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0년대에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사회문제에 관심깨나 가졌던 사람치고, 브루스 커밍스(1943~)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흔히 “6․25사변”이라고 불리는 한국전쟁의 역사를 미세하게 다룬,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한국전쟁의 기원들)}(프린스턴대학 출판부, 1981)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한국전쟁이 “1950년 새벽 4시에 북한이 기습적으로 38도선 전역에서 불법남침하여 일어난 전쟁”이라고 보는 한국(남한)의 공식적 교육내용과 상반되는 주장, 즉 전쟁이 “1945년 이후 미군정 시기부터 표면화된 내전적 상황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펴서 유명해졌고, 덕분에 그는 미국인으로서는 흔치 않게 “빨갱이”의 낙인이 찍히는 영예(?)를 누렸다. 92학번인 나 또한, 선배들이 읽던 일월서각판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번역은 1981년에 나온 원서의 1권을 1986년에 번역한 것인데, 그 내용이 가져올 후폭풍을 감안한다면 번역, 출간 자체가 매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불행히도 이 책은 저자의 판권을 얻지 못한 이른바 불법 번역이었던 듯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라는 책은 1990년에 2권이 나왔다. 1권은 1945년부터 47년까지, 2권은 1947년부터 전쟁 직전인 1950년까지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전쟁책임을 논하는 자극적인 물음(물론 커밍스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잘못되었다고 본다), 즉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과 관련해서는 2권이 더 흥미롭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2권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지 않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원서의 분량이 1000페이지에 육박할 정도로 방대하다는 사실을 지적해 둔다. 그밖에도,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그의 서술 주제가 “한국전쟁”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을 다루는 방식이나 제시하는 자료가 한국인들에게는 너무나 낯설고, 자료의 취급방법 역시 놀라울 정도로 이질적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커밍스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영어를 잘하지 못하는 한국인은 제 책 2권을 읽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읽은 사람도 제가 주장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미국이 1947년부터 1950~51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바를 풀어내는 저의 방법론과 내용입니다. 2권은 미국이 한국 내의 혁명적 분위기를 장악하고 북한을 저지하려 하는 상황을 담았던 1권과는 다릅니다. 대부분의 한국 지식인들이 엉터리 번역일망정 1권은 읽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2권은 전세계적 흐름과 미국의 역사 속에서 한국전쟁을 파악한 것입니다(신동준, <대담 브루스 커킹스와 해리 하루투니안: 미국 아시아학의 비판적 검토>, 158~159면)
커밍스를 친한파 내지 거의 좌파(左派)에 가까운 인물로 상상하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다소 당혹스러울 수도 있으리라. 커밍스 역시 한국인들과는 다른 “순정한 미국인”이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인터뷰 장면을 보며, 몇 년 전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본 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세기의 공중전”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물 중 하나였는데, 1950~53년 사이에 벌어진 미국과 소련의 전투기 개발과 공중전 내용을 소개한 것이었다. 군사전문가가 아닌 까닭에 자세한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소련군이 마련한 비장의 무기였던 미그기의 성능이나 그에 맞서는 미군 전투기의 멋진 외관이 아니라, 전투가 벌어지는 지점들이었다. 공중전은 신의주 상공, 원산 상공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한반도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 최초로 마하를 넘나드는 속도를 자랑하던 최첨단 공중무기들이 실험되던 곳이, 뉴욕이나 모스크바와 같은 이역(異域)의 이름이 아니라, 신의주와 원산 같은 친근한 땅이름 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한동안 충격을 받았다. 커밍스의 학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넓은 의미에서 좌파로 분류될 수도 있겠고, 최소한 좌파에 동정적인 학자이지만, 부정할 수 없는 “미국이라는 제국의 일원”인 것이다. 그의 작업 내용은 어느 면에서 보나 한국학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그가 참조한 자료의 출처는 거의 전적으로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낯설음이야말로, 우리가 한국전쟁을 이해하고, 나아가 20세기 이후 한국을 이해하는 데 긴요한, 어떤 소중한 시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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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미 앞에서 또다른 미국인 한국학자 제임스 팔레(1934~2006) 교수에 대해 자세히 살펴본 바 있지만, 한국의 현실문제에 개입한 정도라는 면에서, 브루스 커밍스의 중요성은 팔레를 훨씬 능가한다. 이 글에서도 “학자로서 브루스 커밍스”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 그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정리해 두고 시작하려고 한다. 자료의 출처는 거의 전적으로 위에 인용한 신동준(현재 케임브리지대학 교수) 의 인터뷰에 의한다.
1943년 뉴욕 생. 이후 오하이오로 이주. 그의 부모는 모두 명문 시카고 대학 출신이었으나 속물적이었고,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었음.
1965년 오하이오의 데니슨 대학 졸업(심리학 전공). 본래 야구특기생으로 입학했으나 3학년 이후 빅리그 진출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공부로 전향한 것임. 그는 여름방학에는 클리블랜드의 제철소에서 노동자로 근무하며 학비를 벌었으며, 허영심에 찬 부모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고백함.
1965년 인디애나대학 석사과정 입학(동아시아학 전공). 중국과 한국에 관심을 가졌으나, 일본에는 이상하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일본어를 공부하지도 않았음. 이 무렵 미국은 베트남 전쟁 중이었고, 커밍스는 대학생 입영정책에 따라 징집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 커밍스는 인디애나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친한 어느 교수의 국제 공산주의 운동 관련 강의를 듣고, 반전(反戰) 사상을 갖게 됨.
1967~68년 징집을 피하고 동아시아를 실제로 체험하고자 평화봉사단(Peace Corps)에 지원해 한국에 옴. 중학교에서 영어 등을 가르치며, “재한 미국인들의 한국인 멸시 태도”와 “한국인들의 과도하게 친절한 미국인 대접”을 동시에 경험했고, 큰 대조를 느낌.
