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정신의 역사, 서양고전문헌학의 역사>는 두 책으로 구성된 저술이다. 하나는 호메로스 시대부터 기원전 1세기 헬레니즘 시대까지의 문헌학의 역사를 다루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 테오도르 몸젠에 이르는 시대에 전개되었던 문헌학자들의 연구를 탐구하는 책이다. 정기문 선생이 옮긴 이 책은 후자를 우리 말로 번역한 텍스트다.
이 두 권의 책은 저자 파이퍼가 노년에 저술을 시작한 텍스트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성경의 말을 인용한다. “가장 성숙했을 때가 시작해야 할 때이다.”(<집회서>(Ecclesiaticus) 제18장 7절) 사실, 이 말은 페트라르카가 먼저 인용한 말이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연구에 몰두했던 페트라르카의 건강을 염려했던 보카치오가 이제 건강을 염두에 두어야 할 나이라고 조언하자, 지금이야말로 연구와 저술을 본격적으로 해야 할 때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마음으로 파이퍼는 호메로스 이후 약 3000년에 걸치는 서양고전문헌학의 연구 역사를 저술하겠다는 담대함 도전에 착수한다. 그와 말대로 “거북이의 걸음(testudineo gradu)”이지만 연구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여서 도달한 저술이 이 책이다.
군산대학교의 정기문 교수가 심혈을 기울여 번역한 이 책은 원래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책은 호메로스에서부터 소피스트와 플라톤 그리고 헬레니즘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활약했던 학자들의 서양고전문헌학 연구에 대한 역사를 다루는 텍스트이고, 두 번째 책은 페트라르카에서부터 몸젠에 이르는 서양고전문헌학자들의 연구를 다루는 저술이다. 전자는 전문적인 심층 연구 논문들을 모은 저술인 반면, 후자는 르네상스 이후 서양 고전학자들의 연구 업적을 개관하는 저술로 파이퍼가 대가의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면서 비전문가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다. 첫 번째 책도 빠른 시일 내에 우리 말로 번역되어 한국 독자에게 소개되기를 기대한다.
2.
물론 파이퍼의 이 저술이 서양고전문헌학의 역사를 다룬 첫 번째 텍스트는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587년 프랑스 고전학자 앙리 엔티엔가 저술한 <고대 그리스와 라틴 문헌에 대한 비판적 문헌학에 대하여 (De criticis veteribus Graecis et Latinis)>가 있다. 이어서 1903년에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산디스의 <서양고전문헌학의 역사>가 뒤를 잇는다. 산뒤스의 저술은 일종의 자료 모음집적 성격이 강한 텍스트이다. 이외에도 구데만의 <서양고전문헌학의 역사에 대한 개략적인 연구>와 이탈리아 고전학자 푸나이올리의 연구가 있다. 이상의 저술들은 서양고전문헌학의 역사를 일별해주고 묶어주는 통일적인 체계와 이 체계를 아우르는 중심 개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약점이다. 이러한 약점을 보안하기 위한 의도에서 연구 기획된 저술이 파이퍼의 <인문정신>이다.
물론 파이퍼의 저술에도 흠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헬레니즘 말기에서 르네상스 초기까지의 서양고전문헌학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원래는 이 시대에 대한 연구도 포함시키려 했으나, 조사하고 분석해야 할 문헌의 분량이 너무 방대했기에 이는 후대의 학자들에게 남길 수 밖에 없었다고 파이퍼 자신이 밝히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이퍼의 흠은 흠이 결코 아닌 셈이다. 새로운 연구 영역(terra incognita)을 개척하고 남긴 셈이기 때문이다.
