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3-04 10:33
[이승범 서평] 이기적 유전자를 넘어서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28,248  


도서정보
저자명 리처드 도킨스
저서명 이기적 유전자
출판사 을유문화사
연도(ISBN) 2010(9788932471631)
1. 들어가며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는 매우 유명한 책이다. 1978년에 출간된 이래 40년 가까이 되어가지만, 새롭게 다듬어진 개정판이 십여 년 간격으로 나오면서 꾸준히 읽히고 있다. 유전자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전 생물학사를 설명하는 일의적 방식이 매우 인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이 주는 선정성이 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이 책의 흥행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래서 주제를 함축하고 있는 제목부터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이기적 유전자인가? 이기적 DNA나 이기적 염색체도 아니고 혹은 이기적 개체도 아니고, 왜 이기적 유전자일까?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킨스가 유전자를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를 주시해야 한다. 
 
먼저 유전물질을 뜻하면서 엇비슷해 보이는 DNA나 유전자, 염색체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자.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면 전체적으로는 투명에 가깝게 보일뿐 유전물질에 해당하는 것은 관찰되지 않는다. 세포의 특정시기에 시약에 의해 염색(!)되어야만 뚜렷이 보인다고 해서 바로 ‘염색체’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러니까 염색체란 유전물질의 현미경적 소견에서 유래된 말이다. 상대적으로 가장 거시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DNA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에 의해 그 구조가 규명이 되었는데, 유전물질을 분자적 차원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면 되겠다.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DNA의 기능적 (최소) 단위라고 보면 무방하다. 일부 학자는 단일 유전자가 1개의 단백질을 만든다고 정의하면서, 그것은 시스트론(cistron)으로 부른다. 


2. ‘유전자’의 의미
 
그러나 이 책에서 도킨스는 ‘유전자’를 단순히 단일 시스트론을 가리키는 개념보다는 좀 더 미묘하게 쓰고 있다. 단백질 하나를 만드는 시스트론도 교차 반응에 의해 쪼개질 수 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최소단위로 쓰기에는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모호하고 유연하게 유전자를 정의한다. 
 
그가 정의하는 유전자란 자연선택의 단위로서 기능적 역할을 하면서 긴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작은 유전 단위이다. 복제 충실도가 뛰어난 자기 복제자가 바로 유전자이며 개체의 부분적인 형질이나 행태로서 기능한다. 그것은 시스트론 보다 작은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다수의 시스트론들이 모여서 하나의 기능을 나타낼 때도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개체는 자손을 낳고 사라지지만, 유전자는 세대와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불멸의 물질이다. 개체로서 존재하는 우리는 자신의 지속을 위해서 유전자를 이용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히려 유전자가 자기 지속을 위해서 개체라는 운반자를 이용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이기적 유전자론은 설명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인간도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이용되는 거대한 운반기계에 불과하다. 불멸의 코일인 유전자야 말로 생명진화의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낼 개념이라는 것이 도킨스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는 이 개념을 이용해서 동물들 간의 공격행동, 혈연간의 선택, 개체수를 조절하는 가족계획, 세대 간의 다툼, 암수 간의 미묘한 싸움까지 설명한다. 게다가 꿀벌 등에서 나타나는 사회성 동물의 이타성까지 유전자의 관점으로 정량적이며 일관되게 설명해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수학적 모델에 기반으로 한 논지를 꾸준히 따라가다 보면, 그의 선정적 주장 및 근거와 탄탄한 지적 기반의 결합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상당한 지적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가 여전히 진화론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저서로 각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3. ‘이기성’의 의미

40억 년 전 스스로 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 대양에 나타났고, 그 장구한 시간을 거치면서 이 복제자는 탁월한 생존술을 갖게 되었다. 유전자라는 이름을 가진 그것은 수천 만 년 이상 격심한 세계 속에서 생을 계속하여 왔다. 이 사실은 유전자에게 특별한 성질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바로 ‘무정한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한 유전자에게 기대되는 특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운명적 이기성은 이기적인 개체 행동의 원인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이기성’은 생명체의 의도나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의인화시켜 표현한 것일 뿐 ‘이기적 유전자’를 의식을 가진 목적 지향적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구한 세월동안 지속적으로 살아남는 것들이 갖는 (정보적) 패턴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기 유지적이고 증식적인 패턴을 갖는다. 
 
