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3-06-28 18:12
[누가를 그리워하며 2] 한 사람의 힘
 글쓴이 : 아포리아
조회 : 11,462  


1.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 1:3-4)

누가는 자신이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목적이 오직 ‘한 사람’이 예수에 대해 확실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데오빌로(Theophilos)라는 말이 ‘하나님의 친구(또는 사람)’라는 뜻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러나 데오빌로를 로마의 기관장으로, 그의 신분을 밝힐 수 없었던 ‘한 사람’으로 이해했을 때, 우리는 누가의 헌신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제자도의 본보기가 됨을 알게 된다.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사역을 기록한 이유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일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례대로'(kathexes)라는 말에서 보듯, 그는 일찍부터 이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로 했다. 단순히 예수님의 행적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누가복음을 쓸 때부터 사도행전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누가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 내 스스로의 일을 기획하고 실천하듯, 한 사람을 위해 이토록 열심을 다해 준비했다는 것이 어찌 놀랍지 않냐는 말이다. 그리고 주님의 복음이 아는 것에 그치지 않는 것, 실천의 방도는 다르지만 행하는 것에 기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그의 섬김이 어찌 간단해 보이겠냐는 말이다.

2.

다음으로 눈에 띄는 것은 누가의 겸손한 태도다. 누가는 자신의 기록이 당시 많은 사람들의 헌신보다 크게 뛰어날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 "우리 중에 ...내력을 기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나도"(누가 1:1-3) 신학자들이 인정하듯 누가의 문체나 꼼꼼한 기술은 사도 요한의 논리와 자신감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자신의 기술만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생각된다. 예수님의 복음이 허탄한 소문들로 퇴색되어 갈 시점에 분연히 붓을 든 요한이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요한 21:24) 하고 말했다면, 누가는 "한 사람"의 영혼이 분열과 다툼으로 얼룩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기록은 많은 것 들 중 하나라는 말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진지한 배려와 아가페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는 철저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함을 강조하셨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할 때가 종종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 7:5).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에서 우리는 쉽게 정욕과 탐심과 다툼으로 들끓는 우리의 지배욕(desire of domination)과 주목받고 싶은 욕망(love of recognition)을 관리하는 것에 실패할 때가 많다. 서양에서 16세기 르네상스는 이러한 지배욕에 휩싸인 부패한 교회와 신학으로부터 정치와 인문학이 독립을 선언했고, 17세기는 이러한 욕망에서 끝이 보이지 않던 종교전쟁의 소용돌이를 절대왕정 국가라는 철퇴로 풀어가는 새로운 해법을 선택했다.

3.

일반적으로 관용(tolerance)이라고 하면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인식된다. 그러나 관용은 상대주의적 회의(relativistic skepticism)나 영과 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니다. 관용의 정신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임을 인정하는 기독교의 정신이 담겨져 있다(잠언 1:7). 이는 "하나님이 내 뒤에 계신다"(God behind me!)는 선지자적 전투자세에서 한 걸음 물러나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감찰하신다"(God over us!)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거리낌 없는 온전함을 가지고자 하는 용기이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역대상 28:9)는 확고한 믿음 위에 서 있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실천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아 보일 예루살렘의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도, 과부된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늙은 선지자도 이런 누가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경건한 눈에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보였다는 누가의 차분한 기록을 읽으며, "데오빌로 각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누가 2:25-40). 유명한 마리아의 찬송에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표현된 누가의 긍휼과 공의의 하나님의 모습에서 데오빌로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하신 말씀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었을까(누가 11:34).

4.

결국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즐거울 수 있는 넉넉하고 부드러운 마음, 정죄하고 비난하고 싶은 마음을 다스리는 '진정한 섬김'의 사랑을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누가는 데오빌로가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잠언 6:7)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비약은 아닐 것이다. 이런 누가의 손길은 참으로 따뜻했을 것이다.

불관용 지수가 그 어느 나라보다 높은 한국 사회를 돌아보자. 이미 불평등 지수로 알려진 지니 계수가 OECD국가 중 상위에 올랐고, 자살률도 인구대비 일본보다 높은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누가가 그리워진다. 모두가 가르치려하고, 모두가 듣지 않으려하는 주변이 더욱 누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는 각양각색의 일들이 있다. 만약 우리 주변에 선생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혹시 이제 주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들도 필요하지는 않을까? 데오빌로에게 누가와 같은 사람, 시므온과 과부 안나에게 누가와 같은 사람, 그리고 사도 바울에게 누가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말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아포리아 편집부, Diagog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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