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물리학자들, 하이젠베르크나 리처드 파인만, 브라이언 그린 등의 저자들 책을 읽으면 참 뒷맛이 좋다. 분자생물학자인 자크 모노나 신경과학자인 제럴드 에델만의 책도 그렇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과학도서에는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거나 해방적인 정치적 기획의 가능성을 정초할 수 없다는 제한이 있지만, 최소한 논쟁 속에서도 차곡차곡 누적되고 진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공부해볼수록, 여러 인문-사회학적 사고들(저서들)은 합의 불가능 혹은 화해 불가능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 각각의 이론의 근저에는, 자기주장의 기본전제가 다시 그 주장의 논거로서 쓰이는 순환논리가 있고, 이것은 이론들 간의 화해 불가능한 근원적 간극을 발생시키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철학사의 논쟁이며 백가쟁명의 예가 그것을 입증해 준다. 주요한 사회적 이슈와 관련하여 그런 싸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소통할 수 없는 개념의 대결들, 그래서 거기에는 일종의 내기에 참여한 자들 특유의 주관적 자기 확신들이 판칠 뿐 자연과학적인 공통된 방법론을 통한 합의의 틀이 부재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가위바위보 놀이처럼 물고 물릴 뿐 객관적으로 더 나은 이론이나 개념을 세울 수 없다는 안타깝고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상상하게 된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의 지속과 번영과 행복의 해법을, 객관적 근거에 의해 과학적 방식으로 제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과학을 이용해 최선의 사회를 디자인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하고 신나는 일인가! 그렇게 된다면 자기 충만감에 도취된 이데올로기적 편향들의 함정을 넘어, 저 해방된 참세상으로 우리는 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2.
그런 바람을 성취하기 위한 시도들은 이미 있어왔다. 물리학 등의 자연과학과 등가의 과학적 객관성을 지향하는 시도를 사회과학(social science)과 구분하기 위해 일단 ‘사회의 과학(science of society)’(이 용어는 필립 볼의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Critical mass)>에서 빌려 왔다)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러한 ‘사회의 과학’의 역사는 그 뿌리가 얕지 않다. 과학혁명 시기 물리학의 태동과 더불어 물리학적 패러다임을 인간 공동체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빈번하게 있었다.
토머스 홉스는 갈릴레오가 운동 법칙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했던 논리를 이용해 인간의 상호작용, 정치, 사회에 대한 과학을 정립하려고 하였다. 그의 대표작인 <리바이어던>은 그러한 세계관으로부터 정치의 과학을 정립하려던 시도였다.
흔히 사회학의 아버지로 거론되는 19세기 철학자 오귀스트 콩트는, 사회학을 수학과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과 함께 현실의 모든 것을 서술하는 여섯 가지 기본 과학중 하나로 여겼다. 콩트는 ‘사회물리학’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사회학이 인간 경험의 ‘총체적 이론’이 될 것이며 경제, 정치, 제도 등을 설명하는 이론으로까지 확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공학자와 건축가, 과학자, 정부의 기술 관료 사이에 계몽주의 시대나 산업혁명 시대에 과학과 공학의 문제를 해결했던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연했다. 그런 사람들은 ‘하이 모더니스트’라 불리었는데, 그들에 따르면 도시 디자인과 천연자원 관리, 심지어 경제 전체를 운영하는 일 까지도 ‘과학적’ 계획의 범위에 포함되었다. 탁월한 성과를 보였던 과학적 방법론을 사회에 직접 적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방법론과 사회의 만남의 결과는 참담하였다. 소비에트의 집산화나 르 코르뷔지에의 브라질리아 계획 등이 처참한 결과를 낳았고, 그중에서도 나치즘의 사회공학 등의 사례는 20세기의 비극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러한 실패는 최근의 경제, 사회 정책에서도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다.
과학적 방법론은 물리학이나 생물학의 영역에서는 상당한 성취를 보였는데, 왜 사회학의 영역에서는 처참한 결과를 보이는 것일까? 겉보기에 올바른 듯 보였던 ‘하이 모더니스트’들의 유토피아적 시도는 왜 실패한 것일까? 과학 자체의 근본적 한계일까? 아니면 과학적 방법론이 적용되기에는 사회가 지나치게 복잡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미래에 대한 집단적 기획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인가? 저자인 던컨 J. 와츠는 바로 이런 질문들에 답하고자 한다.
3.
