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이러한 직관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이미 기원전 7세기 그리스 서사시인 헤시오도스는 『일과 날』(299행∼313행)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신들도 싫어한다고 읊는다.(1)
일하지 않는 자는 인간은 물론 신들도 싫어하는 법이요.
일을 사랑하되, 때를 놓치지 마시오.
그대의 곳간은 양식으로 철철 넘치게 될 것이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고 부자가 되는 것은 일 덕분이요.
일하는 자를 신들이 더 사랑하는 법이요.
일은 수치가 아니고. 일하지 않는 것이 수치요.
그대가 일하면 게으름뱅이는 그대를 시기할 것이요. 곧 부자가 될 그대를!
부에는 위엄과 명예가 따르는 법이오.
고대의 세계관에서 살펴볼 때 일을 예찬하는 헤시오도스는 전복적이다.(2) 명상(vita contemplativa)이 몸 놀리는 일(vita activa)보다 고귀하다는 관념은 노예제에 기반을 둔 고대 세계에서는 지극히 자연적인 관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끝 부분에서 좋은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명상이며 신들만이 철학적 명상을 중단 없이 지속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누군가가 중단 없이 명상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의 땀과 수고가 필요하다. 헤시오도스가 일이 진정한 멋이고 일이 명예의 출발점이라고 읊을 때, 그는 명예에 관한 고대적 관념을 전복하며 세계를 유지하는 근본을 드러낸다. 나아가 헤시오도스는 일을 전쟁에 대비시킨다. 그는 두 가지 경쟁을 구별하며 전쟁을 야기하는 경쟁은 사악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유익한 경쟁도 있으니, 그것은 “게으른 사람도 일을 하게끔 부추기는” 경쟁이다. 즉 이웃보다 더 부유해지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2,500년 후 애덤 스미스가 본격적으로 제출할 관념이 헤시오도스에서 이미 발견된다.
하지만 헤시오도스가 땀과 수고를 예찬하는 이유는 게으른 사람도 일하게 만드는 경쟁이나 “곳간을 양식으로 철철 넘치게” 만드는 작용, 곧 부의 생산 때문만이 아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도 엿보이듯이, 일은 “때”의 문제, 곧 절기節氣와 조화의 문제이고, 그래서 헤시오도스는 “일을 사랑하되, 때를 놓치지 마시오”라고 조언한다. 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부자가 되기 위함이 아니다. 헤시오도스에게 일이란 신들이 정한 자연 질서에 맞추어 우주사宇宙事를 집행하는 행위로서 신들의 일을 ‘제 때에 맞추어’ 수행하는 것이다. 땀과 수고가 부의 원천이라는 논변은 근대 이후의 노동숭배론의 특징이다. 이러한 논변은 물론 헤시오도스에게도 나타나지만 오히려 부차적이다. 헤시오도스가 일을 옹호하는 주된 논변은 훗날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철학적으로 완성되고 아퀴나스에 의해 수용되어 중세까지의 세계관을 결정지은 목적론적 자연관과 유사하다. 즉 일은 우주가 때에 맞춰 돌아가게 하여 신들의 일을 집행하는 것이기에 예찬 받아 마땅하다는 논변이다. 일함으로써 인간은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적 목적을 실현한다.
2.
일 또는 노동이 명상보다 중요하다는 관념은 분명 근대적이다. 로크는 노동에서 사유재산의 기원을 찾고 애덤 스미스는 국부의 원천을 발견한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근대적 숭배는 일에 대한 고대적 숭배와는 다른 지반 위에 위치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대로부터 중세까지 이어져 온 목적론적 자연관과 이에 토대를 둔 정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전복과 관련된다.
이러한 전복은 17세기 초반 『리바이어던』의 저자 토머스 홉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근대의 노동숭배는 헤시오도스에게는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던 목적론적 자연관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논변에 의지하게 된다. 그것은 주로 노동을 통해 비롯되는 긍정적 효과에 의지하는 결과론적 논변consequentialist argument, 공리주의적 논증이다. 예컨대 『바이블』 「창세기」의 노동계명에 여전히 호소하고 있는 로크의 『통치론』도 유용성의 거의 모든 부분은 노동에 의존하며 영국의 날품팔이가 인디언 추장보다 부유하다는 결과론적 주장을 덧붙인다.
