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은 참으로 오래된 예술인데도 문학, 미술, 음악 같은 다른 예술들만큼 일반교양이 되지 못하고 있다. 초중고 학교교육에서도 건축은 접하기 어렵다. 일반독자가 읽을 만한 건축관련 주제의 교양서도 국내에는 부족한 편이다. 과거의 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늘어난 것에 비해 지금 우리주변의 환경을 가꾸는데 정작 필요한 교양, 즉, 현대건축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교양을 키우는 친절한 책은 드물다. 일반독자가 전문적인 건축역사서나 건축이론서를 집어 들기도 쉽지 않다. 건축이론서들은 난해하기 일쑤고, 직접 봐도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종종 이해가 안 되는 오늘날의 건축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책은 정작 부족하다.
그래도 최근에 <건축이란 무엇인가>, <건축은 예술인가>, <사람, 건축, 도시>, <건축과 도시의 인문학> 등 국내에 기성건축가들이 일반독자와의 소통을 염두에 두고 쓴 책들이 나오고 있고, 그 책들을 통해 이러이러한 건축이 좋은 건축이라는 개별적 관점들이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 책들도, 일반독자의 입장에서 건축을 두루두루 유연한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돕기에는, 다시 말해 건축을 폭넓게 경험, 감상, 판단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돕기에는 그 포괄성이 좀 부족해 보인다. 그런 욕구를 채워주는 책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건축에 대해 쓴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을 그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하나 눈에 띈 책이 바로 이 폴 골드버거의 <건축은 왜 중요한가>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건축에 “관심은 있지만 전문지식은 없는” 독자들을 “전문가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들이 늘 왠지 모르게 끌리는 예술작품과 한층 더 연결된 느낌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골드버거의 이 책을 알랭 드 보통은 ‘건축예술의 세계를 알려주는 책으로는 최고’라고까지 치켜세우는데, 그것은 좀 과한 칭찬이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골드버거의 책이 친절하고 재치 있고 또 일정한 깊이까지 갖추었음은 분명하다. 40년간 써 온 저널리스트의 숙련된 필력이 잘 전해지는데, 그의 수사학은 웅변적이라기보다는 친절하고 차분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반 독자들의 건축경험과 판단을 돕기에는 이 모든 것들이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구체적인 대상을, 즉 건축물을 직접 가보고 경험하라고 주문하는 저자는 대개 미국의 사례들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한국사람이 몇 명이나 가봤을까마는 미국사람이라면 “거의 모두가 아는 미국의 기념비적 걸작인 링컨 기념관”을 예로 든다든지 해서, 미국밖의 외국독자들은 생생하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도, 한국어로 제대로 잘 번역되기만 했어도 일반인의 지적 욕구를 꽤 충족시켜 줄 뻔 했다. 불행하게도, 지금의 한국어번역수준은 무척 실망스러운데, 골드버그의 간명하고 능수능란한 글솜씨를 제대로 맛보기 어려운 정도를 넘어, 읽기 곤혹스러울 정도다. 유감스럽게도 번역자와 출판사의 성의와 능력이 부족했다.
2.
이 책의 주목할 만한 의의를 제대로 알아 보자면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필요가 있다. 폴 골드버거는 건축가도 건축역사학자도 건축이론가도 아니다.(골드버그는 자기의 책이 건축역사서도 건축이론입문서도 아님을 밝힌다.) 그는 지명도 있는 미국의 저널리즘 건축평론가다. 1950년생인 그는 대학에서 건축역사수업을 듣고 스물두 살에 뉴욕타임즈에 입사해서 1973년부터 신문건축평론을 쓰는 것을 전문직으로 삼았다. 그는 1984년에 건축평론부문의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 1970년에 퓰리처상에 평론부문이 추가된 바로 그 해에 뉴욕타임즈의 건축평론가인 애더 루이스 헉스터블이 수상했고 그 뒤로 지금까지 모두 여섯 명이 건축평론으로 이 상을 수상했다.