오래전부터 그리고 최근까지도 인간 공동체 대한 과학은 ‘사회과학’이라는 명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과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학문의 성취나 가능성이 과연 자연과학자들이 얘기하는 과학과 같은 것이냐 여부는 논쟁중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사회과학 책들을 보면서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게 무슨 과학이냐’는 것이다. 사회학 영역에서는 인간 행동에 대해 물리학 법칙 엇비슷한 보편적이고 정확한 법칙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거다. 뉴턴의 법칙들처럼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는 보편적 법칙에 비견될 만한 어떤 이론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사회과학이 과학으로 분류될 자격조차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일부 과학자들은 확신하고 있다.
존 그리빈이라는 저명한 물리학자는 어느 사회학자의 저서를 비판하면서, 사회학자들이 법석을 떨며 매달리는 문제들은 초보물리학자에게는 빤한 내용이라는 주장했다. 사회학자들의 작업은 한심하다고 말하면서, 일자리가 없는 물리학자는 사회학 분야로 가면 순식간에 큰 성과를 낼 수 있으니 당장 업종을 변경해 보라고 권했다.
소개하려는 책의 저자인 던컨 J. 와츠는, 그리빈의 글을 접하면서 물리학자에서 사회학으로 업종을 변경했다고 한다. 그리고 십 수 년 간 사회과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그런 이후에 그는 왜 사회과학이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과 다를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했고, 그것을 책으로 담은 것이 바로 <상식의 배반>(원제: Everything is Obvious)이다. 이 책은 (자연)과학자들의 사회과학을 대한 경솔한 비판에 대한 학문적 해명이며, 변화된 세계에서 사회과학의 진정한 과학화의 가능성까지 제시해준다. 또한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는 것, 예측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통찰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4. 상식의 문제
저자는 ‘상식’의 비판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텍스트에서 상식이 의미하는 바는 꽤 복합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그래도 대체적 윤곽은 갖고 있다. 상식의 의미는 직관이나 민간 지혜, 사회 통념, (명시화하기 힘들지만 누구나 대부분 알 수 있는)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 등을 의미한다. ‘상식’이란 단어를 복합적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런 면도 있다. 하지만 과학이나 수학 같은 형식적 체계를 갖는 지식과 대조해보면 상식의 특징은 뚜렷해진다. 과학이나 수학과 달리 상식은 답 자체에만 관심 갖지 그것을 찾는 방법이나 왜 그런지 아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이처럼 상식은 실용성을 지향하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형식적 지식체계는 개개의 것을 보편적 원리에 따라 범주화 하지만, 상식은 개개의 구체적인 상황을 그 자체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상식은 구체적이며 케이스 중심적이란 얘기이다.
이런 상식의 특성은 우리가 학교나 직장 등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때 많은 도움을 준다. 상식은 일일이 나열하기 힘든 수많은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인 규칙으로 존재한다. 관찰한 내용, 경험과 통찰, 상황에 대처하면서 배우고 축적해가는 일반적인 지혜가 상식인 것이다.
단편적이고 일관성이 없으며 때로는 자기 모순적이기도 한 상식의 특성이 일상생활에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일상생활은 구체적인 맥락에 따른 작은 문제로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식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장기적이며 큰 규모의 상황을 다루어야 할 때 발생한다. 기업, 시장, 국가의 정책 수립 등의 상황은 상당한 복잡성을 안고 있다. 결국 상식은 우리가 세상에 용이하게 적응하도록 도와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을 심각하게 약화시킨다. 이 텍스트에서는 세계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인식을 방해하는 인지적 패턴을 ‘상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한 상식이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1차 과제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회 현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상식이 일으키는 인지적 오류를 저자는 대략 3가지 범주로 나누어 설명한다.
(1) 인간 행동에 대한 동기모델의 오류: 사례1
장기기증은 가치관에 따라 의견을 달리하게 되는 민감한 사안이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양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고 나라마다의 편차가 심하다. 몇 년 전의 조사에 따르면,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장기기증에 동의한 시민의 비율이 나라에 따라 낮게는 4.25%에서 높게는 99.98%까지 나타났다. 그 수치는 고루 퍼져 있지 않았고 두 부류(10%내외와 90%후반)에만 몰려 있는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으로 A나라에서는 약 10% 남짓의 시민이 장기기증에 동의한 반면 B나라에서는 99.9%가 동의했다.
