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3일. 이 글을 쓰는 날짜를 적어 보았다. 한국은 현재 동아시아 국제정세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하겠으나, 신흥 강대국으로서 세계의 중심축이 되어가는 막강한 중국과, 과거의 위세를 많이 잃긴 했지만 여전히 선진국인 일본의 사이에 끼어, 어렵게 자존감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평가가, 대체로 공정할 것이다. 한국의 이러한 지위에 자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지난 100여 년간 조상들이 겪은 고난의 산물일 것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를 받은 채 숨죽이며 살고 있었다.
방금 나는 무심결에 “한국인”이란 말을 썼지만, 이때 한국인이란 과연 무엇일까? 한국인이란 대체로 “대한민국인”의 줄임말이겠지만, 1915년 당시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상하이 임시정부조차 수립(1919년)하기 전이었다. 정확히 말해 한국인들은 없었고, 일본과 병합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었으니, 국제법상으로 우리 조상들은 “일본인”이었다. 물론 국내법적으로 보면 아직 정비되지 못한 것들, 혹은 일본이 정비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 때문에, 구(舊)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 본토, 이른바 내지(內地)의 일본인들에 비해 매우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참정권이나 병역의무 같은 경우가 가장 극단적인 증거일 것이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에 우리는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았다. 그런데, 국내사의 관점을 벗어나 보면, 약간의 의문이 생긴다. 8․15는 한국인들에겐 “해방”을 뜻하지만, 국제법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이 끝난 것을 뜻한다. 일본 천황이 포츠담선언(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침략으로 강탈한 영토반환 요구)를 수락한 날짜이기 때문이다. 이날,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환호했고, 미국인들은 일본을 마침내 굴복시켜서 환호했고, 일본인들은 미국에 보복하지 못해 원통해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당시 한국인들은 태평양전쟁의 종전(終戰)이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것이라는 점을 의심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늘날 한국이라 불리는 한반도는, 위에서 말한 대로 국제법상 일본 영토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에게 한반도는 태평양전쟁의 전리품도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한국의 일본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이라는 등식은 합리적 형식논리에 따르면 성립하지 않는다.
태평양 전쟁, 즉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시작될 당시(1941.12.8), 일본은 중국 주요부와 인도차이나 남부까지 군사지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1941년 중반까지,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는 물적․심적 준비만을 갖추고 있었을 뿐, 최종적으로 미국과 결전해야겠다는 결심은 세우지 못했다. 가능하다면, “제압당할 가능성이 낮은 강대국”과 전쟁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주지 않자, 대일교섭은 결렬되었고, 일본은 행동을 개시했다. 미국령 하와이 공격(12.8), 미국령 필리핀 공격․점령(12.8~12), 영국령 홍콩 점령(12.25)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모두 1941년 12월 한 달 동안에,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미국은 어지간한 무력 행동이 아니면 도전에 응하지 않을 정도로 중립과 전쟁불개입을 신성시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미국도 일본에게 반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일본의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하고, 전쟁의 명분을 침략 이전의 원 상태로 회복하는 데 두었다.
그런데, 이 원상회복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만약에 그것이 (1) 태평양전쟁 개전 직전의 상태, 즉 1941년 12월 7일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포츠담 선언의 요구는 과도한 것이며, 패전국 일본에 대한 요구는 홍콩, 필리핀에서 일본군이 철수하고, 하와이 공습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는 차원으로 끝나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본은 만주 전역,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상당 부분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미국이 원하는 것은 이런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2) 중일전쟁 개전(1937.7.7)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야 하나? 그렇게 하더라도 일본은, 북중국의 전부나 다름없는 만주국 및 조선반도를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은 이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면, (3) 만주사변 개전(1931.9.18) 이전으로? 그렇다 해도 일본은 조선반도, 대만, 여순․대련 등을 유지하게 된다. 실제로 태평양전쟁의 승전국인 미국과, 연합군 소련이 한반도를 군사점령하게 된 역사적 결과를 보면, 미국의 의도는 (3)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청일전쟁의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던 1895년 4월 이전의 상황으로 영토를 재조정받는다. 즉 미국이 요구한 것은, 조선반도, 대만, 중국 본토의 모든 영역에서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이었다(독도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의 패전이, 조선반도 및 대만을 포함한 아시아 대륙 전역으로부터 일본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귀결된 것은, 한민족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다행한 일이었으나, 이는 미국이나 소련이 한국인을 특별히 배려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의 잔혹함과 악랄함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일본을 “전쟁하지 못하는 나라”로 만들기로 결심했다(이 결심의 결과가 오늘날의 일본 평화헌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게 된 최초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고, 그것이 1894년의 청일전쟁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태평양전쟁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 일본의 군사적 후퇴를 요구했던 것이다. 즉, 한국인뿐 아니라 미국인을 포함한 인류 전체에게,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행태는, 도저히 분리될 수 없는 “일관된 침략정책의 일환”임이 분명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시 1943년 11월에 미국․영국․중화민국 수뇌가 일본에게 보낸 메시지라 할 카이로 선언을 인용한다.