1968년 콜럼비아대학 박사과정에 진학(동아시아학 전공). 하버드 박사과정에도 응시했으나 낙방. 당시 하버드의 면접관은 한국사 연구의 개척자 에드워드 와그너였는데, 한자를 모른다고 대답한 커밍스에게 면박을 주었음. 콜럼비아대학에서 한국어를 강의하던 제임스 팔레를 처음 만남. 팔레는 이후 커밍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됨.
1975년 한국의 미군정기(1945~48) 연구로 콜럼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그는 이 논문과 이후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쓰기 위해 1972년부터 약 5년간 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살다시피 함. 이후 팔레가 그를 워싱턴대학(시애틀 소재)으로 이끌어 10년간 근무했고, 나중에는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음. 워싱턴대학 근무 시절 팔레와 그는 시애틀의 보수적인 재미교포들로부터 “빨갱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함.
1981년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권 간행.
1986년 위 책의 한국어 번역본 {한국전쟁의 기원}(일월서각) 간행.
1990년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권 간행.
1997년 『Korea's Place in the Sun』 간행.
2003년 위 책의 한국어 번역본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창비) 간행.
2014년 현재 시카고대학 석좌교수.
자질구레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자세하게 그의 생애를 살핀 것은, 그의 사람됨과 성향, 나아가 미국의 분위기를 상세하게 알아보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었다. 읽어본 사람은 대부분 동의하겠지만, 그의 이력에는 놀랍다 해야 할지 당혹스럽다 해야 할지, 충격을 주는 몇 가지 지점들이 있다. 우선 첫째, 그가 대학교 저학년 때까지 공부와는 거의 담을 쌓은 야구선수, 말하자면 전형적인 “양키”였다는 사실이다. 나 또한 그의 개인사를 전혀 모르고 오직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라는 점만 알고 있었던 시절에는, 그를 어떤 연구실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양심적인(?) 미국 지식인” 정도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세밀히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의 글에서는 유쾌함과 짓궂음, 그리고 신랄한 조롱이 쉽게 발견된다. 그에게 반골기질이 있긴 하나, 유쾌한 성격의 양키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둘째,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그의 가정환경에 대한 고백이다. 그의 부모는 (물론 커밍스 본인이 보기에) 주류사회에 진입하는 데 실패한 속물로 여겨졌고, 아들인 자기에게 그러한 삶의 틀을 강요하려고 했다. 물론 반항적 기질의 소년 커밍스는 이를 거부했고, 일찌감치 아르바이트로 중노동을 하며(제철소 근무) 학비를 벌었다. 한국에서야 이런 일이 흔치 않지만, 저명한 영미인들 가운데는, 이와 비슷한 가정환경에 놓여 집안을 뛰쳐나간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일랜드 출신의 위대한 극작가 버나드 쇼(1856~1950)도 그랬다. 쇼의 부모 역시 극빈층이었음에도 귀족 행세를 했고, 그는 구역질을 참으며 문학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했다. 그리고 그 또한, 커밍스와 비슷하게, “온건한 좌파의 길”을 갔다. 인디애나 시절 중국인 교수의 집에 초대를 받고 찾아가 “불우한 집안 출신으로서 행복한 집안을 엿보는 것의 즐거움”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커밍스의 모습에서, 미국인 특유의 낙천성과 함께, 그가 받은 소년기의 정신적 아픔을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셋째, 그가 학문을 하기로 결심한 시기가 꽤 늦었으며, 학문을 하기 전에는 “이 사람이 과연 공부에 적성이 있을까?” 혹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한국전쟁사에 관한 최고의 학자가 되고, 미국 한국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평가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와 같은 질문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공부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는 첫 번째 사항과 관련이 깊다) 여기서 커밍스의 다음과 같은 짖궂은 “자학적 유머”가 빛을 발한다: “저는 주변적인 길을 왔습니다. 야구선수로서 생명이 끝났을 때 아시아학을 시작했기 때문에, 게처럼 옆으로 기어들어와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웃음).” 실제로 커밍스는, 사람들이 학자한테서 기대 또는 예상하기 마련인 어떤 가벼운 위선이나 점잖음, 아는 체함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극단적으로 솔직한 것이다. 한자를 몰라 하버드의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에게 면박을 듣고 입시에서 떨어졌다든지, 시카고 대학으로 이직하기 전까지 푸코, 데리다, 리오타르, 심지어 니체의 책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데서는(신동준, 151면), 그의 솔직함에 경탄을 넘어 존경(?)의 마음마저 갖게 된다.