이런 격차가 벌어진 이유에 대해, 저자는 강의 중에 대학생들에게 설명 해보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의견을 내보길 바란다. 과연 어떤 요인이 이런 차이를 유발하게 되었을까? 다양한 가능성이 제기됐다. 한 나라는 세속적이고 다른 나라는 종교적일 것이다. 어쩌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 비해 의술이 상당히 발달해 장기이식 성공률이 더 높을지도 모른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사고비율이 높아서 장기기증자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한 나라는 사회주의적 문화가 강해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반면, 다른 나라는 개인적 권리를 더욱 가치 있게 여길지도 모른다 등등의 의견이 표명되었다.
모두 그럴듯한 설명이었지만, A나라는 독일이고 B나라는 오스트리아였다. 여러모로 유사성이 강한 나라들이었던 것이다. 그럼 두 나라의 법률이나 교육 제도에 어떤 차이가 있던 것일까? 오스트리아에서 장기기증의 동기를 유발하는 충격적인 이벤트나 언론 캠페인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설명을 요청받았던 학생들은 무언가 대단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인간행동의 엄청난 차이는 예상치 못한 단순한 이유로 생기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에서는 기본으로 주어진 선택이 ‘장기기증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던 반면, 독일에서는 ‘장기기증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서식의 차이는 사소해 보이지만 장기기증자 비율의 현격한 차이를 높였다. 기본 선택에 따르는 사람은 가만있어도 되지만 반대 선택을 할 경우에는 서류를 우편으로 다시 보내야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본 서식처럼, 선택의 결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어디나 선택이 존재하고 그 선택은 삶의 모든 측면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선택방식에 관한 이론이 대부분의 사회과학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람들의 행태를 이해하려 할 때, 반사적으로 이해 가능한 합리적 행동이라는 틀을 채택한다. ‘사람은 합리적 존재’라는 가정은 전반적으로 장려되는 계몽적 가정이다. 그러나 전자나 단백질, 행성의 움직임을 ‘이해한다’는 말과 인간의 행동을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는 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전자의 움직임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학자는 자신이 연구 중인 전자가 처한 상황이 있다고 상상하지 않는다. 그 학자에게는 전자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것은 전자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과학적 ‘이해’에서, 연구자는 연구 대상에 대해 자기 투영을 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다.
반면 인간 행동을 합리화하다는 것은, 이해하려는 그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일일지 마음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일이다.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 사람이 한 것과 같이 우리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 때만 진정으로 문제의 행동을 이해했다고 느낀다. ‘시뮬레이션을 통한 이해’는 상상적 투영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상당한 주관적 요소가 끼어들 여지가 있다.
앞서 장기기증자의 예에서 살펴보았듯 우리의 정신적 시뮬레이션은 특정 유형의 환경적 요인이 매우 중요한 것인데도 무시하고 넘어간다. 이는 우리가 생각할 때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요소인 동기부여, 선호, 믿음 등과 관련된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선택지는 환경의 일부로서 의식적으로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런 식으로 인간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것들로는 프라이밍(priming), 앵커링(anchoring), 틀짓기(framing), 가용성 편향(availability bias), 확증 편향(comfirmation bias), 동기화된 추론(motivated reasoning) 등등 일일이 나열하기 힘들 정도다. 합리적 선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들이, 뱃사람을 유혹하는 사이렌의 함정들처럼 곳곳에 무리지어 있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불합리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예들을 계속 파고들어 인간의 선택이 다양한 정보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같은 이유로 가장 단순한 상황에서조차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것과 관련성이 있을 만한 요인의 목록은 순식간에 길어질 수 있다. 행동의 원인으로 삼을 수 있는 목록이 무한에 가까워지는 것을 ‘사고범위 문제’라고 부른다.
