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03-03 16:59
[2015년 3월, 이달의 서평] 우리는 인민이었던가?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7,555  


도서정보
저자명 알랭 바이우 외
저서명 인민이란 무엇인가
출판사 현실문화
연도(ISBN) 2014(9788965641056_)
[2015년 3월, 이달의 서평]: 우리는 인민이었던가?

1.
1980년대 한국의 어느 가정집에서든 ‘세계위인전집’ 같은 종류의 학생용 전집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나 역시 어느 날 부모가 구입한 그 전집을 ‘회유섞인 반강제’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링컨이 누구인지 남북전쟁이나 노예해방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던 어린애의 기분에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듯싶다. 왜냐면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링컨의 발언에서 무언가 섬뜩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유는 사실 별 게 아니었다. ‘인민’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해서 나왔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인민’이라니? 그건 북한공산집단이나 쓰는 단어가 아닌가? 링컨은 미국대통령인데 설마하니 공산당이었다는 말인가? 무언가 학교선생님이 엄격하게 금지했던 ‘불온한 문서’에 접한 것은 아닌지, 이런 책을 구입한 내 부모는 대체 어떤 사람들인지, 꽤 오랫동안 불안해 했던 듯싶다. 어른이 되어 사리판단이 제대로 설 때까지 ‘인민’이 어쩐지 기피해야 할 섬뜩한 단어로 각인된 것은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방북했을 때 남쪽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는 엇비슷한 섬뜩함을 느낀 이들이 있었다. 평양의 만수대 의사당을 찾아가 남긴 방명록에 그가 “인민의 행복이 나오는 인민주권의 전당”이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인민’이라니? 북한정부가 사용하는 공식적인 표현을 남한 대통령이 사용했다? 노무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 문구를 읽고 격렬한 분노와 적개심에 휩싸였으며, ‘반공’과 동일시되었던 국가적통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심을 공공연히 표명했다. 심지어 대통령을 내란죄에 회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던 듯싶다.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이 소동은 무언가 자가당착 그 자체처럼 보인다. 분별없는 초등학생이야 그렇다 해도, 중학생만 되어도 역사나 사회시간에 우리는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천의 하나로 인민주권론에 대해 배우지 않는가? 장-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프랑스 혁명의 위대한 업적도 모두 인민주권이라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공부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분명 인민주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민’이라는 단어로부터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아니, 그렇게 느끼도록 교육되어 왔다. 말할 것도 없이 남북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 하에서 선별된 단어군(群) 가운데 ‘인민’이 배제되는 방식으로만 사용된 탓일 게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해 반공을 주인-기표로 내세운 사회에서 인민은 ‘국민’에 의해 억압되고 밀려남으로써만 그 의미를 간신히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떤 점에서 보면 국민(nation)이야말로 더욱 섬뜩한 단어인데, 일제시대부터 이 단어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교육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럼 인민과 국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민이란 도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가? 혹은 우리는 인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2.
알랭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주디스 버틀러,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사드리 키아리, 피에르 부르디외. <인민이란 무엇인가>의 저자들은 대부분 한국 지식사회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쟁쟁한 학자들이다. 한국어를 모르는 그들이 ‘인민’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에 착안하여 이 책을 집필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민이란 무엇인가?”라는 표제의 질문에는 그들이 무엇을 문제삼고 있는지 정확히 드러나 있다. 그것은 인민이라는 단어가 일상어로 널리 쓰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실체에 대해, 그것의 실제적 의미에 대해 한번도 성찰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인민을 공허한 기호로서만 인식하며, 이는 우리의 정치적 삶에 심각한 혼란과 치명적인 무기력을 낳고 만다. 천천히 따라가 보자.