파이퍼가 남긴 새로운 연구 영역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한 영역은 키케로로부터 페트라르카 이전까지의 라틴 문헌 중심의 서양고전학 역사에 대한 연구 분야이고, 다른 한 영역은 헬레니즘 시대 말기부터 비잔틴 제국의 멸망에 이르는 그리스 문헌 전통에 대한 연구 분야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연구는 후대 학자들의 몫이라 하겠다. 마지막 영역은 16~17세기에 진행된 서양고전의 동양 수용에 대한 연구이다. 특히 문헌을 중심으로 하는 동서 교류의 연구와 관련해서 17세기는 다른 어느 세기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 말부터 중국에서는 동양고전과 서양고전의 번역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매우 체계적이고 아주 심도 깊은 동양과 서양의 학자들의 토론과 논의를 통해서 이미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이뤄진 번역은 양 방향으로 진행되었는데, 요컨대, 하나는 서양 고전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양 고전을 서양어로 특히 라틴어로 옮기는 것이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일부, 유클리드의 <기하학>, 키케로의 <우정론>의 일부가 <명리탐(名理探)>(1) <교우론(交友論)> <기하원본(幾何原本)>의 서명으로 한역되었다. 후자와 관련해서는 사서오경(四書五經) 중의 일부가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inensis이란 제목으로 라역(羅譯)되었다. 이 번역 작업의 중심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중국의 대학자들과의 토론과 논의를 심도 있게 나누었고 그 논의를 바탕으로 번역하고 주석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명말에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와 알레니(Giulio Alleni, 艾儒略, 1562-1649) 같은 선교사들이 명의 고위 관료이자 학자였던 이지조(李志操, ?-1630)나 서광계(徐光啓, 1571-1630)와 같은 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번역 과정에서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중핵 개념들과 동양 사상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핵심 개념들이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맞대응 되면서 비교되고 있다는 것도 주목거리다.후자와 관련해서는 대표적으로 <중국의 철학자 공자 혹은 중국의 학문(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inensis)>이 저술 및 번역되었다. 이 책은 1687년에 루이 14세의 칙령으로 왕립 출판사의 지원을 받아서 파리에서 출판되었다(Parisiis, Apud Danielem Hortemels, via Jacobaea, sub Maecenate, 1687 cum Privilegio Regis). 이 책의 서문은 중국 학문의 특징과 공자의 생애를 다루는 기록과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를, 마지막으로 일종의 부록으로 중국 역사를 소략적으로 서술한 <중국연대기>를 담고 있다. 사서(四書) 가운데 <맹자(孟子)>는 빠져 있다.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학문을 소개하려 했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번역 기획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 동양 고전의 라틴어 번역이 단기간에 진행된 작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사서의 번역을 시도한 것은 기록상으로는 적어도 1589년 이전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서를 처음 번역한 이는 미켈레 루기에리(Michele Ruggieri 羅明堅, 1543-1607)이다. 그는 1590년에 이를 로마에서 출판하려 시도했다. 이 번역 원문 필사본은 현재 로마의 엠마누엘레 비토리오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Fondo Gesuitico 1195번). 이후 마테오 리치가 1591년에서 1594년 사이에 중국의 소주(蘇洲)에서 사서(四書)의 번역에 착수하였다. 하지만 이 번역은 필사본의 형태로만 전승된다. 책들이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해는 1662년부터다. 다 코스타(Ignatius da Costa, 郭納爵)는 <공자의 생애, Vita Confucii>와 함께 <대학>을 Sapientia Sinica라는 서명으로 중국 강서성(江西省) 건창부(乾脹府)에서 목판본으로 출판한다. 1672년에 인토르체타(Prospero Intorcetta, 殷鐸澤)가 <중용>을 Sinarum Scientia Politico-moralis의 서명으로 출판한다. 이들이 번역을 위해서 저본(底本)으로 사용한 원전은 주희(朱熹)가 편집하고 주석을 단 <사서집주(四書集註)>였고, 일부 텍스트를 확인한 결과 주희의 주석과 장횡거(張橫渠, 1020-1077)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 과정에서 명나라의 만력제 신종(神宗)대의 명재상이자 대학자였던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의 <사서직해(四書直解)>를 참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번역된 책들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같은 왕과 같은 정치가와 볼테르,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행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시기에 이뤄진 번역과 주해 작업은 크게 주목해야 할 사건이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동양에서 사용하는 주요 개념들과 용어들이 이 번역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고, 다른 한편으로 서양의 근대가 시작함에 있어서 또한 근대 학문들이 시작하는 데에 있어서 동양의 학문도 또한 서양이 동양에 끼친 영향에 못지않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17세기에 번역과 주해에 몰두했던 예수회 신부들이 많고 많은 책들 가운데에서 하필 이 책들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진 바가 거의 없다.