합리적 선택 이론처럼 우리의 상식도 사람들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고범위 문제를 고려할 때 우리가 어떤 상황에 관련 있는 요인을 전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방대한 심리학 문헌에 따르면 관련 있을 만한 요인 중 상당 부분이 우리의 의식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 행동의 동기 모델은 심각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2) 인간의 ‘집단행동’을 동기모델로 설명할 때의 증폭되는 오류: 사례2
처음에 페이스북이 인기를 끌 때는, 대학생들만 배타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성공비밀이라는 것이 통념이었다. 하지만 페이스북이 만인에게 개방되고 나서 한참이 지난 2009년, 한 신용평가회사 보고서에서 페이스북의 성공요인은 광범위한 연결과 호소력이라고 평가했다. 즉 페이스북은 페이스북이 지닌 속성으로 인해 성공했고 그 속성이 반대로 바뀌었을 때조차 그렇다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새로운 일이 발생할 때,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에도 유사한 논리적 패턴이 등장한다. 여성이 투표권을 얻는 일, 동성커플의 결혼을 허용하는 일, 간통죄가 위헌으로 판결나는 일 등 새로운 사회적 동향을 설명할 때면 흔히 사회가 그것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로 설명한다. 그러나 사회가 무엇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이런 상식적 설명에는 순환논리가 버티고 있다. ‘X라는 일이 일어난 까닭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X라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회사의 성공 이유를 설명할 때, 그리고 새로운 사회현상의 등장을 설명할 때, 심지어는 뛰어난 예술 작품을 설명할 때조차도 이러한 순환논리로서 설명하는 상식의 오류는 반복되고 있다.
사회적 현상을 설명할 때 왜 이렇게 순환논리가 만연하고 있을까? 그 순환성에는 상당히 중요하고 심오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그 순환성은 사회학 용어로 ‘미시-거시 문제(micro-macro problem)'라는 학문적으로 중요한 인식상의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다.
사회학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상황은 다수의 사람이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거시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사회적 현상은 개개인의 선택, 즉 ‘미시적’ 행위로 촉발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개개인의 미시적 선택이 사회라는 세계의 거시적 현상으로 넘어가는 걸까? 기업, 시장, 문화가 특유의 특징을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이 바로 미시-거시 문제다.
이러한 미시-거시 문제는 과학의 모든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창발(emergence)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 원자에서 어떻게 분자로, 분자에서 아미노산, 세포, 기관, 생명체까지. 이런 관점에서 사회학은 아원자 입자에서 시작해 글로벌 사회로 끝나는 복잡한 피라미드의 한 조각일 뿐이다. 그 피라미드의 각 단계에는 본질적으로 똑같은 문제가 존재한다. 어떻게 하면 한 수준의 현실에서 다음 상위 수준의 현실로 넘어가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은 그 문제(창발)를 회피해 왔고, 대신 각 수준을 분업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물리학, 화학, 생물학은 그 자체의 사실과 법칙, 규칙성을 갖춘 독립된 과목들이었다. 하위 단계의 법칙에서 그 상위 단계에 적용되는 법칙을 도출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각 뉴런의 행동에 관해 많은 것을 안다고 해도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과학에서는 그러한 난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사회현상에 관해 말할 때는 기업, 시장, 정당, 민족국가, 인구집단 등을 ‘사회적 행위자’로 일컬으며, 마치 그 집단이 그것을 구성하는 개개인과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말한다.
이처럼 ‘대표 행위자’의 방식으로 사회적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수천, 수백만 명의 개인 행위자 사이에 오고가는 상호작용을 무시함으로써 분석을 엄청나게 단순화한다. 마치 개인행동 방식에 관한 제대로 된 모형만 있다면, 대규모의 인간 집단이 움직이는 방식에 관해서도 제대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실제로 실패한 이론이다. 개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룰 때 나타나는 창발의 과정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식별 불가능한 아주 미세한 차이를 가진 두 집단이 상호작용하는 요소를 고려해 시뮬레이션 할 경우 한 집단은 폭동으로 다른 집단은 질서와 평화가 유지되는 집단으로 아주 상반된 행태를 보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델이 바로 그라노베터 모형이다. 평균적인 ‘대표 행위자’ 모델로는 집단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에 궁극적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예라고 하겠다. 두 집단 간에 다른 결과가 나온 이유를 이해하려면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고려해서, 누군가가 어떤 행동을 하면서 이내 꼬리를 물고 펼쳐지는 각 개인의 결정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개인들 간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실시간 따라가면서 그것을 연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방법의 결여가 창발의 과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미시-거시 문제를 난제로 만들었고, 사람들을 상식적인 순환논리적 설명에 만족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그러나 새로운 미디어의 발달에 의해 이 문제를 극복할 가능성이 생겼다. 마지막에 다시 다룬다).