분업의 효용과 경쟁의 이점을 통해 말하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도 마찬가지의 논증 구조를 가진다. 여기에 대해 세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소 상세한 윤곽을 드러낼 필요가 있는 지점은 목적론적 자연관의 해체와 함께 노동 개념도 인간 주체를 중심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이다. 이제 노동은 인간에게 부여된 목적의 실현이라기보다 인간의 자기실현, 나아가 인간과 자연과의 필수적인 물질대사로서 파악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은 노동함으로써 대상에 자신의 형식을 부여하고 대상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노예가 사실은 자기의식의 진리이며 노동을 통해 자기의식을 객관화한다고 밝힌다. 헤겔에 따르자면, 노예 노동에 의존하는 주인이 아니라 대상을 가공하고 변형하여 대상에 주체의 형식을 부여하는 노예의 자기의식이 객관적이고, 그 이유는 바로 노동생산물에서 주체와 대상은 통일되고 주체는 대상화하고 대상은 주체의 형식이 되기 때문이다. 맑스 역시 헤겔처럼 노동을 자기대상화의 관점에서 고찰하지만, 노동은 대상화의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에서 일어나는 교호적인 물질대사로서 더욱 적극적 의미를 얻는다.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활동을 통하여 자연과의 물질대사Stoffwechsel를 매개하고 규제하고 조절한다.(3)
여기에서 물질대사란 일방적인 대상화가 아니라 쌍방적인 교호관계를 뜻하는데, 즉 노동을 통해 인간은 “자기 밖에 있는 자연에 대하여 작용을 가하며 이처럼 자연을 변화시킬 때 인간은 자신의 고유한 본성Natur도 변화”시킨다. 맑스에 따르자면, 노동에 의해서만 인간은 비로소 인간이 된다. 이와 같은 노동의 인간학에 근거하여 맑스는 모든 사회적 형식들과 무관한 노동에 관한 본원적 규정을 발전시킨다. “노동은 모든 사회적 형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인간의 존립조건이며,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 곧 인간의 삶을 매개하는 영원한 자연필연성이다.”(4)
3.
고대적 규정인 ‘일’에서 근대적 규정인 ‘노동’으로의 변화는 노동의 목적이 목적론적 자연관과 같은 외적 규정에 의거하지 않고서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재설정되는 변화를 내포한다. 이를 통하여 노동에 대한 독자적인 논증 기반과 정당화 기반이 부여된다.
예컨대 맑스는 노동을 “삶을 위한 수단”(5)으로서 파악하는데, 즉 노동이란 자연을 변형하여 유용성을 산출하려는 인간 주체의 합목적적 행위이며, 이때 노동의 목적은 외부적 자연으로부터 부여되지 않으며 인간 주체 스스로에 의해서 설정된다. 노동의 목적은 “개인이 스스로 설정한 목적으로서, 자기실현이자 주체의 자기 대상화로서”(6) 이와 같은 노동 개념은 공학과 과학의 특성인 수단-목적-합리성과 연관된다. 도구적 노동관은 근대적 노동 개념의 공통적 특징이고 맑스의 노동 개념 속에도 분명 등장하는 요소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맑스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해소되고 예속적인 분업이 사라지며 개인의 전면적인 발전과 함께 생산력이 성장하여 조합적 부의 모든 분수噴水가 흘러넘치게 되는 “코뮨주의의 고차적인 단계”에서는 노동이 “삶의 수단”을 넘어서서 그 자체로서 “삶의 욕구”가 된다고 말한다. “삶의 욕구”로서의 노동은 자유로운 개인들의 전면적인 자기실현을 위한 “생활활동Lebenstatigkeit”으로서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적인 행위이며 자기충족적이고 자기목적적이다. 또한 노동이 자연Natur을 변형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인간 본성Natur을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맑스의 주장에 비추어 본다면, 노동이 ‘자유로운 활동’으로 변화함으로써 노동자는 자유로운 개인들로 변모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노동의 성격 변화를 통해 노동 주체의 성격이 바뀐다. 맑스는 이러한 변화를 역사적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변화로 파악하는데, 만약 노동 개념을 자유로운 활동과 대별되는 종차種差의 개념이 아니라 자유로운 활동을 포함하는 유類의 개념으로 확장하여 이해한다면 확실히 맑스의 노동관은 도구적 노동관을 넘어선다. 하지만 『독일 이데올로기』 등의 저작에서 맑스는 노동과 자유로운 활동을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고,(7) 그와 같은 개념 사용에 따른다면 노동 개념은 도구적인 영역에만 한정된 개념이다.