“미국․영국․중화민국 세 동맹국의 목적은, 일본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개시 이후에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도서 일체를 박탈할 것과, 만주․대만 및 팽호도(펑후 열도)와 같이 일본이 청국으로부터 빼앗은 지역 일체를 중화민국에 반환함에 있다. 또한 일본은 폭력과 탐욕으로 약탈한 다른 일체의 지역으로부터 구축될 것이다.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3대 동맹국은 일본과 교전 중인 여러 국가와 협조하여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는데 필요한 중대하고도 장기적인 행동을 속행한다.”
많은 한국인들은 카이로 선언을 잘 기억하고 있다. “적당한 시기”의 해석과 관련하여, 1945년 이후 신탁통치 찬반 논쟁 및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고, 결국 분단으로 귀결된 탓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와는 다른 맥락이다. 가장 눈에 띄는 항목은, 대만과 한국을 분리하는 연합국 수뇌들의 태도이다. 대만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1895년의 일이며,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1910년의 일인데도, 3개국 정상들은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요구로서 “대만의 즉각적인 중국 귀속”은 인정하되, “한국의 즉각적인 해방(독립)”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왜일까? 전문적인 국제정치학자가 대답할 문제이긴 하겠으나, 일단 카이로 선언에 중화민국의 최고 권력자인 장개석이 참석해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카이로 선언을 정독해 보면, 연합국 수뇌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이 이중적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들은 대만의 식민지화를 언급함으로써, 사실상 일본의 침략정책이 개시된 순간을 1895년 4월로 잡았으면서도, 실제 문면에서 일본이 침략국가로 된 시점을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잡아, 1910년에 이루어진 일본의 한국병합 사건을 사실상 무시 내지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1914년을 시점으로 일본이 침략국가가 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소가 웃을 일이다. 당시 일본은, 영국의 당당한 동맹국이었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장개석은, 한국의 독립운동 역량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던 덕분에(김구의 상해 윤봉길 의거가 장개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중국의 이익보다 앞세우고 싶진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루즈벨트 역시, 카이로 선언에서 일본의 한국병합 사건 및 한국의 독립 조치를 명시할 경우, 그것이 1910년의 한일병합을 묵인했던 과거 미국 행정부의 행태(이른바 카츠라-태프트 밀약)와 모순된다는 것을 깨닫고, “적당한 시기의 한국 독립”이라는 어정쩡한 문구로 절충한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노예상태를 확인”받은 것은 한국인들에게 불행 중 다행일지 모른다. 한일병합 상태가 길어지고, 한반도가 일본의 일부라는 것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전=한국의 독립”이라는 등식은 결코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한국인들이 일본의 강압적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이, 당시 연합국 수뇌들에게, 즉 국제 사회에 인정됐던 것이다. 내가 집요할 정도로 이 사실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1910년 당시만 해도, 국제 사회는, 일본이 한국을 강압적으로 지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사실은 그대로이되, 1910년에서 1943년 사이에, 서구 열강(의 일부인 영․미)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꾼 것이다. 1905년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의 또다른 루즈벨트 대통령은, 풍전등화에 놓인 대한제국의 운명을 방관하며, “우리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일본에 간섭할 수 없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했다”고까지 했다. 그렇다면, 왜,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조선지배에 대한 생각을 바꾼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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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내가 소개하려는 책은, 토쿄대 인문사회연구과 교수인 카토 요코(1960~)가 쓴 {근대 일본의 전쟁 논리}(태학사, 2003)이다. 토쿄대의 학부 강의에 기반을 둔 이 책은, 일본이라는 국가가 청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약 50년 이상 꾸준히 전쟁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내적 원동력을, 상층부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전쟁을 받아들이고 직접 수행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추적하는 데서 찾으려고 한다. 물론 군부, 지식인, 국제정치적 변수 등도 두루 고려되긴 하지만, 단순히 전쟁의 경과와 결과를 기술하는 역사가 아닌, 전쟁이 발생하는 이유와 그것이 지속되는 심리를 추적한, 일종의 “전쟁심리사”이자, 전후세대 특유의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이 돋보이는 저술이다.
