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4-11-11 00:36
[이승범 짧은 북리뷰] <멀고도 가까운>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819  
   http://멀고도 가까운 [1017]


도서정보
저자명 리베카 솔닛
저서명 멀고도 가까운
출판사 반
연도(ISBN) 2016(978-89-8371-773

<멀고도 가까운>

- 리베카 솔닛 (반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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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전에 저자의 다른 책을 펼친 적이 있다. <길 잃기 안내서>, 어디선가 추천 받고 읽다가, 제목처럼 내용도 너무 뻔한 느낌이라, 앞부분 보다가 중단. 뭔가 인문학적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해야 할까. 정해지고 주어진 루틴화 된 생활이 아닌, 그것을 이탈함 속에서 삶의 핵심적 가치과 본질을 찾고 어쩌고 하는 내용의 느낌이었다.

사실 그 이상의 내용이 없는, 인문학 책 중 ‘피상적 성찰 팔이’ 책 중의 하나일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마치 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 수준에 머무는 느낌적 느낌이랄까.

그래서 이번에 읽게된 <멀고도 가까운>도 우려가 있었다. 문체에서 느껴지는 자기 연민적 징징거림, 어떤 문제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 집합적 차원이 되었을 때 어쩌면 당연해지는 ‘소외의 필연성’을 받아들으려 하지 않는다 든지, 그런 비사회적인 상상적 주체의 자아라든지(특히 체 게바라 비판할 때). “이것이 다가 아니다” “경계를 무너뜨리고 자아의 가능성을 넓혀 보기” 식의 (불패의) '여집합 논리'로 세상을 대하는 빤한 인문학적 교양이라든지, 뭔가 맘에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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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모임에서 정해서 읽은,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은 성향상 불편감이 있었음에도, 그런대로 읽을만 했다. 빤하지만 여러군데 괜찮은 부분이 많았다. 다소 자신의 병리적인 면까지 마치 제 3자를 대하듯 자신을 관찰하며 드러내는 솔찍함이라든가, 그 주어진 달란트 내에서의 치열한 성찰들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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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 부족함이 나의 부족함과 비슷해서인가, 내 눈높이에 맞는 느낌이었다. 성향이 다르지만, 옆에서 이런저런 잔소리를 주고받으며, 얘기하기 좋은 (자기 성찰에) 성실한 사람이라는 느낌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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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은 신변잡기의 에세이이다. 자신과 그다지 건강한 관계가 아니었던 어머니가 알츠하이머에 걸리고, 집이 그나마 가깝고, 여유시간이 많은 사람(작가)이라고 판단한 어머니가 그녀에게 많이 의존하면서 이전에 풀리지 않았던 갈등이 심화된다. 저자를 여전히 비난하고 질투하는 어머니와의 갈등은, 그 인지기능 장애가 심화되면서 더 심해지고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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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자신의 글에 관심을 가진, 아이슬란드의 어느 인물의 초대를 받는다. 마치 미술작가들을, 외지고 독특한 곳에 상당기간 초대하는 레지던스 비슷한 프로그램에 글을 쓰는 작가로서 초대 받는다. 환대는 없었고, 나쁘진 않았지만, 독특한 낮과 밤의 시간과 심심함에 저자는 쓸쓸한 모드였지만, 나름 자기 성찰의 시간도 됐던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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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를 갔다 오고 어쩌고, 어머니는 끝내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르고, 그녀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저자는 힘들어하면서,,, 순간 순간 여러 자기 극복의 사례들을 타작가들의 좋은 글들을 인용해가며, 공허를 메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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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눈물을 먹고 사는 나방, 아이슬란드에서 자주 가던 공간인 어느 작가가 만든 작품이자 미로 같은 공간에서의 느낌, 고통과 실패가 벌꿀들에 의해서 내 안에서 꿀이 되어주는 그 순간들을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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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도, 이렇게 글이 된다는 것이 좋기도 했고, 저자가 느끼는 상처와 고통과 그 극복이 단순하게 편집된 해피엔딩이 아닌 형식도 좋았다. 우리는 결국 끝내 극복하고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흐름 속에서 약간씩 나아질 수 있을 뿐이라는(혹은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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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글을 보는 분들 중에는, 글쓴이가 인문학적 성찰을 디스하며, 뜬끔 없는 과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의야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추가적으로 보충하자면 이것은 인문학이나 인문적 성찰에 반감을 갖거나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 한때 ‘자기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널리 읽힌 적이 있었다. 1995년에 출간된 조혜정 교수의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과 삶읽기>가 처음이었다. 당신 소위 대학가 사회과학 전문 서점들이 갈 길을 잃어 거의 씨가 말라가고 있을 무렵, 그 책은 이전의 주류와 다른 패러다임 제시하는 듯한 면모 때문에 당시 대단한 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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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0년 차를 두고 2005년에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이 출간되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제목과 표지만 다를 뿐, 조혜정 교수가 말했던 것. 타자나 거대 담론의 시각으로 나를 우리를 보지말고 성찰을 통해 나만의 시각을 갖자는 내용의 반복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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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담론이 히트를 쳤다가 시간이 지나 잊혀지고, 집단적으로 까먹을 쯤 다시 비슷한 내용이 독서 시장 혹은 담론 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보고, 이건 뭐지 하며 의야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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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수년이 지나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가 출간되어 히트를 치는 것을 보면서는, 참으로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조혜정, 정희진 저자의 책 핵심 논지를 책 제목과 표지만 바꿔서 나오면서, 과거의 있었던 것들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새롭게 열광을 하는 사람들을 보니, 과연 학문적 발전이란 것이 우리 사회에 있나 싶은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이전 저자들의 논의에서 반발짝도 나가지 못한 채 반복하면서 인기작이 '재'탄생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안쓰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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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념을 뒤로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3명의 히트작 저자들이 말하는 내용이, 그 자체로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표지판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타 인지를 중시하고, 자신을 다르게 바라볼 줄 아는 의식이 필요하고, 성찰을 하고 어쩌고는, 정말 타당한 얘기이고 중요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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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기 성찰을 경유해서, 우리를 소외시키며 괴롭혔던 어떤 사회적 힘들에 맞서 자유와 주체성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근데 그러한 아이템은 우리가 뭔가를 제대로 시작하기에 앞서 거쳐야 하는 ‘교양 필수’ 과목 같은 것이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알려주지 못하는 텅 빈 형식이라는 것이다. (원래 주체성이나 자유의 자리는 그런 기묘한 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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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런 '성찰 팔이'의 성공이, 물신화되어 그 자체가 큰 목표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인냥 행동하게 되면, 좋은 의도가 더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이 성찰 아이템을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만 매달리면, 거기에는 소외를 거부하는 자유인들의 나르시시즘적 함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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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적 주체는 사회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우리의 자리는 성찰을 통한 자유의 충전을 통해, 그것을 경유해 어딘가로 나아가야 하고, 또 사회와 그것의 다른 이름인 또 소외 속에서 분투해야 한다. 각자의 전공의 자리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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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의 글이나, '자기 성찰'은 참 좋은 것이지만, 그 상상계성으로 인해(아마도 그것이 자신에게는 큰 힘이 되겠지만) 그런 성향에 걸맞는 자리는, 작가나 사회운동가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작가의 자리가 부럽고 그래서 이런 질투심을 숨기고 그를 힐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이하고 특수한 사람들만이 가능한 자리이니, 그것의 특성과 한계점도 알아야 부작용이 줄어들 듯싶어 이렇게 심술궂은 사족을 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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