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의학은 스스로를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요즘은 인술이니 어쩌니 하는 윤리적 색채를 가지려하기 보다는, 자신이 객관적 근거에 기반한 의과학(medical science)임을 더 분명히 내세운다. 이제는 더 이상 의심스런 전통과 권위에 순응한 치료법에 따르지 않는다. 19세기 이후의 의과학적 노력으로 해부학, 조직학, 생리학, 생화학적 지식의 바탕 하에 병리학과 약리학에서의 누적적 경험은 체계화를 갖추게 되었다. 거기에 실제의 임상사례들에 대한 분석과 함께 치료와 예후의 통계화를 통해, 과학처럼 객관적 근거를 기반으로 눈부신 성과를 올리며 누적적인 발전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것은 일견 맞는 말처럼 보인다. 과거의 치명적 감염병은 이제 대부분 충분히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을 운명이던 심근경색이나 장기부전 환자들이 관상동맥에 대한 시술을 받거나 신장이식이나 간이식을 받고 마치 기적 같은 새로운 생명을 현대 의학에게서 선물 받는다. 수많은 구체적이고 분명한 성공적 사례들 때문에 의학은 사람들에게 신비한 아우라 마저 갖게 되었다. 그러한 과학화된 의료 덕에 의료인의 전문적 주장은 상당한 권위를 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주장에 대한 비전공자의 반론은 마치 어쭙잖은 괴변처럼 보이기에 이르렀다.
2.
그러나 막강해 보이는 현대 의학의 힘은 개별적 임상사례들이라는 미시적 스케일에서는 분명해 보이지만, 거시적 차원에서는 그다지 명백하지 않다고 오래전부터 주장되었었다. 보건학이나 예방의학 진영에서는 첨단 의료의 이름으로 과소비되는 작금의 의료행태를 비판해 왔다. 여기서 소개하려는 이반 일리히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서도 그런 진영의 문제의식과 동일한 지점에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산업화된 첨단 의학이 겉보기보다 상당히 실속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원제는 <Limits to Medicine, Medical Nemesis: The Expropriation of Health>(의료의 한계, 의료의 복수: 건강의 착취)로서 1975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출간된 지 40년이 지난 책이라, 일리히의 주장이 새롭게 업데이트된 의학적 성취들에 의해 그 논거의 유효성이 약해질 여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궁극적 논지는 여전히 상당한 영감을 준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일리히의 주요 논점은, 의료 전문가에 의한 건강 치료의 한계라는 문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산업화되어 과잉된 의료의 부작용을 줄이고, ‘건강’의 개념을, 객관적 ‘사실’이라는 미명하에 의료 전문가가 독점하던 형태에서 벗어나, 지역사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사회적 ‘가치’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본래적 위치로 되돌리고자 한다.
3.
먼저 산업화된 의학이 갖는 신화적 이미지의 허구적 실상을 일리히를 따라 추적해보자. 과거 한 세기에 걸쳐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질병 양상이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소아마비, 디프테리아, 결핵은 거의 사라졌고, 항생제 개발로 폐렴이나 매독도 완치된다. 대규모의 사망자를 초래했던 전염성 질환이 통제되어, 이제는 사망자의 대부분은 노령으로 인한 질병과 관련된다. 이러한 건강상태의 변화는, 의학적 치료가 질적, 양적으로 향상된 덕분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를 분석해 보면, 그 변화는 고도의 의학적 장비나 시설과 상관되는 것이 아니다. 이 변화는 일반 대중을 둘러싼 사회적 도시공학적 환경의 개선과 관계된다.