물론 이는, 그가 학계의 꽁생원이 아니라, 누차 지적한 대로 “전형적인 양키”임을 보여주는 증거다. 그는 학문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점잖을 필요는 없고, 자기 전공분야가 아닌 데서까지 박학(博學)을 과시하거나 무지를 감출 필요는 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분명히 그의 이러한 태도는, 한국학계에서라면 시쳇말로 “튀는 면”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의 재능을 아껴 워싱턴 대학으로 불러들인 제임스 팔레 교수만 하더라도, “한국사를 하려면 한국어, 한문은 물론, 일본어도 해야 한다”며 학자적 잔소리(?)를 늘어놓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기질은 더욱 두드러진다(참고로 팔레는 유대계이다). 이런 사람을 “세계적 석학”으로 만들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미국 시스템의 힘”이 아닐까 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물론 이것은 시스템에 한정된 말이지, 커밍스 개인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그의 삶은 반골이었고, 미국 펜타곤(국방부)와 국무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혁명운동” 변수를 이해할 능력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자랑스럽게 말한다. “애치슨(한국전쟁 당시 미 국무장관)은 민족주의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혁명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다. 김일성이나 호치민(베트남의 공산주의 지도자) 같은 인물이 역사의 능동적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pp.414~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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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브루스 커밍스의 새로운 면모가 어느 정도 이해되었을 것이고, 성급한 이라면 “커밍스에 해당하는 한국인”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다소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미국의 386세대(1990년대에 30대를 겪고, 80년대 학번이며, 196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 세대를 일컬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요직을 지낸 경우가 많음)” 쯤 될 것이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1956~1975)이라는 진흙탕에 휘말려 헤어나지 못할 때 젊은 시절을 보낸 이른바 반전운동 세대로서, 미국 역사상 대학가(大學街)가 가장 심하게 좌경(左傾)에 빠졌던 시절의 인물인 셈이다. 그는 자신의 한국전쟁 연구가 좌우의 대립 속에서 해석되는 것에 극도로 혐오스런 반응을 보이지만, 그가 한국 내외에서 이른바 “보수 우파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수많은 한국인들 가운데 한국 진보운동(반대하는 쪽에서는 “좌파”라고 불린다)의 대부(代父) 격인 백낙청 교수(전 서울대 영문과)하고만 두 차례 대담을 했다(1991년, 2008년). 커밍스가 느낄지 모를 억울함(?)을 별도로 친다면, 그를 이른바 “미국의 좌파 지식인”으로 간주하는 데 이유가 없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열심히 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좌파 지식인”으로 되어버린 커밍스를 그러한 낙인 속에 묶어두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한국에서 “좌파”라는 말이 본래 공격을 위한 딱지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언어를 연구하는 내가 보기에, 오늘날은 하도 그 말이 남용되어, 서구와 같이 “일종의 급진적 사회세력”을 뜻하는 중립적인 어감을 어느 정도 획득해 가는 것 같다. 이제 비난과 공격을 위해서는 “친북좌파, 종북좌파” 쯤은 돼야 확실한 효과를 볼 수 있는 상황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커밍스를 좌파라 부르든 말든, 거기에 비난의 어감을 담든 말든, 그것은 자유다. 이 글에서 내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가 “미국 좌파 학계의 두목”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고, 한국전쟁에 대해 물의(?)를 빚은 견해를 보여주어서도 아니다. 나는 그가 학자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연구 내용이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 한국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현실적 중요성은 제임스 팔레의 업적을 훨씬 훨씬 능가하는데, 이는 팔레의 주 연구대상이었던 대원군(1820~1898)은 죽은 지가 100년도 넘은 반면, 커밍스의 연구대상인 한국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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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둘러 말하고 싶지 않다. 커밍스는 “일부 측면에서” 친좌파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학자이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는 결코 좌파일 수 없다. 그는 좌파이기 이전에 미국의 극동정책을 세계체제의 관점에서 세밀하게 본 미국인일 뿐이다. 내 생각에, 미국에 진보주의자는 있어도, 좌파는 없다(혹은 없어졌다). 커밍스는 역사학자 내지 지역학자로서, 그의 독특한 점이라면, 동아시아의 좌파 내지 공산주의 운동을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행동 주체로 인정한다는 것뿐이다(이것이 그를 좌파로 낙인찍는 유일한 근거다). 미국은 물질문명의 폭포 속에서, 사실상 공산주의가 말라죽은 사회다. 커밍스는 한국현대사를 연구하는 자신의 특수한 상황에 대해, “나의 미국적 시각은 일종의 부정적 조건으로서 한국인들에게 충격을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 일하고 나를 순정한 미국인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차라리 축복일 수도 있다. 물자체(物自體, 칸트철학의 개념으로 경험세계를 넘어선 보편적이고 불변하는 진리)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비교와 유추, 은유를 통해서밖에 알아낼 수가 없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21면. 이하 {현대사}로 약칭)”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는 학자적 양심을 매우 강조한다. 그가 한국전쟁을 수정주의적으로 해석하고(수정주의적 해석이란 대부분의 경우 남침 부정론 내지 이승만이 북침했다는 주장을 가리킴), 미국과 남한을 북한에 비해 훨씬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은, 일부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가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을 출간한 후 시카고를 찾은 백낙청 교수와 인터뷰에서,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주장이 아닌 자료”를 제시하여 설득하려 했으며,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이 1천 페이지 정도로 두꺼워진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1991년 인터뷰). 그의 주장에 따르면, 1947년 1월에 미 국무장관 조지 마셜은 향후 동아시아의 운명을 방향짓는 중요한 결정을 했다. 핵심은 “한국에 분단정부를 수립하고 일본경제와 연결하라”는 것으로서, 일본을 세계경제 속에서 중요한 지역생산자로, 이전의 식민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재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38선에서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일본을 부흥시켜 장기적으로 방어의 부담을 떠맡기는 구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게 제가 사료를 통해서 본 것이었고, 그것을 기술하지 않는다면 부정직한 일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신동준, 위의 글, 158면).”