이와 관련해서, 예를 들면 <그리스도교 중국 원정>이 주목해야 할 저술이다. 왜냐하면 서양고전문헌학의 관점에서 볼 때에도 이 책은 많은 새로운 사실과 학문적으로 숙고할 만한 정보를 담고 있는 저술이기 때문이다. 이 저술은 기본적으로 동양의 학문과 제도에 대한 정보를 서양 세계에 소개하는 텍스트이다. 예컨대 이 책의 제1장은 중국의 정치 제도, 통치 방식, 학문과 사상에 대한 소개를 담고 있다. 아마도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중심으로 편제되어 있는 중국의 중앙집권적인 통치 체제에 대한 마테오 리치의 관찰과 보고는 루이 14세와 같은 프랑스 왕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이 분명하다. 특히 절대 왕정의 확립과 관련해서 중요한 관료제의 도입이나 중상주의 정책은 당시 중국을 통치하고 청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보다 자세한 연구가 요청된다. 어찌되었든 루이 14세는 특히 중국의 관료 선발 시험인 과거 제도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고, 또한 중국의 통치 체제를 가능케 하는 교육 제도와 그 교육의 실제 내용이었던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읽고 싶어 했다. 동양 고전이 17세기 말에 서구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퍼지게 된 것도 실은 루이 14세의 절대적인 후원 덕분이었다.(2)
3.
어찌되었든, 17-8세기에 중국에 온 예수회 선교사들이 번역하거나 저술한 책들을 대략적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천문학 분야에서는 다음과 같은 저술이 번역 혹은 소개되었다. 마테오 리치의 <건곤체의(乾坤體義), 1605>, <경천해(經天該), 1601>,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設), 1607>; 테렌츠의 〈측천약설(測天約說), 1631>), <정구외도표(正球外度表), 1631>, 〈황적거도표(黃赤距度表), 1631>; 베르비스트의 <의상지(儀象志), 1674>; 우르시스의 <간평의설(簡平儀說), 1611>, <표도설(表度說), 1614 >; 디아즈의 <천문략(天問略), 1615>; 로의 <측량전의(測量全義)>, <오위표(五緯表)>, <오위력지(五緯曆指)>, <월리력지(月離曆指)>등; 불리오의 <西曆年月> 등 아담 샬이 <숭정역서(崇禎曆書), 1631>에 총서로 묶었는데, 여기에는 135 책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 수학 분야에는 마테오 리치의 <기하원본(幾何原本), 1607>, <환용교의(圜容較義), 1608>, 등; 로의 <비례규해(比例規解), 1630>; 알레니의 <기하요법(幾何要法), 1630>; 테렌츠의 <대측(大測), 1630>등이 저술 혹은 번역되었다. 이어서 지리학 분야에는 마테오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 1604>; 알레니의 <직방외기(職方外紀)>; 불리오의 <서방요기(西方要紀)> 등이 있다. 또한 물리학 분야에는 우르시스의 <태서수법(泰西水法), 1612>; 아담 샬의 <원경설(遠鏡說), 1626>; 테렌츠의 <기기도설(奇器圖說), 1627> 등이 있다. 아울러 기상학 분야에는 바뇨니의 < 공제격치(空際格致),1633>가 있다. 물론 의학 분야에도 여러 저술이 있다. 테렌츠의 <인신설개(人身說槪), 1627>와 로의 <인신도설(人身圖說), 1650>과 베르비스트의 <목사총도(目司總圖), 17세기 추정>이 있다. 또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어문학 분야에도 많은 저술을 남기었는데, 예컨대 루기에리의 <포르투갈-중국어 사전>, 마테오리치의 <서자기적(西字奇蹟), 1605>, 트리고의 <서유이목자 (西儒耳目資), 1625 >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철학과 사상 분야에도 많은 저술이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루지에리의 <천주실록(天主實錄), 1593>나 마테오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1603>, <교우론(交友論), 1595> <서국기법(西國記法), 1594>과 바뇨니의 <서학수신(西學修身) 1605>, <서학제가(西學齊家), 1605>, <서학치평(西學治平), 1605>과 알레니의 <서학범(西學凡), 1623>와 푸르타도의 <명리탐(名理探), 1631>, <환유전(寰有銓), 1628>등이 있다. 이상의 책들이 17세기 중국에서 저술되었거나 번역되어 출판된 대표적인 저술이다.(3)
