 자신의 부모와 사회의 '작은 사람들(kleine Leute)'의 삶에 대한 직면.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나는 분노, 당황, 부끄러움이야말로, 화해와 용서로 가는 길을 연다. 이를 외면하고, 함께 비판의 대열에 서는 것은 역사를 과거의 먼지 속에 감추려는 헛된 시도에 불과하다. 굵은 글씨로 인용한 부분은 2003년 당시 거의 모든 책 서평에 실렸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역자의 놀라운 번역 솜씨이다. 역서가 나온 2003년은 대구 지하철 참사가 있고, 2014년에는 세월호가 있다. 그리고 아직도 슬픔은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 슬픔이 과거와의 직면이 되어서, 그것으로 인해 마침내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직면을 거부당하고, 사람들의 '슬픔'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역자가 말하는 "상심(傷心)", 슬프고 상한 마음은 이 시대 한국인들의 느끼고 보는 거의 모든 영역에 흩어져 있다. 우리의 상심은 민주적 참여를 통한 화해와 용서로 나아가는 것일까?


4.
포이케르트는 제3제국의 역사를 일상사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여섯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아우슈비츠가, 파쇼의 테러가 어떻게 가능했고, 감내되었으며, 부분적으로 지지를 받기도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둘째, 나치에 대한 저항이, 권력 핵심부에 있지 못하던 사람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저항했는지 드러낼 수 있다. 셋째, 체제에 대한 지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어떤 태도와 기대가 "총통"의 그럴싸한 성공에 대한 환호로 이어졌는가 인식할 수 있다. 넷째, 체제를 비판하거나 체제의 대표자들과 갈등을 벌이고 체제가 어떻게 확산되고, 포괄적인 저항으로 나가지는 못해도, 함몰되지 않았던 사정도 도출해낼 수 있다. 다섯째, 일상으로 표출되는 산업사회 발전의 보편적 경향들이 제3제국에서 얼마큼 지속되었고, 그 경향들이 나치 체제의 목표와 어디에서 만나고 충돌하는지 질문할 수 있고, 제3제국이 독일 사회사에서 점하는 위치를 "우발적인 사고" 혹은 "독일사의 특수성"이라는 피상적인 발전론에 빠지지 않고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 여섯째, 나치에 참여했거나 혹은 적어도 저항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부분적으로 나치에 책임을 져야 하는 구세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당시 그들이 처했던 활동공간의 협소성을 고려해야 한다.(22-23) 제3제국에 대한 교육은 상심(다시 한 번 강조)과 그에 따르는 민주적 참여를 유도해내기 위해, 경험공간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고, 경험을 교육적으로 개척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24)

제3제국 일상에 앞서 거대한 위기가 있었다. 경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이마르 정치체제의 붕괴와 격렬한 경제적 동요, 전통적 사회적 가치와 태도의 전복, 평화조약으로 인한 배상금. 개인적 상황의 유지조차 힘들고, 대외정치는 암울하고 국내정치는 퇴락하고, 자본주의의 위기나 전통적 가치의 해체 혹은 "서구의 몰락"으로 해석될 만큼 사회 전반이 무너져 내릴 때, "더 이상은 안된다는 일상적 합의"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30-31) 문제는 왜 이 위기가 나치의 야만성으로 귀결되는가 이다. 분열된 노동운동을 제치고 권력을 장악한 파쇼 운동에게 경제계, 군부, 관가의 권력 엘리트들은 곧 모여들어 동맹 파트너가 되었다. 바이마르 체제의 "종결"과 민족적 "웅비"를 약속하면서.(32) 나치의 정책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파시즘적 측면이 있으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36) 군수에도 전력을 쏟아 붓지 않았고, 경기 진작 프로그램은 각종 프로젝트에 돈을 나누어주며, 단기적 캠페인으로 일관했다. 노동자들의 급여는 상승했다.(37) 노동계급의 정치적 반발에 대해서는 테러로 대응하지만, 사회적으로는 "뇌물 공여"에 입각한 나치의 태도는 모호했다.(38) 

파쇼적 해법 선택에 결정적 계기는 사무직, 공무원, 자영업자, 농민 등 사회 중간계층의 움직임이었다. 이들이 나치 운동에 가담했다. 이 외에도 전시 청소년, 예비역 청년, 직업적으로 실패한 사람, 장기 실업자 등.(42) 나치는 하위 중간계층이 많았고, 노동자들은 적었다. 특히 "구투사"의 경우, 자신의 사회적 존재가 위태로웠거나 좌절해 버린 사람, 경제적인 이유로 점포의 포기, 패전 후 사회 복귀 실패, 직장이나 직종의 잦은 변경, 반복되거나 장기화된 실업상태가 특징으로, 소위 "좌절한 중간세대"에 속한 사람이 많았다.(44) 반복되는 투쟁으로 시간을 채우고, 당의 사무 보좌나 행진에 의미를 부여하고, 언젠가 보상될 것을 기대하며, 사회적 접촉의 기회와 인간관계의 망이 만들어졌다.(45) 나치당의 매력은 정책이 아니라 사회적 접촉의 장이나 흥분을 자아내는 "운동"의 형식에 있었다.(46) "구투사"에게는 절정은 지도자 대면 체험이었고, 나치당 지지자들은 가투를 통해 개인적 상처와 분노를 터뜨렸다. 무자비한 대응은 정의롭고 정당하다는 것이다.(48)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부르주아 사회는 중간계층에게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공하지 못해, 근대적인 형태의 대중운동을 낳았다.(49)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19세기말의 사이비 이념인 국수주의, 반근대주의, 반마르크스주의, 반유태주의, 반민주주의에서 취했고, 증오는 근대성과 체제 그 자체로 향했다.(50) 농민, 소상인, 수공업자와 같은 구 중간계층 뿐 아니라, 사무직(Angestellte)이라는 근대적 중간 신분의 지위 악화도 있었다.(50-51) 퇴행적 이데올로기는 신구 중간신분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었으며, 나치의 전근대적 이데올로기와 반근대적 정서는 근대적 요소, 기술, 대중 제식, 노동 귀족, 공장과 공공건설, 군수기술 및 무기체계와 결합되어 있었다.(51) 복고적인 "최종 목표"와 근대적인 "수단"의 복잡한 결합이었다. 성취지향적 노동, 기술자와 발명가의 실천, 기업가와 기업정신에 대한 히틀러의 생각은 거의 미국적이었다.(52) 낡은 요소와 근대적 요소의 독특한 결합. 구중간신분과 신중간신분, 삶의 전망을 잃어버린 청년들과 장기실업자 및 사회적으로 강등된 자들로 구성되어 혼합적이었다.(53) 거기에 더한 새로운 사회문화적 양식 "폭풍의 20년대", "타락한 대도시적 삶", "가치의 상실", 민주적 바이마르 공화국의 권위구조와 정치문화의 변동 등.(54) 악의 근원은 바이마르 "체제" 그 자체이며, "유태인", "볼셰비키", "자본가"의 "음모"가 원인이었다. 파쇼 이데올로기는 반유태주의, 반볼셰비즘과 반자본주의가 상호 교환 가능했다.(54) 절망적인 현재는 "단발의 과격한 타격"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다. "최종 목표"는 모호했지만, 중요한 것은 흔들리는 삶의 "정상성"을 다시 세우는 일이며, 유토피아 적인 것이다. 모두가 안전하고 존중받는 자기 자리를 갖는 정의로운 계층사회(55) "진정한 민족공동체." 운동은 숨막히는 역동성으로 다음 선거, 시위, 실내 전투로 달려가고 있었다.(56) 

나치는 노동운동을 테러로 해결해 버린 후, 지배 엘리트와의 동맹을 통해, 모든 피지배계층을 정치적 영향력에서 배제시키고,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기관들을 파쇼의 지배 통제에 직접 통합시킴으로 헤게모니를 재편했다.(58) 사회의 이익집단들 사이의 다원주의적 경쟁은 상호 경쟁하는 권력기관들 사이의 혼란스러운 전투로 바뀌었다. 파쇼의 지배체제는 경쟁적 권력집단의 다극 지배체제(Polykraite)로 귀결되었다. 국가의 폭력독점과 국가기관의 통일성이 해체되고, 권위와 권력의 상호경쟁 체제가 들어섰다. 사회를 "국가화"하려는 시도는 지배관계의 원자화를 결과했다.(59) 합리적인 국가독점자본주의가 아닌 파편화된 국가적, 반국가적 기관들에 의한 경쟁과 단기적인 캠페인에 의해서만 제어되는 권한의 혼란 상태였다. 사회의 "국가화"는 국가의 "사유화"를 낳았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위기의 결과이고, 패전과 미완의 혁명으로 부르주아 체제가 해제되던 와중에 노동운동 역시 대안을 제공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다.(60) 근대 산업사회의 정상적인 안전판이 위기 상황을 맞아 갑작스레 기능을 정지하고 위기의 압력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고"로 파멸적인 재앙으로 폭발해버렸다.(61) 나치즘의 폭력은 유럽 내부의 "정상적인" 전쟁과 특히 식민지 전쟁에서 나타났던 행위와 태도들이 파시즘의 대두와 함께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출현한 것이다.(62) "유럽의 신질서"는 유럽의 파괴와 수백만 동료 시민들의 학살로 귀결되었다. 나치는 인플레이션으로 지탱되는 군수경제, 특권 경제와 부패하고 혼란스러운 행정,(62) 박해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새로 만들고, 사상통제와 감시의 체제를 쌓아올렸다.(63)

나치의 등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 성장과정에서 한계와 위기에 봉착했을 때, 희생을 강요당하던, 중간계급이 파시즘적 대안을 택하고, 신분적으로 안정된 질서 있는 사회를 기대하면서 형성되었다. 이것이 일베가 가진 메시지다. 일베가 흔히 말하는 무임승차론. 그리고 수많은 음모론. 끊임없이 적을 만들어내는 논리. 또 하나 1930년대의 독일과 유사한 것은 경제의 엔진이 식어서 깊은 침체를 향해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럴 때, 지금까지 경제를 주도하던 재벌 등 자본은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있다. '낙수 경제론'은 이제 설득력이 없다. 대기업은 위기를 입에 올리면, 구조조정에 나선다, 살고 보아야 한다. 노동운동은 원래 조직력이 10%에 불과한데다, 자본과 국가의 지속적인 이데올로기 공격, 귀족 노조 공격으로 노동운동에서 조차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있다.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헤게모니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질서, 안정, 정상성(Nomalität)을 바라고 있다.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라기 딱 좋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 일베 등이 뿌리를 내리는 데는 사회 구조적 차원들이 깔려있는 셈이다.