한국의 분단정부 수립 구상은 전후 일본의 처리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2차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1~45년 동안에는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의 천황제 군국주의에 맞서 일시적으로 연합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1945년 4월에는 독일을, 8월에는 일본을 각각 패망시켰지만, 이들 패전국의 처리 문제는 새로운 골칫거리가 되었다. 독일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었지만, 일본은 철저히 미국에게 점령됐다. 일본을 영구히 무장해제한다는 데에는 미국인 모두의 뜻이 일치했으나, 일본의 산업기반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이참에 일본을 철두철미한 농업국가 수준으로 약화시켜야 한다는 한쪽 극단의 주장에서부터, 소련의 영향력으로부터 극동을 방어하기 위한 방파제로 삼기 위해 어느 정도의 국력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다른 쪽 극단의 주장까지가 있었고, 미국은 1946년까지 분명하게 확정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짐작컨대 일본을 재건하여 그들에게 경제적 잠재력을 준다는 것은, 미․일 전쟁의 참혹한 기억(진주만 공습, 오키나와 등지에서 일본군의 야만적이고 격렬한 저항, 카미카제 공격 등)이 생생히 남아 있던 당시의 상황에서, 제아무리 실용주의적인 미국인들이라 할지라도, 매우 부담스럽고 걱정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1947년 조지 마셜의 선택은 어려운 결단이었겠지만, 이는 동시에, 미국의 수뇌부가 “공산주의의 현재적 위협”을 “일본인들의 잠재적 위협”보다 중시하는 쪽으로 확실하게 방향을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미 제압된 적”이며, 소련의 공산주의는 “아직 제압되지 않은 살아있는 적”이니 그럴 만도 했다. 중국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으니, 미국이 믿었던 국민당의 장개석이 공산주의자인 모택동에게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알고 있듯, 1949년 미국으로서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 즉 대만을 제외한 “중국대륙 전체의 공산화(共産化)”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무능한 장개석이 공산주의를 방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공산주의의 방파제”로서 일본의 중요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2015년 현재,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한없이 친근해져만 가는 미-일 관계”를 불편하게 바라보고 있을 터이나, 공산주의 중국이 남아있는 한, 미국의 일본 재무장에 대한 묵인은 계속될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일본 땅에 수만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자기들이 자위대(최악의 경우 부활한 일본군)를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는 만큼, 문제될 게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관점에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분명하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더 이상의 공산주의 확산이 일어나는 것을 저지해야 했던 것이다. 1949년 미 극동정책의 촉수는, 단지 한반도뿐만이 아니라, 장개석과 국민당 세력의 도피처가 된 대만에도 향해져 있었다. 국방예산이 한정되어 있는 미국은 전선의 확대를 원치 않았고, 미국 내의 장개석 지원파는 “미국이 한국(남한)을 지원하지 말고 대만을 지원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로비를 벌였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p.426). 한편 남한과 북한은 1949년 내내 38선 부근 특히 개성 일대에서, 결코 국지적이라 할 수 없는 규모의 군사충돌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충돌이 1950년에 재연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고,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다. 애치슨은 1950년 1월 프레스 센터 연설에서 한반도와 대만이 미국의 극동“방위”선 밖에 있다는 말을 했는데, 이는 김일성에게 “미국이 남한을 포기했다”고 오판하게 하여, 6월의 남침(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식으로 흔히 해석되고 있다(특히 한국과 미국의 우파를 자처하는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한다). 그러나 커밍스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방위”는 북한의 위협만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닌, 그보다 훨씬 복잡한 어떤 것이었다. “애치슨의 방위는 북한, 남한(당시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치며 미국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었고, 남한 군부의 북한에 대한 국지적 도발을 금지시키지 않았음), 대만, 미국 내 친(親)국민당파(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중화민국 버전으로, 미국의 힘을 빌려 대륙을 탈환하자고 주장하는 장개석 지지파) 모두를 상대로 하는” 고도로 복잡한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공산주의 방어를 해야 했으나 돈이 모자랐고, 자기편이 된 일본을 장기적으로 “방위 분담자”로 키우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꿈은, 65년이 지난 2015년 현재, 극적으로 실현되어 가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분석하는 역량은 “미국인 학자의 냉철한 눈”이며, 결코 “좌파”와 같은 정치적 이해집단의 것일 수 없다.
한국의 진보진영 내지 좌파 집단은, 한국전쟁의 원인으로서 이승만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거론한다. 1945년 귀국하자마자 남한 단독정부론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뭉쳐라”고 지시한 뒤, 그들이 거부하자 잔인하게 탄압했고,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밀어붙였으며, 이로써 뻔히 보이는 남북 분단을 사실상 방치했고, 혈기왕성한 김일성의 무력통일 욕망에 불을 질렀다는 것이다. (이승만과 김일성의 나이 차이를 고려할 때, 한국전쟁에는 분명 세대갈등의 측면도 있었다고 본다) 이승만보다 훨씬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던 김규식 선생은, 단독정부를 밀어붙이는 이승만에게 “권력욕에 따라 움직이지 말고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하라”고 만류했지만, 이승만이 “심판은 나중에 받겠다”며 굴하지 않고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러나, 브루스 커밍스의 글을 읽다 보면, 서북청년단이니 국립경찰이니 이승만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종속변수일 뿐, 누가 뭐래도 남한에는 결국 단독정부가 들어설 수밖에 없었겠다는 좌절감 내지 무력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한국 땅 위에서 벌어지는 “세기의 공중전”을 감상할 때 느끼는 착잡함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일개 한국인에 불과한 내가 커밍스의 글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유일한 위화감이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커밍스의 책임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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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이념적 성향을 규정하려 한다면, 그러한 “규정하려는 욕망”이나 “규정의 내용” 안에, 이미 “규정하는 자의 이념적 성향”이 묻어나게 마련이다. 나는 위에서 커밍스가 좌파일 가능성을 부정했지만, 이러한 부정 자체가 “커밍스는 빨갱이”라는 비난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누군가(짐작컨대 보수우파)가 지적한다면, 나는 거기에 대해 애써 부정하지는 않겠다. 커밍스는 책으로밖에 만난 바 없으나, 나에게 큰 가르침을 준 거대한 스승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가르쳐 준 것은 “한국전쟁을 일으킨 것은 미 군부 강경파들이다”는 식의, 선동적이고 저열한 음모론이 아니다. 나는 그로부터 세계체제 전반을 시야에 넣은 미국인의 관점, 한국에서 구할 수 없는 방대한 미국측 공문서 자료의 존재, 자기가 믿는 진리 앞에 정직하려는 자세, 그리고 심각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심각하지만은 않은, 한국인에 대한 따뜻한 배려의 태도를 배웠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의 태도를 “있는 자의 여유”라고 삐딱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강자가 약자의 처지를 배려하는 것은 아니므로, 커밍스에 대한 평가에 인색할 필요는 없다. 이러한 약자 배려가 이른바 좌파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커밍스에게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앞에서 우리는 이미 “애치슨은 혁명을 모르지만, 나는 안다”는 커밍스의 자부심을 이미 확인했기에 더욱 그렇다.
