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이 무병장수하며 행복하시기를 형제자매가 어려움 없이 행복하기를 자식들과 친구들이 그리고 이웃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이처럼 행복추구는 마치 자명하고 자연스런 현상처럼 보인다. 그래서 오래전 어느 철학자는 행복이야말로 인생의 목표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흔히들 돈, 명예, 건강 등을 꼽는다. 그렇다면 최고의 부자는 가장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우리의 행복추구 경험을 잘 되새김질 해보면, 행복을 둘러싸고 있는 이상한 점들을 떠올릴 수 있다. 성취만하면 너무 행복하리라고 여겨지는 것들, 가령 대학 입학, 원하던 곳에 취업, 고시 합격, 로또 당첨, 누군가에게는 결혼,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혼 등등. 그것을 막상 이루게 되면 그 기쁨과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는다.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며 영원히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되던 행복은, 얼음이 물로 녹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 어느새 사라져 버린다. 그토록 갖고 싶었던 행복의 파랑새는 기약 없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왜 그럴까? 행복은 손에 잡을 수 없는 파랑새인가? 가까이 가면 그만큼 멀어지는 환영적인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저 바깥에서 허깨비를 쫓아다니길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외적 조건의 성취로 행복을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하며 내면의 행복을 추구하는 노선을 따를 수 있다. 기대치를 가급적 낮춰서 약간의 성취에도 넘치는 기쁨을 느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치를 낮춤으로서 행복을 성취한다는 시도에는 한계가 있다. 실제적인 변화 없이 기대치만 낮춘다는 것은 단지 ‘생각의 변화’(인식 전환)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인데, 그러한 시도에 우리의 몸이 충분하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의 시도에 대해 우리 몸이, 우리 뇌의 특정한 다른 부분이 본능적으로 그런 조작을 눈치 챈다.
가령, 진짜 놀라는 것과 놀라는 척하는 것은 다르듯이 말이다. 심장 박동수에서, 호르몬 분비에서, 식별 가능한 미묘한 표정들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성적 사고란 인간의 위대한 점이겠지만, 실제 그것은 뇌의 여러 기능 중 일부분일 뿐이다. 행복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뇌 전체의 반응이다. 개체의 전체적 반응이기 때문에 부분기능에 불과한 이성의 독단적 설득논리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뇌 전체, 인간 개체를 관통하는 생물학적인 행복의 작동원리가 있을까?
심리학자인 서은국은 <행복의 기원>에서 행복의 속성을 진화론적으로 고찰하면서, 우리에게 행복 길라잡이를 제공하고 있다. 막연한 여러 행복에 대한 주장들, 고전적 권위를 가졌지만 근거는 불충분 했던 여러 행복론들을 넘어서, 과학적 연구에 근거한 행복의 원리를 잘 정돈하여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일관된 생물학적 접근법을 통해 저자는 간명하면서 깊은 설득력을 준다.
다윈주의적 행복론
저자가 다윈주의에 바탕 한 행복론에서 주장한 것은, 행복이 거창한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경험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생물체의 쾌락에서 기원하는, 기쁨과 즐거움 같은 긍정적 정서들이다. 이런 정서는 뇌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 때문에, 철학이 아닌 생물학적 논리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쾌감은 먹을 때와 섹스할 때, 그리고 사람과의 사회적 관계에서 온다.
이에 대비되는 고전적인 아리스토텔레스식의 행복론은 다분히 목적론적이고 가치지향적이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며, 이것은 의미 있는 삶을 통해 구현된다는 식의 생각이다. 왠지 친숙한 도덕책 버전의 행복론이다.
그러나 세상 특히 생물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적론적 사고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는 우주’에서 살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초다. 인간은 단지 수많은 우연에 의한 진화의 산물이다. 유구한 세월을 걸쳐 수많은 자연 선택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의 이유는 결국 생존을 위한 것으로 특징지어졌다. 이러한 다윈의 진화론은 과학책 버전의 행복론을 말해준다. 진화론의 핵심 메시지는 ‘생명체가 가진 모든 생김새와 습성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생존과 짝짓기를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행복도 생존을 위해 기능하는 도구일 수 있다.
마치 꿀벌이 꿀을 찾는 것이 그것이 목적이어서가 아니라 수단이듯이, 인간도 행복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추구하는 것으로 본다.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다.
미로 찾기를 하는 실험쥐에게 먹이라는 보상을 주어 훈련을 시키듯이, 인간의 쾌감도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도록 하기 위해 진화적으로 개발된 감정도구이다. 인간이 음식을 먹거나, 근사한 데이트를 할 때, 혹은 찜통더위 속에 있다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을 때 ‘행복하다’는 느낌을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만 또다시 먹이를 구하고,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으면서 생존과 번식을 가능하게 한다. 진화론적 관점으로 보면 행복은 삶의 최종적인 목적이 아니다. 다만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정신적 도구일 뿐이다.