결핵이나, 콜레라, 이질, 장티푸스는 의사에 의해 항생제 사용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이미 상당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었다. 원인균이 이해되고 특수한 치료법이 발견되기 전부터 줄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성홍열, 디프테리아, 백일해, 홍역의 사망률은 1860년부터 1965년까지 15세 이하 어린이의 경우 거의 90% 정도 감소되어 왔는데, 그것도 항생물질이 보급되고 예방접종이 광범하게 행해지기 이전의 일이다. 이러한 감퇴의 주요 원인은 주택의 개선과 영양이 개선된 덕분으로 숙주(인간)의 저항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가난한 나라들에서는 (적절한 치료약과 치료 가능한 일부 의료시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설사와 호흡기 감염이 더욱 빈번하고 영속적으로 발생한다. 현대적 의료시설의 여부와 상관없이, 저영양 상태라면 의학적 치료가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간에 그 사망률은 더욱 증가하는 것이다.
1세기 이상의 기간에 걸친 질병의 경향을 분석하여 알 수 있는 점은, 환경이야말로 일반적으로 사람의 건강상태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이다. 이처럼 거시적인 질병 유병율의 변화, 유행양상의 변화에서 현대적 의학기술의 영향은 낮은 편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전반적인 영양 상태의 개선과 대중적으로 보급되는 주택에서의 상하수도 시설, 배설물처리, 소독을 할 있는 간단한 항균처리 약제와 기술 등 주로 전문적이지 않은 건강조치들이다. 반면에 특별하고 전문화된 의료조치는 질병의 부담을 경감시키거나 평균수명을 연장시키는 것과 크게 관련되지 않다. 전체 인구에 대한 의사의 비율, 이용할 수 있는 의료기구와 병원의 침대수 중의 그 어느 것도 질병구조에 현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4.
이처럼 일리히는 전문적인 의학적 치료는 거시적으로 큰 효과가 없다고 본다. 제한된 사회적 자원을 의료비로 과잉되게 소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뿐 아니라 과잉된 의료화에 의해서 병원이나 의사가 병을 만드는 병원병(iatrogenesis, 의원병)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전형적인 연구 병원(이른바 대학병원급의 병원)에 입원한 5명 중 1명은 병원병을 얻으며, 이 중에서도 30명중 1명은 사망까지 이른다. 이러한 병례의 반수는 약물 치료에 의한 불가피한 합병증 때문이지만, 10명중 1명은 진단 중 검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의료기술 체계와의 접촉에서 생기는 바람직하지 못한 부작용을, 제 1차원의 병원병인 ‘임상적 병원병’이라고 한다(좁은 의미에서 병원병이란 전문적으로 추진된 치료 행위에 의해 생기는 질병만을 말한다. 더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임상적인 병원병’이란, 치료, 의사 또는 병원이 ‘병을 발생시키는’ 인자가 되고 있는 모든 임상적 상태를 포함한다. 과도한 치료문화의 포괄적 부작용을 말하는 것이다). 제 2차원의 병원병은 사회적 제도의 과의료화 현상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것을 일리히는 ‘사회적 병원병’으로 부른다. 제 3의 차원에서는 전문적인 의료체계가 사람들이 스스로 건강문제를 처리하고자 하는 자율적 능력을 파괴해 감에 따라, 문화적 차원에서 스스로의 건강노력을 부정하는 태도가 차츰 깊어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문화적 병원병’으로 부른다.
5. 사회적 병원병
사회제도에 의해 개인의 건강의 손해가 야기되는 것이 ‘사회적 병원병’이다. 사회적 병원병은 의료의 관료성이 증가되어 의존성을 증폭시키고 개인이 자기관리의 권리를 포기함에 따라 불건강을 낳을 때 시작된다.
사회제도의 과도한 의료화의 증거는, 모든 산업국가에서 보건 부문의 성장률은 GNP의 성장률을 훨씬 상회하고 있는 것으로 감지될 수 있다. 현대의 대성당이 되어버린 병원은 건강 광신자의 신성한 환경으로 군림하고 있다. 부자에게도, 빈자에게도 인생은 검사와 진료를 통하여 출발점에서 끝날 때까지 관리된다.