포이케르트의 논의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지배관계의 "원자화"를 지적하는 부분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와 나치의 등장으로 인해, 독일사회는 강한 국가와 원자화된 개인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이 원자화된 개인의 업적지향적 성격과 라인 강의 기적을 결부시키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의 원자화 및 지배계급의 원자화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제기는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의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Korea: The Politics of the Vortex)』에서 였다. 주미대사관 참사관과 문정관은 지낸 헨더슨은 조선 시대로부터 이어지는 전통 한국의 정치 문화의 지속에 원인이 있다는 식으로 원자화와 중앙집권화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나치 독일, 제3제국의 경험은 다른 인사이트를 주는데, 그것은 개인의 원자화 현상 및 원자화된 권력 추구는 근대적 현상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런 정치문화도 근대 자본주의의 도래와 함께 형성된, 근대화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렇다면, 이런 정치문화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조선총독부 통치와 미군정, 이승만 독재 및, 박정희 유신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권위주의적 근대 이식, 근대성 착근,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고착화된 것일 가능성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특히, 이 부분은 조선 중기 및 후기 즉, 17-18세기 연구자들이 조선 후기 정치세력이 원자화되어 있지 않았다고, 정치 문화적 해석에 대해 끊임 없이 제기하는 반론을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5.
총체적으로 동원된 민족공동체라는 인위적 표상은 사람들의 기억과 다르다.(67) 망명 사민당의 "독일보고서(Deutschland-Berichte)"와 경찰의 상황 보고서, 게슈타포의 비밀 보고서에 의하면,(68)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많고, 최후승리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69) 나치의 경찰국가적 억압 때문에 비판은 작은 형태, 다양한 비공식적 소통 수단으로 전달되었다.(73) 라디오 수신기의 성능 개선으로 외국 방송(라디오 모스크바나 BBC)를 청취할 수 있었다.(74) 그러나 저항행위는 적었다. 불평의 내용은 주로 생활조건의 악화와 생필품 공급의 열악성에 대한 불만족,(76) 34년이 지나면서 나치당에 대한 실망,(78) 좌파에 대한 테러에 대해 침묵,(79) 교회 문제는 보다 반향,(79) 유태인 박해에 대한 태도는 단일하지 않고, 물질적 이해관계가 침해당할 때 격렬하게 비판했다.(80) 나치 정권의 대외 정책만은 각별히 호평을 받았다.(84) 그러나 히틀러를 전면적으로 추종하지 않고,(86) 승리했을 때만 분위기가 호전되었다.(87) 사람들은 수동적인 거부적 태도로 일관했다. 나치 테러기구, 전쟁의 부담, 사회적 관계의 격심한 원자화가 원인일 것이다.(88)  비교적 광범했던 불만과 비판 능력의 정치적 효력이 이중으로 제약되고 있었다. 비판적 진술의 고립성과 특수 이익에의 함몰이 한 원인이고, 일상적인 부분 비판이 빈번히 체제에 의한 동의와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 다른 원인이다.(93)

마지막 순간까지, 병사로 노동자로 의무를 당하는 독일인을 파쇼의 대중 조작기술의 힘을 강조하는 유혹이론과 제3제국의 통제, 첩보, 경찰체제에 주목하는 감시이론으로 설명해 왔다.(94) 그러나 불평도 있고, 틈새도 있었다.(95) 독일인의 나치 지지는 대외정책에서의 성공과 그 방법에 대한 지지에서 비롯되었다.(96) 사민당 독일보고서는 독일이 세계 무대에서 역할한다는 만족감, 과격한 성공을 위한 폭력적 방법, 외교적 성공을 개인화하여 총통신화의 구축을 원인으로 말한다.(97) 나치경제는 36/37년 모두에게 일과 빵을 제공했고,(98) 군수를 인플레이션적으로 추구한 결과이긴 했으나 주간 노동시간도 증가하고, 소득과 소비재 공급을 향유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를 위해 나중에는 유럽의 절반을 약탈했다.(99) 가족지원, 교통수단, 직업적 상승 등은 나치 선전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할 만큼은 되었다.(100) 나치의 국내 정치도 "질서" 회복을 약속했을 때는 인민의 동의를 얻었다.(100) 히틀러는 질서의 버팀목으로 사람들은 그에게 질서와 청렴성을 원했다.(101) 나치 대중조직은 많은 사람에게 직책과 과제를 제공했다.(102) 미래에의 전망과 냉엄한 일상 사이의 간극을 총통 신화가 메웠다. 아돌프 히틀러의 인기는 변치 않았고, 비판은 중하위 당직자와 같은 하위 권력자에게 집중되었다.(103) 체제에 대한 근본적 합의를 위해 한 고양된 존재(총통)이 전체의 정체성을 표상해야 했다.(104) 총통신화의 작동을 위해, "총통"은 비판과 불만을 일으키는 일상적인 문제들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유지해야 하며, 대내외적 성공이 모두 "총통"의 개인적 카리스마 덕분으로 간주되는 메커니즘이 있어야 했다.(107) 그러나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힘을 줄어들고 있었다. 체제의 부정적 현실을 덮어 버리기 위해 "적"을 생산했다.(108) 유태인, 집시, 반사회적 인간, 노동기피자 등, 인민의 정상성에 대한 희구, 질서의 회복이 표현되고 있었다.(109) 민족공동체의 주변에서 공동체의 적들에 적대적으로 세워지는 질서였다.(109-110) 수동적 합의는 또한 나치 체제가 공격하는 동시에 촉진했던 과정, 즉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사적인 영역으로의 후퇴에 기반하고 있었다.(110) 재즈, 코카콜라, 비정치적 영화, 근대적 기술, 카레이서 등.(111) 라디오를 통한 "비정치적인" 오락의 제공.(113) 역설적으로 나치의 동원에 대한 사람들의 반작용이야말로 체제를 안정시켰다.(114)

대중의 열광적인 동원과 광장에 모인 군중의 환호를 보여주는 영상들은 그 시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우리들에게 일종의 환상을 심어주는 지도 모르겠다. 초기에 비해 나치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열광적이고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치 정책에 대한 불만과 비판도 종종 생겨났다. 그런 비판과 불만은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가 직접적으로 침해되었을 때였다. 그러나 대외정책에 대해서 만큼은 환호가 있었다. 나치는 베르사이유 체제라는 패전국 독일에 대한 제재를 과감하게 벗어버리고, 영토확장을 시도하고 성공했다. 대중조작과 비동원, 뒷날의 3S 정책을 연상시키는 대중 오락의 만족은 나치에서 뿐만 아니라 독재 혹은 권위주의 국가에서 흔한 일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성공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우리도 지금까지 이런 일을 무수하게 경험해 왔다. 특히 외교적 성공에 집착 내지는 외교적 성공을 지도자에게 모두 돌리는 일, 국내 질서 회복에 집착, 국내 및 주변 갈등에 개입하지 않고, 최종적 심판자의 역할을 담당하려고 하는 일, 지도자 개인의 인기에 집착하는 일. 이런 모든 일들은 적극적 지지 보다는 수동적 지지, 즉 후안 린츠가 말하는 비동원(demobilization)의 전형적인 형태들이다. 나치즘에 대한 대중의 순응과 테러에 의한 저항의 해체 및 비동원은 그 이후 모든 권위주의, 전체주의 체제에 선구자 격이었다.


6.
나치즘은 내적 갈등으로 찢겨져 있었다. 첫째, 나치 체제와 적들, 혹은 나치 체제와 체제에 대해 투쟁했던 집단들 사이의 외적인 갈등이다. 교회, 노동운동 등. 이런 집단은 과거로부터 발전시켜온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었다. 둘째 나치 체제의 지배적 파당들 사이에 수평적으로 전개되던 내적 갈등. 나치즘은 모순 없는 단일한 체제가 아니라 경쟁하는 권력 블록간의 "다극 지배체제" 속에 찢겨져 있었다. 셋째, 나치 체제 내부에서 수직적으로, 즉 나치 엘리트와 대중 혹은 나치 체제와 지배받는 개별 인민 집단 사이의 갈등이다.(116-117) 나치 체제는 근대 산업사회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모순을 다만 덮어버렸으며, 농업 낭만주의와 인종주의에 입각한 이데올로기 교육은 근대적 기술과와 배치되었다.(118) 나치는 기존의 사적인 영역에 정치적 요구를 부과함으로써 사회를 정치화 시켰다. 사람들은 사적인 영역으로부터 후퇴했지만, 이런 대응은 비순응을 거쳐, 거부와 저항으로 사람들을 몰라가는 경향이 있었다.(121)

1933년 이전 나치당은 중간계층으로부터 각별한 지지를 받았다.(123) 거대 사회계급 사이에 끼어 닳아 문드러지고 대중 사회의 역동성에 의해 묻히던 그들에게 과거의 특권적 지위를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신분적으로 편성되고 계서적으로 조직된 사회의 존경받는 권위적 중간신분으로 복귀를 약속했다. 중간신분 주변화에 대한 불쾌감과 권위적인 정치적·사회적 가치 질서에 대한 요구.(125) 소상인, 수공업자, 농민에게 해당되는 시대와 상황에 대한 이해관계. 예를 들어 부채 탕감.(126) 그러나 나치는 지배집단과 동맹을 맺고, 정치적 반대는 억압했고, 점차 군수공업에 입각하는 등,(127) 자본주의적 공업사회에서 구 중간신분의 중요성은 감소했다. 이들은 불가결하지 않은 신분으로 거세대상이었으나, 대단히 높은 충성심을 견지했다.(127) 수공업자들은 근대 산업사회의 발전에서 신분을 지켜줄 포괄적인 특별법을 나치로부터 약속받았다. 모두 지켜지지는 않았으나 일부 중요한 개별조치는 시행되었고, 일부는 이익을 보았고, 수공업의 내적 분화가 진척되었다. 불평도 있었으나 일정한 근원적인 만족감이 있으며, 수공업을 찬양하는 상징적 차원에서 분위기가 좋았다. 소상업도 상황은 비슷했다.(131) 농민도 전체적으로 수공업자, 소상인과 비슷했다. 일상적인 불평불만에도 불구하고 권위적인 체제에 적응했고, "창조적 신분"이라는 상징적 선전으로 자긍심을 얻었다.(133) 

신중간계층, 임금 혹은 봉급을 받는 영업, 기술 부문 회사원, 직공장, 엔지니어, 각종 행정기관의 사무직원과 공무원, 대학생, 고등학생 등 교육기관 졸업자가 나치당을 지지했다.(133) 이들은 노동자와 "컬러의 경계선"이 뚜렸했으며, 자신들이 중간신분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나치 이데올로기와 선전의 근대적 측면에 끌렸다.(134) 나치의 민족공동체는 사회적 격차의 균질화와 평준화를 겨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계서제가 능력에 입각하여 작동하도록 사회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능력에 입각한 계서제.(137) 