삶에서 어려운 일들을 성취해 낼 때 느끼는 희열, 뿌듯함, 자신감도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자신의 장기적인 생존 확률을 높일 때 느끼는 감정이다.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에 계속 매진하라고 알리는 것이 쾌의 본질적 기능인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는 것도 동일한 이유이다. 바로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포식자들이 있는 한, 모든 동물의 생존 확률은 다른 개체와 함께 있을 때 높아진다.
먹는 쾌감을 느낄 수 있어야 음식을 찾듯이 사람이라는 절대적 생존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아주 좋아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고, 교류할 때 뇌에서는 사회적 쾌감을 대량 방출한다. 우리는 이런 사회적 쾌감을 예민하게 느꼈던 자들의 유전자를 지니고 산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을 절실히 찾는 것이고, 가장 강렬한 즐거움도 사람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는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강력한 고통과 기쁨은 모두 사람에게서 비롯된다. 이 때문인지 시대와 문화를 막론하고 인간이 치르는 가장 성대한 의식들은 사람과의 만남(결혼, 탄생)과 이별(장례)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한마디로 사회적 동물이다.
행복에 대한 여러 고찰 중에 놀라운 것이 있다. 바로 유전의 중요성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삶의 조건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인생의 여러 조건들, 이를테면 돈, 건강, 종교, 학력, 지능, 성별, 나이 등을 다 고려해도 행복의 개인차 중 약 10~15% 정도만 예측할 뿐이다. 행복의 개인차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가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외향성이라는 성격 특질이다. 학계의 통상적인 견해는 행복 개인차의 약 50%가 유전과 관련이 있다고 본다. 전체의 반으로서 매우 큰 편이다. 아마도 이러한 외향성과 행복의 밀접한 관련성은, 행복은 사회적 동물에게 필요했던 생존 장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와 같은 행복에 대한 다윈주의적 고찰을 바탕으로 서두에서 우리가 제기했던 여러 궁금증을 풀어보자.
질문1) 행복은 왜 영원하지 않을까?
우리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행복의 파랑새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음을 경험한다. 그것만 있으면 평생 다른 것은 필요 없겠다 싶은 소원을 성취하더라도 그 지속은 길지 않다. 대단한 성취(고시합격, 로또 당첨 등등)가 주는 기쁨은 대략 3개월이면 행복감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다고 한다. 좋은 일 뿐만 아니라 나쁜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슬픈 이별의 아픔도,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뼈아프게 후회스러운 일도 유효기간이 3개월이다.
인생의 아무리 멋진 일도 처음에는 매우 감격스럽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놀라움은 금세 시들해진다. 행복뿐만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은 어떤 자극에도 지속적으로 반응을 하지 않는다. ‘적응’(adaptation)이라는 생리학적 현상 때문이다(경제학에서는 이것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복권 당첨, 새 집, 새 차도 잠시 짜릿하지만 지속적인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적응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현상이다. 앞에서, 뇌가 행복감을 느끼는 목적은 우리 생존에 필요한 자원들을 구하도록 유인하는 정신적 도구라고 했다. 근데 중요한 점은, 생존 행위는 반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살기 위해서는 조만간 또 사냥을 나가야 한다.
적응은 생존 자원을 지속해서 의욕 하기 위한 필요조건인 것이다. 쾌감 수준이 원점으로 돌아가는 이런 초기화(reset) 과정이 있어야만, 쾌감을 유발시킨 자원을 다시 찾는다. 반복되는 생존 사이클을 지속시키기 위해 쾌감이 소멸되는 초기화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만약 쾌감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행복감에 겨워 마냥 누워 있을 것을 것이고 행복감 속에서 굶어 죽어갈 것이다. 그래서 쾌감이 소멸되지 않는 것은 생명체에게 심각한 결함이 된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생리학적 체계는, 행복이라는 좁은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일이지만 생존을 위해서 불가피하며 필수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왜 영원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은 잘못된 질문이 된다. 우리는 행복의 지속 불가능함을, 사라지는 파랑새를 안타까워하지만 그 사라짐 때문에 살아 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행복의 생리학적 특성에 의해, 어떠한 기쁨도 시간에 의해 퇴색되지만, 덕분에 어떠한 좌절과 시련에도 적응되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정서적 힘을 가질 수 있다.
질문2) 돈을 통한 행복은 얼마나 가능한가?