유전자는 유전자 자체의 유지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며, 생물의 몸을 빌려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물의 이기적 행동도 이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타적 행동처럼 보이는 것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에 불과할 뿐이다.
 
자기 증식적 패턴을 가진 유전자가 모든 생명현상에 우선한다는 도킨스의 세계관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킨스가 주장하는 ‘이기적 유전자’론에는 ‘유전자 환원론’과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와 결정론에는 인간의 고유하고 자연스런 감정을 파괴하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런 세계관 속에서는 우리가 믿고 싶은 보편적인 사랑이라든가 인류애라든가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어찌 보면 단순하고 획일적인 ‘이기적 유전자’의 개념을 주장하는 것 같지만, 문제는 그의 설명이 너무 그럴싸하다는데 있다. 얼토당토않다면 그것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겠지만, 학문적 설득력을 통한 높은 개연성은 일부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4.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개념으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문제를 분석한다. 유전자의 운명적 패턴인 이기성은 결국 개체 레벨에도 필연적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사회가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이타주의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의 논리로 설명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타주의는 위장된 이기주의의 한 양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먼저 논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 도킨스가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어떻게 정의내리고 시작하는지를 알아보자.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정의는 마음속의 것이 아니라 행동상의 것이다. 전통적인 윤리적 구분법에 따르면 도킨스는 동기 중심이 아니라 결과 중심의 윤리적 입장에서 얘기하고 있다. 과학적 방식에서는 아무래도 행동의 동기에 대한 접근법보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접근법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행위의 결과가 이타행위자의 생존 가능성을 낮추고 동시에 수익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주면 이것을 ‘이타 행위’로 정의한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표면상 이타주의자의 죽을 가능성을 높이고 동시에 수익자의 장수의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잘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동물 생활은 대부분을 번식에 이바지하고 있고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이타적 자기희생 행위는 어미가 새끼에게 하는 것이다. 자기 유전자의 보존을 위한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친족에 대한 이타적 행위와 그것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혈연 선택설도 철저하게 이기적 유전자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좀 더 거시적으로 살펴보면, 큰 집단 내의 이타주의는 집단 간의 이기주의를 동반할 때가 많다. 같은 고향사람들끼리 같은 학교출신끼리의 협동은 지연이나 학연 등의 배타적 행태의 이면일 뿐이다. 애국적 희생을 장려하는 국가는 이타적 자기희생의 주요한 수익자인데, 젊은이는 자기 나라 전체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동시에 그들은 타국인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을 살상하도록 장려 받는다. 인종차별이나 애국심에 반대하여 동지의식의 대상을 인류 전체로 대치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타주의 대상을 인류 전체로 확대하려는 진보적인 인도주의자들은 흥미로운 결론을 낳는다. 즉 그들은 생태계 내에서 ‘(호모 사피엔스) 종의 이익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들은 이타주의를 더욱 확산시켜서 다른 종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경멸한다. 그들에게는 애완동물에 대해서는 애지중지하며 아낌없이 투자하면서 굶어 죽는 사람들에 무심한 행태에 분노를 보이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타성이란, ‘우리’라는 보호해야 할 범위를 설정하는데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지, 그 ‘우리 아닌 타자’에 대한 배타성과 ‘우리’에 대한 이기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타주의란 분명하게 정의내리기 힘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유는 그 이면에는 항상 이기성이 실제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윤리의 명백함을 믿으며 선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당혹감을 주는 통찰이 아닐 수 없다. 
 
 
5. 혈연 선택설 vs 집단 선택설

도킨스의 이타주의에 대한 비판은 섬찟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다분히 추상적이며 일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시에서 거시까지 층위별로 존재하는 ‘집합체’(분자, 유전자에서 시작해 개체, 집단, 국가, 글로벌 사회까지)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냐에 따라 정반대의 이중적 해석이 가능한 문제인 것이다. 그의 이기성 개념을 통한 이타주의의 비판은 온전하게 그 역으로도 설명될 여지가 있다. 모든 이기성 속에는 필연적으로 이타주의나 협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이다. 흔하게 얘기되는 개체의 이기성 또한 같은 운반체에 올라탄 유전자들끼리의 효율적 협동을 요구하지 않는가? 집합체의 지향성과 무관한 채로 순수한 자기 증식성만을 고집하는 유전자 덩어리를 우리는 암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도킨스는 이타성을 분명하게 정의내리는 것이 힘들다고 비판했지만, 그만큼 이기성도 분명하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것이다.
 
