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룬다티 로이는 《작은 것들의 신》의 대성공 이후 처음 쓴 에세이 〈상상력의 종말〉에서 마하트마 간디의 나라가 감행한 1998년의 포크란 핵실험을 비판하며 자신의 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 있다가 죽었을 때만 비로소 죽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 입에 올릴 수도 없는 폭력과 주위에서 벌어지는 삶의 저속한 격차에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가장 슬픈 장소에서도 기쁨을 찾는 것, 끝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절대로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만들거나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것, 힘을 존경하고 절대로 권력을 존경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켜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절대로 눈을 돌리지 않고, 본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것, 그것이 제 바램입니다.”
작가로서 결단코 죽은 듯이 살지 않겠다는 로이의 꿈, 그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과 삶의 격차에 절대로 둔감해지지 않은 채 아픈 눈을 부릅뜨고 삶의 고통과 아름다움을 지켜보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첫 소설 이후 출간한 다른 정치에세이집과 마찬가지로 《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도 작가가 본 것을 절대로 잊지 않기 위해 2002년부터 2008년 사이에 쓴 열 편의 평론과 두 편의 희곡으로 남긴 현장기록이다. 물론 이번에 로이가 본 것은 바로 8억 명이 넘는 유권자와 90만개의 투표소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이자, 100명의 재산이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반면 인구의 80%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심한 빈부격차를 만든 ‘주식회사’ 인도였다.
개발과 ‘테러리스트’
로이는 약 7억 명이 농촌에 거주하는 나라의 재무장관이 앞으로는 인구의 85%가 도시에 거주하도록 만들겠다고 선포할 때 이런 경제개발이 어떻게 테러방지법이나 인종 대학살과 같은 반민주적인 파시즘의 출현을 예고하게 되는지 지켜보았다. 인도농촌개발 예산의 60%를 다국적 기업 엔론에게 갖다 바친 나라가 앞으로도 더욱 친기업적인 투자환경을 만들겠다고 선언할 때 이런 자유시장 개방이 어떻게 극우 힌두민족주의자들의 집권을 도와주고, 민주국가의 정부가 마치 경찰국가인 것처럼 ‘녹색사냥 작전’(Operation Green Hunt)과 같은 처참한 공권력을 휘두르게 되는지를 지켜보았다. 나아가 이 거대한 주식회사 인도가 정치적으로 파시즘적 징후를 보이자 여기에 맞서 가장 가난한 인도의 민중들이 어떻게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마오주의자가 되는지를 지켜보았다.
이 과정에서 로이는 2000년대 들어 계속된 9%의 놀라운 경제성장이 바로 인도 전역에서 벌어지던 민주주의의 급격한 후퇴와 서로 긴밀히 연결된 모종의 ‘협력’에 의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마치 오리사주(州)의 천연자원을 파헤치느라 그 지역을 완전히 황폐화시킨 초국적기업 베단타(Vedanta)에 몸담았던 차담바람 재무장관이 이번에는 전격적으로 내무장관이 되어 땅을 내놓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찰과 군대를 동원하여 인정사정없이 총구를 들이댔던 것처럼 말이다. 재무장관과 내무장관의 업무가 마치 합체로봇처럼 서로 구별하기 어려워질수록 빚에 짓눌린 더욱 많은 농민들은 자살을 하게 되고, 땅을 뺏긴 더욱 많은 아디바시들은 테러리스트가 되어 그에 합당한 대우를 국가로부터 받게 되었다. 물론 이 때에도 인도 대법원은 ‘왕국의 스캔들’ 장에도 나오듯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두 ‘폭도’임을 법적으로 인정해주고, 이런 판결에 저항할 경우에는 법정모독죄를 적용하는 ‘법치주의’ 원칙을 고수함으로써 정부의 테러진압이 원활히 이루어지도록 법적인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로이는 이처럼 인도 전역에 난무한 소위 ‘정경합체’(政經合體)와 그에 따른 국가와 풀뿌리 민중간의 대결을, 파키스탄과의 분리 독립 이후 인도에 새롭게 등장한 ‘신(新)분리주의’라고 규정하였다.
이 점에서 보자면 인도 전역을 휩쓸고 있는 이 신생 분리주의는 과거처럼 영토를 경계로 한 수평적 분리주의라기 보다는 강자와 약자를 경계로 한 수직적 분리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빛나는 인도와 남루한 인도를 구분하는 것”이자 “공기업 인도를 주식회사 인도와 분리하는 것”이다. 로이에 따르면 이제부터 진짜 인도발(發) 구조조정이 시작된 셈이다. 이 분리주의는 인도정부가 민중이 전통적으로 누려온 공공재와 공공기반을 몇 개의 다국적 기업에게 팔아넘기는 것이자 동시에, 이를 위해 대자연에 기대 살던 토착원주민을 그들의 오래된 삶터에서부터 내쫓는 것을 말한다.
