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9-15 18:52
번역, 그 잔혹한 이야기: 한국어로 된 희랍어학 안내서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5,043  


도서정보
저자명 강대진
저서명 잔혹한 책읽기
출판사 작은이야기
연도(ISBN) 2004(9788995495124)
번역, 그 잔혹한 이야기: 한국어로 된 희랍어학 안내서(잔혹한 책읽기, 강대진, 작은이야기, 2004)

1.
이 책의 저자인 강대진 선생은 한국에서 알만한 사람은 아는 희랍어(고전 그리스어)의 권위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쓰는 이때까지 필자를 직접 한번도 뵌 적은 없으나,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편이다. 실제로 뜻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강대진 선생은 희랍어 교사이자 서양고전의 교사로 알려져 있다. 나 또한 교수직에 있으면서도 EBS 에서 하는 선생의 희랍어 첫걸음 강좌를 들으며 희랍어의 세계에 눈뜨고 공부하고 있는 제자의 한 사람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이 책은 사실 좀 낡았다면 낡은 책이고, 문제의식 또한 이제 그렇게 참신한 것은 아니다. 책이 나온지가 9년이 넘었고, 연재된 시기를 생각하면 거의 12년이 넘은 글들이기 때문이다. 한때 문학평론계를 주름잡았던 전 서울대 불문과 김현 교수의 <행복한 책읽기>를 패러디한, <잔혹한 책읽기>라는 제목을 지닌 이 책은, 한마디로 말해 번역의 결과를 실명으로 비판한 번역서평에 해당한다. 스티브 잡스의 전기가 나온 이후로 일반 대중에게도 번역의 오류나 정확성에 대한 논의가 있다는 것이 꽤 알려진 편이어서, 문제의식 자체는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참신함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여전히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를 몇 가지 말하고자 한다. 특히 국문학자의 관점에서. 먼저 이 책의 가치에 대해 내가 이해하는 바를 적고자 한다. 먼저 이 책은 단순한 문학평론가의 종합서평서가 결코 아니다. 사실 문학평론이라는 것은 독후감 모음집이다. 유명한 작가나 평론가들은 대체로 이런 책을 많이 쓴다. 일본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는 제목으로 책까지 냈고, 비슷한 책이 여러 권 있다. 그리고 내용도 꽤 유익하다. 그밖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장정일의 <공부> 같은 책도 이런 종류의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을 지적하기에 앞서 먼저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 책은 단순한 서평집이 아니다. 이 책은 번역에 관한 전문서평이며, 그것도 특히 희랍어와 라틴어, 즉 서양의 고전어와 관련된 번역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으면 이 책의 진가를 알기가 쉽지 않다. 물론 필자 역시 제목을 붙이는 데 희랍어-라틴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의 곤란함을 느껴 약간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전히 아쉽다. 이런 제목은 어떤 자극적인 서평들의 모음을 독자로 하여금 기대하게 하고, 실제 내용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안 그래도 무관심한 독자들은 더욱 마음을 닫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해 이 책은 국문학을 연구하는 소장 교수인 나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문화사에서 큰 기념비가 될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지 않더라도 그러하다. 이 말이 상당히 독단적이고 심지어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백낙청 교수가 창비 어느 곳에서 "김수영의 시를 민중들이 읽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시는 민중적"이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신 것을 읽고 참으로 궤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보니 백낙청 선생의 고민이 이해되는 것도 같다는 느낌이다.

2.
이 책의 미덕을 먼저 이야기해 보자. 먼저 이 책은 "희랍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우리 문화상황에 대해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희랍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는 말부터 분석해 보자. 희랍어는 약 2500년 전 전후부터 약 500년 이상 고대 그리스 일대와 지중해 일대에서 널리 쓰였던 국제 문자언어이다. 희랍어가 중요한 이유는 <일리아스>나 <오이디푸스왕> 같은 고대 그리스의 문학, 플라톤의 철학, 최초의 역사학 저술, 그리고 신약성서가 기록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희랍어를 특별히 헬라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 "희랍어를 안다는 것"은 과장을 섞어 말하건대 축복이자 저주이다. 한국에는 희랍어학과가 없다. 전문가의 수가 매우 부족하다. 희랍어의 위상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현재도 쓰이는 서유럽의 여러 언어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영미, 프랑스, 독일인 등 서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이 고대 그리스라고 믿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고전학과를 두어 희랍어 연구의 수준을 두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 물론 희랍어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현대 서양인들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희랍어 공부의 여러움은 크게 셋이다. (1) 희랍어가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고, (2) 중요하다는 것을 알더라도 공부하기로 결심하기가 쉽지 않고, (3) 공부하기 시작했어도 그것을 완성하기가, 아니 완성은커녕 어느 정도 읽는 수준까지 도달하기도 쉽지가 않은 언어이다.