인생은, 출생 전의 검사로 시작되어 의사는 어떤 방식으로 출산할 것인가를 결정해 주고, 의사가 인공호흡장치를 멈추라는 지시를 내릴 때 끝난다. 출산과 사망사이에는 인생의 단계마다 사람들은 각각의 연령에 따라 특이한 장애자가 되어 다수의 약물 치료를 받는다.
노인 치료에 대한 요구는 증가되고 있으나 그것은 생존하는 노인이 더욱 많다는 이유에서보다는, 노년은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노인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더욱 많은 노인들이 전문가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함에 따라, 스스로 독립하여 늙을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전문가의 서비스에 의존하는 노인이 증가함에 따라, 노인을 위한 특별한 시설에 가두어지는 노인의 수도 증가된다. 그리하여 결국 엄청난 부자와 확실한 독립성을 가진 인간만이 의료화 되지 않은 인생의 끝을 선택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노인 치료의 급증과 제도화는 보금자리로서의 가족, 상호 증여 관계를 맺는 이웃 관계, 그리고 생활의 근거지로서 지역사회라는 전통적 건강관리 체계의 인프라를 파괴하는 경향을 강화시킨다.
전문적 치료의 고비용 저효율이 명백해짐에 따라, 의료는 예방을 추가적으로 시장화하기 시작했다. 병적 상태라는 개념은 미래의 위험성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예방의 의료화는 사회적 병원병의 또 다른 주요 증상이 된다. 그것은 장래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대리인에 의한 관리로 변화시킨다.
커다란 인구 집단에 대하여 조기진단을 위한 검사를 일상적으로 행함에 따라,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계이고 자주 수리공장에 가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는 생각을 강요받는다. 또한 광범위해진 진단의 그물망을 통해 사람들을 환자 역할 속에 가두고, 건강한 자로부터 분리시켜 전문가의 권위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6. 문화적 병원병
사회적 병원병은 제도적 환경이 지나친 관료적 관섭에 의해 개인과 가족, 이웃에게서 자율적이거나 상조하는 능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면, 문화적 병원병은 그런 제도의 지속적 각인에 의해 인내하고 스스로 규정하는 인간 의지를 상실하게 되어서, 이내 그런 태도가 기본적 양상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건강하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질병에서 회복된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극복의 과정을 누리는 것도 의미했다. 그것은 기쁨과 아픔 속에서 생명을 느낄 수 있는 내면적 경험을 의미한다. 치유한다는 것도 약물이나 수술적 처지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치료받는 이들을 위로하고, 배려와 안락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병자 치료의 대부분은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관용의 한 형태로서 지역사회의 상호부조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던 사회적 행동이었다.
현대의 산업적 의료의 이데올로기는 치료와 고통에 대한 고유한 문화의 가능성을 방해한다. 문화가 의료화되면 건강과 치유의 전통적 관습은, 기계적인 시스템과 의료적 규약에 의해 점차 해체되어 간다. 의료화는 각각의 인간이 고통, 질병, 죽음을 다루려는 욕구를 부정하는 것에 기초를 둔, 풍부한 관료적 프로그램을 구성한다. 현대의 의료기업은 사람들에게 옛날에는 문화적 유산이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게끔 뒷받침해 주었던 것을 대신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정에서 가족의 임종을 맞이하던 문화에서, 이제는 병실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병원 장례식장을 이용하고 상조협회의 서비스를 받는 식으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죽음의 방식은 패키지로 외주화되었다. 그런 양상은 ‘죽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고통과 질병의 치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산업적 의료의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개인적인 도덕적 행위를 가능성을 맥 빠지게 만들며, 본질적으로 문화적이며 자율적 활동이던 고통, 치유, 죽음은, 현재에 이르러 기술 관료에 의한 정책입안 분야가 되었다.