골드버거는 그 수상경력과 더불어 지금까지 미국의 간판급 건축평론가로 자리를 굳혀 왔는데, 25년 동안 뉴욕타임즈의 건축비평을 쓴 뒤 1997년부터 2011년까지는 잡지 뉴요커지의 스카이라인 칼럼을 연재했고, 지금은 잡지 베니티 페어에 자신의 건축평론을 싣고 있다. 그가 쓴 건축평론들은 지금까지 두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On the Rise: Architecture and Design in a Postmodern Age [1983], Building Up and Tearing Down: Reflections on the Age of Architecture [2009]). 골드버거의 이 책, <건축은 왜 중요한가>는 예일대학교출판사의 <무엇무엇은 왜 중요한가(Why X Matters)> 시리즈로 나온 것인데, 저자 자신이 이 책이 자신의 비평의 관점을 드러냈다고 대놓고 내세우진 않지만, 일반독자를 위한 개괄서이자 동시에 골드버거 자신의 건축평론의 관점을 요약정리한 책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저널리즘 건축평론가는 건축의 경계에서 건축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다. 전통적으로, 건축이 왜 중요한지, 어떤 건축이 좋고 나쁜지를 규정하는 일은 건축전문분야 안의 건축가들과 건축학자들이 주로 담당해 왔다. 건축이라는 직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데, 의료계와 법조계처럼 자격증 없이 종사할 수 없는 통제된 지식과 제도를 가지고 있다. 건축디자인과 건축학의 모든 새로운 경향들이란 건축의 가치판단기준을 재규정해 왔다. 건축도 모더니즘의 큰 변동을 겪었을 뿐 아니라 기술과 도시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계속 성격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늘 제도화되고 규율화되어 왔다.
오늘날의 건축이 얼마나 복합적인 지식과 기술과 업무들로 이루어져 있는지 제대로 들여다 본다면 이 전문분야가 독자적인 전문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실에 꽤 놀랄 만도 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여느 전문분야들처럼 건축의 경계가 예전처럼 공고하지 않다. 오늘날 건축을 만들고 해석하는 지식들은 종종 건축의 바깥에서 온다. 평가기준을 건축가나 건축학자들만이 정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건축의 평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된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저널리즘 건축평론이고, 골드버거는 그 몫을 해 온 인물들 중 한 명이다.
3.
한국의 저널리즘에는 영화평론, 문학평론은 있어도 건축평론은 없는데, 외국의 저널리즘 건축평론은 그 대중적 영향력이 만만치 않다. 미국의 경우 신문과 잡지의 건축평론은 19세기부터 일찌감치 제 자리를 잡았고, 지금도 주요 신문과 시사잡지들이 오래도록 건축평론 칼럼을 하나씩 두고 있다. 이 신문잡지의 평론들을 통해 대중들은 건축물과 건축사업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접하고(여기까지는 리뷰의 수준이다) 나아가 저널리스트가 선별하는 건축적 문제와 평가를 접한다.(비평의 수준이 된다).
저널리즘 건축비평이 왜 이처럼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면, 오늘날 일부의 전문적 건축이론과 담론은 대중들이 이해하기에 종종 난해하거나 애매한 경향이 있는 것이 부분적 이유일 수 있겠다. 저널리즘에서는 일반시민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더 깔끔하게 판정해 주니 요긴하다. 건축전문분야가 사회화 충분히 대중하지 못할 때 저널리즘 비평은 꽤 긍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건축물과 건축가의 평판에 영향을 끼치기에 저널리즘 건축평론의 영향력은 건축전문분야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지만, 전문영역의 경계에 서 있는 저널리스트는 전문분야의 이해관계에서 더 자유로운 더 공평하고 실속 있는 비평을 생산해 낼 가능성도 있는 법이다. 제대로 된 경우, 건축의 공공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한 사회의 건축문화를 건전하게 떠받치는 자산이 된다.