그렇다면 이런 어려운 희랍어를 왜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또다른 희랍어 스승님 중 한 분인 정암학당의 김주일 선생님께서는 희랍어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간단히 이렇게 말씀해 주셨다. "플라톤과 예수님의 말씀이 희랍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않았어도 희랍어를 공부할 필요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참으로 정곡을 찌른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예수와 플라톤 사상만큼 서양의 문명에 근본 뿌리가 되는 것이 또 있겠는가. 그러므로 최소한 그 문제를 한담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 그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번역을 보면 되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이 문제에 관해 나는 참으로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벌써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나는 현재 국어국문학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번역은 간단히 말해 희랍어로 된 텍스트를 현대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을 말한다. 편협한 전공의식을 갖고 이야기한다면, 희랍어는 나의 전공이 아니지만 "희랍어가 번역된 현대 한국어 텍스트"는 완벽하게 나의 전공분야이고 내가 관심가져야 할 분야인 셈이다. 자, 그러면 생각해 보자. 희랍어 원전에서 현대 한국어로 번역된 텍스트가 얼마나 되는지.

한국에서 희랍어 번역가는 현재 손꼽을 수 있는 수준이다. 플라톤을 번역하고 계신 성균관대 명예교수 박종현 선생님, 정암학당의 연구원들, 희랍-라틴번역에 개인적으로 헌신하고 있는 천병희 교수님 정도가 다이다. <잔혹한 책읽기>의 필자 강대진 선생도 정암학당 연구원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번역가의 집단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희랍어 원전의 다양한 텍스트가 상당 부분 한국어로 번역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의 번역이 없는 것은 늘 지적되어 온 고질적인 문제이다.

서양의 역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희랍어를 아는 사람은 특히 서유럽에서는 로마 멸망 이후 (정확히 말하면 서로마 제국 멸망과 보에티우스의 죽음 이후)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중세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할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라틴어만으로 글을 썼으며, 희랍어를 알았다는 증거가 없다. 희랍어 공부가 서유럽에서 다시 시작된 것은 대체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 학자들이 오스만 투르크를 피해 이탈리아와 알프스 북부로 넘어오기 시작하는 15세기 이후부터였다.

나는 앞서 한국에서 희랍어를 안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라는 말을 했는데, 이것은 한국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15세기의 서유럽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교황청의 권위로 강요된 라틴어 문화에 찌들었던 중세 서유럽에 희랍어는 너무나 낯설고 어려운 언어였다. 그러나 낯설고 어렵기만 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희랍어는 위험한 언어였던 것이다. 라틴어를 쓰는 교황청의 부패한 관료들이 구약성서는 본래 히브리어로 쓰였고, 신약성서는 희랍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로 라틴어 성서를 완성해 놓고 그것만을 강요했다. 교황청의 배경은 이탈리아요, 라틴어는 이탈리아를 고향으로 하는 로마 제국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15세기부터 서유럽으로 희랍어가 유입되기는 했으나, 그것을 공부하는 것은 라틴어와 교황청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프랑스의 유명한 의사이자 작가였던 라블레(1483~1553)도 희랍어를 공부하다가 고초를 겪었으며, 그의 책을 내준 출판업자는 처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희랍어를 앎으로써 영광스러워진" 진정한 인물은 르네상스 최대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1466~1536)였다. 그의 업적은 너무나 많지만, 각설하고 한 가지만 말하자면, 인류에게 최초로 "신약성서의 희랍어 원본"을 인쇄본으로 제공했다는 데 있다. (물론 여기에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다. "희랍어본"이긴 하지만 "원본"이 아닌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하기로 하자)