한국전쟁 책임론이라는 해묵은 주제로 돌아가 보자. <현대사>에서 커밍스는, 이른바 “친북좌파들”에게는 실망스럽겠지만, 비교적 단호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김일성의 책임을 적시했다: “김일성은 한국의 내전적 갈등을 전면전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의도되었건 의도되지 않았던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결과를 낳은 데 대해 중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다(368면).” 이 때문에 남한의 어떤 외교관은 그에게 “당신이 이제 생각을 바꾼 것을 이해합니다. 이제는 남한이 전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지요”라고 말했다고 한다(위의 책, 8면). 그러나 커밍스는 자신이 견해를 바꾼 적도 없고,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커밍스와 그를 싫어하는 한국인들 사이의 이러한 의사소통 실패는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나는 커밍스의 위 언급 자체에 정답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를 자처하는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은, 위에서 언급한 커밍스의 김일성 책임 언급을 “한국전쟁 유발과 그로 인한 참혹한 결과 전체의 책임을 김일성에게 돌리는 것”으로 오독한 것이다. 심각한 난독증(글을 읽지 못하는 증세)인 셈인데, 사실 커밍스가 언급한 김일성의 책임은 “내전 상태에서 전면전을 일으켜 참혹한 결과의 본의 아닌 원인을 제공한 것”에 한정된다(강조점을 참조하라). 난독증 환자들은 “내전 상태에서”와 “본의 아닌”이라는 김일성 책임론의 단서조항을 읽지 못한다. 아니, 읽고도 못 본 척 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는, 모든 병에는 이유가 있다는 믿음에 따라, 이러한 난독증의 원인을 진단해 볼 수 있다. 첫째, 브루스 커밍스는 김일성을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미워하는 만큼 그렇게 미워하지 않는데, 난독증 환자들은 그에게 “북한을 미워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겠지만 누구를 미워하라 마라는 누가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알 카에다나 오사마 빈 라덴을 미워하는 정도로 김일성 일가와 북한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북한의 핵 위협을 성가셔하긴 하지만, 대다수의 미국 시민들은, 북한이라는 나라의 존재와 그 특성에 별 관심이 없다. 알 카에다와 달리, 북한은 미국에게 “현실적 위협”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로 인해 상황이 조금 달라지긴 했으나, “미 제국주의자들을 박살내 버리겠다”는 북한 방송의 협박에 실제로 위협을 느끼는 미국인은 없다. 우리는 이미 호치민과 김일성에 대해 커밍스가 “제3세계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능동적인 변수”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미국인의 평가 치고는 매우 이례적으로 높고 후한 평가이며, 지하에 있는 김일성을 흐뭇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매우 객관적이고 냉정한, 철저한 “방관자적 평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내가 그를 좌파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커밍스는 공산주의의 이상을 신봉하고 실천하는 혁명가가 아니며, 사료와 문헌을 전달하는 역사학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공정하게 평가하려면, 역사학자 앞에, “압도적으로 설득력 있는 시야를 지닌” 이란 수식어를 붙여야 하겠지만.
난독증의 둘째 원인은, 한국인들 자신이 냉전 체제의 굴레에서 풀려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커밍스는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이 굴레를 묘사한다: “북한에서는 이승만에 대해서, 남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해서 좋은 말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다가는 바로 감옥에 가게 되었다.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하는 질문에는 비무장지대 어느 쪽에 살고 있느냐에 따라 한가지 정답밖에 없다(<현대사>, 199면)” 이러한 언급에서, 남북 양측의 편협함을 힐난하는 그의 통렬한 조소(嘲笑)를 읽어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아마 커밍스는 자기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그 한국인 외교관에 대해서도 똑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커밍스의 독창적인 점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나는 앞에서 김일성에 대한 그의 평가에 대해 “방관자적”이라는 논평했는데, 솔직히 그에게 조금 미안한 감도 있다. 한국인을 아내로 둔 그가, 한국이 철저하게 방관자적 존재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 또한 그의 글 곳곳에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연구하는 지역의 사람들을 가르치려 드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어찌 보면 객관적 역사학자답지 않은, 다음과 같은 언급이 그다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언젠가는 남북의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마침내 그랬듯이 내전은 혼자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지혜를 깨닫고 화해할 것이다. 미국인들이 그렇게 하는 데 1세기 가량이 걸렸다. 그러므로 5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의 화해가 여전히 미결정 상태인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현대사>, 359면).”
김일성에게 내전의 전면전화(全面戰化) 책임이 있다는 커밍스의 언급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핏 보면 답답한 실증주의와 문헌숭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다음과 같은 언급들이다: “6월의 전투를 개시하는 데 북한, 소련, 중국이 각각 수행한 역할을 확인하기에는 우리가 아는 것이 아직도 너무 적다. 우리가 소련측에서 나온 문서를 모두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모두가 마땅히 잊으려 애쓰고 있는 질문, 즉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는가 하는 문제를 정녕 확고한 근거 위에서 논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남한의 기록, 북한의 기록, 타이완과 중국의 기록, 미국측의 정보, 통신신호, 암호기록까지 모두 구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위의 책, 368~9면).” 커밍스가 원하는 것은 정적을 비난하기 위한 일방적 규정이 아닌, 역사학자의 진실이다. 그리고 진실을 밝히려면, 많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하고, 그 변수들을 확정하기 위한 증거가 필요하다고 그는 믿는다. 제임스 팔레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커밍스를 싫어하는 남한 사람들의 편견에 대한 동병상련의 반응이리라: “나(팔레)를 정체론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일 겁니다. 커밍스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의 주장을 잘못 읽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커밍스는 여러 가지 사실을 고려하면서 매우 정교하게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선입견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아요(한홍구, 미국 한국학의 선구자 제임스 팔레 정년기념 대담, {정신문화연구} 24권 제2호(통권 83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01, 2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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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4년 초에 쓴 최정운 교수의 {한국인의 탄생} 서평에서, 한국 근대사에는 두 번의 먹칠 구간이 있었다고 썼다. 그 중 두 번째의 먹칠구간이 1938~45년인데, 이 시기는 커밍스도 집중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사실 세계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가까운 시기의 사료를 조직적으로 인멸하고, 남은 사료를 집단적으로 외면하고, 외면하다가 망각한 사례는 흔치 않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이상한 현상인지 알고 싶다면, 미국사나 영국사 등의 연표에서 20세기 이후의 어느 몇 년간의 자료가 없거나, 혹은 미국인이나 영국인들이 쉿쉿 하고 그 시대를 학교 역사에서 가르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 보기만 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극적 반발로 나온 것이 {친일인명사전}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커밍스는 이러한 사태를, “방관자로서 누릴 수 있는 발언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이렇게 적고 있다: “남한에서 1935년에서 1945년 사이라는 한 특정한 시기는 비어 있는 찬장과 같다. 일본에 이용당하고 착취당한 수백만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건의 기록을 입수할 수 없으며, 일본에 협력한 수천 명의 한국인들은 그런 역사를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주 지워버렸다. 심지어 군지(郡誌) 같은 지방의 계보록에 있는 공무원 명단에서도 이 시기는 빠져 있다(<현대사>, 199면).”