또한 이러한 문화적 병원병은 의료의 과학화에 의해 촉진되었다. 질병에 대한 물리적 측정법(혈액검사, x-ray검사, CT촬영 등)의 사용이, 질병이 참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믿음을 만들었다. 또한 질병이 의사와 환자의 지각으로부터 독립된 존재라는 생각을 강화시켰다. 이러한 임상적 측정은 사회 전체에 만연되어 가고 있다.
현재 많은 수의 산업화된 나라에서 의료의 이용과 시설과 인력이 추가적으로 요청되고 있으며 그것을 충족하기 위한 의료재정의 급증으로 인한 위기는, (과학적으로 정의된) ‘질병의 개념’에서 초래된 위기라고 해석될 수 있다. 아마 해결방법은 그 개념을 비판하고 과학적으로 건전한 비의료화를 통해서만이 그러한 사회적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질병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의학적 인식론’은 이 위기적인 건강의 해결방법에서 의생물학이나 의학공학보다 훨씬 중요해진다. 이러한 인식론은 진단과 치료의 사회적 본성을 밝히는 것이다. 모든 질병에는 사회적이며 규범적 요소가 있음을 통찰해야 한다.
산업화된 사회에서 의료전문가들의 질병에 대한 객관주의적 태도는, 예방적 검진 프로그램의 산업화와 더불어, 뚜렷하지 않은 건강향상의 목표를 위해 막대한 자원을 쏟아 붓게 만든다. 의과학에 대한 맹목이 오히려 비합리적 자원 낭비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의료 역사의 고찰을 통해 질병이 규범적 요소를 가진다는 깡길렘의 주장은, 일리히에게서도 반복된다.
7. 건강을 위한 정치
건강에 관하여 가장 흔하고 반복되는 정치적 쟁점은 의료에 대한 접근이 불평등하고, 부자가 빈자보다도, 힘있는 사람이 약자보다도 더 큰 혜택을 입는다고 하는 문제의식에 기초한다. 그래서 정당은 보통 의료시스템이 생산하는 상품 자체에 관해서는 묻지 않고, 특권자를 위하여 생산된 것과 같은 것을 모든 사람들이 손에 넣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사의 청구서와 건강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하는 믿음은 막연한 추정에 불과하다.
일리히는 건강 측면에는 그런 고비용을 요구하는 평등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고 말한다. 건강에 대해서는 ‘자유’와 ‘권리’라고 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생물학적 상태와 주변 환경조건에 대하여 통제를 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건강은 살아가는 자유의 정도와 같게 된다. 또한 법은 기본적인 건강의 권리를 평등하게 분배해야 한다. 그러나 의료제도 속에서 ‘자유’의 측면은 조직된 정치적 노력들을 통해 만들어지는 특정한 환경조건에 좌우된다. 권리로서의 건강관리가 어떤 수준의 강도를 넘게 되면 그것이 아무리 평등하게 분배된다고 해도 자유로서의 건강을 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일리히는 최소한의 평등한 치료 기회와 더불어 산업화된 의료기업의 건강서비스의 총량을, 의원성적 부작용이 발생하는 한계 내에서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강에 관한 추가적인 주요한 정치적 쟁점은 의학 연구의 과학화와 관련되어 있다. 의학 연구에는 더욱 고도의 과학적 기준이 있어야 하고 나아가 그것은 사회적으로 조직화 되어야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병을 유발하는 의료는 사회에 방치되어 있는 실력이 부족한 나쁜 의사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더욱 신중하게 선별되고, 더욱 잘 훈련되고, 동료에 의해 더욱 철저히 감독된 의료는 민중에 이로울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학의 우상화는, 질병의 규범적 속성을 철저히 부인하는 태도이며, 환자가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고정된 특수한 증례인 것처럼 보는 문제가 있다.