더 많은 수가 있으나 지면 관계상 여기에서 멈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많은 저술들이 당시 유럽에서 활발하게 진행된 당대의 담론과 논쟁을 직접 수용하거나 반영하고 있거나 거의 같은 시기에 저술되거나 번역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우르시스의 <태서수법(泰西水法), 1612>은 아고스티노 라멜리(Agostino Ramelli, 1530-1600)가 1588년에 저술한 <여러 기계들(Diverse et Artificiose Machine)>를 저본으로 참조해서 저술되었다. 또한 라멜리의 책은 테렌츠의 <기기도설>의 저본으로도 활용되었다. 이는 다음의 두 그림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왼쪽은 라멜리의 그림(1588)이고, 오른 쪽은 테렌츠의 그림(1627)이다. 그런데 테렌츠의 <기기도설>은 조선에에서도 건축과 기술 분야에 활용되었던 책이다. 대표적으로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수원성을 축조할 때 참조했다. 또한 <기기도설>의 저자인 테렌츠는 당시 서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연과학자였고, 이는 그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절친한 친구였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어쩌면, 갈릴레이의 과학 사상이 테렌츠를 통해서 다산에게 흘러 들어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되었든 이와 같은 번역과 저술 사정을 고려할 때 소위 르네상스 운동은 서양에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라 실은 동양에서도 동시에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가 요청된다 하겠다.
다시, 파이퍼로 돌아가자. 파이퍼가 서양고전문헌학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밝히고자 했던 연구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한마디로 파이퍼가 밝히고자 했던 점은 서양고전문헌학(philologia)이라는 학문의 방법론적 정체성의 규명이었다. 파이퍼에게 있어서 서양고전문헌학이란 한 문헌이 최초의 원전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걸쳐서 현재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지를 해명하고, 그 전승 과정 중에 생겨난 오류들을 교정해서 최초의 원전을 복원하고자 하는 학문을 뜻했다.
이러한 학문이 발전하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전승된 문헌 중에 원저자의 필체로 기록된 문헌은 거의 찾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설령 원저자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원저자의 필체를 알고 있지 못하기에 그것이 원저자의 기록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서양고전문헌학자들은 전승된 문헌에 대하여 원 저자의 기록-저술이 아니라는 가정하에 작업을 진행한다. 만약 주어진 문헌이 필사된 판본이라면, 최소한 필사- 모본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문헌학자들은 필사-모본을 찾기 위해 문헌을 추적한다. 대개 문헌 추적은 선대의 모본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필사-손자본도 추적하게 된다. 예컨대 도서관이나 박물관 혹은 고문서 보관소나 문서고를 뒤지다 보면 다양한 종류의 판본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발견된 문헌(혹은 필사본)들은 처음 보기에는 아무런 연고 없는 고아처럼 보이지만, 조금 자세히 연구하면 어딘가에는 일가 친척이 있는 텍스트들이고, 어딘가에는 친척 관계에 있는 다른 텍스트의 내용을 비교해 주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서양고전문헌학자들은 전승된 텍스트를 원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전승된 텍스트에는 한편으로 원전이라 보기 어렵게 하는 많은 종류의 오류로 가득 차 있고, 이런 종류의 오류를 교정하려 시도했다가 원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원문을 바꾸어 놓는 경우도 많이 있고, 원문에는 원래 없었던 문장을 삽입(interpolatio)한 경우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전승된 문헌을 의심하면서 교정하려는 노력은 최근의 현상이 아니었고, 멀리는 기원 전 3세기 헬레니즘 시대에 이미 시도 되었고, 가까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들에 의해서 시도되었다는 점을 밝히자는 것이 파이퍼의 기본 생각이었다.
4.
이런 연구를 통해서 파이퍼는 서양고전문헌을 다룸에 있어서 요청되는 기초 방법론들이 실은 약 2000년에 걸쳐서 축적된 전통이라고 제안한다. 이 제안을 통해서 그는 요컨대 문헌추적, 판본전승조사, 판본비판 및 텍스트 비교-검증, 텍스트 교정 및 텍스트의 조직, 텍스트 번역, 텍스트 주해와 관련된 여러 방법들과 원리들이 역사적으로 어떤 계기와 어떤 논쟁을 거치면서 하나의 기초 방법으로 자리잡는 과정과 서양고전문헌학이 지향하는 목적은 ‘전승 문헌에 생기를 불어넣어 문헌 원래의 모습으로 살려내는 일임을 밝힌다.
