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미술모임에서 거의 읽었던 책이었지만 최근에 다른 모임에서 이 책이 선정되어 다시 읽게 되었다. 못읽었던 마지막 챕터를 읽고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그림이 많아 금방 일독. 다시 읽으니 역시 처음 느낌과는 다르게 책 전체의 구도가 잘 그려졌다.
미술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것이 일반화된 것이 근대의 산물이며, 그런 근대성이 전제하는 미술의 보편성이야말로 상대적인 어떤 것이다, 라는 주장이다. 책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제목부터, 니체-푸코적 냄새가 물씬 풍긴다.
진리란(가령의 미술의 진정한 미술성) 그것이 위치하는 계보학적 지점에 의해 그 의미가 결정된다는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담론인 것이다. 책 제목부터가 푸코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를 패러디했다. 파이프가 그려진 그림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진 것까지 포함된 마그리트의 그림을, 푸코가 자신의 책 제목으로 재 인용한 것이지만 말이다.
파이프를 앞에 두고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책처럼 그림(미술품)을 앞에 두고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소쉬르가 그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주장하고, 현대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언어학적 전회’에 해당하는 내용의 반복이다.
언어라는 기표체계가 우리는 실재적 의미(기의 체계)를 대신하며 사물을 분명히 지시한다고 생각한다. '나무'라고 발음하면 우리는 식물이며 그 잎파리는 녹색인 숲을 이루는 그것을 연상한다. 그 '나무'라는 기표가, 식물이며 가지와 줄기와 이파리를 가진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소쉬르적 통찰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 기표와 기의의 연결에는 필연성이 없다.
우리는 기표를 통해 기의라는 실재 세계에 다가가지 못하며, 그 현실적 실재세계와 언어체계로서의 기표체계는 연결되어있지 않는 각각의 따로 떨어진 섬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기표('파이프'혹은 '미술')는 기의(실재적 파이프 혹은 미술)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서로 맞닿을수 없기 때문이며, 우리가 말하고 지칭하는 것은 단지 기표 체계 속의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는 책 제목은 '미술'이라는 기표가 갖는 (기표체계속의) 불안정함에 대한 강조이며, 오직 미술의 의미는 그 실재성(기의)이 아니라 역사적 상대성 속에만 그 의미 획득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책의 논조는 다분히 탈근대주의 철학 담론의 전형적인 니체적 '관점주의'와 페미니즘적인 냄새를 풍긴다. '보편적인 미술'은 없으며, 있었다면 그것은 단지 서구 중산층 백인 남성의 담론일 뿐이라는 식의 주장이다.
이런 문화연구자들 특유의 상대론적 주장을 처음 들으면 매우 신선하다. 뭔가 그동안 알고 있던 전형적인 통념을 깨면서 그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우리에게 폭로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2000년에서 벌써 훌쩍 시간이 지났고, (사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겠지만) 이런 식의 연구방법론을 자꾸 재탕해서 듣다 보면, 상당한 불편감을 느끼게된다. 수없이 재탕해서 울궈먹는 상대주의적 문화연구론자들의 담론은 근본적 한계를 결국 드러낸다.
그들은 진리가 맥락 속에서만(주체가 갖고있는 이해지평의 층위) 드러나는 것이라는 주장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진리를 상대주의적 역사주의적 해석으로만 의미를 국한해버리는 효과를 낳는다.
그런 방식은 '과연 그것은 실재로 어떠한가'라는 주관적 의미 이해 맥락을 떠난, (주관과 무관한) 실재적 객관적 현실 인식에 무관심하다. 그런 객관적 실재성에 대한 무관심(앎의 부재)은 미적 해석의 보편주의를 거부하는 위치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책에서도 칸트의 '공통 감각'을 비판하는 것이고, 아마도 저자는 윌슨의 <통섭>에 나오는 bioesthetics(생물미학)도 강력하게 거부할 것이다. 왜냐면 미학이나 미술의 가능 조건을 단지 역사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것으로만 환원할 경우, 거기서는 어떤 보편적인 미학이나 미술의 가능성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여러 미덕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전제하는 방법론의 한계 때문에 이것은 반쪽짜리 책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상대주의적 미적 이론을 전제하는 담론들의 후유증은 특히 현대미술에서 미적 보편성을 상실한 상황에서 (현재의 미술시장에서) 어떤 참혹한 것들이 이루어지는가를 본다면 더 명백해질 것이다. (참고; 피로시카 도시 <이 그림은 왜 비쌀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