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의 쇄신은 가능한가?": <일그러진 한국 교회의 얼굴>, 박영돈 저, 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IVP, 2013)
1.
최근 한국사회의 종교단체와 관련해서 가장 눈에 뛰는 것 중의 하나는 '성찰과 반성'의 움직임이다. 불교는, 특히 조계종은 여러 불미스러운 일이 반복되자 '종단쇄신위원회'를 꾸려 근현대사의 질곡가운데 만들어진 여러 내부적 문제를 고쳐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기독교는, 특히 개신교를 중심으로 남다른 위기감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쇄신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목회자는 목회자들대로,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대형교회의 문제들을 해결해보자고 팔을 걷어부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현상적으로 드러난 사건들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종교 단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쇄신의 움직임이 어떻게 보일까? '위기'니 '회복'이니, 이런 단어들이 어색한 일반 사람들 눈에는 종교계 내부의 성찰이 어떤 점에서 반갑고, 어떤 점에서 여전히 불쾌할까?
박영돈 고신대 교수의 <일그러진 한국 교회의 얼굴>은 이런 질문의 대답을 '교회의 개혁'이라는 익숙한 단어에서 찾고 있다.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가 개혁의 대상이냐고 반문할 필요는 없다. 이때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불러서 모인 사람들'(ekklesia), 즉 기독교인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읽다보면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라는 말을 쓴 이유를 고민하게 된다. 무엇보다 '목회자' 또는 '설교가 행해지는 강단'이 개혁되어야한다는 저자의 주장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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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개신교의 정치사회적 의미는 한 마디로 '근대화의 기수'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속에 한국인이 신음할 때, 기독교는 '또 다른 따뜻한 근대화'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비록 19세기에 벌써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기독교가 조선 사회를 흔들어 놓았지만, 해방을 위한 우리 민족의 몸부림을 함께하면서 기독교가 우리의 삶 속에 더욱 뚜렷하게 각인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 공간에서 미국을 등에 입은 개신교도들의 활약, 급속한 근대화 과정 속에서 합리적 교육으로 무장했던 개신교인들의 지대했던 사회적 공헌 등, 개신교는 '한국의 근대화'와 함께 성장했다고 말하더라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개신교도 '성장주의'라는 패러다임에 빠져있는 한국 사회를 많이 닮아있다. 여전히 '무한한 성장'을 곧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타성과 '삶의 회복'을 말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교차하는 것이다. IMF이후 또 다시 확인된 '시장의 잔인함'이 여전히 '성장'에 대한 대다수의 집착을 가져오고,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양극화와 빈곤의 악순환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안적 패러다임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박영돈 교수가 '성장' 자체가 아니라 '성장주의'에 문제가 있다고 본 것은 곱씹어 볼만한 대목이다(11쪽). 사실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듯, '성장'에 대한 집착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더 크다.'는 평신도들의 유아적 심성도, 더 많은 사람들과 더 좋은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꿈꾸었던 목회자의 성공신화도,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런 '규모의 성장'에 대한 집착이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부합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많이 하면서도, 어떤 대안적 '성장' 패러다임이 있는지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3.
그래서 박영돈 교수가 "대형 교회 현상을 욕망의 역학으로만 푸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19쪽)라고 지적한 부분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인격적 교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비대한 대형 교회, 규모의 성장이 곧 '목회의 성공'이자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불러온 부패와 비리를 지나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대형 교회들이 최초에는 '외적 성장'이 아니라 '영적 성숙과 건강한 교회'를 지향했다는 점에 주목한다(21쪽). 교회의 성장이 가져다주는 명성에 굴복한 목회자(23쪽), 그리고 교인의 수가 가져다주는 사회적 영향력에 들떠버린 평신도(33쪽), 이들 모두가 '성장주의'에 매몰되는 과정이 있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아울러 '큰 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도 문제가 산적하다는 지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시원치 않은 설교뿐 아니라 목사의 볼썽사나운 인격과 삶이 자아내는 불협화음까지 감수해야하는 이중고"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작은 교회를 찾았다가 낭패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35쪽). '사이비'(2013)라는 만화영화가 고발하는 시대의 아픔이 시골의 어느 곳에서든 조그마한 도시의 개척교회든 있을 수 있다면,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면, 비단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짚어봐야할 사안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닮은 성장,' 박영돈 교수가 말하는 '거룩함'에 대해 궁금해졌다(38쪽).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까지 도구화된 설교,' '선동인지 설교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설교,'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서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성공의 비결을 가르치는 설교,' 이 모든 것을 대체할 성경적 교훈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4.
