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6-02-29 17:16
[2016년 3월, 이달의 서평] 존엄성, 그 역사와 의미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8,632  


도서정보
저자명 마이클 로젠
저서명 Dignity
출판사 Harvard University P
연도(ISBN) 2012(978-0674064430)
[2016년 3월, 이달의 서평] 존엄성, 그 역사와 의미

1.
이 책은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 교수 마이클 로젠이 2012년에 출간한 책 ‘Dignity: Its History and Meaning’이다. 로젠의 책은 한국에서 지금껏 소개된 적이 없고, 마이클 로젠이라는 학자도 한국에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것이 이 책이나 이 학자가 소개될 가치가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 책은 아직 우리에게 낯선 마이클 로젠이라는 학자의 사유를 소개하기에 내용면에서나 형식면에서나 매우 적절해 보인다. 비교적 얇으면서도 가볍지 않고, 실제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높은 수준의 이론적 추상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
이 책의 저자 마이클 로젠은 1952년에 영국에서 태어났다. 1970년에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 정치학, 철학, 경제학을 공부했고, 그후 2년간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연구했으며,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1980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헤겔의 변증법과 그에 대한 비판에 관한 것인데, 지도교수가 바로 저명한 헤겔연구자이자 공동체주의철학자 찰스 테일러이다. 로젠은 그후 20여 년 동안 옥스퍼드 대학과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서 정치학과 철학을 가르쳤고, 2006년부터 지금까지 하버드 대학 정치학과에서 정치철학(그가 선호하는 표현으로는 ‘정치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주요 관심 분야는 독일 관념론, 헤겔, 마르크스, 아도르노, 그리고 롤즈와 현대 정치철학이다. 1982년에 헤겔의 변증법에 관한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책으로 펴냈고, 1993년에 칸트의 󰡔유고집(Opus Postumum)󰡕을 번역했으며, 1996년에는 허위의식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책 󰡔자발적 예속(On Voluntary Servitude)󰡕을 출간했다. 그 밖에도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리 많지 않은 저술과 논문에서 독일적 전통의 사회철학에 대한 저자의 관심이 대체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책 󰡔존엄성󰡕에서도 유럽 대륙철학에 대한 저자의 깊은 이해와 관심이 잘 드러나고 있다.

3.
이 책은 ‘존엄성’에 관한 것이다. 존엄성은 유럽어의 번역어이다. 물론 ‘존엄(尊嚴)’이라는 한자어가 과거에 이 땅에서 한때 지녔던 구별되는 의미가 있을 것이고, 오늘날 이 땅에서 일상어 ‘존엄(성)’이 영어 ‘dignity’와 다르게 지니는 의미가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존엄성은 기본적으로 번역어이다. 한국어 ‘존엄(성)’은 서양에서 ‘dignitas/dignity’라는 단어가 함축할 수 있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의미를 ― 그것을 이 책에서 저자는 세 개의 가닥으로 구분하여 제시하는데 ―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이 책에서는 ‘dignity’를 맥락에 따라 ‘존엄’으로도, ‘위엄’으로도, 때로는 ‘품위’로도 옮겼다. 한국어 ‘존엄(성)’만으로 이런 개념사적 논의와 정치이론적 분석을 전개한다면 그것도 좋겠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언어가 이미 번역어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이 모두, 서구를 힘의 중심으로 하는 지구화한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작업이 오히려 우리의 실제 삶에 대해 배반적일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때에 한국어 ‘존엄(성)’뿐만 아니라 영어 ‘dignity’를 동시에 그 속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사실, 저자 역시 영어권 독자들에게 ‘dignity’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는 의미의 차이들을 의식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니, 거기에 한국어와 영어/유럽어의 차이를 추가하라는 것이 그리 큰 요구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차이를 의식할 때에 비로소 우리에게 사고 작용이 일어난다는 점에서 ― 추천자인 디터 그림도 얘기했지만 ― 이 책은 우리의 지성을 매우 흥미로운 방식으로 자극하는, 사유를 촉발하는 책이다. 

4.
최근 유럽에서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실 사건은 진작부터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그 동안 계속 벌어지고 있던 사건이 비로소 대중의 직접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2015년 9월 2일, 터키의 어느 바닷가에서 세 살배기 아이가 숨진 채로 엎드려 있는 것이 발견된 것이다. 그 모습은 곧 언론매체를 통해 전 세계에 퍼졌고, 시리아 내전과 그로 인한 난민 문제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난민들의 행렬이 향했던 곳이 유럽이었기 때문에 유럽의 시민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고, 유럽 각국의 정상들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2015년 여름 이후로 난민의 수용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언급된 국가는 독일이었고, 인물은 독일의 총리 앙겔라 메르켈이었다. 독일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이미 시리아 난민을 모두 자국에 수용하겠다고 선언했었다. 예상을 훨씬 웃도는 규모로 밀려드는 난민들 때문에 지금은 독일 내에서도 전면적인 난민 수용 정책의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당시에는 메르켈 총리의 그 파격적인 선언에 많은 사람들이 지지를 보냈다. 난민들을 당장 그들의 나라로 돌려보내라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 메르켈 총리는 단호하게 “그런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민사회 내에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 시민들이 보여준 난민에 대한 환영과, 이런 ‘진보적’ 정책이 보수적인 기독교민주연합(CDU) 소속의 총리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 열쇠는 바로 독일의 기본법 제1조 1항에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자국 국민뿐만 아니라 인간 일반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일을 자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는 헌법 정신을 빼고는 독일 사회의 이런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 물론 그런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일은 복잡하고도 어렵다. 이 책의 2장은 바로 이 조항과 관련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1장과 3장에 비해 현실과 좀 더 밀접하게 연결된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1장과 3장의 내용이, 물론 더 어렵기는 하지만, 흥미롭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저자의 칸트 해석에, 그리고 그 덕분에 칸트의 도덕철학 자체에도, 매우 큰 매력을 느꼈다. 우리의 인격 안에 있는 인간성을 존중해야 할 의무와 관련한 저자의 해석은 유교에서 가르치는 ‘독신(獨愼)’을 떠올리게도 했다. 나 자신이 칸트 철학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저자의 칸트 해석이 얼마나 정확하면서도 독창적인지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저자 자신은 반복해서 영어권 칸트 해석자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해석과 자신의 해석이 다르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그런 저자의 칸트 해석이 최소한 나에게는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5.
이 책은 그리 쉽게 읽히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가 서문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철학의 고유한 증명 방식 탓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런 까다로움이 쉽게 제거될 수 없다고 말한다. 논증이 생략된 철학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그런 어려움이 지식의 진보를 위해 우리가 불가피하게 치러야 할 비용이라고 얘기한다. 철학의 외피를 걸친 말랑말랑한 대중서에 길들여진 독자들에게 이런 얘기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다. 아무튼 저자는 이미 비용을 치렀다. 이제는 독자가 비용을 치러야 할 차례이다. 저자의 논증을 따라가며 그 논증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직접 확인해야 할 차례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이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4, No.3, 2016년 3월, 공진성, 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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