인민이란 무엇인가? 한국어의 어감이 조금 무겁다면 영어로 돌려 생각해 보자. 인민은 ‘people’을 옮긴 말이다. 경우에 따라 ‘대중’ ‘군중’ ‘민중’ 등으로도 번역되지만, 단적으로 말해 그냥 ‘사람들’이다. 그럼 어떤 사람들인가? 당장 길거리에 나가보면 마주치는 장삼이사(張三李四), 갑남을녀(甲男乙女)가 바로 그들이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특색없는 이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서 정의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시내버스에 승차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 역시 ‘people’임에 분명하지만, 그들을 어떤 근거로 하나의 ‘people’이라 명명할 것인가? 혹은 야구장에 모인 관중들, 극장의 관객들, 도서관 이용자들, 아니면 지금 인터넷 기사를 읽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의 집단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막연하게 집단적으로만 명명가능하고 구체적인 실존을 물을 때 미궁에 빠지는 ‘people’, 그들이 곧 인민이다. 이처럼 규정할 수 없고 모호하기만 한 존재를 어떻게 주권의 주체라고 말하는 걸까? 민주주의가 인민(demos)의 통치(kratia)에서 유래했다고 할 때, 이렇게 실체없는 존재를 어떻게 정치적 행위의 중심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인민은 국민과 어떻게 구별되며 어느 쪽이 정치의 근본적인 핵심에 가까이 있는 것일까?

군주가 신의 지엄한 명령으로 주권을 위임받았다고 믿어졌던 시대에는 인민이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인민의 생각이 어떠했건 통치자로서의 군주의 의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사회로 접어들며 정치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인민을 소환하고 동원하는 데 두어진다. 군주의 절대권이 왕권신수설 따위로 보장되지 않을 때 역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인민의 동의였던 것이다. 통치자는 더 이상 자신의 정당성을 종교적 토대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인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 여기기 시작했고, 그로써 자신의 현세적 권위의 정당성을 옹호하고자 했다. 프러시아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2세가 자신을 ‘국가의 제1의 충복’이라 자임한 것도 따지고 보면 인민을 제2, 제3의 충복들로 호출하기 위함이었다.

슬라보예 지젝은 계몽군주들의 이러한 전략에서 재미있는 순환논법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인민은 국가의 주체(subject)인 동시에 국가를 위해 복무해야 하는 신민(subject)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자 노예라는 이상한 역설이 그것이다. 왜 이런 역설이 성립하는가? 왜냐면 국가의 근거가 되는 인민이 실체없는 모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모호하다면 그것의 지지를 받는 국가가 모호할 수밖에 없고, 국가가 복무할 대상 역시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인민이 모호하기에 국가가 인민에 대한 복무를 방기하거나 포기하는 게 이상할리 없다. 하지만 그런 만큼 그 국가는 인민의 지지를 받는다고 볼 수도 없게 될 것이다.

이 이상한 역설을 이해하려면 국민과 인민의 차이를 좀 분명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국민은 근대국가체제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이자 그 부산물이었다. 근대국가는 인민에게 국가적 귀속성을 부여함으로써 국민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렇게 나타난 국민이 우리가 아는 국적인들이다.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우리는 특정한 국적에 귀속됨으로써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그 정체성을 향유하게 된다.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나라없는 백성의 수난사’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국가를 국민에게 선험적으로 가정된 실존조건으로 받아들일 때 빠지는 함정은 국가없이 국민이 존재할 수 없다는 폭력적인 사고이다. 이에 따를 때 국가는 부정할 수 없는 대상이 되기에 우리는 국가를 어떻게든 용인해야 하고 그것을 뒤엎는 혁명을 거부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 이전의 인민은 마치 사회계약론에서 계약 이전의 자연상태처럼 ‘필요한 가정’으로만 다루어질 뿐 실제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인민이 모호하고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이 설명이 이론적이고 복잡해서 이해하기 어렵다면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자. 가령 난민(難民)은 어떨까? 난민이 국가를 상실한 채 유랑하는 인민을 말한다면, 그들의 인권은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을까? 베트남의 보트피플이나 국가수립 이전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혹은 국권상실기의 조선인들을 생각해 보자. 이념적으로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즉 법과 법적용의 문제에서 사정은 다르다.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들은 그 어떤 실정적 보호도 받기 어렵다. 생각해 보라. 모든 법은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난민은 자국민의 바깥에 있다. 그렇다면 법적용의 대상이 아니며 당연히 보호의 대상도 아닌 것이다. 모든 국민국가들의 외부에 남겨진 채 보호받을 수 없는 인민, 그들이 난민인 것이다. 이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인민은 이론적·이념적으로 국민보다 선행하지만 실제로 국민이 아니면 인민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국민이 아니면 보편적 인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역설! 그렇다면 인민이란 한낱 허구적인 이념이나 개념에 불과한 걸까?