커밍스가 이 식민지 시대 말기의 약 10년간에 주목하게 된 데는, 필연적 이유가 있다. 앞서 우리는 그가 콜럼비아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한국의 미군정기(1945~48)를 연구했음을 살폈다. 역사 연구에서 일어난 사실을 확인하고 연표를 정리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이므로, 미군정기가 직면한 문제는, 분명히 1945년 이전에 벌어진 일들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는 1945년 이전에 관심을 가졌고, 문헌을 중시하는 그의 날카로운 눈길은 “1935~45년 사이의 비어 있는 찬장”을 발견한 것이다. 짐작컨대 그는 당혹했으리라. 고대사도 아닌, 불과 30~40년 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인멸하다니! 사실 충격적이다 못해 괴기스런, 일개 역사 왜곡의 차원이 아니라 범죄의 증거 인멸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 시기의 한국인들은 일본에게 인적․물적으로 노예적 총동원을 당하면서도, 그것을 일본에 대한 애국으로 포장하도록 강요당했고, 일부 한국인들은 정신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거짓 애국을 진심으로 전환하기까지 했다(이광수가 그랬다). 한마디로 “비참함과 굴욕이 극에 달한” 시기였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의 물질적 피해와 정신적 스트레스는 견딜 수 없는 지점까지 도달했다가, 1945년 8월 15일에 마치 “압력솥처럼(커밍스가 구사한 비유임)” 폭발해버렸다. 그리고 일본이 물러가고 상황이 바뀌자, 일본에 대한 강요된 협조를 넘어 적극적으로 부일(扶日) 협력을 했던 최상층은, 자신들의 “판단 실패”와 동족을 괴롭힌 악행을 인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섰다(이승만과 미군이 반공 이데올로기로 그들에게 연장을 제공했다). 한편 그들에게 당했던 대다수의 백성들은, 그들 나름대로, 끔찍한 오욕의 체험을 잊어버리기 위해, 즉각적인 자주권 회복과 독립국가 실현, 그리고 친일파(정확히 말하면 악질적인 부일협력 패거리)의 청산을 원했다.
한반도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군정을 실시하기 위한 최고책임자 존 하지(John R. Hodge, 1893~1963)가 직면한 한반도의 상황은 이러한 것이었다. 남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구성한 인민공화국을 미군정이 부정하고, 반공정책을 밀어붙여 반발을 초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인민공화국이 좌경화되어 있고 자본주의의 통제권에 두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미국이, 38도선 이북의 급격한 공산주의화가 남한에까지 퍼져나갈 것을 두려워했던 탓이다. 38선은 1945년 8월 초부터 한반도에 진입하여 일본군과 전쟁상태에 들어갔던 소련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나눠서 하겠다는 명분하에 임시적으로 획정된 선이었다(소련은 38선 이남으로 내려오지 않는 데 동의했다). 이후 미군정청은 남한에서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탄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중대한 문제가 생겼다. 첫째, 체제수호를 위해 식민지 시대 말기의 친일적 국가기구인 경찰, 관료, 군대의 인적 자원(즉 적극적으로 부일협력한 조선인들)을 처벌하지 않고 그대로 재임용하였다. 둘째, 이러한 과거청산의 실패로 인해 남한의 상당수 백성들은 환멸에 빠졌고, 미군정 자체에 대해 반발하는 저항세력으로 변했다. 실제로 2015년 현재 평균적인 대한민국 백성들은, 1945~48년에 남한사회의 분위기가 얼마나 혁명적(혹은 좌익적)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공식적 학교교육에서 그런 문제를 배운 적도 없고, 객관적인 자료가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커밍스가 제시하는 상은 다음과 같다: 이 시기 남한사회는 거의 “혁명적 분위기”였지만, 미군정과 과거 친일세력이 연합하여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철저히 진압했다. 혁명세력들은 상당히 괴멸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49년 사이에는 제주, 여수, 지리산 등지에서 유격전의 형태로 저항했다. 한편 북한은 북한대로 움직여 건국을 강행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공식적으로 분열됐다(1948.8.15 대한민국 성립; 9.9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성립). 그러나 남한과 북한은 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에도 옹진반도와 개성을 중심으로 계속 국지전을 벌였는데, 커밍스는 이것을 한 국가 내부의 전쟁인 “내전(內戰)”으로 간주했다(그의 무의식 속에서, 한국은 “분단되지 않은 한 나라”였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무척 감동적인 일이다). 그리고 1950년 6월, 김일성은 이러한 내전을, “분단상태 해소를 위한 전면전”으로 확대시켰다.
커밍스가 이해하는 한국전쟁 전 10여 년간의 남한 역사를, 비유적으로 설명해 보겠다. 어떤 연약한 A라는 집단이 있다. 이웃의 강자인 B 집단에게 모질게 얻어맞고, 많은 것을 빼앗겼다. 아들은 B가 C 집단에 맞서 일으킨 전쟁터로 끌려갔고, 딸자식은 일터(위안부를 의미함)로 내몰렸다. B의 물리력은 엄청났고, A는 자연스럽게 “자기 삶을 위해 B에 협력하는 부류(A-1)”와 “B에 저항하는 부류(A-2)”로 나뉘었다. A-1은 B의 환심을 사기 위해, A-2를 B보다 훨씬 가혹하게 다뤘다(예컨대,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국어학자들을 가혹하게 고문한 일본경찰은 조선인 출신이었다). 그러다가 C가 B를 결정적으로 꺾고, B는 물러갔다. A는 환호했지만, 이제는 C가 지배자로 나섰다. C는 B와 같은 폭압적 지배는 하지 않았지만, A를 자기 세력권 하에 두려는 집요함 면에서는 B에 못지 않았다. A의 상당수가 반발했지만, C는 A의 상처를 보듬기보다, 지배를 서둘렀다. C가 보기에는, 경쟁자인 D 또한 A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C의 관점에서 A는, 자기 방어 능력조차 없는 못난 존재들이었고, 자치할 능력이 없는 골칫거리였지만, D에게 빼앗겨서는 안되었다. C는 지배를 위해 A 내부의 분열을 이용했다. A-1의 과거를 묻지 않는 대신, “C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변한 A-2를 제거할 물리력을 제공한 것이다. A-2은 상당히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C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A-1에 의해 괴멸되었다. 그리고 A라는 집단은 C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균일화되었다.