정치가와 기업가, 그리고 법률가들로 결탁된 이 신종 ‘차르’들은 자기들이 주장하는 진보모델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음을 확실히 관철시키기 위해 수많은 인종적, 종교적 학살을 아끼지 않았다. 희생자들은 차르의 그때그때의 사정에 따라 아디바시와 달리트가 되기도 하고, 시크교도나 무슬림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마오주의자나 카슈미르의 민중이 되기도 한다. 이 국가적 시장개방 사업을 위한 대규모 이주로 누가 희생되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때로는 대규모 댐건설로, 때로는 힌두우익의 배타적 민족주의로, 때로는 파키스탄과 벌이는 카슈미르의 영유권 확보를 위해 그저 필요에 따라 학살될 뿐이다. 이 차르들의 목표는 가난한 사람들을 깨끗이 치워버려 이들이 “소액대출, 개발계획, 비정부기구 후원금의 수혜자가 되어 미소 지으며” 텔레비전 광고에나 나오도록 만드는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저항도 만만치 않다. 2008년에는 카슈미르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고, 지금도 안드라프라데시주와 차티스가르주, 오리사주, 그리고 서벵골에 걸쳐있는 인도 최대의 천연자원 매장지역인 소위 ‘붉은 회랑’(Red Corridor)에서는 30만 명이 넘는 무장 마오주의자들이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다. 혹자는 소금행진과 비폭력과 평화적인 단식시위의 전통을 자랑하는 간디의 나라에서 어떻게 무장투쟁을 선택할 수 있느냐고 반문할 테지만 로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미 굶주리고 있는데 어떻게 단식투쟁을 할 수 있을까요? 물건을 살 돈이 없는데 어떻게 외국 제품 불매운동을 벌일 수 있을까요? 소득이 없는데 어떻게 납세를 거부할 수 있을까요?” 원주민들은 차르가 만든 새로운 토지수용법이 자기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모두 범죄자로 만들고 있으며, 자기들의 저항을 테러리즘으로 낙인찍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힌두 근본주의자들에게 무슬림이 적이 된 것처럼, 기업 근본주의자들에게는 토지 수용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바로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메뚜기 소리를 듣다’ 장에도 나오듯이 만모한 싱 전(前) 총리가 “마오주의자들이야말로 인도의 치안을 위협하는 가장 큰 내부의 적”이라고 선언하고, 특수부대를 동원하여 이 저항세력이 다시는 활동하지 못하도록 박멸할 것을 요청했을 때, 원주민으로서는 싸우지 않으면 죽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인도정부는 이주를 거부하는 원주민들을 메뚜기 떼로 취급하지만 로이는 이들 가장 가난한 민초들이 내는 저항의 함성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고 말한다. 비록 총은 들었어도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간디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로이는 무장 마오주의자들의 초대를 받아 오리사주 숲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몇 주를 보낸 적이 있다. 그 때의 기록인 《부서진 공화국》에 따르면 한 팀이 수백 명에 이르는 이들 원주민은 모두 완전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탄소발자국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지구에 어떠한 오염도 남기지 않으며, 어떠한 소비와 낭비와 쓰레기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간디보다도 더 간디적인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이는 이들 총을 든 간디주의자들에게서 인도의 희망을 찾는다. 게다가 이들은 마오주의자로 불리지만 실상은 마오쩌뚱(毛澤東)이 누군지도 전혀 모른다는 점에서 더욱 희망적이라고 본다.
경제성장과 위협받는 민주주의
그렇다면 이 끔찍한 폭력과 학살이 도대체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이 한 마리의 육식동물로 합체하여 오로지 이윤 극대화만 추구”하는 무시무시한 돌연변이가 되었을까? 그 비밀은 바로 “대의(代議)가 너무 지나쳐 오히려 민주주의를 크게 손상시킨 대의제 민주주의”에 있었다. 로이가 지켜본 인도의 ‘선거 민주주의’는 더 이상 사람들이 꿈꾸던 정의와 안정의 수단이 될 수 없었다. 책 서문에서 로이는 무엇보다도 이와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가 어떻게 해서 파시즘적 폭력을 행사하는 돌연변이로 변신하게 되는지를 추적하고자 현장기록을 시작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 합체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연합과 진보’의 결합이다.
