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2-27 15:31
[이승범 서평]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의 매혹과 미혹사이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5,419  


도서정보
저자명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저서명 미움받을 용기
출판사 인플루엔셜
연도(ISBN) 2014(9788996991342)
[이승범 서평] 미움받을 용기: 아들러의 매혹과 미혹사이

1.
책 좀 읽었다 싶은 사람들 중 적지 않은 경우에서, 소위 ‘자기계발서’류의 책에 대해 정서적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한마디로 가증스럽다는 것이다. 그 분야에서 쏟아져 나오는 책들은 많은데 내용은 거기서 거기이고, 유명인의 이름을 팔아 한 몫 하려는 낚시성이거나 민망한 자화자찬식의 책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겉치장의 과한 외피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런 류의 책들이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를 덮어 둔 채 약자나 실패한 사람에게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고 몰아가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틀린 지적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까다로운 독자에게 옹호되는 인문학적 성찰을 보여주는 책들에서도 묘하게 자기계발서류 책들의 주장과 유사한 논리를 발견하곤 한다. 주어진 사회나 환경의 제약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기를 촉구한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의 논리는 보통 이런 것 같다.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 탓을 그만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무장하고 자기 확신을 갖고 열정적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 긍정의 마인드가 성공의 열쇠이다 등등. 철학에서 이런 유사한 논리는 실존주의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현대적인 탈구조주의 철학에서도 구조의 한계를 이탈할 수 있는 인간 자유의 가능성을 옹호하기 있기 때문에 유사한 논리적 패턴이 반복된다고 할 수 있겠다. 

자기계발서가 은폐하는 음흉한 논리를 비판하기에 앞서, 그들의 논리가 보여 주는 액면 그로의 모습은 그다지 반박하기 힘들어 보인다. 긍정적이고 자발적으로 한계를 극복하고 등등. 그것은 고무되어야 하는 좋은 가치이지, 폄하될 만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모순적 사회구조에 대한 은폐와 경시? 기존사회에 대한 경시는 혁명을 꿈꾸는 주체에게도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 글에서 소개하려는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을 리뷰하면서 제시해보고자 한다.

2.
이 책은 알프레드 아들러라는 심리학자의 이론을 흥미롭게 소개하는 책이다. 아들러의 이론을 소화하고 따르는 어느 철학자와 그의 의견에 냉소적 질문을 던지는 청년 간의 대화 형식으로 책은 구성되어있다.

이 책은 대중적인 심리학책인데, 앞서 말한 일종의 자기계발서가 아닌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는 생각이다. 개인에게 주어진 상황적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개인의 자발성과 적극성으로 그 한계를 돌파해야함을 선동한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개인의 책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다른 점은 그 지향점이 세속적 성공과 가시적인 성취에 기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성찰을 통해 자기를 확립하고 공동체를 지향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의 일부는 자기계발서적 냄새를 풍기지만, 지향하는 바는 실존적 주체의 위상을 정립하기를, 또한 그 위상이 공동체적 가치와 자연스럽고 필연적으로 연결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매우 인문학적 서적에 가깝다고 하겠다.

일단 책속의 철학자가 주장하는 아들러의 담론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들러 심리학의 핵심적인 생각을 이해하고, 그것의 한계점 또한 짚어보기로 하자.

아들러는 프로이트의 트라우마 운운하는 주장이 인간을 과거의 원인에 의해 좌우되는 결정론적 존재로 만들고 있다고 비판한다. 인간은 과거의 경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과거의 충격적 경험 때문에 우리가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본다. 재해나 어린 시절의 학대가 영향이 있긴 하지만 그런 사건들이 무언가를 결정하지 못하며, 그런 과거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과거 경험이 주는 ‘한계를 넘어 자신의 원하는 목적을 지향하는 인간’이 아들러의 인간관이다. 즉 인생이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들러 심리학은 운명론과 대치하는 사상이 된다. 문제는 ‘무엇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며 인간이 변할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때로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어 하는 것도 ‘무엇이 주어졌는가’에만 주목하기 때문이며, 그러지 말고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불가피한 현실을 인정하기를 요청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쳐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성격이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그런 성격을 사고나 행동의 경향을 뜻하는 ‘생활양식(life style)'이라는 말로 설명하려 한다. 세계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의미부여 방식이 생활양식인 것이다. 성격이란 말에는 변하지 않는다는 뉘앙스가 있지만, 세계관이라면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함의가 있다. 

아들러의 심리학에서는 생활양식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며, 자신의 불행한 상태뿐만 아니라 꼬인 성격까지도 선택의 결과로 본다. 또한 변하지 않는 것조차, 스스로 ‘변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으로 본다. 