미국의 현대건축의 진행과정에 영향력을 끼쳐 온 대중적 건축비평의 전통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았다. 그것을 중요한 장르로 올려놓은 공으로 치면, 우선 몽고메리 스카일러(1843–1914)가 있었고, (그는 저널리스트이자 건축평론가로서 뉴욕타임즈 신문의 편집위원(1883-1907)이었고 건축잡지인 아키텍처럴 레코드(Architectural Record)을 1891에 공동창간했다.) 아마도 가장 걸출한 건축비평가는 루이스 멈퍼드였다. 그는 잡지 뉴요커의 스카이라인 칼럼을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160편 가량 연재했고, 여기서 기존의 건축전문분야와 대립각을 세우며 새로운 가치체계를 제시했다. 멈퍼드는 전문가와 일반인을 중재해주는 역할을 했다기보다 어쩌면, 자신의 고유한 건축의 가치, 특히 도시문명적 가치와 기술비평을 통해 현행의 전문분야로서 건축의 실천과 학문을 비판하고 새 인식을 확산하려 했다.
4.
다시 골드버거의 책으로 돌아오자. 이 책의 본문은 7개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1장 의미, 문화, 상징 / 2장 도전과 편안함 / 3장 물체로서의 건축 / 4장 공간으로서의 건축 / 5장 기억으로서의 건축 / 6장 건물과 시간 / 7장 건물과 장소만들기의 순서다. 이 순서대로 저자는 상징과 시지각을 통해 감정에 영향 주는 형태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람마다 달라서 수량화하기 어렵지만 결국에는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개인적 기억”(165쪽)과 문학과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형성되는 “공동의 기억”을 이야기하며, 건축이 시간과 장소에 차원에서 문제되는 측면까지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골드버거는 건축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떤 특정한 관점을 날카롭게 세우기보다는 포괄적이고도 유연한 종합을 도모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건축가와 건축이론가가 특정한 또는 극단적 태도를 선명하게 내세우는 오늘날 주목할 만하다. 그는 건축에 대한 경험과 판단이 다른 예술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위의 구성에서 보는 것과 같은 몇 가지 테마로 나누어 능수능란한 수사학적 솜씨로 설명한다. 저자가 보편적 내지상식적 원칙이라고 보는 그 내용들에 오늘날의 건축전문가들이 반드시 찬동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 까닭은, 건축을 이해하고 창작함에 있어서 무엇이 ‘상식적’인가에 대해 전문가들의 입장이 꽤 다를 수 있고 오늘날 서로 경쟁하는 건축가들은 공통의 기반보다는 서로의 독창성과 차이 만들기에 대개 더 관심 있기 때문이다.
5.
책 제목이 시사하듯이 저자는 우선 건축의 가치체계들 언급한다. 건축은 “비바람을 막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세상에 관해 뭔가 말하기 시작할 때, 즉, 예술의 특질을 띨 때,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생존의 필수도구라서 건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이야기고 실용성을 넘어설 때 건축은 중요해진다는 게 골드버거의 주장이다. 그는 예술적, 미적 특질과 실용적 측면이 균형있게 고려되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건축도 예술이라면, 즉, “도전을 제기하기 위해 존재하지, 안아주고 보듬어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닌 것이 예술인 바에야”(67쪽), 건축에는 딜레마가 생긴다는 것이 골드버거의 설명이다. 즉, 건축이 도전적이면서도 편안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골드버거는 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본다. 즉, “건물이 높은 미학적 야심도 달성하고 의미 있고 설득력 있는 사회적 목적도 지녔을 때, 그것은 여느 건물들과 다른 수준에서 움직인다. 설사 건축가가 우리에게 편안함을 더 강조하려 했어도, 그것은 윤리적 기능에 있어서 우리에게 도전을 제기한다.”(79쪽) 그런 예로 골드버거가 드는 것은 제임스 갬블 로저스가 설계한 예일대학의 고딕양식 건축 같은 것이다.