인간의 적응이라는 생리학적 반응은 외적 조건이 주는 행복감을 금세 초기화 시킨다. 그 덕에 외적 조건과 장기적 행복의 관련성은 없어진다. 더 많이 가졌다고 더 많이 (지속적으로) 행복하진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재화의 결여로 불행해 하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많이 본다. 돈이 없어 아픈 몸인데도 맘 편히 치료받지 못하고, 돈이 없어 열악한 주거지에 살고, 돈이 없어서 받고 싶은 교육도 못 받고 등등. 재화의 부족 즉 빈곤은 경험과 기회의 부족을 낳고, 그 사람이 갖고 있을 잠재력의 개발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생활고로 인해 생존에 급급한 생활 속에서는 행복감을 얻을 기회가 낮아지는 것도 사실이지 않는가.
맞다, 맞는 말이다. 계급의 사다리의 아래쪽에 있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들어맞는다. 하지만 수많은 연구 데이터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바는 재화의 양과 행복감의 비례관계는 어느 정도까지 만이다. 돈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데에는 상한선이 있다. 어느 선을 넘어서면 재화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 거기에는 생리학적 이유가 있다.
우리의 머리는 ‘불행하지 않은 것’과 ‘행복한 것’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예를 들어 생수 한 병은 사막 속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갈증의 고통을 없애주는 천금 같은 행복이지만, 갈증이 가신 사람에게 그 물은 더 이상 행복을 주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돈이라는 외적인 조건들은 사막에서의 물과 비슷하다. 일상의 불편과 고통을 줄이는 데는 매우 효력이 있지만, 결핍에서 벗어난 인생을 더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최고 불행 상태를 ‘-10’, 최고 행복 상태를 ‘+10’이라고 하고, 중립상태를 ‘0’이라고 가정하자. 최근 학자들의 중요한 발견 중 하나는 불행의 감소(-5에서 0)와 행복의 증가(0에서 +5)에 기여하는 요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 부정 정서의 독립성이라고 한다.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행의 요인을 줄이는 것이 행복을 증가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것이 바로 돈의 행복에 대한 영향력이 한계를 갖는 생리학적 이유일 수 있다.
질문3) 사회적 관계가 행복의 원천이라면, 집단주의적 한국사회는 왜 행복감이 낮은가?
행복스런 사건에 우리는 금세 적응해 시큰둥해 지고, 아무리 열심히 행복의 외적 조건을 쌓아도 그것이 결핍을 채워줄지언정 행복의 의미 있는 증가에 기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행복을 찾아야 할까? 진화론적 행복론이 말하는 바, 바로 사람들 속에서 인가?
행복에 대한 많은 연구와 고찰들은 행복에서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다고 일관되게 제시한다. 그렇다면 이상한 점이 있다. 고소득 국가인 한국, 일본, 싱가포르는 대표적으로 행복감이 아주 낮은 특이한 나라에 속한다. 서구적 가치가 많이 들어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서로에게 많이 간섭하고 공유된 가치를 중시하는 집단주의적 문화를 가졌다. 근데 밀접한 관계를 갖고 공유된 가치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왜 이렇게 행복감이 낮은 것일까?
여기서 저자는 말한다. 사회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사회적 관계에서 반응을 더 강렬하게 체험한다는 것이지, 집단 속에 파묻혀있다고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사회적 관계에 둘러싸인 사람은 관계 속에서 행복감은 더 행복하게, 불행을 더 불행하게 느낀다.
특히나 집단이 개인에게 과도한 요구를 하고, 이를 수용하지 않으면 철없고 이기적이라는 낙인을 찍는 집단주의적 문화는 행복에 악영향을 끼친다. 한국, 일본, 싱가포르 같은 아시아의 행복 부진 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행복감을 예측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특성은 개인주의라고 한다. 개인주의 문화는 개인에게 심리적 자유감을 통해 행복 성취에 유리하게 작동한다. 각자의 삶을 보편적으로 지지해주는 문화 속에서 행복의 씨앗은 쉽게 싹을 틔운다.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행복 수준의 이유를 고소득과 복지제도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유효하지 않는 설명이라고 한다. 그러한 국가들에서 피어난 개인주의적 문화가 실질적인 주요 원인이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성향을 통계적으로 제거하면, 국가 소득과 행복의 관계가 거의 소멸된다고 한다.
막연한 공동체적 유대, 친구가 무조건 많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몇 명의 진짜 친구가 있는지,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가 중요하다. 만나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자율적 자발적 공동체라야 행복감과 유의미하게 연결된다.
질문4) 행복이 유전이라면 우리의 할 일은 무엇인가?
이 책의 주장에 따르면 행복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양한 외적 조건의 성취도 아니고 유전이라고 말한다. 그중에 특히 외향성이라는 요소가 행복에 다른 모든 요소들을 합친 것 이상의 영향을 준다고 한다. 외향성이 높은 사람의 특성은, 사람을 찾고 그들과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외향성이 높을수록 자극을 추구하고, 자기 확신이 높고, 위험을 피하기보다는 즐거움을 늘리는 것을 중시한다.