지방에서의 나치 집권은 지역의 전통적인 정치로부터 도움을 받았다.(139) 대부분의 지역에서 강요와 순응이 이루어졌고, 권력구조는 구엘리트와 신참의 융합에 의해 형성되었다.(140) 갈등은 카톨릭 문화협회를 흡수할 때 커졌고,(141) 교육 부문의 나치화에서 폭발적이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부모의 권위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시키지 않으려 했다. 일종의 근대화 기능을 수행했다. 독일소녀단도 마찬가지 였다.(142) 중간계층의 인지방식과 행위에는 비판과 동의가 중첩되어 있었으며, 전통과 근대 사이의 장기적 갈등이 교차되고 있었다. 일상적 비순응의 넓은 장이 마련되었지만, 나치 체제에 대한 저항 잠재력으로 결집되지 못했다.(144)

놀랍게도 중간계급이 나치를 지지했다. 그것도 구 중간계층 뿐 아니라 신 중간계층(die Angestellten)까지. 놀랍게도 중간계층은 근대의 산물처럼 보였음에도 근대를 두려워했다. 독일의 중간계급이 융커를 기반으로 한 구 토지귀족 출신이라서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 신 중간계층까지 그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다극적인 나치 엘리트의 지향은 일종의 농업 낭만주의와 인종주의였다. 이런 태도는 일견 근대와는 거리가 멀어보인다. 중간계급은 근대적이지만, 근대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근대사회에서도 "정상성"이라는 이름의 안정을 희구했는데, 그 안정은 신분제적인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식의 반동은 일본에서도 보인다. 메이지 유신 초기 사무라이들이 과거 회귀적으로 일으킨 세이난 전쟁은 사무라이의 존립 기반을 무너뜨린채 끝났다. 한때, 자신들이 주도하던 근대화에 의해, 이제 거꾸로 자신들의 생존기반이 해체되다시피 치어나가는 그들은 어딘가 자신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말하는 안전판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왜 자영업자는 보수 여당을 지지하는지 약간의 수수께끼가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왜 그들을 지지하는지, 노년층은 왜 그들을 지지하는지. 그러나 여당은 실제로는 대기업의 이익과 자산보유자, 즉 건물주의 이익을 대변하지, 자영업자, 농민, 노년층의 이익을 실제로 대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정당이 던지는 메시지에 깔려 있는 '질서와 안정'이라는 메시지에 호소력이 있다. 자영업의 존속을 위해, 사회적 약자인 농민과 노년층의 보호를 위해서는 특권적 보호가 필요하다. 그러나 중도 내지 진보정당은 늘 공정성과 공평함을 주장한다. 중도와 진보정당은 어찌되었건 최종적 순간에 젊은이의 편이며, 적어도 40-50대의 목소리를 반영한다. 게다가 그들이 말하는 것은 결국 질서의 재편인데, 이 과정에서 특권적 보호가 유지되거나 강화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자영업자, 농민과 농촌거주자, 노년층 등 근대화의 확산에 따라 점차 취약해지는 이들은 보호가 필요하고, 보호를 원한다. 그리고 이들이 원하는 보호는 사회를 과거로 되돌리는 보호이다. 이런 보호는 보수정당을 통해서만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목소리로라도 위안을 얻는다. 정책은 반대로 가더라도. 어찌보면 사회변동의 과정이 선택을 억압해 버린 결과일 수 있다. 중간계급은 진보적이지 않을 수 있다. 중간계급은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다가도, 중간계급의 안정적 토대가 해체되는 것처럼 보일 때, 격렬하게 저항한다. 반동적 선택도 서슴지 않을 수 있다. 근대성을 지향했지만, 근대성의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경우 근대에 저항하거나 근대를 포기하거나 자기파괴적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중간계급은 안정과 정상성을 지향하며, 그것은 위계적이다. 근대를 원한다고, 모두가 같은 근대를 원하는 것은 아니며, 근대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근대의 모험을 지속하려하지 않을 수 있다. 


7.
노동자들은 나치를 지지하지 않았다.(146) 나치는 집권 후 노동운동의 조직문화는 물론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상문화, 노동자 거주지역과 공장에 조성되어 있던, 조밀한 사회문화적 환경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151) 사회문화적 환경에 가해진 테러는,(153) 저항을 결연한 소수자의 문제로 만들었다. "대중적 저항"에 필요한 조건은 단 하나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노동조합, 정당, 협회와 결부된 "프롤레타리아적 공동성"의 정치적 측면은 단 몇 주일 만에 산산조각 났다. 나치의 승리는 압도적이었다.(154) 노동자들이 나치 체제에 순응한 것은 아니나, 다수는 정치적으로 수동적이었다.(157) "민족적 노동질서"를 위한 새로운 법은 고용주를 기업지도자, 노동자를 추종자로 만들었다.(158) 제3제국 노동자들의 거부적 태도는 한편으로 나치의 정치에 열광적이지 않고 공장 노동에 열성적이지 않은 태도와 다른 한편 사적인 영역 및 자기 주변의 믿을 만한 소집단의 연대성으로 조심스럽게 후퇴하는 것이었다.(164) 노동정책의 요체는 노동자들의 동원과 미성년화를 결합하는 데 있었다.(165) 계급투쟁은 나치 체제에서 철폐되지 않았다.(166) 집단적 연대성이 개별적 투쟁으로 분산되었으나, 병가, 결근, 어슬렁거리기 등으로 대응했고, 나치는 이를 격렬하게 성토했다.(167) 구세대 노동자의 연대감이 젊은 노동자에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들은 재교육과 승진 프로그램에도 어느 정도 호응했다. 물론 나치즘에 일체화되지는 않았다.(173) 노동자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나이든 노동자에게는 존속되었고, 그러나 나치는 노동운동의 연대구조를 파괴하는 동시에 개인주의적이고 능력주의적이고 "회의적인" 새로운 노동자 유형이 발달하는 길을 닦았던 것 같다.(174) 

노동자들은 끈질긴 일상적 거부로 나아갔다.(176) 나치는 비순응을 처벌했다.(177) 노동자들의 저항방식은 전통, 의식 결속의 보존, 파시즘 이후 실천하게 될 민주주의에 대한 구상, 나치 체제에 타격을 가하거나 붕괴시키기 위한 활동 등이었다.(178) 조직화된 저항은 반복적으로 파괴되었으나, 노동운동의 핵심 세력은 비공식적 차원에서 의식과 결속력을 보존하고 있었다.(188) 

1942년부터 수백만의 외국인 강제 노동자들이 투입되었다.(189) 나치는 "노동을 통해 학살한다"는 전략과 외국인 노동자 혹은 "초빙 노동자"를 독일 노동자의 하위에 투입하여 독일 노동시장의 구조를 장기적으로 개편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인종주의가 겹쳐져서, 인종적 계서제가 급여, 주거 조건, 식사, 대우, 이동성 등에서 등급화되었다.(190) 이민족 노동력의 투입은 갈수록 첨예해지는 문제 상황에 대한 나치 체제의 응답이었다. 그리고 기술관료적 세계관과 인종주의적 세계관의 혼란 속에, "정상적인" 초빙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을 통해 학살"되어야 할 지위를 한꺼번에 가지게 되었다. 나치즘은 현재와 미래의 사회가 복지와 궁핍 사이에서 등급화 된 불평등에 기초한다는 것이다.(192) 감시와 처벌제도는 독일인 노동자로 확충되었다.(194) 위험하고 육체적으로 힘들며 종속적인 노동에 투입되던 외국인 노동자의 존재는 독일인 노동자의 지위도 변화시켰다. 독일인 노동자들은 빠르게 승진했고, 외국인의 고통을 무시했다. 독일인 대다수는 "이민족 노동력"을 경멸하기만 한 것도 연대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 이따금씩 연민이 뒤섞이는 무관심이 일반적 태도였다.(208) 일반적으로 독일인들은 "이민족 노동력"을 불신하거나 거리를 두었고, 나치즘을 지지하지 않던 독일인도, 외국인 해방이 그동안의 고통에 대한 복수로 나타날까 걱정했다.(211)

"외국인 노동자"의 등장은 한국사회의 노동구조를 크게 바꾸었다. 3D업종, 농촌의 힘겨운 노동, 심지어 소규모 항구에서 어선을 타는 일까지 "외국인 노동자"의 일이 되었고,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고, 이들에 대한 합법적 이민이 거의 허용되지 않아, 불법체류자들이 생겨난다.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고, 사양산업을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성공단 문제도 사실 동일 선상에 있다. 월 급여 15만원짜리 공단이 폐쇄되자, 중고생 교복이 공급되지 않고 있다. 유태인이나 집시들에 대한"노동을 통한 학살"이나 "집중캠프"와 같은 특수하고, 괴물적인 상황에만 집중하기 쉽지만, 그것은 파국적인 상황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구조이다. 노동자들을 순수한 독일인(아리아인)에서부터, 인종주의를 따라 계서적으로 기획된 틀 안에서 이미 초빙노동자 즉, Gastarbeiter 개념을 수립했다. 유럽의 다른 국가에서 온 노동자들, 소련에서 데려온 노동자들, 그리고 유태인이 있었다. 한 국가에서 외국인 노동이 가져오는 노동환경의 변화, 지위의 변화, 소득과 처지의 변화, 태도의 변화, 무관심, 불안감. 이 모든 것은 나치가 시작한 일이었다. 전후 독일 경제는 사실상 외국인 노동자 없이 돌아가지 않았다. 베를린이 특히 그래서, 인구의 삼분의 일이 터키인일 정도이다. 게다가 지금 유로권에서 유일하게 누리고 있는 독일의 호황도 독일로의 젊은 노동자들의 끊임없는 유입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해 보통의 평범한 노동자나 일반 주민이 가지는 태도 역시 마찬가지. 인종주의란 굳이 이념으로 주입하지 않아도, 인간은 모두 본능적으로 유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식민주의와 그 이후 권위주의 독재정권에 의해 학습, 유지, 강화된 것인가. 나치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독일이 외국인 노동자에 의존할 것임을 미리 예측했다고 한다.