(3) 특별한 소수에 의해 사회현상이 유발된다는 모델의 오류
‘대표행위자’나 순환논리로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방식 다음으로 유행하는 것은 ‘소수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이론이다. 이것은 말콤 글래드웰이 <티핑 포인트>에서 주장했던 것인데, 사회적인 큰 사건의 발생은 영향력 있는 특별한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촉발된다는 주장이다. 이는 그럴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인간 행동에 관한 수많은 매력적인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소수의 법칙도 인식의 착각으로 드러났다.
대유행이나 큰 사건에서 핵심적 소수의 영향력의 효과는 대체로 크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단순히 어떤 전염을 통해 영향이 확산될 때는, 그것을 촉발한 개인의 속성보다 네트워크의 전반적인 구조에 더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마치 산불이 번져 넓은 땅을 태우려면 바람, 온도, 건조함, 가연성 연료가 함께 작용해야 하듯, 사회적 전염도 영향력의 네트워크가 적절한 조건을 만족시켜야 확산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영향력이 있는 소수의 개인과 무관했다. 오히려 쉽게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쉽게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임계치 이상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 많이 좌우되었다. 이들 무리가 임계치 이상 존재할 때는 평균적인 개인도 거대한 반응을 촉발할 수 있다. 큰 산불이 일어날 조건이 갖춰져 있을 때는 작은 불씨 하나만 있어도 산불이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우리는 베스트셀러나 히트상품을 만드는 것은 타이밍과 환경의 조합이 만든 우연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소수의 법칙을 비롯해 특별한 사람을 내세우는 주장은 모든 행위를 소수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네트워크 구조가 결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를 간과하게 한다.
5. 복잡계에 대처하기
단순계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부분의 변형을 하나의 모형으로 포착할 수 있는 체계다. 진자의 진동이나 위성의 궤도가 그렇다. 복잡계는 일반적으로 복잡성이 비선형적 방식으로 상호작용하는 수많은 독립적 요소에서 생겨나는 체계이다. 복잡계의 모든 자잘한 요인이 잠재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에 예측 모형을 만드는 데도 한계가 있다.
예측은 대개 단순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사회의 거의 모든 것(마케팅 캠페인의 효과, 경제정책의 효과, 사회 기획의 결과 등)은 복잡계의 범주에 속한다. 애초에 사회라는 세계를 단순한 구성원의 집합체가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 그러한 상호작용을 통한 창발의 과정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복잡성이 발생하고, 바로 그 때문에 가능한 예측의 종류가 심각하게 제한을 받는다. 복잡계의 예측이 힘들다고 해서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특정 종류의 사건이 일어날 확률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사회라는 복잡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조금 단순화하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역사적 패턴에 부합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는 전자에 대해서만 일정부분 신뢰한 말한 예측을 할 수 있다. 계절성 독감의 특징은 해가 바뀌어도 변화가 적기 때문에, 독감 예방주사 약의 필요량을 무리 없이 예측할 수 있다. 다른 예로 재정 상태가 동일한 소비자들이 신용카드 대금의 연체 확률은 개인에 따라 상당한 다르지만, 신용카드 회사들은 여러 변수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전체적인 연체율을 놀랍도록 잘 예측해낸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새 작품의 판매량이라든지, 기획중인 영화의 성공여부는 신뢰할만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통제 불능의 훨씬 많은 변수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복잡계에서 미래 예측의 궁극적 한계를 인식하고 인정하게 될 때, 새로운 대처법이 가능할 수 있다. 전통적 전략 기획은 기획자에게 미래 예측을 요구하고,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오류에 취약해진다. 그렇다면 기획자가 장기적인 전략 동향 예측에 크게 의존하지 말고, 현장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하는 일에 더 중점을 두는 방식, 즉 ‘측정과 대응’이라는 전략법이 복잡계에 대한 대처법으로 각광받고 있다.
‘측정과 대응’ 전략의 가치는 온라인 세상에서 더 뚜렷이 드러난다. 온라인에서는 낮은 비용과 수많은 사용자, 신속한 피드백 주기의 조합으로 거의 모든 것의 다양한 변수를 시험할 수 있다. 실제로 구글과 야후의 연구진은 ‘플루’나 ‘플루 주사’ 같은 인플루엔자와 관련된 검색 건수를 세어 인플루엔자 환자 수를 측정했는데, 놀랍게도 그 추정치는 질병통제센터가 보고한 수치에 가까웠다.