3.
이 책의 저자들은 이러한 인민의 모호성과 규정불가능성, 비실체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답변하려고 한다. 그들은 인민의 관념이 갖는 부정성을 충분히 직시하고 있으며, 그러한 부정성으로부터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를 끌어내고자 부심하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는 국민과 혼용되는 인민과 그 자체로서의 인민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정치에서 단일한 실체이자 전체로 규정된 인민은 말 그대로의 인민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화된 인민, 즉 국민으로서 이미 예속된 인민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인민’과 같은 표현이 그러하다. 이는 ‘프랑스 국민’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서 국가적 정체성과 인민을 포개어 놓고, 그로써 근대의 국가주의에 인민을 예속시키는 언어적 장치라는 말이다. 그 치명적 결과는 인민과 국가를 처음부터 불가분의 존재로 묶어 놓고 국가의 운명에 인민의 운명을 종속시킨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국가가 정해둔 선거절차, 법적 제도, 사회적 장치들에 대해 예속된 인민인 국민은 처음부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의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존립할 수 없게 되고, 국가의 부재는 곧 국민 자신의 부재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로부터 인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스스로 비국민이 되는 것, 그럼으로써 국가의 소멸이 불가피하게 만들고 국민이라는 사슬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국민 아닌 인민, 바디우는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인민’이 (재)탄생하는 길이라 단언한다.

주디스 버틀러는 인민이란 무엇인지, 그 실재성에 관해 더 도발적인 질문과 답변을 준비한다. 본연의 인민, 그것이 국민 이전의 것이든 혹은 허구적인 논리적 가정에 불과하든, 본래적인 인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우리는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어떤 주체성을 발견하거나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정치적인 주체성을 보유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그것을 발화할 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이 그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 그 때가 바로 정치적 주체로서 인민이 탄생하는 시점이다. 광우병 반대집회가 한창이던 2008년 서울 도심의 광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었다. 그들의 직업과 연령, 성별, 의지와 욕망 등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고, 사실상 하나로 통일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노래했을 때, 이 장삼이사에 갑남을녀들은 정치적 주체로 변형되었다. 일상에서는 지리멸렬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소시민들이었어도, 함께 광장에 운집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그들은 인민으로 재탄생했던 것이다. 그것이 발화의 힘이며, 발화를 통한 자기 정의이다. 버틀러는 인민주권이 천부의 권리마냥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 인민 자신이 자기 자신을 호명함으로써 성립시키는 수행적 행위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인민을 어떤 위대한 이념적인 것으로 쉽게 간주하지는 말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인민은 언제나 감각적인 존재로서 우리 앞에 재현된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에 관해 상술하려는 역사가가 위대한 변혁의 주체로서 인민을 아무리 강조한다고 해도, 그가 보는 것은 사서(史書)에 기록/재현된 인민의 이미지다. 회화나 영화, 문학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우리가 목격하는 인민은 감각의 형식을 통해 재현된 이미지이며, 그것은 인민의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잠재성이다. 고야의 학살당하는 인민의 이미지를 보라. 무엇이 느껴지는가? 감각에 포착된 인민의 모습은 보잘 것 없다. 그들은 초라하고 비참하고 때론 비루하다. 그러나 이러한 실제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민의 실상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고 감각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지 못한 채 인민의 위대함을 이념적으로만 떠든다면, 우리는 영원히 인민의 허상만을 좇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이름인 사드리 키아리의 지적은 보다 구체적이다. 그는 역사적으로 유럽 내에 만연했고, 지금도 진행중인 인종주의의 벽과 인민의 관계를 조명하고 싶어한다. 추상적으로 인민의 권리와 평등, 자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인민이 함축하는 인종적 차별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실상 인민주권의 개념이란 것도 인종적 차이를 전제로 한 계몽사상가들에 의해 고안된 이념에 불과하며, 이를 돌파하지 못할 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의 추상성에 함몰될 위험이 있다. 아무리 민주주의가 꽃피웠다 해도 유럽에서 인민을 말하는 것은 아직 백인과 유럽인, 기독교인을 전제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국민국가의 정치학을 무비판적으로 반복하는 일이 되고 만다. 키아리는 좌파정치의 함정을 여기서 찾는다. 우파정당에 반대하는 좌파정당은 종종 국민적 가치와 권익에 호소하곤 하는데, 그것은 결국 국민과 국가를 혼동함으로써 좌파를 국가주의 정치학에 투항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나치즘이 좌파적 이념을 공유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게 국가주의로 회수되었을 때 대학살과 세계대전은 필연적이었다.