박영돈 교수는 자신의 목회에 기초해 몇 까지 '그리스도를 닮은 성장'에 대해 가늠할 수 있는 단초를 제시한다. 첫째, 그는 '목회자'의 갱신을 촉구한다(47-84쪽). 권위주의와 독단주의를 버리고, 성전건축에 몰입하는 그릇된 목표를 내려놓고, 영적인 공허함을 감추려는 종교적 위장술을 버릴 것을 주문한다. 목사가 세상보다 더 '맘몬'을 추구하면서 영적인 성장을 말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세태가 만든 '작은 교회 목사'들의 설움, 그래서 이를 악물고 성장만을 생각하게 만드는 교계 내부의 역학도 솔직하고 진솔하게 토론해야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큰 교회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결과주의도 배격한다. 교회의 비대화와 비인격적 집단화, 대형 교회의 교회답지 못한 모습에 모두가 눈떠야한다는 것이다.
둘째, 성경의 회복이다(82-118쪽). 아마도 기독교 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설교들을 한번이라도 수사학적 눈으로 본 사람이면 모두 느낄 대목들이 나열된다. '부의 축적이 곧 축복'이라는 메시지가 홈쇼핑의 호스트와 같은 어투로 반복되어 나오고, 성경구절 하나에 지식인지 정보인지 알듯한 이야기들이 여과없이 전달되며, 말씀묵상보다 전도폭발부터 가르치는 '기도 없는 말씀 사역'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온다. 박영돈 교수에게 이런 상황에서 '큰 교회만이 꼭 큰일은 한다.'는 말은 다분히 인간적인 발상이다(98쪽).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단순 구도 속에 축소시킨 메시지가 '예수 성공, 불신 실패'라는 논리로 귀결된 것일 뿐이다(112-113쪽).
셋째, 목사의 회개를 가져올 평신도들의 자각이다(121-206쪽). 특히 조금만 믿음 좋으면 목회자가되라고 부추기는 사람들, '신학 교육은 필수적이지만 그보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가 더 중요한 것'을 모르는 목회자 지망생들에 대한 비판은 눈여겨 볼만하다. "하늘의 소명과 비전이 없으니 이 땅의 물질과 명예나 탐하고, 설교의 은사가 없으니 때우기식으로 설교하며, 목회의 즐거움이 없으니 교단 정치에나 기웃거리며 감투나 좇는 정치꾼이 되는 것이다."(132쪽)는 지적은 '목사의 교주근성'(150-153쪽)에 대한 비판 만큼이나 아프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도 아픈 것이 '어리석은 교인들'(153-157쪽)에 대한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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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실명비판이 갖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1980년대 이래 한국 개신교를 이끌어온 목회자들의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한 것을 감사해야겠다. '착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족쇄를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만 뒤집어씌웠던 것, 그리고 '착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교회 내부의 비판에 침묵하는 나태함을 두둔하게 내버려두었던 일, 모든 것에 대한 기독교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박영돈 교수가 기존의 대형교회와는 교파가 달라서 자유롭게 비판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기독교라는 큰 테두리를 놓고 본다면, 모두가 아파했던 주제다. 그래서 박영돈 교수의 희생에 감사한다.
물론 아쉬운 점은 있다. '성장주의'를 대신할 대안적 패러다임을 기대했지만, '그리스도의 몸을 닮은 거룩함'이라는 일반론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 아울러 목회자와 목회자 후보생이 먼저 바뀌어야한다는 지적에 공감하면서도, '어리석은 교인'이 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상세히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다. 지금 많은 교회들이 '어리석은 교인'과 '어리석지 않으려는 교인'들 사이의 분쟁으로몸살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정죄'하고 '단죄'하며 교제는 커녕 화해도 불가능한 길을 걷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교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개혁의 몸부림에 대해 좀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목회자도 평신도도 원어로 성경을 읽는 시대다. 그렇지만 '성령의 운행하심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진리만큼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따라서 최근 교회마다 벌어지고 있는 분쟁들을 보면서, 겪어야할 진홍이라는 느낌과 함께, 교회도 '공개적 회개'만큼이나 '화해 프로그램'이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눈에 있는 들보를 빼고 보는 것'만큼이나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는 것이 좋은지 토론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운동'이 '말씀'에 앞선다면, 어디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함'을 회복하겠는가 말이다.
박영돈 교수는 '개독교라는 참담한 용어'가 일그러진 얼굴을 반영한다고 한다(250쪽). 어쩌면 '개독교'라는 사회적 비난에는 모두가 선생이 되고만 기독교에 대한 실망도 담겨있는 것은 아닌지. 기독교인들의 '선민의식'이'예수 성공'이라는 잘못된 교회관과 결합하듯,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열정과 욕망이 불러일으킨 '정죄'와 '배제'에 교회가 너무나 관대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해진 것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2, No.1, 2014년 1월, Scient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