일리히는 의학이 응용과학이라고 하는 생각은 신앙에 가까운 것이며, 병자의 역할을 할당하는 의료전문가의 독점에 정치적 통제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을 고친다고 하는 것은 ‘사회집단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행위’이다. 이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객관적 결과만을 주장함에 따라, 의학 기술자는 사회의 요청보다는 과학자의 이익을 진척시키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정치적 판단의 가치를 저하시키기 위해 과학주의를 끌어들인다. 순수하고 확실한 의과학에 대한 요구는, 과학에 의해 쉽게 측정될 수 없는 요소(사회적 요소, 개인가치의 요소)들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그래서 가치와 무관한 치료라는 주장은 분명히 사악한 넌센스이고, 무책임한 의료라고 일리히는 주장한다.
공동체의 지속과 공정성을 위한 적절한 방식을 찾기 위해서, 현재의 물질적 조건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탐구하고 인식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임박한 재앙에 대한 반응은 여전히 더욱 좋은 건강 유지의 서비스, 더욱 효과적인 조기검진 프로그램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해결책을 여전히 산업 시스템 속에서의 더욱 좋은 기술화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증상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 병의 근원이 산업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인식되고 있지 않다. 병원병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사회공학자와 경제학자들에 의해 제안되고 있는 구제책의 대부분은 의료적 통제를 더욱 증가시킴으로서 시스템을 더 관료화 시킬 뿐이라고 일리히는 비판한다.
결론적으로 일리히는 자율적 행동의 회복을 주장한다. (당시 일부국가에서 시도되고 있던) 민중 주도의 건강관리 시스템을 긍정적 가능성의 하나로서 제시한다. 건강관리에 대한 개인적 책임의 회복이 중요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분야의 독점제한이 입법의 중요하다. 또한 자신들의 환경을 스스로 통제 가능한 생활양식으로 재조직하는 권리가 인정될 것을 요구하고, 그리하여 책임 있는 이용이라고 하는 충분한 짐을 병자와 그 근친자에게 이전시킬 것을 주장한다. 민중들에 의해 건강업무를 맡는 치유자가 선출될 것이고, 스스로의 행동의 평가를 전문가 조직에 맡기는 대신 그들의 공동사회에 의해 평가하게 될 것을 대안으로서 주장한다.
일리히는 의료의 개입이 최저한으로 행해지는 세계가, 건강이 가장 좋은 상태라고 말한다. 건강한 사람들이란 출산, 성장, 노동, 치료, 죽음의 어느 것에 대해서도 적합한 환경 속에서 건강한 집에 살고 건강하게 식사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8. 일리히의 가능성과 불가능성
일리히의 산업화된 의료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대안 제시를 보면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의 핵심적 메시지는, 산업화되어 지나치게 분화되고 전문화된 체제가 인간의 자율성을 손상시키고 있으며 의료에서의 그러한 체제는 고비용 저효율과 반생산성으로서 사회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는 경고이다. 그래서 산업화된 체제에서 탈피하여 지역공동체에 기반하여 지역 내의 생산양식에서 의료의 생산과 수요가 충족되는 전통적 체제의 복원을 바란다. 그렇게 될 때만, 인간이 가치의 자기설정을 통해 소박하며 충만한 안정감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대적 성취에 해당하는 산업사회의 분업적 방식에 의한 막대한 생산성을 거부하는 제스처는 마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적 구호를 연상시킨다. 일리히는 책의 곳곳에서 그런 순진하며 근본적인 낭만성에 빠져있지 않다는 알리바이를 남기려고 했지만 말이다. 그는 산업적 생산양식과 전통사회의 자율적 생산양식의 조화를 말하면서, 산업적 생산양식의 ‘적절한(!)’ 