즉 당시에 보급되기 시작한 활판인쇄술로 예수님의 원음이 기록된 책을 편집하는 총책임자가 에라스무스였다. 과연 에라스무스는 희랍어의 귀신이었으며, 그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라스무스가 당시 교황청이나 가톨릭 주류로부터 받은 평가는 "고지식한 문법학자놈이 자구를 놓고 따지며 우리의 권위를 무너뜨리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 어이가 없었고, 천성적으로 치고받는 싸움을 싫어했으며, 차라리 그 시간에 고요한 연구실에서 공부하기를 원했던 에라스무스는 그 모든 상황을 한 편의 웃음거리로 만든 책 <우신예찬>을 유려한 라틴어 문장으로 써냈던 것이다.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성서를 대본으로 삼아 독일어 번역성경을 만든 사람이 그 이름도 유명한 마르틴 루터(1483~1546)이다. 그 이전에도 몇몇 영어나 프랑스어로 번역된 자국어 성서가 있었으나, 희랍어 원문, 즉 예수님의 원음을 유럽의 자국어로 번역해낸 것은 루터가 최초였다. 이것이 진정한 고대의 부활인 르네상스요, 가톨릭의 권위에서 벗어나는 진정한 종교개혁이었다. 우리가 서양의 언어를 둘러싼 이러한 역사적-지적 긴장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서양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강대진 선생의 책으로 돌아가 보자. 나는 이 책에서 필자의 놀라운 한국어 감각에 충격을 받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필자는 참으로 사소한 번역의 문제를 파고드는 것처럼 보인다. 예컨대 다음 구절을 보라.

"제우스와 전쟁에서 패한 티탄들은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타르타로스로 보내지게 되는데, 이 타르타로스는 땅으로부터, 하늘에서 땅까지의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고 한다. 이 거리는 기이하게도 모루가 떨어지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주어진다. 역자는 이것을 "하늘에서 떨어진 모루가 구 일 밤 동안 떨어져서 십일 째 되는 날 땅에 닿았다. 이와 똑같이 땅에서부터 구 일 밤과 구 일 낮 동안 떨어져서 십일 째 되는 날 타르타로스에 닿았다."고 번역했는데, 두 문장 끝의 "닿았다"는 좀 심각한 오해를 야기한다. 마치 이것이 일회적인 어떤 사건을 보고하는 것인 듯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희랍어로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희구법(optative)이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이 문장이 희구법 구문으로 되어 있다(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723~5행). 그 정도로 엄밀하게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그저 "닿는다" 정도로만 옮겼어도, 어떤 사건 묘사가 아니라 일반적 상황 묘사라는 것이 전달되었을 것이다". (139면)

나는 이 부분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다. 말 그대로 위에서 지적한 번역문은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 땅과 타르타로스 사이의 거리를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서울에서 뉴욕까지의 거리를 말할 때, "서울에서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이면 뉴욕에 닿았다"고 하지 않는다. "닿게 된다, 닿는다" 식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닿았다"는 과거 직설법(past indicative)이며, "닿게 된다"가 희랍어의 이른바 희구법(optative)인 것이다. 그러나 희구법이니 직설법이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더라도, "닿았다"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은 한국인의 본능적 언어감각에 비춰볼 때 분명하다. 사실 이것은 100% 국어의 문제요, 국어국문학을 하는 사람이 먼저 지적하고 "이런 문장은 이렇게 쓰면 안되고 요렇게 써야 한다"고 지적해야 할 문제였다. 다만 번역본만을 보고 있는 대부분의 독자들(여기서 독자들이란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희랍어를 모르는 국문학 교수들도 포함된다)은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 자체를 알지 못한다.

이제 희랍어 학습의 고난을 이야기할 차례다. 외국어 학습을 하는 것은 세계를 보는 창 하나를 얻는 것이라는 낭만적인 말이 있지만, 고전어와 같이 익히는 데 최소 수년, 심지어 수십년이 걸리기까지 하는 언어를 학습하는 것을 "창 하나를 얻으시오"라는 말로 권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에라스무스는 희랍어 실력이 있었기에 영원히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만, 그는 동시에 가톨릭의 끊임없는 비난에 시달렸으며, 만년에는 루터와도 거의 목숨을 건 격렬한 싸움을 치러야 했다. 솔직한 말로 에라스무스는 어떤 성직자의 사생아로 태어나 가정생활의 단란함을 알지 못한 차가운 환경에서 평생을 살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가톨릭 신부로서 평생을 보냈으므로, 좀 심하게 말하면 그가 평생 공부를 한 것은 그저 환경의 결과물일 따름이었다. 그는 지독한 책벌레였으며, 르네상스인들이 좋아했던 회화, 건축, 라블레의 의학 같은 실제적인 기예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극단적이고 편협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강대진 선생이 위에서 지적한 번역의 문제점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고 이렇게까지 설명했으므로 취지야 이해하시겠지만, 약간 좀스러운 비판 같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 믿는다. 사실 남의 글을 비판하는 사람의 기분인들 좋기만 하겠는가. 그러나 강대진 선생이 이런 책을 쓴 이유는, 우리가 영어는 많이 공부하고 실제로 번역의 대본으로 영어본을 많이 사용하긴 하지만, 희랍어나 라틴어는 한국인 번역자들이 실제로 접하거나 배울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영어책 특히 고전과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영어책에 숱하게 나오는 희랍어-라틴어 근원의 표현들을 번역할 때 틀리기 쉽고, 틀리고 나서도 틀린 줄조차 모르는 현실을 지적하기 위함이었다.

