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4-04-25 16:30
1%를 위한 불평등: 극소수를 위해 존재하는 자본의 불편한 진실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8,084  


도서정보
저자명 Thomas Piketty
저서명 Capital in the Twent
출판사 Belknap Press
연도(ISBN) 2014(978-0674430006)
1%를 위한 불평등: 극소수를 위해 존재하는 자본의 불편한 진실 

1.
지금 대한민국은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 휩싸여있다. 정부는 무능하고, 자본은 부패했다.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두 가지 기본 축이 무너진 것이다. 수 백명의 인명을 앗아간 세월호 사건이 '인재'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미 익숙해진 정치에 대한 불신과 실망이 공적 영역에서 작용하는 모든 시스템과 메커니즘에 대한 반감과 절망으로 귀결된다. 언론도 앞다투어 부도덕한 기업가, 무능하고 부패한 공무원,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받을 행동도 말도 하지못하는 정부에 대해 보도한다. 이젠 모두가 분노를 넘어 좌절을 느낀다.   

그러나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본질을 회피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 모두가 불신해도 '정부'든 '국가'든 우리의 삶의 일부이자 필요한 부분이다. '어떤 정부, 어떤 국가를 만들어야하느냐?'는 날선 비판과 '정치는 불필요하고 무용하다'는 자조섞인 푸념은 다른 것이다. 물론 무엇보다 일반 시민들의 상식에 훨씬 못미치는 재난방지시스템과 국정운영관행을 뜯어 고쳐야 할 것이다. 제대로된 백서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지난 재난들과는 달리, 매우 치밀하고 객관적인 동시에 사려깊고 엄밀한 보고서가 마련되고 이것이 모두에게 공개되어야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사건이 가능할 수 있었던 관행 속에 뿌리박은 편견과 오해도 바로잡아야할 것이다. 늘 그렇다고 생각하던 것, 늘 그러해야한다고 믿었던 것을 한번 분석하고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연일 뉴욕타임스와 파이낸셜타임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일간지들과 권위있는 서평지들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21세기의 자본론(Capital in the Twenty-First Century)>을 눈여겨볼 이유는 충분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이후 끊임없이 제기되는 '중산층의 몰락'과 '불평등의 심화'를 감정적으로 내뱉기보다, 시장의 실패를 단순히 '경기침체'나 '정책실패'로 치부함으로써 시장에 대한 편견을 되살리기보다, 매우 구체적이고 꼼꼼한 자료를 가지고 우리가 믿었던 시장 메커니즘이 어떻게 1% 미만의 사람들에게만 자본을 집중시켜왔는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부당함에 대한 분노에 편승한 무분별한 운동에 앞서, 그리고 불평등에 대한 감정적인 대처에 앞서,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바들을 다시 살펴봐야할 이유를 진지하게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2.
파리 경제대학 피케티 교수의 <21세기의 자본론>은 <Le capital au 21e siecle>이라는 제목으로  2013년 9월에 프랑스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의 학자적 능력은 '불평등'에 대해 고민하던 학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었기에, 영어로 번역되기 훨씬 전부터 경제학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피케티는 프랑스 사회과학 고등연구원(EHESS)에서 로제 게느리(Roger Guesnerie)의 지도하에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MIT에서 교편을 잡은 1993년 이후, 참으로 많은 연구 성과들을 주요 학술지에 게재해왔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버클리 소재)의 엠마누엘 사에즈(Emmanuel Saez)와 함께 내놓은 최상위 부유층의 소득에 대한 연구는 경제학계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왔던 터다. 그래서인지 그의 책은 일찌감치 영미학계에서도 주요한 화두로 회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뉴욕 타임스의 스티븐 어랜저(Steven Erlanger)가 "아담 스미스(그리고 칼 마르크스)에게 대적하다(Taking On Adam Smith(and Karl Marx))"라는 2014년 4월 19일자 기사에서 소개한 피케티와의 인터뷰는 프랑스 뿐만 아니라 영국과 미국이 그의 책에 주목하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첫째, 피케티의 불평등 이론은 '사적 소유'와 '시장'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의 도식은 피케티의 경제이론에서 발견할 수 없다. 그는 1960년대 유럽과 미국을 휩쓸었던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부모의 세대가 해석하는 '불평등'의 기원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의 붕괴, 걸프 전쟁, 금융 위기와 같은 1971년생이 경험한 시장과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본과 반자본의 대결이 아니라 지금까지 불평등을 용인해온 수많은 가정들이 실재 삶의 세계와 얼마나 동떨어져있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마치 바우만(Zigmunt Bauman)이 '왜 소수의 부가 우리 모두에게 혜택을 미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트리클 다운'(trickle down)과 같은 문제의 정치사회적 의미를 되짚어 보듯, 피케티는 오랜 시간동안 꼼꼼히 분석한 자료를 통해 '더 가진 사람은 더 가지게 되는' 현실에 도전한 것이다.  