어쩌면 이와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서양고전문헌학에 대해서 답답하게 느낄 독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답답함이 오히려 덕성으로 받아들이는 학문이 서양고전문헌학이다. “거북이 걸음”을 중시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또한 고답적이고 보수적인 학문이기도 하다. 서양고전문헌학의 일차 목표는 원전의 복원에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서양고전문헌학자들은 전승 자료가 허용하는 것 이상의 해석이나 발언을 하지 않는 것을 덕목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해석이나 발언은 고대 문화의 전체 윤곽이 드러나고 개별 문헌의 당대 역사적 맥락이 확보되고 난 다음에야 가능한 것인데, 아직 고대를 찾아가기에는 시기적으로 그리고 여건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대적 시각에서 자신이 필요한 입장에 따라 재해석하고 마음대로 평가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시도가 현대에 필요한 고대의 활용이란 점에서는 어떤 의미가 충분하게 있겠지만 고대를 온전하게 고대의 모습으로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빌라모비츠 당대의 이런 입장은 역사 실증주의(Positivismus)라고 불리는 전통으로 이해되었다. 이 전통의 특징은 자료 실증주의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아울러 너무 고대에만 초점을 맞춘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과 흐름에 대해서 반발하는 학자들이 당연히 나오게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그 유명한 프리드리히 니체(Fridrich Nietsche)다. 니체는 “무엇을 위한 고전이란 말인가?” 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그러니까 니체의 관심은 “어제의 고전”에 있지 않았고, “고전과 오늘”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관심 차이는 나중에 “본(Bonn) 사태”로 확장되고, 니체는 그 싸움으로 끝내 고전문헌학으로 복귀하지 않고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학적 영역의 태두로 활약하게 된다. 21세기 시점에서 보면 니체의 문제 제기는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고 중요한 문제 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빌라모비츠의 입장이 틀린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은 고전 문헌학자들이 니체의 입장을 따랐다면 과연 지금의 서양고전문헌학의 위상과 모습이 가능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서 어떤 기여를 분명히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면 그 많은 전승 문헌들은 누가 살려낸다 말인가? 이를 통해서 고대의 복원을 시도해야 하는데, 그 일의 실행자는 누구일까? 바로 이러한 일을 하는 것이 서양고전문헌학자 고유의 일인데 말이다. 그러나 당대 문제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묵묵히 뚝심을 가지고 문헌 편집과 서양고전문헌학에 필요한 개별 방법론들을 세워 나간 선대 문헌학자들의 200년에 걸치는 작업 덕분에 우리는 “고대종합학(Altertumswissenschaft)”이라는 고대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공동의 지적 사다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사다리를 통해서 21세기의 문헌학자들은 무한정하게 자유롭지는 않지만 일정 정도는 고대를 있는 그대로의 고대로 볼 수 있는 학적 세계를 세워 왔고, 그 성과를 번역을 통해서 아니면 논문을 통해서 일반 독자와 대중에게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고대종합학”이라는 안전한 학적 세계의 지원을 통해서 이제는 현대에서 고대로의 안전한 여행을 보장하고 있는 셈이다. 필요에 따라서 옛날을 옛날대로 보도록 지원하고, 요청에 따라서는 지금의 당면 문제에 옛날의 지혜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는 서양고전문헌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세대와 세대를 거친 공동 작업의 결과라 하겠다.
5.