제한의 필요성을 말한다. 그러나 그 ‘적절함’이란 사회정책을 논할 때 참으로 모호한 말이다. 이런 저런 방식의 과도함과 과소함이 현실의 시도 속에서 사후적으로 안정된 양상을 보이는 것에 대해 우리는 ‘적절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낭만성만이 아닌 적절하고 조화로운 낭만성을 지향하지만, 일리히는 그 둘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일리히적인 낭만적 성향의 아나키스트들에게 따라 붙는 기본적 한계점이 있다. 아마 그 구체적 모습은 일리히의 담론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려는 사람들에게서 잘 드러난다. 비근한 예로 한국에서는 일부 중산층 지식인들이 일리히의 건강담론에 따라 직접적으로 행동하려는 모습을 종종 관찰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도 일리히처럼 글로벌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그 사이사이 구석까지 뻗어 있는 시장주의의 힘을 너무 간과하는 행태를 보인다. 그들은, 주로 과학화되고 산업화된 주류적 의학에 대한 일리히의 반의료 안티테제를 충실히 따른다고 생각하면서, 그 대신 의료시장에서 일리히적 스타일에 해당하는 ‘근원적 대안적’이라는 이미지로 포장된 고가의 대안의료 상품을 덜컥 구매하는 것이다. 상품시장의 특유의 유연한 고객중심적 태도는 그들에게 그럴듯한 심리적 분위기를 주면서 고가의 의료상품을 판매에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주류시장의 틈새에서 일리히의 대안적 이미지마저 그럴싸하게 상품화되고 있다. 하지만 일리히의 건강 가이드라인의 뼈대는, 과학적으로 충분히 근거 있으며 적용이 용이한 효율성 높은 저비용 치료와 자발적인 건강한 생활습관의 변화이다. 어느 정도 건강에 관한 공부도 스스로 해야 하고, 생활습관에서의 번거로운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기에 일리히에 제대로 따르는 수고로움 보다는, 일리히 향이 뿌려진 상품의 손쉬운 구매로 사람들이 끌리는 것 같다.
일리히적 담론이 갖는 더 중대한 문제점은, 그의 제도적 관섭에 대한 거부와 자율성에 대한 주장이 신자유주의 시장주의자들이 음험한 논리와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책임을 앞세워, 세금과 복지를 줄이고 시장주의의 순수한 효율성이라는 망상에 대해, 아나키즘적 순수성은 (아마도 뜻하지 않게) 같은 편에 위치하게 되는 모습을 보인다. (시장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정치를 통한 정부의 관여는, 복지정책에 의해 일부 개인들을 귀찮게 할지는 몰라도 주기적 파국을 품고 있는 미친 기관차와도 같은 시장제일주의에 유일한 브레이크인 것이다. 글로벌한 신자유주의 앞에서 일리히적 담론은 너무 순진해 보인다. 아마 그가 청장년기에 근거지로 활동하던, 지역적 기반(주로 중남미)의 특성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싶다. 제 3세계로서 산업화되지 않은 나라지만, 의료의 주축은 최상위층의 소수만을 위한 고비용의 산업화된 방식이었고, 다수의 민중들에게는 기초적인 의료혜택도 부족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실천적 대안도 그가 속해있던 지역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산업화된 선진국 내부에서, 그 내부의 분위기를 맞보면서, 피해갈 수 없는 시장적 집요함 속에서의 대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9.
그는 병원병을 3가지로 구분했다. 임상적 병원병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습적 검사와 치료법에 대한 기술의 숙련에 의해 혹은 더 효과적인 방식의 개발에 의해, 그 위험성이 줄여들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가 더 우려하는, 제도가 강제하는 사회적 병원병과 그것이 인간에 내면화된 문화적 병원병에 대한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하겠다. 특히 ‘죽음’과 관련된 문화가 그런 것 같다. 대형병원에서 희망 없는 환자에게까지 확대 적용되는 소동스러운 치료는 정말 철학적 제도적 문화적으로 큰 반성이 요정되는 부분일 것이다.