둘째, 피케티의 경제이론은 숫자와 그래프에 매몰된 경제학을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자료를 통해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전환했다.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경제수학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논문들, 지극히 단순화된 도표를 통해 '성장'만을 전달하는 언론들, 그리고 경제학의 폐쇄성만 일깨워주는 모든 정보들이 "최상층의 임금 성장률은 경제 성장률의 여러 배가 되는 현실"을 전달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유에서 순수 경제이론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에 빠져있는 MIT를 떠났다는 그의 말에 박수를 치게 된다. 손쉽게 수학과 통계를 이용해서 업적을 늘리는 것이 편하긴 했지만, "소득과 부에 대한 역사적 자료를 모으는 조금의 진지한 노력도 없는" 연구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는 것, 그리고 폐쇄된 MIT 경제학과를 떠나 프랑스로 돌아가 누구나 읽기 쉬운 책을 통해 아담 스미스와 마르크스에게 도전장을 내민 용기에 큰 찬사를 보내게 된다.  

셋째, 피케티는 '불평등의 해결'이라는 이념적이고 추상적인 슬로건에 대해 사뭇 진지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그는 '능력'이나 '장점'이 초래하는 불평등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고, 모든 사람들이 평등해야한다는 혁명적 견해를 피력하지도 않는다. 대신 "내겐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 불평등이 문제되지 않는다(I have no problem with inequality as long as it is in the common interest)"고 말한다. 한편으로는 불평등이 개인의 독립과 부의 창출을 촉진하는 한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금과 다른 수단을 통해 한 사회가 더 나아질 수 있다면 불평등한 처우도 용납된다는 말이다. 즉 모두가 평등해야한다는 이상을 내세우거나, 누진세나 소득세의 불평등을 지적함으로써 시장의 방임을 주장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아마티아 센(Amartya Sen)이나 마사 너스바움(Martha Nussbaum)과 같은 자유주의자들과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와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가 말하는 '가능성의 평등'(the equality of capability), 즉 기회의 평등만이 아니라 '그러한 기회를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의 평등이 민주주의에서 왜 필요한가를 역사적 자료들을 통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3.    
전문가들도 피케티의 책을 불평등에 대한 오랜 편견들을 깨뜨려버릴 '혁명적'인 연구라고 주저없이 인정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프린스턴 대학의 크루그만(Paul Krugman)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New York Review of Books> 2014년 5월 8일자에 실린 글에서, 피케티의 연구가 가져다준 가장 큰 성과들 중의 하나가 '지금까지 불평등 연구에서 도외시한 '최상위층의 부'(the very rich)가 실재 우리가 겪고 있는 불평등에 매우 큰 이유들 중의 하나라는 점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울프(Martin Wolf)도 지금까지 근거없이 떠돌던 이야기들을 풍부한 데이터를 통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독자에게 부여해주었다는 점을 크게 칭찬한다. 즉 두 사람 모두, 입장은 다르지만,  세계화의 결과로 치부하던 불평등의 심화나 중산층의 붕괴를 피케티가 말하는 1%에 불과한 극소수에게 전체 소득의 거의 대부분이 집중된 것, 그리고 지금의 자본주의가 '가족세습적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으로의 회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의 충분한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소득'과 '분배'의 다이나믹스에 대한 피케티의 연구가 어떤 점에서 '21세기의 자본론'이라는 저자의 자신감을 뒷받침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피케티는 지금까지 우리가 분석해왔던 전혀 새로운 자료를 통해 불평등의 원인을 꼼꼼히 되짚는다. 바로 역사적으로 축적된 세금 통계(historical tax statistics)다. 물론 세금을 가지고 소득의 분배를 이야기하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소득의 분배를 최상위층의 소득과 연관시키고, 1차 대전 이전부터 지금까지 거의 1세기를 관통하는 데이터를 모아, 그것도 대부분의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세금관련 기록들을 모두 분석한 연구는 없었다. 가계 소득이 1950년 이전에는 통계 자료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면, 피케티의 연구가 오랜 기간동안 자본의 흐름과 불평등의 원인을 살펴보기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은 쉽게 동의하게 된다. 게다가 수작업으로 1%, 아니 0.1%까지, 최상위층이 전체 소득의 몇 퍼센트를 가졌는지를 살펴보고, 그들이 얼마의 세금을 냈는지에 대해 세밀히 분석한 후, 이것을 읽을 수 있는 숫자와 간단한 표를 통해 전달하는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다. 