저자의 말대로 행복이 유전적으로 외향성이라는 성격요소로 대부분 타고나는 것이라면, 우리의 행복을 향한 고군분투는 소용없는 짓인가? 특히나 내향성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말이다. 어쩔 수 없는 내향성의 성격. 그 성격은 각오하고 다짐하는 등의 생각만으로 바뀌지 않는 체질적인 요소가 강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향적인 사람도 사회적 관계를 통해 행복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당연히 내향적인 사람도 혼자일 때보다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더 높은 행복감을 느낀다고 한다. 단지 그 상황을 더 불편해할 뿐이다. 그게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의 원인이기도 하다. 내향적인 사람들은 이런 타인에게서 받는 사회적 스트레스에 민감한 것이다.
사회적 관계를 통해 행복이라는 고지에 오르는 경우, 외향적인 사람들은 짐 없이 가벼운 상태라면, 내향적인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진 처지이다. 고지에 오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에 대한 예민함이라는 추가적 짐이 있는 것이다. 하여, 상대적으로 불편하고 약점이 있을 뿐 행복의 고지에 오르는 데에 절대적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맺으며: 다윈주의적 행복론은 가치추구와 상충하는가?
저자는 다윈주의적 통찰과 행복에 대한 최신 연구에 기반 하여, 우리에게 행복의 기원을 알려주고 있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생존에 유리한 행동을 유발하기 위한 정신적 도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변치 않는 행복의 파랑새’를 찾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며, 생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를 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타까워하던 ‘행복(감정)의 지속불가능성’ 덕에 우리는 계속 살아 갈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이다. 더불어 어떤 고난에도 고착되지 않고 털고 일어날 수 있게 해준다. 지속되지 않는 감정의 유통기한 덕분에 말이다.
진화론이 말하는 바, 행복은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것, 그것이 거창하진 않을지라도 진정한 행복의 본 모습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책을 통해 내내, 진화론을 통한 행복론을 설파하면서 그것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나 가치 추구를 통한 행복론을 대결시키고 있다. 과학책 버전의 행복론과 도덕책 버전의 행복론이 상충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 과거의 고전적 권위에 입각한 전통적 주장들을 실험과 데이터에 기반 한 과학적 주장으로 대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경험적이고 비실증적인 하지만 여전히 지배적인 담론을 제대로 한번 갈아엎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자는 행복에서 ‘사회성’의 진화론적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적용될 때에는 오직 개체 단위에서 그러니까 인생론 차원에서 사회적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만을 얘기한다. 단일 개체 차원이 아니라 개체집단 차원에서 새롭게 창발 되는 가치추구가 그 집단의 지속 가능성에 도움을 주면서 행복과 연결될 가능성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관점은 한편으로 과학적 일관성을 보이는 성실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욕심을 내서 몇 걸음 더 나아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간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행복하다는 것이 즐거움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 그 관점까지 포괄하는 시도를 말한다. 의미 있는 삶,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는, 이른바 신념 있는 삶에 대한 옹호. 다윈주의적 행복론에 이러한 가치추구를 하는 윤리적 요소를 끌어안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이런 관점은 저자가 이미 도덕책 버전의 거창한 행복론이라고 공격한바 있다. 가치추구를 행복으로 보는 방식은 관념적이고 생물학적으로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물학의 생존 지상주의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윤리적인 가치추구가 결합될 수 있다면 어쩔 것인가?
통섭의 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지구의 정복자>에서 최근 10여 년 간의 새로운 연구 성과에 기반 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개체선택론’에서 ‘집단선택론’으로 전환을 했다. 집단선택론은, 개체수준의 생존주의적 일방향성 그러니까 ‘이기적 유전자’로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치, 의미, 윤리 등)가 다윈주의적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의한다. 사회를 이루는 개체들의 경우, 생존은 지속을 위해 타 집단과 경쟁하면서 근시안적인 단순한 생존주의 넘어서는 소위 가치, 문화, 혹은 윤리에 해당하는 것이 생물학적 논리와 병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가치추구는 생물체의 생존지향성과 단순히 상충될 필요는 없게 된다. 그것은 사회적 동물이 집단의 생존과 지속을 위해 경쟁하다가 창발된 것으로 진화적으로도 유효할 수 있다. 가치추구가 사회적 동물들의 생존을 위해 선택된 것이라면, 그 또한 공고한 생물학적 토대 위에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진정한 ‘통섭’의 가능성이 보인다. 다윈주의적 행복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의 결합.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사실’과 전통적 인문학이 추구하는 ‘가치’ 사이에 놓인, 커다란 망각의 강에 다리를 만들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8, 2016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