4.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이오덕 선생님의 <우리글 바로쓰기>를 떠올렸다. 평생을 어린이들의 글을 읽고 고쳐주며 살아온 영원한 교사,  전교조의 정신적 아버지였던 그분. <우리글 바로쓰기>는 우리나라의 온갖 책들에 들어있는 일본말, 중국글자말, 외국말을 지적하고"우리말을 살리는" 길을 고민한 우리 시대의 역작이었다. 이른바 꽤 배웠다는 많은 사람들은 그 책의 민족주의, 국수주의, 편협한 애국주의와 향토애를 비난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우리글 바로쓰기>가 보기에 따라 그러한 문제점을 지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글 바로쓰기>는 일종의 우리말 어원사전이다. 학술적 어원사전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수많은 표현들의 뿌리를 찾아가는 작업인 것이다. '입장' '인상' 같은 특정한 일본어 유래의 말을 쓰지 말고 몰아내자는 일부 주장은,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라고 보는 영미식 실용주의의 언어관에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실상 영미인들이야말로 자기들의 언어인 영어의 뿌리를 가장 철저하게 연구한 <어원사전etymology dictionary>를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이오덕 선생님의 또다른 가르침은 "눈이 아니라, 사람들이 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라"는 것이었다. 그분이 일본말을 몰아내자고 한 것도, 사실은 그것이 우리 나라 사람들의 귀에 자연스럽게 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라. "그녀는 예뻤다"는 말을 우리가 문장으로만 쓰지, 어디 그것이 자연스럽게 입에서 나오는 말인가? 위에서 강대진 선생이 지적한 "닿게 된다"와 "닿았다"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럽게,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오덕 선생님과 강대진 선생의 책 사이에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나쁜 공통점"으로 여겨질 터인데, 어떤 참신하고 체계적인 짜임으로 구성돼 있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하고 거기에 포함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것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오덕 선생님은 실제로 적이 많았다. 그분의 뜻을 배우고자 찾아온 젊은 교사들에조차 원칙에 맞지 않는 글을 써오면 가차없이 정말 "잔혹하게" 비판하셨다. 이 점은 강대진 선생도 꼭 닮은 셈이다.

그러나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이오덕 선생님은 경상북도 청송에서 나서 평생을 경상북도의 초등학교에서만 근무하셨던 (물론 만년에 서울에서 일하신 적이 잠깐 있긴 하다) 경상도 시골 할아버지셨다. 실제로 그분은 외국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셨다고 고백했다.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 나가신 적이 없지 않나 싶다) 그러나 강대진 선생의 책은 이오덕 선생이 전혀 모르는 세계, 서양문화의 정수인 희랍어와 희랍문명을 파고든다.

희랍어와 희랍문명을 파고드는 국내 학자는, 역시 소수이긴 하지만, 최소한 번역에 직접 뛰어드는 이들보다는 많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서양고전학 협동과정, 전국 각 대학 철학과의 고대철학 전공 학자들, 그리고 신약을 연구하는 가톨릭 또는 개신교 신학생들을 포함하면 그 수가 극히 적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제대로 평생에 걸쳐 "희랍어 학자"를 자처할 수준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이 책의 필자인 강대진 선생도 그 중 한 분임이 분명하다.

더 놀라운 사실 하나. "희랍어 학자" 가운데 한국어에 관심을 갖고, 이런 책들의 문제를 한국어로 소개하고, 희랍어의 특질과 문화의 본성에 대해 한국어로 말하는 사람은 더욱 적다. 논문의 형식으로 해서는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강대진 선생의 <잔혹한 책읽기>가 소중한 이유다. 이것은 단순히 번역서를 비판한 책이 아니다. 한국인들에게 희랍어 공부의 필요성을 알려주는 <희랍어학 들어가기>이며, 우리 한국어 문장의 정확도를 높여야 한다는 선언이며, 차분한 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께워주는 일종의 계몽서이다. 우리는 아직 이러한 기능을 하는 책들 가운데 <잔혹한 책읽기>를 넘어선 책을 갖고 있지 못하므로, 이 책의 시효는 이제 겨우 시작됐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서평자로서, 이보다 더 친절하고 상세하며 체계적인 책이 나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덧붙여 전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2, 2013년 10월,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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