둘째, 실증적 자료에 기초한 정치적이고 규범적인 요구는 대안없는 비판이 가져올 허무함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적 구상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피케티는 서문에서부터 '데이터 없는 토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낸다(2-3). 그러나 이 말은 규범적 토론에 대한 반감은 아니다. 실제 자본의 흐름과 무관한 추상과 가정에 기초한 토론은 민주적 심의를 진부한 이념적 대치로 몰아간다는 신중함의 발로다. 그래서 1970년대에는 상위 1% 최상위 소득층의 소득이 전체소득의 10% 미만에 그쳤지만 지금은 20%가 넘는 것이 초국가적 자본이동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심취한 국가가 시행한 '세금 감면'때문이었다는 급진적인 주장도 이념적 논쟁보다 진지한 관찰을 유발하고, '자본의 유동성'이 부유한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간극을 좁히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최근 사례가 보여주듯 '인적 자본(human capital)의 성장이 국가 사이의 불평등을 해소시킬 것이라는 그의 주장이 초국가적 기업의 익숙한 선전을 압도한다(40-71). 

4.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피케티의 책은 이미 정치적이고 규범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책의 말미에서 제시한, 소위 최상위층을 주된 대상으로 제시된 '급진적인 소득세'(progressive income tax)에 대한 논의는 이미 정당성과 실현성을 놓고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만약 그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정치학자는 불평등 심화의 최대 피해자가 민주주의 그 자체이기에 초국가적 자본을 추적해서 누진세를 적용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고, 윤리학자는 최상위층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재산세를 면제하면서 '최상위층'에게 보다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공정한지를 설명해야 하고, 사회학자는 조세든 공동부채든 특정 제도와 정책이 가져올 정치경제학적 결과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적 갈등과 이러한 갈등의 해소를 고민해야한다. 

그래서 몇 가지 주제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첫째, 세금과 노동의 상관관계다. 피케티가 주장하는 최상위 소득층에 세금을 더 부과하는 정책은 '세금 감면을 통해 가진 사람들의소비를 촉진함으로써 경제 성장을 도모한다.'는 일반적인 주장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게다가 세금이 많으면 탈세도 많아지고 생산성도 저하된다는 표준적인 경제 상식에 대한 거부다. 즉 1% 최상위층의 소득세 감면이 전체 경제성장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최상위층의 소득은 늘지만 나머지 99%의 삶은 오히려 더 피폐해진다는 전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역사적으로 사실로 증명된다면, 그리고 피케티가 주장하듯 99%가 기대했던 '생산'을 통한 전체소득의 성장이 아니라 1%가 향유하는 '임대' 등의 비생산적 소득이 폭발적으로 증가된다면, 잘못된 추론으로 99%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유발하는 불평등에 헌신한 꼴이 된다(493-514). 