8.
나치는 청소년에 집착했고, 히틀러 청소년단 등으로 동원하고, 인종주의 이데올로기를 교육하고, 군인적인 행동 양식을 주입하고 미래 핵심적 나치로 성장시키려 했다. 겉으로는 통일적 포섭 전략으로 동시에 파편화시켰다(212) 나치즘의 이데올로기는 모호했으며, 인종주의와 민족주의가 전통적인 인문주의와 뒤섞이고, 독일적 문화의 존재와, 복고적 농업 낭만주의, 근대 기술에 대한 열광이 공존했다. 결국 이 시대에 대한 보편적 특징은 남지 않았다.(213) 자유학교 출신들은 정체성을 지키기도 했다.(214) 나치의 압력으로 억지로 참가한 체육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나치는 이를 통해 전사인간을 창조하려 했다.(217) 전쟁은 정상이고, 폭력은 정당하다는 논리에 청소년들은 익숙해져 갔다.(219) 그러나 때로 열광과 비판은 잘 어우러져 병존하기도 했다.(220) 패배가 눈앞에 왔어도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221) 나치 청소년 정책의 중심은 히틀러 청소년단이었다.(222) 이 단복은 청소년에게 교사, 아버지, 성직자 등 전통적 권위에 대응할 수 있는 대항적 권위였다.(223) 집단적 여가생활을 즐기고, 유스호스텔이나 운동장을 건설했다. 해방적 동력은 소녀들에게 더욱 커서, 독일소녀단을 통해 가정의 족쇄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224) 1930년대 후반에 히틀러 청소년단에 위기가 찾아왔고, 전쟁 중에 청소년 저항운동으로 발전했다. 갈수록 거부적이 되었다.(226)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자발적인 조직, 자율적 공간을 방어했다. 1930년대말과 1940년대 초에 반역적 행태를 보인 14세에서 18세에 이르는 청소년들은 교육 사회화 과정을 대부분 나치 체제에서 경험했다.(228)

에델바이스 해적(Edelweiss Piraten). 에센의 "여행자 무리", 오버하우젠이나 뒤셀도르프의 "키텔바하 해적", 쾰른의 "나바요스". 주변의 휴양지로 주말여행을 떠나 야영하고, 노래부르고, 토론하고, 히틀러 청소년단의 순찰대를 물먹였다.(229) 14세에서 18세의 청소년이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 모여 자유시간을 즐기며 자생적으로 탄생했으며, 더 어리거나, 부상을 입었거나, 취직을 보류한 청소년이 가세했다. 그들은 보조노동자가 될 수 있었다.(230) 반복적 군사훈련과 멍청한 복종 연습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명령권자가 동년배이거나 중상류 출신인 경우에 더욱 그랬다.(231) 이들은 지역을 원칙으로 학교 친구, 직장 동료, 동네 친구가 무리를 지었다. 이웃한 공원, 선술집, 길모퉁이, 방공호 앞의 공터, 공습 맞은 곳, 운하 둑방, 축제 마당 등에 모였으며, 인원은 청소년 십 수 명과 처녀 몇 명. 비교적 자유롭게 성경섬을 할 수 있었으나 나치의 보고처럼 방종으로 흐르지는 않았다.(232) 자유시간의 절정은 야외로 나가는 주말로 어른들의 통제가 없는 자유로운 시간을 보냈다.(233) 적지 않은 청소년들이 그 나이에 휴가를 이용해 슈바르츠발트, 티롤, 뮌헨, 빈 등지에 갔다. 장기간의 휴가여행이나 단기간의 주말여행은 체험 공간을 열어주고, 결속력, 특수한 소통 방식, 독자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킬 기회를 얻었다.(234) 대중오락을 포기하지 않고, 유행가를 불렀다. 노래 가사를 바꿔서 차별화와 저항의 표식으로 사용했다.(235) 이들의 노래에서 자유에의 욕구가 두드러진다.(237) 이 노래들은 향락, 긴장, 집단적 연대감, 구체적 삶의 기쁨을 노래하고, 임금노동을 경시했다. 이는 물론 파쇼는 물론 성인 전체에 대한 도발이었다.(238) 에델바이스 해적은 당국을 끊임없이 습격했고,(238) 개인별 경고, 일제 단속, 일시적 구금, 주말 구금, 훈육, 노동 수용소, 청소년 수용소, 형사 재판 등으로 억압했고, 수천 명에 달랬고, 1944년 11월 쾰른의 에델바이스 해적 수괴가 처형되었고, 16세 소년은 에렌펠더 휘텐스트라세에서 공개적으로 교수되었다.(241) 맨 앞 사진의 그 장소다. 나치는 노동자와 군인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을 절멸시킬 수 없었다.(242) 이들은 단순한 불량배 이거나 지순한 정치적 저항투사로 파악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지배적인 사회적 규범으로부터의 일탈을 나치즘에 대한 정치적 거부와 연결시켰다.(243) 뒤셀도르프에서도 240명의 청소년에 대한 게슈타포의 기록이 있다. 에델바이스 해적은 대부분 직업 노동에 종사했다.(243) 전직이 잦고, 상급자와 갈등, 자주 결근, 병가, 작업속도의 조절 등을 했다.(244) 아버지의 직업을 보면 이들은 "타고난" 프롤레타리아트 였고, 모험적이었다. 그들은 노동 규범에 적응하지 않는 자의식 강한 프롤레타리아 청소년이라는 것.(245) 이들은 모두 나치를 거부하고 대안적인 스타일을 추구했다. 삐라를 우편함에 넣거나 조직화된 저항운동에 가담했고, 도망친 병사 등에게 피난처를 마련해주던 지하조직에 가담하고 빨치산과 흡사한 전투를 벌여 1944년 가을 쾰른의 게슈타포 청장이 이들에게 희생되었다.(246) 비순응에서 의식적 거부, 공개적 항의를 거쳐 정치적 저항에 이르는 청소년 노동자 일부의 일탈적 하위문화적 규범이었다.

라이프치히의 모이텐은 약 1천5백명으로 에델바이스 해적과 닮았으나, 이들은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전통을 이용했고,(248) 에델바이스 해적보다 더 정치적인 계급적 정체성을 담고 있었다. 게슈타포가 특히 가혹하게 억압했으며, 드레스덴, 할레, 에르푸르트, 함부르크, 뮌헨 등에 유사한 그룹이 있었다.(249) 

스윙운동은 상류 중간층 청소년들이(249) 재즈와 스윙을 즐기고 영어가사를 따라 부르는 것으로(250) 교육받은 중간층 가정 출신들이었다.(251) 나치가 검둥이 음악이라고 불렀던 재즈를 선호했고,(252) 외부로부터 차단된 부모의 집과 밤의 여흥은 성적 경험의 기회를 제공했다.(253) 이들은 비정치적이었으나 유태인과 반유태인을 동아리에 받아들였다.(254)

청소년 노동자들의 공격적 호전성과 회의적 나태함은 제3제국을 곤혹스럽게 한 일상문화의 영역에서 제기한 도전이다.(255) 노동자문화의 금지 속에서 독자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문화적 형식을 발전시키고 분리선을 강조했다.(257) 에델바이스 해적과 모이텐은 뚜렷한 양식적 독자성과 나치즘과 대결하려는 전투적 자세로 인해 갈등을 불사하는 계급문화를 표출했다. 새로운 양식과 놀라운 자발성, 나치의 선전에 배치되는 생활세계를 경험했다.(258) 자신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진정한 남자이며, 정당하게 돈을 번다고 생각했다. 부르주아 청소년 문화와 부모 세대의 가치는 갈등의 여지가 더욱 컸다.(259) 회의, 개별성 느슨함은 스윙 세대가 아버지 세대에 특징적인 부르주아적 사회문화적 자기 이해로부터 탈피했음을 표현하던 양식이었다.(261) 대안적 여가활동은 첫째, 젊은 세대의 중요한 일부가 나치가 공급하는 교육과 여가에서 등을 돌린 것을 의미하며, 둘째, 이들의 나치 현실에 대한 경험과 자기 정체성을 유의미하게 표현하려는 욕구가 나치 이데올로기 및 그 기형적 조직 형태가 어긋나고 있었다. 나치는 독일사회를 장악하지 못했다.(261) 셋째, 패전으로 몰락하기 이전, 나치 사회정책의 양대 목표, 민족공동체적 감정을 통해 계급 현실을 지양하고 전래의 가치를 위협하던 근대성과 국제주의를 군사적으로 형성되고 국수주의적으로 교육된 민족을 통해 파괴한다는 목표가 실패했다. 넷째, 의도와 달리 청소년들의 근대적 여가 활동에 길을 닦은 것은 나치즘이었다.(262)

나치의 청소년에 대한 통제 시도와 하위 문화의 등장을 통한 실패 과정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통제 및 성공과 궤를 같이한다. 나치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기반을 분쇄하기 위해 사회문화공동체, 즉 그들의 저항이 근거할 수 있는 일상생활의 영역을 분쇄했다. 노동자 집단 거주지를 공격하고, 결국 노동자를 원자화하는 데 성공했다. 나치의 청소년에 대한 통제 시도, 히틀러 청소년단과 독일소녀단은 그 반대로 강제적인 청소년 하위문화를 구축하려던 시도였다. 분쇄는 성공했지만, 구성은 실패한 것이다. 청소년들의 저항은 에델바이스 해적단이든, 보다 사회주의적인 모이텐이든, 스윙운동이든 공통적으로 놀이에 근거했다. 우리에게도 흔하고 익숙한 '노래 가사 바꿔부르기(노가바)'는 저항의 일상적 도구였다. 그 야외에서 이루어지던 캠프, 놀이, 여행. 그것은 즐거운 저항이었다. 이들의 노동은 놀이에 필요한 만큼이었다. 놀이에 필요한 만큼 일하고, 즐겁게 논다. 그러나 그런 놀이 영역을 통제하고, 침범하고, 규율화하려 하자, 저항으로 이어진다. 후일 1960년대에 보인 '반문화(counter culture)'의 싹이 여기서 보인다. 최근에 일본에서 다시금 생겨나는 청년운동, 반전운동, 최저임금 인상시위가 놀이를 기반으로 한 재미있는 시위를 기획하고 시도하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랩과 춤으로 이루어지는 구호와 시위. 80년대 후반의 겉으론 비장하기만 했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었던 하위문화.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입시, 입사 등 삶의 사다리를 타는 과정에서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리는 현실에서 복원해야 할 것은 일상생활과 놀이이고, 그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해서 복원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나야 한다. 식민지 하위문화, 독재와 권위주의에 저항하던 하위문화의 특징을 외려 돌아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넘어서야 할 것은 비장함과 비분강개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치는 인간 노동을 동원하는 이중적 모델을 제시했다. 업무 의지를 가진 자, 재능 있는 자, 사회적 사닥다리에서 보다 좋은 위치와 교육을 받은 자들에게는 자극을 주면서, 특권이 유전적 인종적 가치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사회의 밑바닥에 위치한 의지를 갖지 않은 자들에게는 강제를 가하고, 분리하고 최종적으로 제거하는 것이다. 제3제국의 현실에서 소가족, 상승에의 지향, 매스미디어, 여가 문화, 간섭적 복지국가 등으로 구성되는 미래의 능력 및 소비사회가 빛을 발하는 가운데, 인종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편성된 테러적 질서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271) 나치즘이 "근대화 동력"을 발휘했는가 묻는다면, 1930년대와 1940년의 사회사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불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답변이 네 가지 방향으로 잡힌다. 첫째, 나치즘은 일괄해서 "반근대적"으로 특징지을 수 없다.(273) 둘째, 나치즘은 근대의 장기적인 추세에 기꺼이 적응했다.(275) 나치 시대 청소년 하위문화의 근대적 추세가 정치적으로 나치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던 자발적인 동아리 문화나 사회적 태도로 향했을 때, 전후의 "회의적인" 청소년 세대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이었던 가치 변화는 나치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싸워 얻은 성과였다. 셋째, 혁명 개념에서 진보와 사회적 개편에 대한 지향성을 빼버린다고 해도 "나치 혁명"은 과도한 해석으로 보인다.(276) 1950년대의 근대사회를 낳게 되는 의식의 변화는 나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발생했거나 인지되지 못한 채 곁가지로 일어났거나, 나치를 거부하는 가운데 이루어졌고, 나치즘이 약화시킨 많은 전통은 전쟁으로 분쇄되었다. 나치즘의 성격을 파괴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혼동의 역동성을 규정해야 하며, 가속적인 파괴의 과정인 한에서 "부정적인 혁명"으로 해석될 수 있다.(277) 넷째, 나치즘의 파괴적인 동력, 민족공동체 이념의 내적인 구성능력 부족을 갈수록 과격하게 적들을 지목함으로써 외적으로 뒤덮으려던 나치즘의 경향은 근대의 산업적 계급사회의 장기적인 병리적 차원을 드러낸다.(278)