지금까지 비유적으로 설명한 상황에서, A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생각해 보자. 우선 얻은 것은, B에 비해 비교적 온건한, C 영향력 아래의 상대적 안정(安定)일 것이다. 잃은 것은 꽤 많다.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 자기 존재에 대한 자부심, B의 통치를 받으며 생겨난 분열의 상처를 치유할 기회 등등. 커밍스는 묻는다. A는 올바른 선택을 했는가? 그리고 C는 A를 올바르게 처리했다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커밍스가 대신 물은 이 물음을, 이제 우리도 차근차근 정확하게 물어야 한다.
물론 현실은 위에서 제시한 비유보다 훨씬 복잡했다. 위 비유는 남한사회의 1937~50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는 데 적합할 따름이다. 북한이라는 변수, 더 정확히 말해 A 내부의 더 큰 분열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위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비유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커밍스가 최초로 연구주제로 삼았던 “남한의 미군정기(1945~48)”에는 정확하게 들어맞는 설명 모델이다. A는 식민지 조선, B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 C는 미국, D는 소련, A-1는 남한 내 친미세력으로 변신한 구 친일세력, A-2은 남한 내 혁명세력(흔히 좌파라고 불림)이다(남한을 중심으로 한 모델이므로 D는 상대적으로 작게 처리돼 있다). 커밍스는 A-2가 창궐한 이유를, C가 “부일협력의 원죄를 지닌 A-1”을 부당하게 비호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으며, 이것이 C의 대한정책에 관해서 그가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점이다. 미국 수뇌부는 식민 지배의 강렬한 압박과 스트레스, 자존심과 생존욕구를 철저히 짓밟힌 한국인들의 처지를 공감하려 하지 않았고, 더구나 그러한 막다른 처지가 혁명적 에너지로 전환되는 상황은 이해할 능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많은 관심을 가진 국문학자로서, 커밍스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 지점이다. 나는 식민지 시대 말기의 친일문학 시기와 그 이후를, 연속성의 관점 또는 인과의 관점에서 다루는 문학 연구가를 이제껏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공식적 문학사에서 1945년 이전은 암흑기, 1945년 이후의 3년은 이름도 당당한 “해방공간”으로 평가된다. 어쩌면 정치적 분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이러한 분열, 분열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무감각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분열은 벽안(碧眼)의 미국인이 최초로 지적해낼 수 있었다.
커밍스는 진지하지만, 근본적으로 유쾌하고, 자기 PR을 할 줄 아는, 전형적인 미국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자기 연구성과가 지닌 가치를 충분히 알 정도로 영리하다. 한국학 연구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나는 일제 식민지 시기 말기의 10년과 1940년대 후반의 정치적 무질서를 체계적으로 연결지은 최초의 학자(1991년 인터뷰, 376면)”라는 그의 “깨알 자랑”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이전을 보지 않으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느닷없이 일어난 이데올로기의 대립 전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이것은 공교롭게도 1945년 이전을 가장 적극적으로 인멸하는 A-1의 주장이다). 그러나 1945년 이전을 고려에 넣고 보면, 한국전쟁이란 “반(反)식민지 자주국가를 건설하려는 세력(A-2)”이 새로운 외세에 맞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실용적인 미국 정부는 “이들의 저항을 진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만 지원을 하겠다고 이승만에게 엄포를 놓았고, 이 때문에 이승만은 A-2의 저항을 필사적으로 진압해야 했다(장개석이 공산당 진압에 실패하여 미국에게 버려지는 꼴을 그는 똑똑히 보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전부터 남한사회는 A-1과 A-2의 내전상태였으며, A-2가 북한정권과 직․간접적으로 연계되면서 전면전으로 변질된 것일 뿐이다. A-1이 지배하는 공식교육을 받은 남한 사람들은, 브루스 커밍스가 보기에는 너무나 명료한, 다음과 같은 시각을 봉쇄당한다. “국제관계의 측면에서 볼 때, 한국전쟁은 근원적으로, 탈식민지 상황에서 어떤 나라가 한반도의 새로운 사대(事大)의 대상으로 떠오를 것인가, 아니면 한국인들이 통일된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이상을 과연 스스로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관련된 것”이라는 시각 말이다(<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실제로 1945년 이전 한국과 거의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베트남은 이 이상을 실현시켰다. 오늘날 공산 베트남을 구소련이나 중국의 꼭두각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라, 전후 세계체제의 남북갈등(선진국과 저개발국 갈등) 혹은 소위 “제3세계”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이 모든 문제제기가 봉쇄된 채, 남한 백성들은 “1950년 6월 25일 방아쇠를 당긴 자는 누구인가?”라는, 중요하지만 결과에 불과한 질문만을 하도록, 그리고 그 답은 “김일성”이라고 암송하도록 강요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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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 커밍스 학문의 형성과정과 특성을 살펴봤다. 오독했거나 소홀히 여긴 부분이 있을 터이나, 그것은 내가 그의 책을 다 읽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브루스 커밍스 선생께 너그럽게 용서를 청한다. 그러나 2003년에 나온 {현대사}를 통해, 우리는 그의 생각의 상당 부분을 한국말로도 읽을 수 있게 됐다. 잘 씌어졌고, 흥미진진하며, 한국어 번역의 질도 원저자로부터 믿음을 얻은 이 책은, 사실 본래는 미국인 독자들을 위해 쓴 것이다. (놀랍게도, {한국전쟁의 기원} 역시 그렇다. 커밍스는 많은 미국인들이 1945~48년의 기간 동안 미군정이 남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도 이 책을 읽고, 우리가 처한 상황을 한 미국인(커밍스)은 어떻게 보는지를 알게 된다면, 이 “전형적이면서도 독특한 미국인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가 많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거듭 말한다. 