문제는 이러한 데이터에 수긍하면서도 최상층에 대한 누진세에 선뜻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거대 자본의 가계적 세습이 일반화되고 있지만, 바우만의 말처럼 '활기차고 자신감에 가득찬 젊은이'와 '절망하고 미래가 없는 젊은이' 사이의 간극이 점점 커지지만, 시장에서의 개개인의 '자유'는 이른바 개개인의 선택에 있어 자율과 존엄을 가늠하는 주요한 잣대처럼 인지되어 있다. 어쩌면 피케티가 제시한 데이터를 가지고도, 모두가 공멸하는 무한경쟁이나 1%에게 부가 집중되는 것을 용인하는 선택을 할 사람이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즉 '결과적으로 이러하니까 당신의 자유를 규제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주장이 '규제가 없는 개개인의 선택'을 자유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각자의 '재능'과 '노력'이 빚어낸 불평등을 용인하면서도 최상위 1%에 대한 예외적 과세가 용인될 수 있는 정치사회적 판단근거는 무엇이냐는 것이다(377-429). 무분별한 '평준화'나 이상적인 '평등'에 대해 불만을 갖고있는 사람들에게도 '세습이 지금 최상층 부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불쾌하다. 그러나 '재능'이 아니라 '세습'이 최상층이 향유하는 현재적 부가 축적된 방식이라는 지적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다. 불평등의 심화를 막아야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모두가 더 가지고자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는 전제를 받아들이면서 모두가 잘 사는 방식을 모색해야한다는 당위는 역사적인 데이터를 통해 확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만약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욕망'을 제외할 의사가 없다면, 흥정과 계약 이상의 사회경제적인 상호관계의 틀을 형성하는 원칙을 제공해야한다는 것이다. '공동체'가 실패했다면, 다른 무엇을 찾아야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케티에 대한 비판은 '불평등'이 가져온 '생산성'의 증가, 그리고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논의로 확대되고 있다. 여기에 비하자면 오랜 논쟁의 하나지만 '운'이 초래한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법으로서 누진세가 갖는 타당성에 대한 논쟁은 역설적이지만 새롭다. 게다가 최근에는 지구화시대에 국가적 경계를 넘어 존재하는 초국가적 최상층에게 어떻게 소득에 비례하는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느냐는 현실적인 문제까지 논의의 주제로 등장했다. 그만큼 '흥정'과 '계약'을 넘어선 상호관계의 새로운 원칙과 근거가 '불평등은 나쁘다.'는 이야기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소수의 특권층이 향유하던 물질문명의 혜택을 엄청난 생산성으로 극빈층까지 향유할 수 있도록 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반박을 인문학적 상상력과 정치철학적 토론없이 어떻게 데이터만 가지고 극복할 것인가 말이다.

5. 
이런 모든 것들을 고려했을 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은 지금의 잘못된 가정과 그러한 가정에 기초한 잘못된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불평등의 심화가 가져올 정치사회적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진지한 고민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식을 출발점으로 해서, 근거없는 주장이 아니라 구체적인 데이터에 기초한 설득을 통해 우리의 익숙한 편견을 깨드려 버리려는 야심차고 뛰어난 연구 업적이다. 크루그먼 교수의 찬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불평등'뿐만 아니라 21세기 '자본'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길을 터준 역작이 될 것이다. 이러한 성취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기대는 단지 지금의 불평등에 대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만은 아닐 것이다. 

또 한 가지 언급해야할 것이 있다. 바로 영어 번역본의 경우 696쪽에 달하는 두꺼운 경제학 서적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발간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모두 판매되어, 이 책을 사려는 많은 사람들이 대기자 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려야하는 기이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물론 영어가 '만국 통용어'(lingua franca)처럼 되었기에 독자가 미국인만은 아니지않느냐며 대단치 않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스티븐 어랜저가 언급했듯이 지금 미국 사회에서 피케티의 책을 모르고는 대화가 어려운 지경이고, 얼마 전에 그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에는 마치 비틀즈에 열광하듯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사실은 독서시장의 규모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미 우리 나라에서도 많은 일간지들이 앞다투어 피케티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대중들이 신문 기사로 소개된 일부분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책을 직접 읽고 보다 심도있는 토론을 만들어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도 이러한 연구가 가능한 토양, 그리고 이러한 역작이 출판 시장의 일반적 경향을 깰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5, 2014년 5월, 곽준혁, 숭실대학교 가치와 윤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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