4.
일이든 노동이든 그것은 모두 합목적적 행위일 뿐이다. 하지만 행위의 목적이 자연과 같은 외적 목적에 의해 부여되는가 또는 자연을 변형하고 가공하려는 인간 스스로에 의해 설정되는가는 근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차이이다. 나아가, 노동이란 여전히 어쩔 수 없는 자연필연성으로서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인가 또는 충분히 발전한 생산력의 기초 위에서 노동 그 자체가 수단의 차원을 넘어 자기목적이 되는가는 노동의 현재와 미래를 나누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절기에 맞춰 자연의 목적을 집행하는 농부의 ‘일’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과 더불어 성격 변화를 겪는다. 대지의 ‘일’은 화폐 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으로 바뀐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서 노동은 넓은 의미에서는 자영업자의 노동까지 합친 상품생산노동이고, 좁은 의미에서는 임금노동이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맑스는 “활동이 임금노동자의 생계를 위한 수단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노동이라고 부를 수 있다”(8)고 말한다. 활동은 화폐와 교환되는 경우에만 비로소 노동으로 간주된다. 자신의 활동의 생산물을 상품으로 판매하든 활동 그 자체를 상품으로 직접 판매하든 화폐와 교환될 경우에만 활동은 비로소 노동일 수 있다. 반면에 가사나 돌봄, 나아가 문화적 향유나 정치적 참여 등 화폐를 얻지 못하는 수많은 활동은 노동이 아니다. 노동은 화폐를 얻기 위한 합목적적 활동이고, 노동의 이와 같은 성격은 자유로운 활동이나 활동 일반과의 근본적인 구별지표이다.
그러나 노동과 활동의 분리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만 특유한 분리이며, 오직 자본주의적 사회형식에 연유하는 분리일 뿐이다. 즉 어떤 활동들은 원래부터 화폐와 교환될 만하고 반면에 다른 활동들은 본래적으로 그렇지 못하다고 구분할 자연적인 척도는 없다.화폐와 교환되는 노동과 그 밖의 비화폐적인 활동의 분리는 특정한 사회형식에서만 통용되는 것으로서 단지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뿐이며, 그 안에는 그 어떤 “자연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2) 호메로스와비교할 때 이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여기에 대한 짧은 글로서 다음을 참조하라: 안재원, 「일은 해야 하나? Homo laborans!」, 『아포리아 북리뷰』 2/1호, 2014년.
(3) 『자본』 제1권, MEW Bd. 23, S. 192.
(4)『자본』 제1권, MEW Bd. 23, S. 57.
(5) 『고타강령 초안 비판』, MEW Bd. 19, S. 10.
(6)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MEW Bd. 42, S. 512. 『정치경제학비판 요강』의 이부분은 노동을 고통으로, 휴식을 행복으로 보는 애덤 스미스를 비판하는 곳이다. 맑스는 스미스가 노동의 자기실현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7)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엥엘스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지금까지의 사회 전체의 존재조건인 자신의 기존 존재조건을 지양하며 노동을 지양한다”(Marx/Engels, MEW Bd. 3, S. 77)고 말하면서, “공산주의혁명은 지금까지 활동이이뤄져 왔던 방식에 반대하는 것이며 노동을 폐지하는 것이며 모든 계급의 지배를 계급 그 자체와함께 폐절하는 것”(같은 책, S. 69∼70)이라고 말한다. 이와비슷한 주장은 다른 글에서도 되풀이된다. “자유로운 노동, 사회적이고 인간적인 노동, 사적 소유없는 노동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단한 오해 중의 하나이다. 노동은 본질상 부자유한 활동, 비인간적이고 비사회적인 활동이며, 사적 소유에 의해 제약되거나 사적 소유에 의해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사적 소유의 지양은 그것이 노동의 지양으로 파악될 때에만 현실이될 것이다.”(Marx, “U¨ber Friedrich List”, S. 24).
(8) MEW Bd. 42, S. 38.
* 이 글은 저자의 동의를 받아 원문을 축약했음을 밝힙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2, 2014년 2월, 금민, 기본소득 네트워크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