이기주의 대 이타주의 논쟁보다 더 핵심적인 것이 있다. 바로 진화에서 선택의 수준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도킨스는 유전자 선택설의 입장에 서 있다. 유전자 선택설이 사회성 동물의 행태에 적용될 때 혈연 선택설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혈연 선택설의 반대 입장은 집단 선택설이다. ‘혈연 선택설 대 집단 선택설’의 논쟁을 처음 접할 때는, 주목을 끌지 못하는 이러한 논쟁을 왜 자꾸 소개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논의를 따라가면서는 이들이 관점만 다를 뿐 동일한 생물학적 현상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결국 하나의 통일된 이론으로 결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그 둘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화해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다. 혈연 선택설 대 집단 선택설의 이론적 논쟁은 학자들을 격하게 할 만큼 충분히 의미 있는 중요한 논쟁이다. 그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는가라는 근본적인 가치적 해석의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론을 사회성 동물에까지 확장하여 설명하고자 하면서 해밀턴의 혈연 선택설을 끌어온다. 그러면서 기존에 지배적이었던 집단 선택설을 반박한다. 이 책을 통해서 도킨스는 많은 분량을 할애해가며 여러 논리와 예시를 통해 반복적으로 집단 선택설을 공박한다. (사회성 동물의) 자연 선택의 수준이 혈연인가 집단인가라는 문제인데, 이는 매우 추상적 논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마도 정치적 관점과 연동되기 때문일 것이다. 선택의 수준을 둘러싼 논쟁은 사회 생물학 논쟁 중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라 자세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즉 이 부분은 매우 분량이 길어질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개체들이 소속된 집단의 행복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개체군은 각 개체가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우선하는 다른 경쟁 개체군보다 아마도 절멸 위험이 적을 것이다. 이런 진화적 이익을 통해 세계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에 의해 대부분 점령되게 된다. 이것이 집단 선택설이다. 도킨스는 집단 선택설이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은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갖고 있는 윤리적 정치적 이상과 조화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집단 선택설에 대한 개체 선택설 주장자의 통상적인 공박은 다음과 같다(도킨스는 유전자 선택론자이지만 때로는 개체 선택론자의 논의를 이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편다. 그래서 개체 선택론자의 여기서의 주장은 도킨스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타주의자 집단 중에는 희생을 거부하는 소수파가 있게 마련이다. 집단 내의 이타주의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개체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개체는 아마도 다른 개체보다 생존의 기회나 새끼를 낳을 가능성이 많아진다. 그리고 그 새끼는 이기적인 성질을 이어받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이 수십 세대를 거치면 이 이타적 집단에는 이기적인 개체가 만연하게 되어 이기적인 집단과 구별이 어렵게 된다. 이타적 집단은 한 방울의 이기적 개체에 의해 쉽게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집단 선택설에서 주장하는 이타적 행태는 진화적으로 안정되게 자리 잡기 힘들다는 주장이다. 이제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이 논쟁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6. 꿀벌의 자기희생과 진화론의 위기

꿀벌은 꿀도둑을 침으로 쏘고 그 싸움에서 거의 확실하게 죽는다. 꿀벌의 이러한 자기희생적인 행동은 고도의 사회성을 가진 곤충의 극적인 예시이다. 꿀벌 이외에도 장수말벌류, 개미류, 그리고 흰개미 등이 진사회성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놀랄만한 이타적인 협력 행동을 보여준다. 적을 찌르는 자살적인 행위만이 아니다. 여왕벌이나 여왕개미 이외에 일벌레들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암컷인 꿀벌의 경우는 여왕벌과 유전적으로 동일하다. 단지 키워지는 방식(먹이 등)이 다를 뿐이다. 일벌레의 경우 대부분(75%)이 암컷인데, 이들은 자기 자식을 낳으려고 개체군 밖으로 나가 보금자리를 새롭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경이로운 이타적인 기계가 되어 여왕의 출산을 돕고, 육아를 하고, 적들과 싸우고, 먹이를 구한다. 인간의 감각으로 말하면 그들에게는 개체로서의 생활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일벌레 개체들의 자포자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벌레들의 사회적 행동은 과연 무슨 진화적 이득이 있기에 유지되고 있을까?
 