나치즘과 근대화의 관련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나치즘 자체는 자신이 표방한 것과 달리 근대화와 근대성에 대해 상반된 방향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독점 자본주의와 공업생산 등은 그 명확한 증거이다. 또한 동시에 나치즘이 무너뜨린 노동자들의 하위 문화 및 노동자의 원자화는 2차대전후 독일의 급속한 경제적 성장의 토대를 형성했고, 나치즘이 약속했던 여가생활과 오락은 결국 나치즘의 목표한 대로 이루어졌다. 결국 나치즘은 근대와 상반된 방향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근대의 거대하고 도도한 흐름 속에서 하나의 병리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 포이케르트의 해석이다. 가장 기묘한 것은 나치즘을 지지했던 중간계급은 근대성과 전혀 상반된 계급이 아니지만, 근대화의 전개에 따라 발생하는 위기를 정치적으로 극복하려 했지만, 결국 파국적인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나치즘은 근대가 성공적으로 전개되기 위해 파괴적으로 근대 성장의 토대를 형성하는 파국적 국면이라는 해석이 가능할까? 나치즘과 전쟁 때문에 전후 독일의 근대가 수월해졌다고 말한다면 더욱 혐오스럽지 않은가. 근대 사회의 형성을 위한 그 과감한 파괴가 이루어진 전쟁과 자멸, 그리고 자기 파괴 과정에 대해서. 한국도 식민지기와 해방정국 8년, 한국전쟁 3년 동안 집중적으로 그 이후에는 다소 산발적으로 엄청난 파괴가 이루어졌다. 이 모든 일은 우리 선의와 무관했지만, 동시대인들의 욕망, 의지, 감정이 투영된 일들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 위로 근대가 걸어간다고 생각하면, 근대에 대해서 입을 떼어서 말하기가 두려워진다.


9.
나치가 선전한 "민족공동체"는 외관 장식이었다.(282) 나치는 과거에 "운동"이 추동했던 낡은 메커니즘에 매달려, 머나먼 미래로 멀어진 유토피아적 민족공동체 대신 공동체적인 것을 암시하고 연출하려 했는데. 그 수단이 대중 행사와 대중 조직이었다. 새로운 캠페인이 공동체적인 열광과 환호를 이끌어내고 유지할 수 있는 기간은 갈수록 짧아졌고, 열광의 시간이 지나면, 회색의 일상이 밀고 들어왔다.(282) 축제, 축하, 대중 행진, 대중 미학 등의 새로운 "민중문화"를 창출하려던 나치의 시도는 점차 줄어들고, 빈곤한 민족공동체 이념을 보충하기 위한 수동적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매스미디어를 통해 오락을 제공하는 편이 나았으며, 전쟁 발발 이전의 괜찮은 복지 수준은 오락을 위한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284) 나치즘은 독자적 문화적 비전을 보유하지 못한 채, 문화를 파괴하고, 기생적으로 도구화 했고(푸르트뱅글러, 카라얀, 한스 바우만 등), 축제 절충주의(285), 나치 건축에서는 기념비 양식과 향토 양식 사이의 긴장이 있으며 여기서 공공성과 사적 영역의 대립이 드러난다. 반면 여기서 개인은 단순한 장식으로 전락한다.(288) 나치에게는 체계적인 문화 이론이 없었으나 파쇼 문화의 진부하고 기괴한 작품에 집착하게 되면, 나치 문화정책의 실천적이고 실용적인 면모를 간과하게 된다.(289) 나치 시대 예술가들은 내적 망명, 진정한 예술의 틈새로 후퇴하고, 필요하면 교활하게 속이고, 가능하면 거부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내적망명은 탈정치화의 이중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289) 예술가들은 최소한의 찬사를 넘어서는 정치적 문화를 생산하지 않는 대신, 무시간적이고 탈목적적이고 기술적으로 성숙한 예술과 오락을 생산했다. 그런데 이 비정치적이고 무해하고 무시간적인 문화는 괴벨스 선전부가 전쟁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떼어놓기 위해 추구하던 가볍고 재미있는 "민족의 동지"용 오락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 떨어진다. 일반인들은 그렇게 희구하던 정상적인 시간으로의 복귀를 약속해주는 문제없는 문화를 찾고 얻었다. 일반인들은 쉬고 싶어했고, 예술 생산자들은 나치의 교조적인 욕구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했고, 괴벨스적인 실용적 오락문화는 라디오(그리고 실험용 텔레비전), 영화, 버라이어티 쇼, 연극, 음악, 문학에서 맹위를 떨쳤다.(290) 호전적 대외정책과 전쟁의 위험에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정상적인 측면이 개제되어 있었다. 독일군이 진군하자 여행 산업은 새로운 광고에 나섰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상호 침투 속에 자기 확실성을 보유한 정상적 인간이 창출되었고, 지배 인종에게 세계는 향유하도록 열려 있었거나, 우월한 자의 권리에 입각하여 폭력적으로 개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293) 여행대상이 될 지역에 대해 이국적으로 소개하면서, 하급 인간이 문화적 진보를 하는 것은 무리라고 덧붙이고, 자연은 문명의 일상적 노고에 지친 독일인들이 경험할 곳으로 묘사된다.(293) 상업적 소비시장은 정치체제가 말살하려 하던 개별성과 자유를 판매 가능한 것으로 찬양하고 있으며, 정상성을 토대로 상대적으로 조화로운 문화적 합의는 타락한 근대에 대한 비난 캠페인에 의해서 별반 방해받지 않았다.(295) 인민은 나치가 억압한 추상예술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치적 예술작품의 어마어마하고 폭력적인 상징언어 역시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바우하우스 양식은 소비재에 계속 적용되었다. 나치의 문화정책은 "고상한" 예술과 일상 문화를 날카롭게 구분했을 뿐이다.(296) 공적인 연출과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사적 영역 사이에서 모호하게 오가는 현상은 일상적 요소(복지 서비스, 저렴한 여행사 운영 등)에서 나타났다.(298) 나치가 목표로 하던 민족공동체를 문화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치의 미학화를 추진했으나 공적인 삶은 공동화되었고 비정치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의 도피는 심화되었다. 그 결과는 체제에 대한 수동적 합의, 즉 그렇게 도달된 정상 상태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를 확보하고 공고화하기 위해 필요했다. 나치가 사람들이 희구하고 확보했던 정상적인 여가생활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국민라디오(Volksempfänger)와 국민차(Volkswagen)는 여가시간과 교통의 개인화에 기여했고, 그것은 근대 산업사회의 대중소비가 요구하는 표준화된 개인화였다.(300)

나치즘이 내세운 이념인 "민족공동체"는 외관장식이었다. 나치즘이 모든 문화 형태를 파괴하고, 파시즘적으로 재구성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치가 내세우던, 추상적인 민중문화, 축제, 행진, 신고전주의적 건축 등은 있었지만, 나치즘에 대한 환호도 있었지만, 나치가 비판하던 근대(모던)적인 것들도 대부분 살아남았다. 예술가들은 순수 예술로 도피했고, 건축은 주택 건축 등의 영역에서 보다 근대적이었고, 바우하우스 양식은 소비재에 적용되었고, 여행업은 성장했고, 괴벨스는 가볍고 재미있는 오락을 추구했다. 나치가 유지했던 대부분의 문화 양식들은 2차 대전 이후로 이어졌고, 심지어 그 일부는 그 이후에야 완성되었다. 나치즘이 모든 문화를 바꾼 것이 아니었다. 나치즘의 거대한 군중동원과 대중 인민 문화는 외피에 불과했으며, 근대는 그 안에서 결국 살아남았다.