커밍스는 좌파 내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60년대에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며 중국혁명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반전사상을 체득하고, 공산주의 운동을 “이해 내지 동정”하게 된 평범한 미국인이다. 그러나 제대로 공부를 시작한 뒤로는 지독하게 성실하게 문헌을 파고들었던, 대단한 학자였다. 그가 미국 내에서 한국학의 수준을 일거에 드높였다는 평가도 있는 바, 그가 다룬 주제의 파괴력 때문에 어느 정도 과장이 섞였을지 모르지만, 정당한 말일 것이다. 그에 적대적인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호의적인 한국의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조차 “커밍스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전쟁과 같이 한국인의 운명에 전면적으로 영향을 미친 커다란 전쟁에 대한 종합적 연구의 선수(先手)를, (전쟁의 중요 당사자이긴 하나 외국인임이 분명한) 커밍스에게 빼앗긴 데 대한, 그리고 그의 자료 수집과 논증, 결론 제시 방식이 (정치적 이유를 제외하고는) 흠잡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데 대한, 좌절감 탓일 것이다. 커밍스를 의식하고 쓴 것이 분명한 박명림의 대작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나남출판, 1996)이, 커밍스가 비교적 소홀히 다룬 1945년 이후 북한과 공산주의 동맹세력의 움직임을 상세히 분석한 것은, 이러한 좌절을 극복하려는 한국인의, 새로운 방향의 노력일 터이다. (나는 박명림 교수 역시 커밍스의 저작을 보면서, 내가 한반도 상공에서 벌어지는 “세기의 공중전”을 감상하며 느꼈던 종류의 좌절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다른 문제 하나를 지적하고 글을 마칠까 한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을 간행한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에 따르면, 박명림 교수는 “구도자적으로 자료 연구에 헌신한” 순정한 학자다. 반면, 브루스 커밍스는 지금은 학자가 맞지만, 젊은 시절에는 학문이 뭔지도 모르고 스포츠에 열중하던 “평범한 양키”였다. 문화가 다르니 비유하기 뭣하지만, 학부도 평범한 시골 대학 출신이었다(나 또한 한국 시골 대학의 교수이니, 독자들은 이 말에 너무 화내시지 말기 바란다). 박명림 이전에 그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인 한국현대사 연구자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커밍스는, 한국의 점잖고 구도자적인 수많은 사학자들을 모두 제치고, 한국전쟁사의 종합적 연구에서 선봉을 잡을 수 있었는가? 내가 생각하는 정답은, “영어만 알면” 평범한 양키도 학자로 성장할 수 있는, “영어문화권의 막강한 힘”이다. 그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영어로 된 미군정기 자료를 토대로 연구를 진척시켰고, 니체 전집도 시카고 대학에 임용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영어 번역으로) 읽었다(그는 요즘 책이나 논문에서는 니체를 많이 인용한다). 커밍스가 그의 글에서 나에게 단 한번 불쾌감을 준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인용한 바, “영어를 못하는 한국인들은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을 안 읽었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것이 특별히 불쾌했던 이유는, 그것이 지적당하기 싫은 부끄러운 사실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한국인이 1천 페이지(2권의 페이지수)에 달하는 방대한 영어책을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설령 비교적 자유시간이 많이 주어지는 교수직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한국인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다. 꽤 영어를 하는 사람이라 해도, 다른 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기에만 몰두한다고 가정할 때, 최소한 한달 이상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본다. 고교 때부터 야구를 했고, 야구 특기자로 대학에 들어간 평범한 한국 청년이 있다고 하자. 그 청년이, 대학 3학년 쯤에, 자기가 프로야구단에서 스카우트될 가망이 없다고 해서, 미국 현대사 연구로 전향할 수 있겠는가? 평균적으로 생각해, 그는 영어를 읽을 능력이 없을 것이다. 한국어 책은 어느 읽겠지만, 한국어만 알아서 미국사를 연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은, 1947~50년이라는 시기, 한국인들의 운명을 오늘날까지 옭죄고 있는 결정적인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시간의 한국사와 미국사(정확히 말하면 미국 외교정책사)를 동시에 다루고 있다. 이 중요한 책은 왜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는가? 한국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넘치고 넘친다. 토익 950점 이상을 받고도 취업을 못하는 사람도 많다. 특목고 학생들은 영어로 책을 출간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국전쟁의 기원> 2권을, 믿을 만한 한국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 없는 것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영어로 읽고 쓰면 인정받고, 한국어로 읽고 쓰면 천대받는 탓이다. 영한번역이든 한영번역이든, 한국어가 개입된 모든 번역일은, 한국에서 고급노동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가난한 백성들(이른바 초벌번역가들)의 일(한영번역)이거나, 백성들을 위한 일(영한번역)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힘이 없고, 백성들에게 잘 보여 봤자 출세할 길도 없다. 잘 보이려면 힘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서야 하고, 영어로 말하고 읽고 쓰면, 한국어는 필요가 없어진다. 번역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어의 위상은, 고매한 국어학자님들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낮고 우려스럽다. 한국연구재단에서 명저번역 지원사업 예산을 줄이며 했다는 말에 해답이 다 들어 있다: “전문서는 다들 영어로 읽는데 왜 굳이 한국어 번역이 필요하냐?” 한국에서 야구선수 출신 미국사 학자가 있을 수 없는 이유를, 이보다 더 처절하게 뒷받침하는 말이 또 있겠는가.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8, 2015년 8월,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