일리히의 주장을 거칠게 다시 풀어내면, 지역사회 내에서 없으면 없는 대로 자족하면서 살아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산업화된 의학의 빈자리는 그다지 크지 않다. 만약 특수한 것(산업화된 복잡한 시설이 필요한 치료)을 요하는 의료자원의 부재가 지속되면 그게 요청될 경우에도, 그에 걸맞게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일 것이고, 그 상황에 분개하거나 끔찍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산업화된 나라에서는 필연적으로 정보와 통신 교통이 발달되어 있기 마련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특수한 의료자원의 부족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발달된 교통수단에 의해 충분히 회피할 수 있는 것이 된다. 맹장염이 터져 복막염을 앓는 사람은 산업화된 문명에서 완전히 고립된 지역이라면 불가피하게 운명을 맞는 것에 심리적 갈등이 없겠지만, 현대적 의학문명이 침투된 곳이거나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 지역에서는 (전통적 진통제인) 양귀비를 섭취하면서 운명을 맞이하는 태도는 쉽게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이 완치를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수개월이나 수일의 연명에 대한 막대한 비용을 그 애정은 손쉽게 초과한다. 사회의 경제적 부가 늘수록 그런 초과는 더욱 빈번히 늘어난다. 왜냐하면 애정을 받는 생명의 가치에는 적절한 교환값이 없으며, 무한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가족이나 연인에 대한 생명의 값어치를 매겨보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 화를 낼 것이다. 생명은 그런 경제적 가치체계를 초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이런 문화적 분위기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집중치료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가역적인 환자뿐만 아니라 비가역적인 희망 없는 환자에게까지 집중적 치료가 확장되는 경향은 의료의 발달에 따라, 뚜렷하던 가역과 비가역적 상황의 경계선이 자꾸 불분명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불분명한 지점에서의 적극적 치료의 중단에 따른 법적 책임의 문제 또한 점차 이슈화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를 경제적이든 아님 그 비슷한 무엇이로든 정량적으로 측정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일까? 여기서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해묵은 철학적 대결이 소환된다. 우리가 인간을 환원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숭고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자체의 필요성과 감동적 설득력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사회적 정책적 구조적으로 무엇인가를 논할 때에는 이런 숭고의 수사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 토대를 흔드는 근본적인 위기만이 이 숭고의 문화에 대한 재검토를 촉발하리라.
10. 첨언
사족으로 일리히의 <병원이 병을 만든다>에 대해 개인적인 간단한 소회를 덧붙이고자 한다. 자기 스스로 과학이나 과학적인 어떤 것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그 한계에 대한 지적질은 항상 즐거운 도전적 과제를 선물한다. 그 지적의 감각적 쾌/불쾌 여부와 상관없이 그것은 지적 추구와 확장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는 선물일 수밖에 없다. 일리히 주장의 근거는 깊고 풍부하고 구체적이며 비판의 방식은 날카롭고 통렬하다. 일리히의 비판적 지성은 거대하고 푸르른 아름다운 나무처럼 보인다. 그 나무의 주변을 산책하는 사람은 여러 이로움을 얻으리라.
일리히는 기성체제 내부의 습관적 문화에 젖어서, 의료인들이 의식화하지 못한 현대적 의료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 분야의 문외한만이 그 문 안쪽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건드릴 수 있다는 에릭 호퍼의 지적을 생각나게 해준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아름다웠지만, 그들은 노예제라는 습관적 문화 때문에 민주와 노예제의 상충하는 요소에 눈뜨지 못했다. 시대적 한계, 문화적 한계, 경제적 토대의 한계, 무언가를 문제로 삼을 수 있는 인지 용량의 한계 등등. 변명의 여지는 많다. 하지만 철학의 역사에서 반철학적 흐름에 맞서며 정합적 지성의 확대라는 철학의 적통을 과학이 이어받은 것이라면(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도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과학 내부 혹은 과학자 사회의 내부, 혹은 의과학자 사회에서 의식화되지 못한 습관적 문화의 한계와 치부를 드러내는 일리히에 대해, 의과학자를 자처하는 의료인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copyrights@aporia.co.kr([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10, 2015년 10월, 이승범, 가정의학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