‘측정과 대응’ 전략을 용이하게 해주는 인터넷의 능력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현재 상태를 바로바로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이 커갈수록 기획에 대한 기존의 사고방식도 변할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예측해서 광고나 제품, 정책 등에 반응하도록 유도하느라 애쓰는 대신, 모든 가능성에 대해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직접 측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대응하면 된다. ‘예측과 통제’에서 ‘측정과 대응’으로 옮겨가는 것은 전반적인 추세이다.
미래 예측의 한계에 대한 이해 속에서, 이제는 서두에서 문제제기 했던 하이 모더니스트들의 실패를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낙관적인 하이 모더니스트들의 시도는 실패했다고 앞서 언급했다. 그들의 실패를 검토해보면, 그것은 과학의 실패가 아니라, 계획가의 직관이 과학적 지식만큼 정확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착각에 근거했기 때문이었다. 하이 모더니즘 철학의 실패는 원인과 결과라는 융통성 없는 사고 모형에 집착하느라, 복잡계적 사회에서 중시해야할 국지적이고 맥락 의존적인 지식의 중요성을 너무 하찮게 보았다는 데 있다.
복잡한 세계에 포괄적인 규칙을 적용하는 것은 실질적인 실패와 환멸을 부른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사회적 계획이 바탕으로 삼아야 할 지식은 그 계획을 적용할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 필수적이고 국지적인 지식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에 대한 참고할만한 성공적인 예시는 건축가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와 브라질 꾸리찌바 시의 대중교통 서비스 정책 등이 있다.
두 예시에서 기획자들은 자기 자신보다 국지적 행위 주체의 지식 및 동기를 중심적으로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방식은 사회라는 복잡계에 대처하는 ‘측정과 대응’이라는 동일한 패러다임 위에 있다.
6. 재능과 성공 그리고 우연의 문제
한 사람의 경력을 저울질할 때, 어떤 예술작품의 가치를 평가할 때 그리고 어떤 공공정책을 평가할 때 우리의 평가는 한결같이, 알려진 그 결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결과에 우연이 크게 작용한 경우에도 말이다. 그런 우연히 발생한 약간의 차이를 확대재생산 하는 것으로 후광효과와 마태효과가 있다.
사회 심리학에서 후광 효과(halo effect)란 타인의 어떤 특징(키가 크다거나 잘생겼다거나)에 대한 평가를 연관도 없는 다른 특징, 즉 지능이나 성격에 대한 평가로 확대하는 경향을 일컫는다.
성공하는 기업은 늘 선견적 전략과 강력한 리더십, 건전한 실행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반면, 실적이 나쁜 기업은 잘못된 전략과 어설픈 리더십, 조잡한 실행력으로 묘사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실적의 변동폭이 큰 기업은 계속 똑같은 전략, 실행, 리더십 아래서도 그만큼의 오르락내리락하는 평가를 받았다. 평가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질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결과에 따라 평가가 정해지는 것이다.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마태복음의 한 구절을 인용해 일종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마태 효과’라고 불렀다. 머튼은 이 같은 원리가 성공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한 개인이 경력 초반에 성공을 거두면 자신의 고유한 소질과 무관하게 어떤 구조적 우위를 얻어 이후에도 더 쉽게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정상급 연구대학에서 일자리를 구한 젊은 과학자는 그보다 못한 곳에서 일하게 된 동료에 비해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수업도 적고 더 뛰어난 대학원생을 제자로 맞게 되며, 연구비를 받기도 더 쉽다. 이에 따라 같은 분야에서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출발한 두 사람이, 단지 다른 기관에 고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수년 후 성공 수준에 엄청난 차이가 나게 된다. 성공은 명성과 인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성공 기회로 이어진다.
보상은 성과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고 믿는 우리는 성공한 사람은 더 재능이 있거나 더 열심히 일했을 거라고 믿고 싶어 한다. 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를 이해하려 할 때 혹은 어떤 사람이 부유하거나 성공한 이유를 설명하려 할 때, 우리의 상식은 그 대상이나 사람의 내재적 특질에서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광 효과와 마태 효과는 이러한 상식적 설명이 착각임을 가르쳐준다. 무작위성과 누적적 이점의 결합은 비교적 평범한 사람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저조한 결과를 낼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의 능력을 평가할 때 성공이나 부를 알려주는 화려한 칭호를 척도로 판단한다면 뭔가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재능은 재능이고 성공은 성공이며, 성공이 항상 재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7. 사회과학의 한계와 전망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회과학이 과학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사회학자가 물리학자의 이론적 성공을 모방하려 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이다.