결국 빌라모비츠의 입장이 옳았다는 말이다. 사실 서양고전문헌학자 고유의 사명이란 고대를 고대답게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일인데, 이를 수행하는 것도 벅차다. 여기에 이미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고대와 현대를 매개하는 의사 소통 체계인 개별 학문의 복합체로서 “고대종합학”의 완성도 또한 어렵고 힘든 일이다. 사실 이 “고대종합학” 자체를 완성해 주는 일이 어찌 보면 문헌학이 오늘날 현대 사회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라 하겠다. 니체식 활동이 서양고전문헌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서양고전문헌학은 수많은 이름 없이 사라져 간 문헌학자들의 공동 노력에 의해서 세워진 학문이다. 이 문제는 동양학과 한국학을 전공하는 여러분에게도 중요한 문제 제기가 될 것이다. 아마도 현장의 요구에 마음이 많이 동요될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동양 고전과 한국의 고전을 접근할 때에 한편으로 그것을 그것답게 볼 수 있게 해 주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옛날을 현대와 연결시켜 주는 안전한 학적 의사 소통 체계가 확립되어 있는지를 물어 볼 수 있겠다.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자체적 논의와 방향에 대한 많은 시행 착오를 거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고전문헌학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므로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세대와 세대를 거쳐서 연장되는 학문이 고전문헌학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완결이 없는 학문이다. 고전문헌학은 해야 할 일이 무한한 학문이고 “영원한 학문”(philologia perennis)이기 때문이다.
<주>
(1) 이 책의 원전은 Commentarii Collegii Conimbricensis e Societate Jesv: In Vniversam Dialecticam Aristotelis Stagiritae, nunc(sic e) primum in Germania in lucem editi. Coloniae Agrippinae, apud Bernardvm Gualterivm, 1611이다.
(2) 프랑스 왕실의 후원을 통해서 예수회 선교사들의 저술하거나 번역한 텍스트는 아래와 같다. 곰드, <中國現狀新誌, Nouveax mémoires sur l'etat présent de la Chine>, Paris, 1696; 부베, <中國現狀誌, L'Etat présent de la Chine en figures>, Paris, 1697, <中國皇帝傳, Histoire de l'Empereur de la Chine>, la Haye, 1699, <耶蘇會書簡集, Recueil des Lettres édifiantes et Curieuses>, Paris, 1703-1776; 뒤 알드, <中華帝國全誌, Description géographique, historique, chronologique, politique et physique de l'Empire de la Chine et de al Tartarie Chinoise>, Paris, 1735; <北京耶蘇會士硏究紀要, Mémoires Concernent l'historire les arts, les sciences, les usages etc, par les missionnarres de Pékin>, Paris, 1776-1814; 코스타(Ignatius da Costa), <대학, Sapientia Sinica>, Kien-Chan Kian-si, 1662; 인트로체타(Prospero Intorcetta, 殷鐸澤) <중용, Sinarum Scientia Politico-moralis>, <중국의 철학적 공자, Confucius Sinarum Philosophus, Sive Scientia Scensis latine exposita>, Paris, 1686-1687; 노엘(Le P. Français Noel, 衛方濟) <중화제국경전, Sinensis inpesi Libri classlci Sex>, Prague, 1711 (이 책은 중국의 사서와 효경, 소학의 라틴어 번역, 중국의 고주를 충실하게 참조하였으며, 라이프니츠와 볼프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많이 영향을 줌); 비스델루(Visdelou, 劉應), <역경> 주해; 프레마르(Prémare, 馬約瑟), <역경>, <중용>, <성리>, <장자>, <노자>, <회남자> 텍스트 연구; 레지스, <역경>의 라틴어 번역; 마일라, <통감강목>의 라틴어 번역; 거빌, <서경>의 프랑스어 번역 등이 있다.
(3) 이 가운데에서 중요한 텍스트들을 모아 총서(叢書)로 1629년에 <천학초함(天學初函)>의 서명으로 출판했다. <천학초함>은 이편(理篇)과 기편(器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편에는 종교, 윤리관계의 서적 10종이 들어 있고, 기편에는 과학, 기술관계 서적 10종이 들어 있다. 도합 20종의 52권을 수록한 방대한 양의 중요한 서학서들이 총망라된 서학 총서다. 조선에서는 유몽인(柳蒙寅), 이수광(李晬光), 이익(李瀷), 신후담(愼後聃), 안정복(安鼎福)이 <천학초함> 중의 <천주실의>, <교우론>, <칠극>, <영언여작>, <직방외기> 등을 읽고 비평을 가한 것으로 보아 <천학초함> 혹은 개별 텍스트 몇 권은 이미 17세기 초기에 조선에 이미 소개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 이 글은 2011년 도서출판 길에서 출판된 <인문정신의 역사>의 뒷부분에 소개된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11, 2015년 11월,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