10.
독일 인민과 나치 체제의 합의에는 음울한 차원이 존재한다. 테러의 특수한 표현에 대한 동의이다.(301) 정치적, 사회적으로 질서를 "교란"하는 자에 대한 테러는, 인민에게 비밀로 하지 않았고, 극히 공개적으로 벌어졌고, 언론에 기록되었고, 지도자들의 연설에서 정당화되었고, 많은 독일인들로부터 승인과 환영을 받았다. 이는 적어도 테러가 좌파의 "적", 그리고 그 뒤에는 "반사회적인 자들(Asozialen)"을 겨냥하는 한 변치 않았다. 1933년 나치가 좌파를 가혹하게 억압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위협받고 있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폭력과 힘을 동원하겠다는 약속으로 받아들였다. 개신교 총감독 디벨리우스는 "포츠담의 날"에 한 설교에서 테러를 옹호했다.(302) 테러는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한 비상사태의 수단으로, "민족공동체"의 이방인들, 혹은 이방인으로 규정된 자들을 배제시키는 수단으로 동의하고 승인했다.(303) 적어도 특수한 테러, 일탈적인 입장 혹은 일탈적인 존재를 수용소에 집어넣고, 격리시키고 훈련시키는 테러 방식에 동의했다.(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아도 도둑맞지 않았다. 절도할 가능성이 잇는 집시들이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장발과 싸움패는 제국노동봉사단에 끌려갔다)(303-304) 독일인들은 필요한 경우 신체를 소진시키는 모욕적인 체벌과 구금에 가까운 조건을 강요하는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었다.(304) 나치는 제2제정(빌헬름 사회)의 질서론을 지속하면서, 그 안에 있는 19세기적 자유주의와 법치국가의 특징을 제거했다. 나치는 직업 범죄자와 반사회적 집시, 상습적 동성연애자들을 수용소에 장기 수용해서, 인민들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305) 하인리히 히믈러는 "규범"과 "질서"에 대한 생각을 강박적일 만큼 자주 피력했고, 폭력을 가차없이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05) 스윙 청소년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체벌하고, 노동수용소에 수감하고, 학교로 돌아갈 수 없게 해야하며, 가혹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편지도 보냈다.(306) 스윙과 재즈 열풍을 결코 없어지지 않았는데, 나치의 감시 보고서는 이들의 성적 일탈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고 있다.(310) "스윙 소년과 소녀들"이 즐겨 찾던 도시의 댄스 콘서트는 다른 한편 전쟁 중에 인민의 흥을 돋우려던 괴벨스의 의도에 맞아 떨어지는 것이기도 해서, 나치의 이중적 문화정책과 어울렸다. 물론 나치는 '전위적-모던적' 면모를 제거하려 했다.(311) 스윙 청소년들은 나치가 설정한 한계를 넘어서 뜨거운 재즈를 요구했고, 일상적 태도로도 연결했다.(311) 히믈러 개인은 어린 시절 성공하려면 자신의 성취욕을 전통적 사회의 계서의 틀에 맞추어야 하며, 무비판적 권력 수용과 권력자의  총애, 행동규범의 내면화 등을 부모로부터 강압적으로 주입받았다.(313) 사관학교 퇴학 및 제2제정의 붕괴와 더불어 훈련과 사회적 상승의 기회가 봉쇄되고, 의무와 상승을 규정하던 전통적 사회적 장치가 붕괴하자 테러로 방향을 잡았다.(314) 히믈러의 편지와 일기가 주장했던 것과, 독일 인민 전체의 명령적 규범은 부르주아 전전 세대의 증언과 민병대 대원 및 돌격대 "구투사"의 회고에서 되풀이되는 "군인적 남자"이다. 내적 강인함은 외부를 향한 살인의 환상으로 전환되고, 현실적 권력이 부가되면 그 강인함은 테러적 행위와 대량 학살에서 현실화 된다.(315) 파시스트의 폭력환상은"제국의 깃발"인 흑백홍에서 표현된다. 흰색은 성을 억제하고 여성을 고귀한 부인으로 중립화한다. 흰색은 또 위협적 시위 군중을 기관총으로 정화시킨 뒤의 텅 빈 광장이다. 흰색은 순수와 청결이다. 붉은 색은 거역하는 자들의 피바다이다. 검은 색은 자신의 의무와 총통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아 부은 뒤 잠시 갖게 되는 노곤한 행복이다.(315-316) 청소년들은 모링겐 수용소에서 블록으로 "인종 생물학"에 따라 실험 대상이 되었다. 교란꾼은 S블록, 항구적인 실패자는 D블록, 일시적인 실패자는 G블록에 배당된다.(316-317) 한편 공동체의 이방인들의 절멸을 겨냥하고 있다. 나치의 인종주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한 엄격한 규범을 내포하고 있다. 나치의 인종주의는 산업사회의 혼란스런 다양성을 테러적으로 분쇄하여, 과학적으로 정당화되는 사회적 계서제와 업적 규범을 갖춘 인종적으로 순결한 민족공동체를 수립하려던 시도였다.(318)

독일인들은 나치의 테러를 지지했다. 그들은 이 테러를 승인했다. 그리고 이 테러는 질서를 교란하는 자들에게로 향했다. 좌파, 반사회적인자들, 유태인, 집시, 동성애자, 노동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 독일교회는 다음에서 말하는 정신질환자에 대해서 저항한 것 외에는 거의 모든 테러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이들에 대해 행해지는 교육은 강박적이고 폭력적이었다. "질서"는 모든 것에 앞섰다. 질서, 안정, 정상성의 회복은 우파가 사회를 바라보는 일관된 관점이다. 질서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유지할 것이며, 질서와 자유 그리고 권리가 충돌할 때, 어떤 해결책을 가져올 것인가? 테러와 폭력을 용인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나치즘의 교훈은 문제의 시각을 전면적으로 바꿀 것을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질문이 "질서를 교란자를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것인가?"였다면, 앞으로의 질문은 "질서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통제하려는 국가와 공공의 제한을 얼마나 허용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감시와 관리 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권력이고, 국가권력의 행사자이지, 질서의 교란자가 아니다. 테러방지법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보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해 진다.


11.
나치의 폭력은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선언된 타민족이나 배신자로 낙인찍힌 정치적 반대파에게만 향했던 것이 아니다. 파쇼의 인종주의가 새로운 사회질서, 사회의 내부적 재편을 위한 모델이었다. 반항적인 청소년, 작업장에서 빈둥거리는 노동자, 반사회적인 인간, 창녀, 동성애자, 직업적으로 무능하여 업적을 내지 못하는 사람, 장애자 등 규범에 어긋나는 모든 사람을 인종주의에 입각하여 도려낸 사회. 나치의 유전학은 정상적인 인간으로 간주된 나머지 인민들의 업무 능력과 태도를 규범화하고 분류하기 위한 평가기준을 제공했다. 그 목표는 "독일의 피를 지닌 북방인종, 육체화 영혼 모두가 직각인 그 인간, 사회적 순응", "독일적 근면"이었다.(319-320) 나치의 광범위했던 사회진화론적 실천, 즉, 안락사, 정신병자의 처리, 불임수술을 강요당한 동성애자는 서독정부에서 보상을 받지 못했고, 노동기피자, 반사회적 인간, 반항적인 청소년은 뒷날 서독에서도 사회적인 혐오를 받았다.(320) 나치의 유토피아인 "민족공동체"는 "안으로" 다양한 전통, 계층, 사회문화적 환경 등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 사회를 인위적으로 자기희생적 업적공동체로 전화시키려 했고, "밖으로" 민족공동체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 "이민족", "치유 불가능한" 정치적 적, "반사회적인 인간", 유태인 등을 차별하고 "도려내려 했다.(320-321) 모든 악의 뒤에 숨어 있는 유태인 원흉, 문화적으로 동화되고 지적인 유태인은 근대성이라는 적을 구현, 종교적인 정통 유대인은 전통적 기독교의 반유태주의 이미지의 대상, 경제적으로 성공한 유태인은 착취 자본과 자유주의, 유태인 사회주의자는 볼셰비즘과 마르크스주의를 대표, 동유럽 게토의 이질적 문화로부터 건너온 유태인은 제국주의의 우월감을 표출하기에 적절한 대상.(321) 나치당의 반유태주의는 "유태인 그 자체"라는 추상적인 목표, 즉 인종주의의 가공 형상을 겨냥했고, 나치 유태인 문제의 총체적인 "최종적 해결(Endlösung)"을 함축하는 것이다. "유태인 그 자체"는 세계의 문제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해석의 명백한 현실성 부족을 신화적으로 극복하는 수단이었다. 인종주의가 효과적으로 조화로운 민족공동체를 창출하지 못하는 만큼, "공동체의 이방인들"에 대한 학살은 과격하고 무자비 했다.(322) 나치가 유태인과 더불어 총체적으로 근절하려 했던 두번째 거대 인종 집단은 집시이다. 집시는 혼란스러운 문화를 보유한 이방인이고, 노동 규율과 고정된 관계에 예속되기를 거부하는 반사회적 인간이었다. 나치는 집시의 부적응을 치유할 수 없는 이유를 유전형질의 탓으로 돌렸다.(322) 나치 시대의 인종생물학적 연구에서 로베르트 리터는 유전적인 범죄 형질이 "범죄 인종"과의 혼혈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범죄 생물학적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첫째 "좋은 종", 둘째 '악한 종", 셋째 거대한 중간집단으로 나뉘며, 집시 혼혈은 열등한 존재로 범죄의 온상이고 교육 불가능했다.(323)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은 유태인과 집시를 이질적인 종으로 규정했다.(324) 반사회적 인간과 노동기피자의 대량 검거에서 집시가 포함되었고, 히믈러는 아우슈비츠 명령을 통해 집시를 아우슈비치-비르케나우 집시 수용소에 수감했다.(325) 대략 21만9천명의 집시가 살해되었는데, 이는 "민족의 동지들"을 규율하고 형성하는 수단이기도 했다.(326) 나치는 "떠돌이"(방랑 도제, 노동 기피자, 모험적인 청소년, 걸인, 뜨내기 등) 문제에도 단호하게 대처했다. "존재의 권리가 없는 무리로 간주하여 완전히 제거"할 것을 요구 받았다.(326) 수백만 명이 실업에 처한 시기의 이 요구는 신질서 사회정책이 1933년 이후 강력해 보이는 국가를 통해 사회복지의 틀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으로, 새로운 사회에서는 능력과 노동의지를 가진 자들만이 정상적인 지위를 가질 수 있고, 일탈과 혼란을 야기하는 자들은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로 간주되었다.(327) 1936/37년에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질서에 입각한 논거 외에 국민경제적 논거가 제시되어, 노동을 요구했고, 강제로 체포하여 노동하도록 만드는 것은 노동규율 유지에 필수적이었다.(327) 사회적 국외자들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파쇼와 무관한 사회정책 관련 정치가, 교육자, 복지사들이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인식에 의거하고 있고, 나치가 한 일은 그들의 해법을 받아들여 강화하는 한편 법치국가적 제약을 제거한 것 뿐이다. 나치가 한 일은 기존의 분류 작업에 인종생물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수용소에 수감하고 학살했다는 것이다.(328)  노동교육소에 수감되는 독일 노동자는 소수였고, 이런 노동수용소의 주된 목적은 노동 대중 일반에 대한 계고였다, 특수 수용소는 외국인 노동자를 겨냥했고, 작업장을 이탈하는 청소년 노동자를 수감하고 교육했다.(329) 노동교육수용소는 난폭성을 통해 인간의 의지를 깨부수고 처벌의 강도를 통해 나머지 사람을 경고하는데 맞추어져 있었다. 이때, "민족의 동지"와 "공동체의 이방인"이라는 이분법 대신 일탈에 대한 처벌, 테러에 의한 교육에서 시작하여 체계적인 절멸에 이르는 경찰국가적인 적응 압력의 연속이었다. 나치의 인종주의는 민족공동체 내부에 순응적 사회적 태도를 테러적으로 강요하기 위한 수단이자 이데올로기적 표현이었다. 나치의 인종주의는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사회적 태도의 규범화를 목표로 했다.(331) 나치가 내세우던 유전학적 기준이 모호했기에 인종적 특징을 규정하던 핵심은 인간의 사회적 태도였다.(332) 인종적 유전형질이 혼합된다는 나치의 이론은 인간을 "교육 가능한 자" "교육이 어려운 자" "교육이 불가능한 자"로 단계적으로 범주화했는데, 이런 분류가 일상적인 태도의 관찰, 즉 사회적 태도에 입각했다는 것이다.(333) 나치 인종주의의 양대 요소는 생물학적 심증을 일탈적 사회적 태도의 징후를 통해 확인하는 것과 특정 소집단의 행동 방식을 규범으로 확대시켜 거의 모든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경향이었다.(333) 나치는 여성에게도 독일적인 어머니 상을 부여하면서, 유전병에는 불임수술, 유태인과 아리아인은 결혼을 금지하고, 집시와 흑인에 확대한 후, 1차대전 후 라인란트 점령군의 일원인 유색인 병사와 독일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어린이들은 라인란트 사생아로 불리며 강제 불임수술을 받아야 했다. "어머니라는 직업을 금지시키는 것"(Gisela Bock)은 제3제국 출산정책의 또 다른 측면이었다. 나치는 출산을 등급화했고, 불임의 기준은 사회적 유용성과 지배적 규범을 따르느냐 였다.(333-334) 나치 인종정책은 "이민족적" 혹은 "반사회적"으로 낙인찍힌 가정의 출산증가를 원하지 않았다.(336) 1920년대에 이미 파쇼와 무관한 의사들로부터 "생존의 가치가 없는 생명의 근절을 허용"하자고 제안했고, 1933년에 나치는 우선 유전병자들을 고립시키고, 출산을 불가능하게 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전병 법원은 정신분열환자나 중증 알코올중독자들에게도 강제 불임수술을 가능하게 했다. 이때 모두 법질서에 대한 태도가 문제였다.(336-337) 강제불임시술은 1945년까지 20만 내지 35만에 달했고, 정신병자에 대한 살해는 1941년 8월 교회의 반발로 중단될때까지 7만명이었다. 이런 사례를 제외하고는 나치가 공동체에 이질적인 집단을 제거한 경우 독일인들은 그저 감수하고, 형식적 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조치인 한 침묵을 지켰다. 독일인 다수가 인정한 대표적인 나치 테러는 동성애자라는 소수자에 대한 테러였다.(338) 동성애자의 "일탈"에 대한 파시즘의 살인적 적대감은 "엄격한" 군인적 인간이라는 지도 이념에서 기인한다. 나치는 동성애자 하위문화를 파괴했고, 정치적으로 거슬리는 신부나 수도 성직자 혹은 청소년 결사 운동 지도자들을 박해할 때 동성애자로 비난했다.(339) 1945년 이후 보상을 받은 동성애자는 한 명도 없었다.(340) 이외에도 수백만이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수감의 위협, 조사 후 경고, 포괄적인 차별의 체제로 인해 옥죄고 억눌렸고, 삶의 욕구를 표현할 길을 박탈당했다.(340) 전체적으로 나치 체제의 내적 동력은 갈수록 과격화되었고, 일탈적인 모든 태도를 테러로 분쇄하려는 경찰에 의해 총체적으로 감시받는 민족공동체의 유토피아를 지향했다.(341) 1944년의 "공동체의 이방인 처리법"의 마지막 법안에서 "공동체의 이방인"은 노동 혹은 사회적 태도, 범죄적 기질로 분류되어, 감시, 복지, 감호기관, 수용소에 수용하도록 정하고 있다.(341-342) 이는 나치의 계획이 법치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즉, 범죄 구성요건의 명료성, 경향에 대한 추측이 아닌 행위에 근거한 처벌, 사법 절차의 명료성과 점검가능성을 위반하고 있음이 응축되어 있다. 이 법안의 고무줄 조항은 경찰의 행동 공간을 무한대로 확대시켰고, 행위 형법은 의식 형법으로 법치국가는 경찰국가로 전환되었다.(342) "공동체의 이방인"을 규정하기 위한 기준은 일상적인 사회적 태도에 대한 규범에서 이탈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고, 이는 "민족의 동지들"에게 자기 규율과 순응을 강요하는 것이었다.(343) 비순응적인 사회적 태도를 인종주의적으로 차별하는 현상은 1933년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며, 신체로서의 사회를 과학적으로 재편하고 개선하려는 프로젝트는 세기 전환기에 결핵, 콜레라, 유전병 등을 근절하고 사회개혁을 통해 결국 반사회적 성향과 범죄를 방지하려는 태도에 이미 나타난다.(343) 교육적-사회개혁적 진보와 유전형질의 인종위생적-유전학적 개선을 조합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극우에만 한정되었던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과학 문헌들을 관통하고 있던 발상이었다.(343) 나치의 사회적 다윈주의는 고비노에서 체엄벌린에 이르는 상대적으로 기괴한 19세기 인종주의에만 뿌리박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심리학, 의학, 범죄학, 사회복지학 등에서 학문적 입지를 구축한 학파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런 인간과학들은 파쇼적이지 않고 환경 요인뿐만 아니라 유전적 요인까지 고려하여 사회적 유용성을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했지만, 인간과학의 이론과 실천은 치료와 교육이 한계에 부딪치면 언제나 유전형질 탓으로 돌렸고, 유전학이야말로, 사회적, 의학적 접근의 한계를 규정한다.(344) 나치가 강제 불임, 수용소 수감, 가스 살인을 통해 "그 아름다운 신세계"를 실현시키려 했기에, 과학과 산업의 진보에 따라 일상생활에 계획적, 교육적, 기획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원칙적 한계도 없다고 생각하던 낙관적인 입장 역시 더 이상 무죄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344-345) 일상의 담론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침투해 있기에 위험한 것은 부드러운 인종주의, 쉬지 않고, "열등한 자"들을 부수적으로 제거해 나갔던 인종주의는, 도와주고 건설하겠다는 의도에서 진행된 부드러운 인종주의였다.(345) 유전학적 기준을 개인에게 "과학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사회적 선택의 개념은 심리학과 인류학의 오랜 전통에 의거하고 있고, 복지사들은 복지 교육의 일상 속에서 곤란한 문제에 부딪치면 인종주의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타락한 유전형질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인종주의 유전생물학을 최종적 종말론적 기획으로 고양시켰다. 치밀한 학문과 강력한 국가권력에 의거하여 시행되는 유전학적 선택과 배제는 가난, 고통, 질병, 범죄를 영구히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필요한 것은 유전학적으로 기획된 사회적 가치에 따라 과학적으로 준비된 선택을 실시하는 전체주의적 국가이다.(363) 나치의 인종주의적 유토피아는 한편으로는 인종생물학적 정보 축적의 인종정책 결정 과정의 카프카적 세계만큼이나 부조리한 관료주의적 혼돈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때까지 상상할 수조차 없던 수백만에 달한 산업적 학살, 그 엄청난 수에 직면하여 개별적인 경우는 통계 속의 "무의미"로 전락해버린 학살 속에서 좌초되었다.(364) 나치 인종주의가 주는 유혹은 선진 사회가 내세우는 그 "진보"에 내재된 병리에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경계심이 절실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365)