다윈도 『종의 기원』에서 이 같은 문제를 고민했다. 그는 아이를 낳지 않는 일개미 개체가 어떻게 자연 선택을 통해 진화할 수 있었는지 오랫동안 고심했다. 그는 이 난제가 “처음에는 난공불락처럼 보였고, 사실상 내 이론 전체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러다가 다윈은 개미 군체가 한 가족이므로, 자연 선택은 (개체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특정 구성원의 불임 상태를 일으키는 구조나 본능이 군체에 유리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막연히 집단 선택이라는 우회로를 택했던 것이다.
 
월리엄 해밀턴은 1964년에 혈연 선택 개념으로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극적인 돌파구를 열었다. 해밀턴이 발표한 사회생물학의 주요 공식은 r×b>c였다. 이타주의자가 치르는 비용 c보다 수혜자가 받는 혜택 b에 (수혜자와 이타주의자의) 근친도 r을 곱한 값이 크다면, 집단 내에서 그 이타주의자의 유전자 빈도가 증가한다는 의미이다. 해밀턴은 근친도 r을 공통 혈통의 결과로서 이타주의자와 수혜자가 공유하는 유전자의 비율이라는 의미로 썼다(ex. 형제나 자매의 근친도 r=1/2이다. 이때 자기를 희생하면서(c=1) 형제자매 3명을 구하는 행위는(r×b=1/2×3=1.5)는 r×b>c에 해당하므로 진화할 것이다). 
 
해밀턴의 공식이 주목을 끌게 된 것은 꿀벌 등이 반수배수성이라는 특이한 성 결정 방식을 갖는다는 것이 알려지면서였다. 이에 따르면 여왕벌이 낳는 수정란이 암컷이 되고 미수정란이 수컷이 된다. 그 결과 딸과 어미 사이(r=1/2)보다 자매들 사이의 근친도(r=3/4)가 더 크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미수정란으로부터 만들어진 부친은 유전자가 반만 존재하므로 감수분열 없이 유전자를 전부 후손으로 전한다. 그래서 부친으로부터 받는 유전자를 자매가 공유할 확률은 100%이고, 모친으로부터 유래하는 유전자가 동일할 확률은 50%이다. 그러므로 자매간의 근친도는 1/2×1(부친유전자)+1/2×1/2(모친유전자)에 따라 3/4가 된다. 어미인 여왕벌보다 자매들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이 더 높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꿀벌의 암컷은 자기가 직접 어미가 되어 근친도 1/2에 불과한 자손을 생산하는 것보다, 모친을 봉양하면서 근친도가 더 높은 자매들을 생산하는 것이 자기 유전자 증식에 더 유리하게 된다. 일벌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암컷 꿀벌의 사회성은 이렇게 진화 했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밀턴은 진사회성 군체가 통상적인 이배수체 성 결정 방식을 가진 종보다 반수배수성의 방식을 가진 꿀벌 등에서 더 자주 진화하는 것으로 예상된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진사회성이 진화했다고 알려진 종은 모두 이에 속했다. 반수배수성과 진사회성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1970~80년대에는 표준적 논리가 되었다. 혈연 선택의 원리에서 진사회성의 출현까지 논리적으로 연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최근 40년 동안, 고등한 사회적 행동의 진화를 낳은 궁극적 원인에 관한 표준적 설명은 이 같은 혈연 선택설이었다. 유전자의 유사성을 기반으로 한 혈연이 사회적 행동의 기원에 핵심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이 이론에서는 집단 구성원들이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이타적이고 협력적일 가능성이 높다.