인간 행동의 복잡성을 생각해보면 사회과학에서 물리학을 닮고 싶어 하는 접근법은 가망이 없어 보인다. 개인의 행동은 수십 가지 심리적 편향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그러한 편향 중 상당수는 의식적인 인식 밖에서 일어난다. 개개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집단으로 행동할 때는 우리가 아무리 개개인에 대해 잘 알고 있더라도 집단의 수준에서 무슨 일이 발생(창발)할지 알 수 없다. 그 창발의 과정조차 관찰할 방법이 없다. 시장, 정부, 회사 등의 복잡성이 서술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사회학에서 물리학의 보편법칙 같은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최근에 세상은 사회과학이 역사적으로 안고 있던 이러한 한계를 제거해주는 방식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전자우편이나 휴대전화, 메신저 같은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수십억 명의 개인 사이에서 오고가는 사회적 네트워크와 정보의 흐름을 추적할 수 있게 해준다. 페이스북, 트위터, 위키피디아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사회적 활동이 실시간으로 기록되면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은 사회과학적 연구에서 커다란 보고가 될 수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에서의 대규모의 상호작용하는 집단행동을 실시간으로 정량적으로 관찰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시간 상호작용에 대한 집단적 데이터에 대한 접근법이 급속히 증가함으로써, 미식-거시 문제의 작동을 즉 창발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추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 사회과학의 새로운 도구를 통해 여러 가지 복잡계적 사회 문제 속에 유사한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중간규모의 보편적 이론들을 만들어낼 수 가능성이 있다.
8. 맺으며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자본주의는 사회의 내적 모순으로 몰락하고 사회주의 도래가 사회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하이 모더니스트들은 사회 공학적 시도를 통해 이상적인 정책을 사회에 적용해보려고 했다. 그들 그리고 그들과 유사한 여러 시도들이 실패를 했지만, 아직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사회문제의 해법에 통쾌한 정답이 있기를 바란다.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한 방의 유토피아적 해법이 우리를 구원해주길 바라는 욕망의 수요는 넘쳐날 것이다. 그런 시도가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펼쳐질 미래는 모르는 것이니까.
하지만 던컨 J. 와츠가 이 책을 통해 말하는 바는, 그런 시도를 가능케 하는 사회적 법칙의 발견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람의 행동을 그가 갖고 있는 합리적 동기로 추론하는 습관이 있는데,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은 그런 모델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다. 인간 행동에서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동기나 의도의 몫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모델을 인간 집단에 적용할 때는 그 오류가 엄청나게 증폭된다. 아직 과학 분야에서조차 학문적으로 제대로 접근해보지도 못한 ‘미시-거시 문제’라는, 창발의 메커니즘 설명해 내야하는 거대한 장벽과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그 거대한 장벽 앞에서 우리들은 순환논리를 통해 자기만족적인 어설픈 설명을 해대거나, 방법론적 개인주의 모델이나 대표행위자 모델이라는 땜질식 이론으로 사회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 공학적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예측의 한계와 우연의 커다란 역할을 잘 알고 인정해야 하며, ‘측정과 대응’의 방식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 방식은 또한 구체적인 상황에 따른 필수적이고 국지적인 지식에 기반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본능적 ‘상식’이 사회 이론에 끼어들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커뮤니케이션 발달에 따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집단행동이 실시간으로 기록된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사회과학의 새로운 희망일 수 있음을 저자는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그 희망에서도 유토피아적 성급한 욕망은 충족되지는 않을 것이다.
뉴턴과 아인슈타인 등에 의해 물리학에서 경이로운 혁명적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그 훨씬 이전에 코페르니쿠스와 티코 브라헤를 비롯한 선대 과학자가 수세기에 걸쳐 집요하고 치밀하게 그리고 고되게 해온 관찰 기록에 기대고 있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마찬가지로 사회과학에서 혁신적 법칙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회과학자들의 지루한 관찰과 기록의 긴 시간을 요청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결론적으로, 성급한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리면서 장인적인 꾸준한 탐구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의 결론은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밋밋하고 지루하며 씁쓸하다. 과학에 근거한 긴급한 사회변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쓴맛 나는 좌절을 안겨준다. 그러나 그것은 정직한 좌절이며, 지적 건강에 좋은 근사한 쓴맛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4, No.2, 2016년 2월, 이승범, 가정의학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