포이케르트의 주장을 요약하면, 유태인 학살은 인종주의 미치광이들이 폭주한 결과가 아니다. 유태인 학살을 낳은 그 사유 체계는 인종주의의 기반이 된 사회진화론(Social Darwinsim)이었다. 우승열패, 약육강식, 적자생존으로 익숙한 이 논리는 이미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확산되어, 의학과 사회정책(Sozialpolitik, 교육, 의료, 복지 등을 포괄)에 이미 기본원리로 내재되어 있었다. 사회 다원주의 원칙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하고, 배치하고, 교육하고, 활용하고, 복지를 제공해 왔다. 이때, 사람들을 분리하는 기준은 법질서에 대한 태도, 사회적 순응 여부였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사회정책이 실패하는 경우, 즉 사회적 일탈을 반복하고, 교육이 효과를 미치지 못하며, 노동을 거부하고 사회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교육과 훈육, 수용에 한계가 올 때, 이들은 유전학, 범죄생물학 등의 인종주의적 발상으로 후퇴하고 만다. 이런 발상은 당시 인문과학, 사회정책에서 일반적인 논리였다. 나치는 여기에 테러와 경찰국가라는 수단을 제공했다. 사회로 격리시켜야 한다는 주장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실제로 실행되었고, 반사회적인 인구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은 강제 불임시술로 실행되었다. 나치의 인종주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관점을 국가폭력을 사용하여 학살을 감행했던 점이다. 이점에서 유태인의 위치가 중요하다. 사실상, 유태인, 집시, 동성애자, 범죄자, 반사회적 청소년을 관리하는 논리는 모두 한 가지였다. 수용과 멸절이라는 최종적 해결책이 가능하다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는 수단으로 유태인이 사용되었다. 모든 악의 신화적 근원이었던 유태인의 존재와, 유태인 배제와 멸절의 논리는 다른 모든 폭력의 정점에 서있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폭력과 테러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사회진화론은 한국 근대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이며, 개화파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를 관통하는 우승열패, 약육강식의 논리의 기원이자, 그 전체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헬조선"과 "노오력"이라는 이름으로 비난 받는 그 노력하라, 성공하라는 논리의 바탕을 사회진화론이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도 사회진화론의 확산과 함께 일본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인종주의가 뿌리내리게 된다. 인종질서를 구축하고, 동아시아 내의 하위 인종질서를 구축하고, 그 인종질서에서 황인종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전쟁에 앞장서고, 식민지의 인력과 물자를 동원한 것이 일본이었다. 해방 후에도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근대화론이 지금까지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고 있다. 사회진화론은 사회적 재화/자원을 분배하기 위해 차별과 배제의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반쯤 붕괴된 신분제 위에서 학벌과 동향, 혼맥을 통해 새로운 차별의 질서가 구축되고, 이 모든 것은 학벌과 학력의 이름으로 가시화된 후, 자산/재화/자원의 불균등한 분배 구조로 고착화되고 있다. 사회진화론은 그 시초가 불평등한 구조를 정당화하고 설명하기 위한 논리였다. 사회진화론은 근대 문명을 구축한 영국 등의 서양이 왜 아시아, 아프리카 곳곳을 식민지로 경영하고, "계몽적 착취"를 수행할 권리가 있는 지를 설명하는 논리였다. 한때, 저항의 논리처럼 보였던 사회진화론은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자들의 일본 제국주의로의 동화과정을 거쳐, 한국 사회에서 소수의 자산/자원 과점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제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기능하고 있다. "열정이 없다. 근성이 없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젊은 세대에 대한 비판, 젊은 세대 중에서도 자원을 분배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비판은 21세기판 한국 사회의 새로운 사회진화론이다. 이제 사회진화론이 지배계급의 지배 정당화 논리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헬조선"과 "노오력" 같은 비아냥은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에 대한 자포자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근원적 공격인 셈이다. 나치가 노동을 거부하거나 회피하던 청소년들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이런 세계관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은 회피와 포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반문화가 도전이 된다.