사실, 현대건축이 놓쳐버린 예술성은 골드버거 이전에도 루이스 멈퍼드가 한 세대 이전에 역설한 것으로서 멈퍼드만큼 현대건축의 비예술성(현대건축가들이 예술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판한 인물도 드물다.(루이스 멈퍼드 지음; 박홍규 옮김, 『예술과 기술』, 텍스트, 2011) 멈퍼드나 골드버거에게나 그 예술성이란 상징성에 직결되는데, 골드버거는 ‘사회공동체의 공동이념을 상징하는’ 건축의 역할을 강조한다. 건축의 의미와 상징성에 대해 그가 쏟는 관심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상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과정을 골드버거는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지어진 현대건축물들이 상징성이 부족해서, 상징의 예를 찾기가 부족한 것도 부분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 상징과정을 자세히 탐구하는 것은 건축이론의 영역으로 들어갈 만큼 어려운 학문적 과제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 결과, 골드버거는 건축의 의미와 상징에 대한 논의를 물리적 형태와 공간에 대한 시지각적, 미학적 경험, 그리고 건축이 제공하는 기억의 역할로 초점을 옮긴다.
6.
골드버거는 “건축이 무엇인지 배우려면 직접 경험하고 판단하라”며 건축의 경험을 강조한다. 이 책의 중심내용인 즉, 건축을 어떻게 경험할지, 건축적 체험의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건축은 다른 것이 가능하도록 하려고 존재하고, 그 다른 것과의 밀접한 관계에 의해 풍부해진다”(55쪽)고도 언급했지만, “그래도 건축은 예술이며, 결국 우리는 건축을 미학이라는 렌즈를 통해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골드버거의 본심이다.(55쪽) 그에게 건축적 경험이란 곧 미적 경험이다. 현대건축을 중심으로 이야기했지만, 그는 오래된 건축을 미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에도 적용되는 일종의 보편적 원칙을 제시한다. 저자는 건축경험상의 “기본문제들”을 언급하는데, “건축은 문화마다 제각기 다른 형태를 띠지만, 비례, 척도, 공간, 질감, 재료, 모양, 빛 같은 기본문제들에 대한 우리 경험의 본질은 건축의 외양만큼 서로 다르진 않고, 내 최대관심은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이해하는 데 있다”(14쪽)고 말한다.
시지각, 상징, 양식이 불균형적으로 취급되던 과거의 경향에 비해 새로운 균형감을 찾겠다는 입장의 골드버거는 특정한 미적 선호도나 기술적 선호도를 뛰어넘어 여러 가지 미적 경향의 건축을 두루 포섭하려 한다. “공식을 찾아 파악하려 하지 말고 구체적인 건물의 모습과 느낌에 관해 이야기해서 파악하려 하는 게 훨씬 알차다”(90쪽)고 말한다. 그는 건축의 형태에 대한 시지각적 경험이 양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비례에 있지도 않고 질서만 강조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시각적 경험을 가진 건축이 바람직한가? 그가 답으로 추구하는 것은, “관습이라는 질서와 독창성이라는 매력을 겸비한”, “낯익으면서도 새롭고, 쾌감도 주지만 평온함도 주고, 질서도 주지만 새로움도 주고, 강렬함도 주지만 휴식도 주어 어떤 식으로든 평온하면서도 뜻밖의 새로운 발견을 한 느낌을 주는” 건축이다.(128쪽)
양식이 가치판단의 확고한 기준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형태, 규모, 비율, 질감은 건물에 적용된 양식보다 건물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훨씬 더 많이 말해준다. 매스, 규모, 비율, 질감, 건물과 주변환경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건물재료와 재료를 쓴 방식, 이 모든 것들이 양식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179쪽)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고 양식에 대한 관심을 뛰어넘어 건축의 기본문제들을 평가하는 데 관심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사실, 옛 건축의 보존에 대한 인식이 커져 있는 오늘날 양식을 가지고 싸잡아 가치판단내리는 풍토는 이미 지났다. 내가 궁금한 것은, 골드버거가 가장 존경하는 건축가들, 가령 프랭크 게리나 로버트 벤추리, 프랭크 로이드 같은 미국현대건축가들이 개인적인 현대적 양식을 확립한 건축가들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가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건축의 아름다움을 결정하는 기준들이 무엇인지, 불변적인 기준은 무엇인고 가변적인 기준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는 오래된 것이다. 17세기에 클로드 페로의 논의가 대표적이다. 21세기 초에 골드버거는 건축이론의 역사에서 다루어져 왔던 전통적인 기준들을 불러내되 그것들을 다소 가변적인 기준들로 만들어 냈다.