물론 변화가 가능하다고 변화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생활양식을 바꾸기 위해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선택하거나, 변하지 않아서 따르는 ‘불만’을 선택해야 한다. 한마디로 아들러 심리학은 인생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의 심리학이며, 다른 표현으로는 바로 인간자유를 주장하는 심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유의 심리학은 당연하게도 자기책임에 집중하게 된다. 

남에게서 상처받고 싶은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거의 누구나가 인간관계 속에서 상처받길 원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은 상처받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거절당해 마음에 상처받는 것을 무서워해서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으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자신을 보호하는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남에게 거절을 당할 염려도 없다. 누구에게나 그런 자기보호 껍데기 안에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들러 심리학은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함을 말한다. 우리는 인간관계에 속에서 크든 작든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우주 공간에서 나 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면 상처의 불가피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떨어져 혼자 사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개인의 순수한 내면의 고민이라는 것은 성립하지 않으며, 어떤 고민이든 거기에는 반드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인간이 이런 타인의 그림자 속에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더욱 용기의 심리학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어떻게 보면 자유란 타인의 미움을 감수하는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미움도 받지 않는다는 건 부자유스러운 동시에 불가능한 일이다. 타인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유의 행사에 대한 대가이다. 타인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러야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있다.

3.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인간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보편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우월성 추구’라고 하는데 ‘향상되기를 바라는 것’,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우월성의 추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열등감’과 ‘열등 콤플렉스’를 구분해야 한다.

열등감은 자체로는 그다지 나쁜 것이 아니며, 노력과 성장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가령 학력에 열등감을 느껴 “나는 학력이 낮다. 그러니 남보다 몇 배 더 노력하자”라고 결심한다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열등 콤플렉스는 자신의 열등감을 변명거리로 삼기 시작한 상태를 말한다. “나는 학력이 낮아서 성공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핑계의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 열등 콤플렉스이다. 건전한 열등감은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이상적인 나’와 비교한다. 그래서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도 있는데 이를 ‘불행 자랑’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 한다. 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괴로운지 알려서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속박하고 지배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의 불행을 특별하기 위한 무기로 휘두르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불행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타인에게 인정받기 원하는 마음을 부정한다. 타인에 인정을 바라는 것은 상벌교육의 영향으로 본다. 적절한 행동을 하면 칭찬을 받고 부적절한 행동을 하면 벌을 받는 상벌교육을 아들러는 맹렬히 비판했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기울이면, 결국에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타인의 평가에 오히려 지나치게 예민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여기서의 타인의 의미는 (요즘 유행하는) 윤리를 정초하는 ‘타자’라는 레비나스적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타인 혹은 타자의 의미는 주체가 윤리를 획득하기 위해 만나야할 심원한 이질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동에 따라 이익을 주거나 손해를 주는 세속적인 형식적 규범 틀에 가까워 보인다.

아들러는 인간관계 속에서 타인과 잘 살아가기 위한 훌륭한 방편을 제시한다. 인간관계의 트러블은 대부분 타인의 과제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에 의해 발생하는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불쑥 끼어드는 개입을 하면서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하지만, 부모들은 자신의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세상의 이목이나 자신의 체면 때문일 것이다. 즉 너(자식)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부모)를 위해서이고, 그 기만을 알아차렸기에 자식들이 부모의 조언을 잔소리로 듣는 것이다. 

그런 경우에 아들러 심리학은, 공부에 관해서라면 그것이 본인(자식)의 과제임을 알리고, 공부하라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스스로 과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부모의 과제라는 말한다.

“말을 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라는 속담처럼 아들러 심리학의 타인에 대한 태도는 그런 입장에 있다. 본인의 의향을 무시하고 ‘변하는 것’을 강요해봤자 반발심만 커질 뿐이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믿고 지원할 수는 있지만, 그런 기대와 지원을 받은 상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것은 그 사람의 과제이다. 이 선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무겁게 짓누른다. 만약 인생에 고민과 괴로움이 있다면 내 과제의 경계선을 정하고 타인의 과제는 버리자. 그럼 인생의 짐을 덜고 복잡하고 힘든 상황을 단순하고 분명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아들러의 ‘이것이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과제 분리하기’는 구체적으로 대인관계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근사한 방식이다. 물론 이러한 ‘분리하기’는 인간관계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 필요한 주체의 공간을 마련해서, 너무 가까워 상대와 마주보고 얘기조차 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것이다. 

4.
아들러는 모든 고민과 불행의 근원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행복의 원천 또한 인간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은 주장한다. 공동체 감각이란 행복한 인간관계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라고.