12.
나치운동을 지지하거나 감수한 많은 독일인은, 근대화의 격변과 위기가 몰고 온 "비정상적인" 상태를 해결해주겠다는 "총통"의 약속을 믿었다. 그들이 꿈꾸던 것은 정상적인 시대, 정규적인 노동, 삶의 계획의 안전성, 사회 조직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자리의 확실성이었다. 노동이 전쟁 준비에 동원되고, "공동체의 적들"에 대한 테러가 지속될 때, 체제가 과격화된다는 징후는, 사람들의 안정된 삶에 대한 오랜 갈망 속에 묻혀버리고 일상의 경험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악몽을 꾸고 있었다.(366) 나치의 침투에 노출된 것은 인간관계, 사생활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정체성도 였다.(367-368) 개인이 후퇴할 수 있는 노동자 거주구역, 카톨릭 공동체, 지방의 마을처럼 견고하게 짜여진 사회문화적 환경과 내밀한 가정생활이 나치즘의 압력에서 후퇴할 수 있는 배후지였지만, 그런 사회환경적 네트워크 속에 사는 독일인은 소수였고, 그것은 철벽이 아니었다. 게다가 민족공동체에 참여하고 사적인 공간으로 후퇴한다는 것은 지배적인 질서를 적어도 수동적인 차원에서 감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활동을 완전히 포기할 경우에만 게슈타포의 간섭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370) 밀고가 만연한 상황에서 사생활이라는 최후의 공간에서 조차 자기 규율과 주변에 대한 경계심, 아첨 섞인 충성과 솔직한 거부감 사이에서 계산적인 저울질이 지배적이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진정으로 자율적인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개인은 사회적 관계를 빼앗긴 개별적 투사였다.(372) 나치를 그저 따라다닌 사람이나 나치에 유보적인 사람 모두에게, 일상생활이 원자화되고 사회적 관계가 해체되고 인지방식이 고립화되고 인식 지평이 위축될, 그리하여 사회적 행위 능력이 망실될 위험이 닥쳐왔다. 이러한 경향은 방공호에서 맞이하던 전쟁 일상의 문드러지는 경험 속에서 강화되었고, 판에 박힌 일상의 일들을 겨우 해내는 가운데 지쳐버리고 행위 능력을 빼았겨버린 나머지 마지막에는 그저 이 모든 것이 어떻게든 끝나기만을 기대하는 무감각한 전시의 독일인이 형성되었다.(373-374) 나치의 대중동원으로 빚어진 원자화와, 다른 한편으로는 사생활로 후퇴함으로서 이루어지던 일상적 거부가 조우했다.(374) 망명 사민당의 독일보고서는 이미 1935년에 이렇게 썼다. "나치 독점 조직의 목표는 인민 하나하나를 완전히 비독립적으로 만드는 것, 자발적인 결사라면 극히 원초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싹부터 질식시키는 것, 인민 하나하나를 동일한 의식 혹은 동일한 기분을 갖거나 느끼는 사람들로부터 멀리하는 것, 그들을 고립시키는 동시에 국가 조직에 묶어놓는 것이다. ...... 파쇼적 대중 지배의 본질은 강제로 조직화하는 동시에 원자화시키는 것이다"(375)  나치는 1920년대의 근대화가 몰고 온 사회적 격변의 혼란에 질서와 조화를 부여하겠다는 약속을 내걸고 등장했다. 그러나 나치 이념의 비전과 힘은 좌초하고, 나치 권력기구들의 권한 싸움 속에서 실종되고, 이는 캠페인에서 캠페인으로 진행되는 정권의 두서없는 역동성으로 보완되고, 이 와중에 파쇼의 페러 기구들은 "사회"라는 그 복잡한 퍼즐을 철저하게 찢어발김으로써 개별적인 부분만 남도록 하였다. 제3제국과 세계대전 끝에 남은 것은 "민족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파편이었다.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사회적 결속 역시 폭파되었다. 공적인 관계와 공적 책임의 파괴 그리고 사회적 생활세계의 격변이었다. "민족공동체"의 끝에는 원자화된 사회만이 남았다(376-377) 2차대전 후 반파쇼 좌파 헤게모니와 전통적 정치문화의 회귀라는 허구적인 복고는 안전과 정상성과 연속성을 내세웠지만, 그 속은 불안정과 생활사적인 격변으로 가득찼고, 그런 맥락에서 전후 서독 사회의 대단히 통합적이고 근대적인 역동성이 경제기적과 더불어 펼쳐졌다. 경제기적에서 나타났던 고양된 분위기는 제3제국에서 이루어진 전통의 상실, 새로이 창출된 행위 규범의 덕을 보았으며, 높은 생산을 통한 고임금을 지향하는 업적주의적이고 개별화된 노동자, 고립된 사생활을 영위하면서 사회적 욕구를 시장을 통해 충족시키는 근대적인 소가족, 근대적 대중 소비 및 여가와 대중매체의 성장 등이 그것이다.(377-378) 원자화된 사회는 1950년대에 관철된 업적 중심적이고 소비적인 근대 산업사회에서 새로운 준거점을 갖게 되었다.(378)

나치 12년 집권의 결과는 사회의 원자화, 사회의 파괴, 사회의 해체였다. 인상적인 것은 미셀 푸코의 1975-76년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의 제목이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라는 점. 그는 여기서 권력의 문제와 인종주의 문제를 다룬다. 1945년 이후, 1953년 이후, 1987년 이후, 1998년 이후, 한국에 남은 것은 원자화된 사회였다. 반복되는 원자화는 구심력을 쉽사리 회복하지 못했다. 간간이 구심력을 가져오는 사건들이 있었다. 4월혁명, 광주항쟁, 6월항쟁, 촛불집회 사람들은 항쟁의 기억을 통해 구심력을 형성했다. 그렇지만, 그 구심력은 사회문화적 기반, 궁극적으로 계급적 기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열정과 흥분이 사그라지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광주항쟁의 기억은 지역이라는 사회문화적 기반을 가졌기 때문에 지속될 수 있었다. 세월호를 정점으로 하는 슬픔의 기억 조차 하위문화를 형성하지 못하고 스러져 가고 있다. 민가협처럼 점점 가족만 남는다. 일베라는 새로운 하위문하가 생겨나고, 이들은 "친노와 호남"을 신화적 악으로 상정하면서, 무임승차를 비판한다. 이들은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사회진화론을 내면화한다. 일베만이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 사회학자가 20대를 연구한 연구서 제목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우리 사회는 괴물을 키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일 그 괴물이 성장한다면, 파괴할 것은 우리 사회 자체일 것이다.

독일만 유태인을 학살한 것 같지만, 실상 선진국들은 거의 모두 학살의 역사를 다른 나라들은 전 세계적 규모에서 진행되었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미국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벨기에가 콩고에서 한 학살,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도 폭력적이었다. 일본도 식민지 조선에서는 강력한 폭력과 통제를 일삼았고, 저항하면 살려두지 않았다. 중국에서는 대규모로 학살을 자행했다. 독일의 유태인 학살을 옹호하거나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20세기를 지배한 사회진화론 자체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사회진화론은 불평등과 차별, 배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였다. 이 이데올로기가 어떤 형태로, 어떤 장소에서, 어떤 강도로 표출되는지의 차이가 있었을 뿐,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것은 모두 마찬가지 였다.

현대 한국에는 적어도 두 개의 근대가 충돌하고 있다. 지배적 근대인 개화, 사회진화, 근면한 노동,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 계층화와 차별화를 정당화하는 근대. 그리고 상당한 정도로 지배적 근대와 공유하지만, 정치적 다양성과 사회적 다양성을 옹호하고, 어느 정도의 분배를 주장하는 자유주의 근대. 사회진화 근대와 자유주의 근대는 정도의 차이, 방향의 차이가 있지만, 둘 모두 근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지향을 공유한다. 마치 나치 안에 2차 대전 이후 서독이 감싸여 있었던 것처럼. 사회진화 근대가 폭력적 방법으로 관철하고 자유주의 근대가 묵인했던, 나치의 노동수용소에 흡사한 삼청교육대는 반사회적 인간을 검거, 제거, 재교육하는 장치였고, 여기에 노동기피자가 포함되었다. 이것은 운동권에 대한 대책이 아니라, 사회진화론적(인종주의적) 배제를 위한 수용소. 당시 검거된 운동가나 학생과 달리 이름이 없는 것은 이들의 배제에 많은 사람이 동의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박정희 집권 초기, 깡패 소탕과 유사하지만, 보다 근대적 기획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독일의 나치즘을 "근대성"과 "근대화"라는 관점에서 꼼꼼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파시스트들도 1920년대부터 "근대 초극"을 주장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와 근대의 혼란을 두려워했다. 나치가 독일인의 순수성에 집착한 것처럼, 일본은 천황 국체에 근거한 일본적 순수성에 집착했다. 둘 모두 군수산업과 전쟁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했고, 자신이 점거, 점령한 지역에서 인종주의 전략을 수행했다. 그리고 극도의 파괴상황에서 전후에 훌륭하게 부활했다. 전후의 고도성장은 독일의 전유물이 아니다. 일본에게도 마찬가지.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이 근대도 달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근대를 초극한다고 허세를 외쳤다고 말했지만(『전중과 전후 사이』), 실상은 일본은 나름의 근대를 달성해 가는 과정에서 근대가 가져오는 혼란과 해체, 파국적 위기를 근대를 앞서간 나라들처럼 식민지를 통해 충분히 해소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대 초극이라는 이름의 파시즘을 내세웠지만, 군수산업은 산업자본주의를 획기적으로 성장시켰고, 군국주의는 형성되던 사회를 해체해 버리고, 사람들은 계급화되지 못한 채로 경제성장이라는 새로운 전쟁으로 내몰린 것이 아닐까. 일본과 독일은 다소 다른 경로와 다른 근대의 진행과정을 가지겠지만, 일본의 군국주의도 어떤 형태의 근대를 준비하고, 어떤 형태의 근대를 수행해 나간 것이 아닐까.

과거의 유전학적 인종주의는 DNA에 근거한 인간 구분으로 변화하는 것 같다. 한층 더 파국적이다. 암과 같은 난치병이 유전자가 원인이라면, 유전자를 치료하는 기술이 발견되기 전에, 개인의 유전자를 검사하여, 잠재적 암환자로 분류하고, 배제하는 학살하는 미치광이 괴물이 지구 위의 어느 곳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사회가 자기 파괴적 폭주의 길로 걸어갈 때, 그것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상심(傷心)"일 것이다. 슬픔의 힘이 과거를 직면하게 하고, 사람들을 과거와 마주하게 한다. 마침 영화 『동주』가 만들어졌다. 윤동주의 '八福'은 이렇게 노래한다.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永遠히 슬플 것이오.

상심한 자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슬퍼하는 자들의 손을 잡고 함께 울고, 슬픔의 힘을 믿고, 슬픔을 마음에 간직하고 나아가는 일. 그 일은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그리고 또 종교에 맡겨진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슬픔을 싫어한다. 그것이 바로 한국 기독교 쇠락의 원인인지도 모른다. 슬픔을 싫어하고 거부하는 종교는 쓸모가 없기 때문에.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책흔들기] Aporia Reivew of Books, Vol.4, No.3, 2016년 3월, 이원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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