7.
이 책에서 다룬 주제들, 즉, 상징, 형태, 공간, 기억, 시간, 장소는 사실, 건축의 전문적 담론 안에서 익히 다루어져 온 주제다.(건축에서 기억과 시간에 대한 챕터를 상당히 할애한 것이 내게는 주목할 만 했다.) 골드버거가 이야기 솜씨와 곳곳에 깃든 그만의 고유한 해석과 재치는 빛나지만, 전반적으로 봐서, 골드버거는 건축을 충분히 새로 재규정하지는 못한다. 무엇보다, 건축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너무 도외시한다. 저자는 오늘날 건축과 관련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여러 가치들 중, 사회경제적 가치, 친환경적 가치 등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건축에서 가장 문제되는 가치란 결국 문화적 가치, 예술적 가치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건축을 정치적으로만 싸잡아 보면 건축의 '본연적 경험'인 미적 경험을 빼놓게 될 것이기에 건축의 사회적 가치를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의 태도는 거꾸로 의미와 상징의 해석에서 앎이 배제하는 문제가 있다. 가령, 그가 최고의 현대건축의 사례 하나로 드는 워싱턴 몰에 있는 베트남기념비의 경우도, 그는 그 디자인이 제공하는 건축적 경험의 뛰어남을 말한다. 하지만, 좀 더 생각해 보자. 그 기념비는 어디까지 말하고 있는가? 어디까지나 그것은 미국의 애국주의적 관점이 강한 기념비다. 그것은 베트남전쟁의 한 상처를 기억하지만 전쟁의 진실을 온전하게 기념하는 기념비는 아니다. 그런 생각에 이른다면, 그 기념비의 의미와 상징은 다르게 읽힐 수 있고, 다르게 읽혀야 한다.
루이스 멈포드의 건축비평에서 가장 돋보였던 관심, 즉, 도시사회에 대한 건축의 문제도 골드버거의 비평은 약하게 다룬다. 골드버거가 제시하는 상식적인 접근이란 어떤 수준까지는 의미있지만, 그 너머로 나아가게 돕지는 못한다. 프랭크 게리의 엘에이 디즈니콘서트홀을 가장 뛰어난 현대건축의 한 사례로 꼽는 골드버거. 그의 이 책은 미국의 주류세계의 교양층 독자들을 위한 내용에 맞춤식으로 쓰여져 있다. 그래서, 오늘날 주류세계의 대중사회에서 건축이 대중적 교양으로 어느 수준에서 제공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표본으로 간주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함께 하는 경험이 생길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건축이 공동체의 의미를, 공동의 기반의 의미를 표현하고, 나아가 우리 시대에 활력을 주면서도 우리 시대에 타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를 열심히 생각해야 한다.”(262쪽)
이 과제를 제시하면서 이 책은 끝난다. 골드버거는 그 해답을 여전히 찾고 있다. 그 과제에 대해 이 책의 한계를 말한다면? 건축의 의미와 상징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면, 그것을 파악하는 과정으로서 경험만 너무 강조해서는 안된다. 과연 그 건물이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건물인지,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더 적극적인 앎이 개입되어야만 한다. 골드버거가 잘 지적한 기억말고도 건축은 역사를 안고 있다. 이를테면, 골드버거에게 건축은 인문학이기보다는 예술이다. 하지만, 앎이, 또는 인문학이 그의 물음의 대답으로서 건축비평을 온전하게 만드는 길일 수도 있겠다.
* 이 글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3, 2013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