사실, 청일전쟁․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일본의 전쟁사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업적은 넘치고 넘치는 데 비해, 전쟁이 왜 일어나고, 그것이 민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개별 전쟁이 정치외교적 사건으로서 갖는 시대적이고 독자적인 성질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서술한 책이 많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토 교수의 이 업적은, 매우 신선한 감이 있었다. 특히 가토 교수의 이 책은, 우리가 앞서 제기했던, “왜 영․미는 한일병합에 대한 태도를 바꿨을까?”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독자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간다. 단, 그 질문의 형태는, 한국이 중심이 아닌 까닭에, “왜 영․미는 일본의 동맹(내지 친선국)에서 적대국으로 되었고, 전쟁까지 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을까?”하는 문제로 바뀌어서 서술된다. 첫째, 조선이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교두보였다는 사실을, 영미측이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둘째, 영일동맹(1902~1923)이 자연스럽게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는 대영제국을 운영하던 영국이, 자국 세력을 위협하던 유일한 세력인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영일동맹이 가능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은 상당한 국력 소모를 겪은 반면, 후발 주자인 일본은 실력을 키워, 중국에서 영국과 이권을 놓고 충돌하는 관계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영국의 대일 적대관계는, 미국도 똑같이 겪게 되는 변화였다.
한일병합이 실행되었던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미국과 일본은 상호 교류가 거의 없었고, 상대의 특성이나 잠재적 역량을 잘 몰랐다. 미국 역시 초강대국이 아니었으며, 하와이․필리핀 등 태평양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수준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조선을 병합하고 싶어하는” 일본이라는 상대를 만나게 됐고, “해외 진출(침략)을 통해 발전하는 존재”라는 동업자 의식을 갖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미국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대륙국가의 속성에 따라, 국제문제에 초연한 듯한 태도를 취하면서, 식민지를 조금씩 챙기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정도로만 자신을 드러냈다. 반면 일본은, 카토 교수가 지적하듯이, “위협받기 전에 빼앗는 것(한반도 침략의 구실, 네 번째 강의)”, “힘의 공백이 있는 곳(예컨대 만주)을 선점하여 주인 행세를 하는 것(만주사변의 원인, 여덟 번째 강의)”을 국가방침으로 삼은, 매우 적극적인 나라였다.
북중국 즉 만주의 힘의 공백은, 1911년 청(淸) 제국이 무너진 후 중국 대륙을 관리할 만한 통합된 힘이 없어진 상태가 오래 지속된 결과이다. 군벌들은 상호 견제하면서 쇠약해져 갔고, 그 와중에서 중국 내정의 혼란이 가중됐으며, 장개석의 국민정부 역시 중국 전체를 통일할 결정적인 힘을 얻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본 군부의 적극적인 세력(관동군의 이시하라 칸지, 219면)이, 장기적인 미일전쟁을 염두에 두면서, 사실상 힘의 공백 상태가 된 만주를 선점하여, 자원 확보처로 삼으려던 것이,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의 의도였다. 물론 거기에는, “만주에 진출한 일본 자본이 군벌들의 폭정에 시달리지 않게 보호해야 한다”는, (서구적 기준에서 볼 때에도 나름 일리 있는) 근거도 있었다(만주국 건설의 정당성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만주를 시찰한 리튼 조사단의 보고서도 이 점을 인정했다. 252면). “청나라는 망했고, 군벌들은 깡패이고, 러시아는 공산혁명으로 혼란 상태이니, 만주의 질서를 잡아 줄 세력은 우리 일본밖에 없다”는 논리다.