자크 랑시에르는 포퓰리즘이란 무엇인지 조심스레 캐묻는다. 한국에서도 대단히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이 단어는 본래 인민의 의지에 가장 적합한 정치이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점차 부정적으로 사용되며 변질된 이래, 이제 포퓰리즘은 대중영합주의를 가리키는 가장 저열한 정치술수를 지칭하고 있다. 물론 대중의 요구를 무조건 듣는 것도 안 듣는 것도 능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다른 함정이 있다. 문제는 대중과 실제로 영합하는지 아닌지가 아닌 탓이다. 복지에 대한 대중의 요구, 가령 무상급식을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포퓰리스트라 부른다면 그것은 어떤 뜻인가? 이는 무엇보다도 낙인찍기가 될 것이며, 그 결과 그 어떤 대중적 주장도 무의미하고 부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정치에 대한 환멸, 허무주의가 포퓰리즘의 궁극적 결론인 것이다. 랑시에르의 주장은 포퓰리즘이 옳은가 그른가를 가리는 데 있지 않다. 그가 주시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라는 낙인의 효과다. 결국 아무것도 신뢰하지 않고 아무것도 행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정치의 장으로부터 후퇴하게 되고, 그로써 파시즘이 도래할 가장 좋은 조건을 자기도 모르게 마련할 것이다. “정치란 다 썩은 거야.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어”라고 냉소하는 순간, 우리는 파시스트들에게 정치의 무대를 순순히 넘겨주는 커다란 우(愚)를 범할지도 모른다.

4.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린 초등학생의 눈에 ‘인민’이라는 단어가 그토록 섬뜩하게 여겨졌던 것은 단지 어리석은 치기에 불과한 걸까? 다 큰 어른이 되어서 ‘인민의 행복’이란 단어에 대해 극렬히 반발하는 것은 단지 편협하게 길러진 정신의 소치일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정치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무엇보다도 인민에 대해 아무것도 사고할 수 없도록 길러진 것이 아닐까?

해방 이후 50년간 한국의 정치·사회교육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판단력을 지닌 시민육성보다는 순종적인 국민형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한국의 국가제도에 대해 배울 때 우리는 삼권분립이나 정당제도에 관해 공부하지만, 실상 그 구조를 아는 데만 집중할 뿐 어떻게 해야 그 구조를 개혁하거나 해체하고 새로 구성할 것인지 고민하는 법은 전혀 배우지 않는다. ‘국민’으로만 길러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호명하는 방법은 모른 채, ‘국가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식으로 국가에 호출되는 방식에 더 익숙하다. 그 결과,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제대로 고민하거나 행동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버틀러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인민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까닭은 인민이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 인민이었던 적이 없다!

인민이란 단어에 그토록 섬뜩한 느낌이나 공포, 혐오나 증오를 보이는 것은 이 단어에 이미 이데올로기적 분별을 내리고, 그에 따라 수용과 거부의 판단력이 작동해서 일 것이다. 언어가 인간의 가치판단을 반영하고 그에 따라 사용되는 것이라면, 특정 사회가 어떤 단어를 즐겨 쓰거나 배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 단어의 의미에 대해 되물어 보고 더 진전된 사고를 금지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국민에 대한 우리의 사고가 멈춘 곳에 인민이 있고, 우리가 인민에 대해 지금 사고를 시작해야 하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이 책의 저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듯, “인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애초에 정답을 전제하거나 추구하는 물음이 아니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정확히 지적했듯, 어떤 용어이건 배제와 포함의 이중적 분할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분할작용을 통해 어떤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대체 어떤 효과를 만들어 내는지, 예컨대 인민이라는 단어가 좌파와 우파, 지식인과 대중,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어떻게 의미분할을 겪으며 그로써 어떤 삶의 변형을 불러일으키는지 면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긴요하다. 인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그 탐구와 과정에서 드러날지 모른다. 따라서 그 과정은 우리가 스스로를 인민으로 호명하는 과정, 우리가 진정 인민이 되는 과정과 나란히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4, 2014년 3월, 최진석, 이화인문과학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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