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에딘버그 대학의 출판부에서 매우 의미있는 책을 출간했다. 벌써 1년 전이다. 제목은 The Edinburgh Companion to Political Realism이다. 말 그대로 '정치적 현실주의'와 관련된 동서양 정치사상사의 거의 대부분의 주요 저술과 사상가를 망라했다. 첫 번째 파트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기존의 이해에 대한 대안적 생각들이 실렸고, 두번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기술한 투키디데스와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찬드라굽타를 도운 카우틸랴로부터 시작해서 레이몽 아롱을 비롯한 정치적 현실주의와 관련된 근현대 정치사상가를 다룬다. 세번째는 비교정치사상사적 관점에서 동서양의 차이를 다룬다. 정치적 현실주의와 관련된 다양한 접근과 이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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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첫 번째 파트에서 다루어진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대안적 생각들은 다소 진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작은 좋다. 언론과 대중매체에서 언급되는 '정치적 현실주의'가 권력에 대한 기괴한 상상력을 요구할 때, 그리고 학술서적과 논문에서조차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정치적 현실주의'를 '이상주의' 또는 '몰도덕주의'와 대립되는 것으로 단순화시키려는 견해에 대한 비판은 매우 시기적절하고 의미있는 출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현실주의'도 '도덕적' 잣대가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 이상을 설명 또는 관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정도의 설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이것이 '정치적 현실'이라는 주장 속에는 당연히 어떤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전제가 깔려있고, 그러한 전제에서 '정치적 현실주의'는 설득하고자하는 어떤 주장이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적 현실주의'를 표방한 서술 또는 언술은 반드시 어떤 입장을 수용한 화자 또는 저자의 견해가 '정치적 판단'이라는 이름으로 제시되고, 동일한 이유에서 그 저자 도는 화자는 자신의 견해가 수용 또는 반대되는 정치적 토론장의 존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최근 마키아벨리의 '도덕'에 대해 많은 저술들을 출간하고 있는 Erica Benner도 중국인의 입맛에 맞는 사해동포주의를 주장하는 자오팅양(赵汀阳)의 글도 원론적인 견해만을 내어놓는 것 같아 아쉽다. 정치적 현실주의가 기회주의와 어떻게 다른지, 정치적 현실주의가 심리학이나 통계적 방법에 의지한 과학적 분석기법으로 전환될 수 있는지, 정치적 현실주의가 인간본성을 앞세운 정초주의로 단순화되는 위험은 없는지, 중요한 질문 어느 것 하나 답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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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두 번째 파트는 주의깊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정치사상사에서 '유토피아' 또는 '이상주의'가 갖는 의미가 고대와 근대에 어떻게 다르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는 데에 유용하다. 고대 정치철학자들의 서술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신중함'을 이야기할 때 왜 신중함의 내용은 경험에서 나올 수 있지만 신중함이 기초해야할 판단의 기준은 철학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는지를 되새길 수 있다. 또한 왜 마키아벨리와 홉스가 신중함의 기초를 철학이 아닌 역사에서 찾고자 했는지도 다시금 성찰할 수 있다. 동시에 동서양의 '신중함' 또는 '실천적 지식'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다른 지에 대한 보다 성숙한 독서도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에게 추천할만한 책이다. 정치적 현실주의가 '숨겨진 통치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정치 권력'의 변화무쌍한 흐름을 바라볼 수 있는 천재적 기민함으로 치부되는 현실, 그리고 정치적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사상적 결과 정치적 주장이 다른 동서양의 정치철학자들을 비교 또는 동일시하려는 일반적 경향을 고려한다면, 이 책은 정치적 현실주의에 대한 하나의 의미있는 출발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