만주에서 일본이 보여준 이러한 속전속결식 행태는 영․미에 큰 충격을 주었고, 특히 미국으로 하여금 정신을 차리게 만들었다. 미국은 기독교 선교와 무역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국에 결정적 이해 관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에 입각한 일본의 중국 진출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주사변(1931) 이후에도, 미․일이 전쟁상태에 돌입(태평양 전쟁, 1941)하기 위해서는 1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을 명석하게 설명하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거치면서, 경제력 면에서 서유럽을 능가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1933년에 성립한 루즈벨트 정권은 대공황으로부터 경제를 회복시키는 것이 급무였으므로, 제국주의․식민주의적 경제정책을 폐기하고, 기회균등의 원칙에 따라 국제무역을 활성화하려고 시도했다. 물론 이는 미국의 막대한 영토와 자원 덕분에 가능한 정책이기도 했다.
일본이 중국에서 벌이는 패악질에 대해,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 늦어진 것은, 미국 스스로 자초한 면도 있었다. 1935년 8월 루즈벨트 정권은 이른바 “중립법”을 발효시킨다. 교전국들에 대한 무기 수출 금지, 교전국과 금융거래 제한 등, 미국의 정책수단만으로 전쟁을 억지하겠다는 법으로서, 사실상 “전쟁을 하지 않고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겠다”는 미국의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법이었다. 그러나, 조금 후에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중립법은 전쟁(일본의 중국 본토침략)을 억지하지도 못했고, 미국의 전쟁 개입(태평양전쟁 개전)을 예방하지도 못하였다.
1935년에는 일본이 고려해야 할 또다른 중요한 변수가 생겼는데, 그것은 소련의 극동지역 군사력이 일본을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진정된 소련은, 일본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장거리 폭격기를 극동에 배치할 여유를 갖게 되었고, 이에 관동군 수뇌부들은 경악하였다(256면). 가토 교수에 따르면, 이시하라 간지 등 관동군 수뇌들은, 만주사변을 일으킬 당시에 소련의 영향력을 얕보았던 것을 후회하며, 향후 5년간 전쟁 시도를 중단하고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여, 소련의 위협에 맞서기로 했다고 한다. 일본 육군은 여지껏 사이가 좋지 않던 재벌들에게 손을 내밀고(일본 육군과 재벌의 대립은 뿌리깊은 것이었다. 일본 역사상 최악의 쿠데타였던 1936년의 2․26사건 역시, 황도파로 불리는 일부 군부세력의 반재벌 정서와 관련이 없지 않았다), 북지나개발회사라는 재벌기업을 차려 북중국을 공업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1937년 7월 7일, 북경 외곽의 일본군과 중국군 간에 “우발적 군사충돌(258면)”이 일어나, 일본은 통제할 수 없는 전쟁의 길(중일전쟁)로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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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토 교수의 논지가 보여주는 탁월한 점과 우려스러운 점을 지적하고 이 글을 맺을까 한다. 먼저 탁월한 점은, 일본이 만주국을 제외한 중국 본토를 본격적으로 침략한 이른바 “중일전쟁(일본인들은 지나사변이라고 함)”에 대한 분석이다.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미국은 곧바로 중립법을 적용하여 일본의 전쟁수행 능력을 억지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때, 미국이 중립법을 제정할 때만 해도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드러났다. 전시에 중립법이 적용되면, 적국인 일본뿐 아니라, 우방인 중국도 곤란을 겪게 되는 것이다. 중국도 미국의 군사원조에 의존하지 않으면 일본과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중국 측에서 중립법의 적용을 하지 말아 달라고 미국에 요청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258면). 중립법은 전쟁을 억지하는 효과는 있지만, 일어난 전쟁을 물릴 수 있는 효과는 없었던 것이고, 결국 중일전쟁에서, 중립법은 적용되지 않았다.