공동체 안에 내 자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 ‘여기에 있어도 좋다’고 느끼는 것. 즉 소속감을 갖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고 본다. 아들러 심리학에서 소속감은 공동체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아들러는 손쉬운 자기긍정을 비판한다. 자기긍정이란 하지도 못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강하다”라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것이며, 이는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고 본다. 한편 자기수용이란 ‘하지 못하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제대로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아들러 심리학은 개인이 지속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변할 수 있는 것’과 ‘변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은 그다지 현명한 조언은 아닌 것 같다. 특히 알 수 없는 미래의 성취에 대해서 그렇다. 아마 아들러는 재능의 유무를 통해서 성취할 수 있음과 없음이 예정된 것이라고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거부하는 운명론적 인간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정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성취여부가 결정된다면 이는 아들러적인 목적을 선택하는 인간관에는 부합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많은 열정들 중 일부만이 성취를 한다. 수많은 과거의 사례에서 보듯 험난한 과정 속에서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특정한 성취여부나 미래의 변화가능여부는 불확실성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오락가락 하는 것이다. 미래라는 불투명한 안개 속으로 무턱대고 내달리는 열정과 움츠린 자기 회의 속에서 말이다. 

아들러는 인간관계가 ‘신용’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성립한다고 본다. 은행이 담보에 가치를 매겨서 대출금액을 산정하는 방식이 신용이라면, 다른 사람을 믿을 땐 조건을 달지 않는 것이 신뢰라는 것이다. 신뢰의 반대편 태도인 회의를 품고는 어떤 관계의 싹도 자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조건 없는 신뢰는 관계에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더불어 아들러 심리학의 신뢰는 교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진정성 있는 열린 태도가 좋은 인간관계의 기본적 조건임을 누구나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신뢰를 이용하는 사기꾼 집단도 있다는 걸 우리가 인정할 때에는 신뢰의 방식을 좀 더 정교화 할 필요가 있다. 사기꾼에게 반복적으로 피해를 입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힌트는 관계 속에서 협동과 배신의 효과가 각자에게 어떤 이해를 주는지를 따지는 ‘죄수의 딜레마’라는 실험에 있을 것 같다. 로버트 액설로드가 심화시킨 이 가상의 게임에서, 경쟁을 통해 가장 우수한 협력모델(협동과 배신의 특정 패턴)로 드러난 전략(Tit for Tat)은 참고가 될 만하다. 이 전략의 내용은 처음에는 협력(신뢰)을 기본으로 하고, 이후에는 상대방이 지속적으로 협력적일 때 마찬가지로 협력을 하고, 상대방이 배신을 했을 때 따라서 배신으로 응수하는 전략이다. 그리고 배신했던 상대방이 협력적 자세를 보이면, 다시 다음번부터는 협력적으로 응수한다. 당연히 가상 세계 속에서 경쟁력 있는 전략이라고, 현실에서 마냥 따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일방적인 신뢰의 방식이 통하지 않았을 때 그 다음 단계에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에 대한 영감은 준다.  

5.
내가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다면, 인간은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과제에 직면할 용기를 얻게 된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하면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에만 가치를 실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때의 도움은 눈에 보이는 형태가 아니어도 되며,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주관적인 감각, 즉 공헌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을 필요 없이 자신의 주관에 따라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아들러 심리학은 시작점부터 주관이 사건을 재해석하는 능력과 개인의 선택 능력을 중시했듯이, 결론부에 이르러서도 성취감이라는 주관성으로 기운다.

아들러 심리학은 의식 개혁을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라는 각성을 촉구하고, 게다가 타자에 대한 공헌도 주관적 자기만족으로 귀결된다.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이런 자유로운 주관성에 대한 강조는 어느 정도 필요하기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다. 개인의 심리 차원에서 시작하는 논리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걸출한 사회학자인 뒤르켐의 통찰을 끌어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회학은 심리학이 놓치는 구조적 관점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뒤르켐은 대표작 <자살론>에서, 요청되는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깨달음을 주는 감동적 호소나 의식을 개혁하는 훌륭한 교육도 명백한 한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령 교육을 통해 아무리 윤리적이며 이타적인 가치로 학생들을 학습시켜도, 그들이 학교를 나와 사회로 나가게 되면, 학교는 단지 온실이었으며 사회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에 적응하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어떤 교육이나 의식 혁신 운동도 헛것이 된다. 그럼 무엇이 사회를 변하게 하나? 그것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에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는 제도들이다. 새 제도는 새로운 법을 통해 가능하며, 그것은 민주사회에서는 선거를 통한 정치적 핵심세력의 변동을 통해서 꾀할 수 있다. 