 
7. 집단 선택설의 반론

혈연 선택설의 논리와 그것이 역사적으로 성공했던 과정을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에 대한 최근 업데이트된 따끈따끈한 반론을 소개해 보고자한다. 이것은 에드워드 윌슨이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에서 펼친 논의이다. 한때 혈연 선택설 옹호자였던 윌슨은 이 책에서는 혈연 선택설이 더 이상 타당한 주장이 아니라고 하면서, 최신의 과학적 결과들을 종합하여 집단 선택설을 옹호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반수배수성과 진사회성 간의 인과적 관련성 가설이 몰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진사회성 동물중 하나인 흰개미는 처음부터 이 설명에 들어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배수체 성 결정 방식을 따르면서 진사회성을 보이는 종들이 (반수배수성의 진사회성 종들보다) 더 많이 발견되었다. 그 결과 반수배수성과 진사회성의 관계는 통계적 유의성이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한 혈연 선택설의 기본 가정들에 맞지 않는 증거들이 추가로 쌓여 갔다. 진사회성 형질이라고 추정되는 것(유전적 근친성이 높은 종)이 동물계의 역사 내내 풍부히 존재했음에도, 진사회성을 획득한 종이 드물다는 것이다. 근친도가 가능한 최고 수준(r=1)인 클론의 경우에 진사회성으로 나아간 사례는 단 한 종도 없었다.
 
가까운 혈연관계에서 유전적 근친도를 상쇄하는 선택압들도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개미의 일부 종은 더 큰 유전적 다양성을 선호한다. 다양성이 군체 내의 분업을 더 분명하게하거나 질병의 내성을 강화하는 진화적 이득을 주기 때문이다. 상쇄하는 힘은 대부분 집단 선택을 통해 진화한다. 진사회성 곤충에서는 집단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진화하는데, 이 선택은 개체 선택보다 높은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이와 같은 윌슨의 반론은 유전자의 근친도에 따른 동물들의 수많은 행태들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동물계에서 진사회성 군체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혈연의 영향이 그다지 인과성이 없다는 것이다. 


8. 마치며

앞서 집단 선택설에 대한 개체 선택설의 공박으로 돌아가 보자. 이타적 개체들로 구성된 집단이 있다고 했을 때, 이 집단에 내부적 돌연변이든 외부에서 흘러 들어온 것이든 이기적 개체가 들어서면 오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기적 개체가 취하는 생존 기회의 확대라는 작은 이득은 수백 수천의 세대를 거쳐 눈덩이처럼 커져서 이타적 집단을 다른 이기적 개체들의 집단과 별 차이 없게 만든다고 도킨스는 주장했다. 그것은 도킨스가 이 책에서 중요하게 활용하고 있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volutionary Stable Strategy, ESS)이라는 개념에 비추어 봤을 때, 집단 선택설의 방식으로 설명되는 이타적 행태는 지속되기 힘든 취약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진화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특정한 행태나 경향은 손쉽게 와해되거나 다른 방식으로 변질될 것이라는 주장을 수학적 방식과 ESS를 활용해 탄탄하게 제시한다.
 
이런 공박은 일견 치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주장의 설득력이나 한계는 그 설명이 갖고 있는 모델의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이 공박의 문제는, 오직 생태계에서 이타주의자 집단이 나홀로 존재한다는 모델을 전제한다. 그러나 자연계에는 수백 수천의 집단이 서로 경쟁하며 진화적 우월을 다투고 있다. 개체 선택설이 전제하는 모델보다는 집단 선택설의 모델이 생태계의 현실에 더 가깝다. 개체 선택설의 공박에서 문제점은 하나의 집단 밖에서 엄연히 존재하는 타집단을 완전히 배제했을 때만 가능한 허구적인 모델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집단 선택설은 그럼 대체 무엇을 함의하는가? 집단을 위해 희생할 개체들을 알아서 만드는 보이지 않는 대타자를 상정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집단 선택설의 의미는 개체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개체들만의 평균적 속성으로는 환원할 수 없는 창발적 속성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집단들 간의 경쟁 속에 혈연에 기반한 지향성 이외에 새로운 선택압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집단 선택설은 그 집단 내에서 말 그대로의 (혈연적이거나 유전자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한 이타성이 존재할 수 있는 생물학적 토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혈연 선택설에서 ‘이기성’은 유전자에 각인된 운명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집단 선택설에서는 이기성만이 아닌 어느 정도의 ‘이타성’이 온전한 형태로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런 관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 본성에 대한 오래된 물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온전히 이기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존재인가?’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view of Books, Vol.4, No.3, 2016년 3월, 이승범 가정의학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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