여기서 연합이란 정치권이 힌두 민족주의라는 파시즘적 깃발아래 모두 모여 종교 분열정책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로이는 파시즘의 첫 징후를 인도인민당(BJP) 정권하에서의 핵실험에서 찾는다. 당시 우익언론들은 힌두민족주의의 승리라면서 핵실험에 반대하는 것은 반(反)국가적 행위이자 반(反)힌두적 행위라고 외쳤고, 파키스탄과의 적개심이 깊어갈수록 인도 내부의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도 덩달아 커졌다. 물론 힌두민족주의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일은 그 이전인 1984년부터 시작되었다. 시크교도에 의해 인디라 간디가 암살당하자 당시 집권당이던 국민회의당(INC)은 힌두 폭도들이 델리 시내에서 시크교도 3,000명을 학살하도록 수수방관했고, 이 종교학살을 교묘히 이용하여 1985년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당시 라지브 간디는 “큰 나무가 쓰러지면 땅이 흔들리기 마련”이라며 학살에 대한 검찰조사를 거부했다. 대성공을 거둔 국민회의당의 선거전략은 정치적으로 맞수인 인도인민당이 집권할 때도 그대로 재활용된다. 구자라트 주총리를 세 번이나 역임한 나렌드라 모디가 이끄는 인도인민당이 집권에 성공한 것도 그가 부추긴 극우적인 힌두 민족주의 덕분이었다. 이들은 고드라에서 일어났던 힌두 성지순례단 화재사건을 무슬림의 소행이라고 부추김으로써, 2002년 구자라트주에서 2,000명이 넘는 무슬림들이 학살당하고, 15만 명의 무슬림이 쫓겨나 지금까지도 무슬림 공동체가 구자라트주의 최대의 빈민가이자 게토로 전락하도록 방치하였다. 로이가 국민회의당과 인도인민당 모두 선거철만 되면 서로 으르렁거리고 싸우지만 사실은 파시즘적 징후를 보인다는 점에서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보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이다. “언제나 국민회의당이 씨를 뿌리면 인도인민당이 그 수확을 거두어가는” 정치체제이기에 이 둘은 투표 때만 수확을 놓고 잠시 싸울 뿐이다.
그렇다면 경제개발을 의미하는 진보, 발전세력은 어떻게 힌두 민족주의 연합과 결합하게 되었을까? 공식적으로는 2009년 인도 최대의 두 기업총수가 구자라트 인종학살의 설계자인 모디를 차기 총리후보로 추대하고 그의 경제개발정책을 칭송하면서부터이다. 미국보다도 더 많은 돈이 드는 인도의 선거비용은 모두 이들 진보세력에게서 나왔으며, 이들이 제공한 공짜 텔레비전과 믹서기, 쌀 보조금덕분에 두 정당이 번갈아 가면서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기업은 그 대가로 보크사이트와 철광석 채굴권이나 아니면 대규모 댐건설과 같은 개발 프로젝트를 할당받는다. 이때 기업의 진격을 방해하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인종학살을 물밑에서 조정해본 풍부한 현장경험을 바탕으로 어느 정부가 됐든 대규모 공권력을 동원하여 알아서 ‘메뚜기 떼’를 박멸해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자유와는 거리가 먼 이상한 ‘자유시장’을 유지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특히 강력한 공권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연합과 매년 10%의 경제성장률을 목표로 삼는 진보의 결합이란 결국 언제 누가 정권을 잡든 인종학살의 위험을 항상 지닐 수밖에 없다. 주식회사 인도가 소수의 다국적 기업의 손으로 넘어가는 데는 민주주의보다는 경찰국가가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투표란, 그저 이런 강압적인 공권력을 행사할 권한을 어느 정당에게 줄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일 뿐, 그것을 서로 번갈아 가져가든, 연합하여 가져가든 학살대상인 풀뿌리 민중으로서는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다. 우리가 높은 경제성장을 바라는 한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파시즘으로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 국가가 민중으로부터 공공재를 빼앗아 기업에게 넘겨주는데 우리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달리트와 아디바시가, 다음에는 시크와 무슬림들이, 그 다음에는 카슈미르와 마오주의자들이 쫓겨났듯이 마지막에는 우리 순서가 될지도 모른다. 정의 없는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중의 통치라고 할 수 없으며, 이런 정의는 선거만으로 얻을 수 없다. 로이의 바람대로 우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정치가들의 권력이 아닌 저항하는 민중의 힘을 존경할 때에야 비로소 정의로운 민주주의가 가능할 것이다.
* 이 저술은 <녹색평론> 139호(11월/12월)에 게재되었던 글을 수정한 것임을 밝힙니다. copyrights@aporia.co.kr ([서평] Aporia Reivew of Books, Vol.3, No.4, 2015년 4월, 박혜영, 인하대학교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