아들러의 실존적 통찰은 인문학적이며 철학적인 품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아들러주의만으로는 실존주의의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높다. 한 바퀴만 있는 수레처럼 아무리 앞으로 가려해도 제자리만 맴돌 공산이 크다. 실존적 통찰과 더불어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저 제도와 새로운 법과 정치의 혁신이라는 반대편 바퀴가 같이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들러는 인생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인생에 있어 의미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가 그 인생에 의미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자유로운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으로 ‘길잡이 별’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그 별은 타자공헌이다. 그 별을 놓치지 않는다면 헤맬 일도 없으며, 미움을 받으면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한다. 과정으로서의 인생을 향유하면서 바로 ‘지금, 여기’를 신나게 춤추고, 진지하게 사는 것. 완결된 찰나를 살 수 있음을 말한다. 

이처럼 아들러 심리학에서 그려지는 인간은, 자기 안위에 연연하지 않고 실존적 결단을 통해 자발적이고 즐겁게 공동체에 헌신하는 사람의 이미지이다. 이는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묘사한 사회주의적 인간형을 떠올리게 한다. 실존과 사회적 가치를 개인의 차원에서 연결시키려 했던 프롬의 매혹적인 시도. 그 시도의 성공여부는 미혹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인생론의 차원에서 그만큼 매력적인 것도 찾기 힘들다. 

6.
주어진 운명적 불우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긍정성과 자발성을 통해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드문 인간승리의 드라마일 것이다. 드물고 귀중하기 때문에, 수많은 자기계발서와 인문학적 책들에서 옹호된다. 왜냐면 주어진 한계를 넘어서서 창조적 재구성을 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성의 핵심을 관통하는 감동적인 무언가를 우리에게 선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정확한 이름은 자유일 것이다. 

사실 정확히 구분하기 힘든 면도 있지만, 인간의 자유를 옹호하는 자기계발서류와 인문학류의 차이점은 자유가 작동하는 내재적인 논리에 있지 않고, 그 지평에 있는 것 같다. 일련의 자기계발서에서 촉구하는 동기 부여된 자발성의 지향은 표면적인 세속적 성공과 성취의 지평위에 있다. 그것을 위해 (피로사회적인) 자기소진적 노력을 요청하는 것 같다. 인문학적 맥락에서 자유의 지향은 내면적 성찰과 가치의 자기 정립으로 향하도록 재촉한다. 이처럼 자유가 작동하는 지평, 즉 맥락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가치의 ‘자기 정립’은 얼마나 어려운 숙제인가. 오히려 가치의 자기 정립이야 말로 가장 부자연스런 일일지 모른다. 거기에는 참고할만한 그 흔한 표준적인 기준점이나 잣대가 없다. 망망대해에서 길을 만드는 것처럼, 결단을 통해 기준점과 공리를 자기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상사적으로만 봐도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니체 급의 위인들만이 근사하게 성취해냈을 뿐이다. 일반적인 경우는 더 쉽게 다른 곤경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긴 자기 결단의 과정을 우회해서 도달하는 지점이 세속적 성공과 성취라면 어찌할 것인가? 디킨스가 <위대한 유산>에서 주인공 소년 핍의 입을 빌어 말했듯이, 그것(이성적으론 환멸이지만 정념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속물적 유혹)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들조차 매일매일 빠져드는 불가사의한 모순’이 아니던가.  

이러한 아들러의 주장에서 강조하는 ‘용기의 심리학’의 메시지를 간명하고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조되는 심리학자가 도움이 될 것이다. 바로 스키너이다. 그리고 이 책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마도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일 것이다. 스키너는 자극에 대한 여러 반응들(레퍼토리)의 집합체로 인간을 규정한다. 인간은 자극에 반응하는 기계인 것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이라는 ‘과학의 이름’으로 삶의 미스터리인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려고 노력한 것이다. 하지만 아들러주의를 소개하는 이 책은 용기를 갖고 선택하는 인간을 주장함으로서 해체된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복권하려는 시도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3, 2014년 3월, 이승범, 가정의학과 의사)


아포리아 16-01-07 06:21
 
와! 귀한 글 감사합니다. 하나의 북리뷰라기보다 이런 자기계발을 담은 책이나 정보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정리한 통합적인 통찰력이 정말 좋습니다.  저도 이런 류의 책들을 접할 때면 "나하나 잘하면 되는겨?"라는 질문과 함께 절망감이 밀려 읽고 싶지 않았죠. 그러면서도 이런 류의 책이 이 나라에서 잘 팔리는 이유는 불행한 사회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절박함을 보여주는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윤리학자이자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가 비도덕적인 사회에서 도덕적인 인간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를 피력하고 있듯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시스템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는한 자기계발류의 정보는 삶 속에서 실천되기 어려울 수 있을지도.... 그래서 사회의 재구성과 변화에 의도적인 열정과 힘을  써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나 <이기적인 유전자>에 관한 책을 review해 주시길 제언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이민선 (220.88.15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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