카토 교수의 논지에 따르면, 일본도 나름대로 괴로웠다.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려던 찰나에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물자와 자금이 부족했던 만큼, 전쟁을 하려면 미국 경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측은 미국이 중립법을 적용할 것이 두려워,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고, 미국은 실제로 중립법 적용을 하지 않음으로써, 일본과 경제교류를 유지했다. 카토 교수의 말에 따르면, “부전조약과 중립법에 의해 규정되어, 일본․중국․미국의 어떤 나라도 그것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발견하는 실로 기묘한 전쟁이 태평양전쟁 발발까지 4년 이상이나 수행(261면)”되게 된 것이다. 일본이 속전속결로 중국을 점령하여 자국 영토로 삼지 않은 것은, 군사력이 충분치 않아서이기도 했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 경제가 파탄날 것을 두려워했던 군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매우 참신한(?) 견해가 도출되는 셈이다.
이제 이 책의 우려스러운 점을 말하려 한다. 나는 이러한 카토 교수의 견해가 국제정세에 입각해 당대 상황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한 학술적 시도라는 점을 믿고 싶다. 그러나 이러한 교수의 견해 속에는, 중일전쟁이라는 이름 하에 일본이 행한 일련의 잔악한 행위들(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남경대학살과 같은 사건도 여기에 포함된다)이,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우발적인 것이었으며, 일본 역시 사태를 주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역사의 힘에 의해 희생당한, 불운한 국가라는 (의식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최소한 무의식적인) 생각이 깔려 있는 것 같다.
번역자인 박영준 선생도 해설에서 지적했지만(275면), 중일전쟁의 발단을 “우발적 군사충돌”이라고 사소하게 언급하는 카토 교수의 태도는, 아직도 전쟁의 상흔을 말끔히 씻지 못한 많은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거북하게 느껴질 것이다. 분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토 교수에게 모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것이 일본인의 한 시각인 것은 분명하고, 특히 카토 교수의 시각은, 방대한 사료 검토와 사실을 바라보는 엄밀하고 양심적인 학자의 시각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데까지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카토 교수가 못 본 부분을 더욱 치밀한 연구로 보완하고 지적하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분개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시각이 너무나 첨예하게 엇갈리는 탓에 실제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중일전쟁의 근본 원인을 검토하는 것이 더욱 긴요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중일전쟁의 원인 이 “우발적 군사충돌”이라는 가토 교수의 분석이, 단순히 군국주의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 “개별적 사실에는 엄밀하게 증거를 찾고 따지되, 역사의 궁극적 원동력에 무감각한” 일본인들의 성향과 관련이 있지 않나 의심한다. {근대 일본의 전쟁 논리}는, 우리를 부끄럽게 할 정도로 우리가 주변의 역사 정황에 대해 무지했다는 것을 깨우쳐 주지만, 궁극적으로 중일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고 여겨진다.
카토 교수의 말에 입각해 가설을 세워 본다면, 일본은 중일전쟁에 임하면서 적당히 힘 조절을 했고, 그러면서 미국과 치르게 될 결전을 준비했다는 시각도 가능하다. 이시하라가 중화학 공업화를 염두에 두고 5개년간 전쟁을 중단키로 한 것이 1935년이었고, 미일전쟁이 개시된 것이 6년 후인 1941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가설은 더욱 그럴듯해진다.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지 않자 미국이 중립법을 적용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의 전략에 미국이 말려들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거대한 대륙인 중국 전역을 침공하는 결정적인 역사의 전환을, 한 우발적 군사충돌에서 비롯된 것으로 처리할 수 있을까?
카토 교수의 이 책은, 전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단순히 사건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고 수행해 가는 인간들의 내적 심리의 방향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뛰어난 책이다. 어떤 의미에서 “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본 일본인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은, “근대 일본의 전쟁 논리”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전쟁이라는 일본 역사 내부의 사건을 실행해 가는 일본과 일본인의 모습만이 강조되고 있을 뿐, 그 전쟁이 세계 역사에 일으킨 풍파나, 일본인의 시각을 넘어선 전쟁의 궁극적 원인에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일본 군부와 일본경제, 그리고 국제정세에 관한 종합적 연구들이 진전되어, 중일전쟁의 근본원인에 대한 명료한 학설이 도출되길 희망한다. 그리고, 한국인 역시 그 속에서 엄청난 불행에 휘말렸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한국인 사학자들의 균형잡힌 시각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2, 2015년 2월, 배수찬,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