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세상에서 서로 다투고 싸우지 않는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에서 재산과 권리를 놓고 계속 다투고 싸웁니다. 그래서 저희 같은 변호사들이 먹고 삽니다. 그러니 때로는 분쟁 없이 평화로운 세상은 변호사들의 불행이고, 분쟁하는 세상은 변호사들의 행복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익과 관련한 세상의 싸움이 악(惡)하다면, 그 싸움 옆에서 싸움을 거들면서 돈을 버는 민사(民事) 변호사의 일도 악(惡)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고아와 나그네를 도와주는 공익·인권 변론과 무고한 자를 풀어주기 위한 형사변론에서는 어느 정도 하나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인(私人) 간의 재산권 분쟁을 다루는 민사재판의 변론에는 하나님 냄새보다 돈 냄새가 훨씬 많이 풍깁니다. 저는 민사재판을 주로 하는 민사 변호사입니다. 2012년 우리나라에서 법원에 접수된 소송사건 총수는 6,318,042건입니다. 그 중 민사사건의 수가 4,403,094건(70%)이고 형사사건의 수가 1,670,018건(26%)으로 이 두 가지가 대부분(96%)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저를 포함하여 변호사들이 수행하는 재판업무의 70% 정도는 사적(私的) 권리분쟁에 관한 민사재판입니다. 그러니 저로서는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세상의 민사재판은 탐욕스럽고 악한 일에 지나지 않는가?’
‘탐심 가운데 다투는 민사재판의 변론에는, 믿음의 실천으로서의 의미가 있을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쟁과 다툼은 나쁜 것’이라고 배워 왔습니다. 재산권, 즉 물권과 채권을 가지려고 지키려고 다투는 권리분쟁은 ‘세상의 것인 재물에 대한 욕심’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으로 인간의 탐심과 죄성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권리분쟁을 다루는 민사재판 또한 세상 재물에 대한 인간의 욕심이 배출되는 죄의 하수구(下水溝)에 불과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왔습니다.
논리적으로 세 가지 인식이 가능합니다. (i) ‘민사적 권리분쟁도 악하고, 이를 처리하는 민사재판도 악하다.’ (ii) ‘민사적 권리분쟁은 악하지만, 이를 처리하는 민사재판은 필요악으로 선한 면도 있다.’ (iii) ‘민사적 권리분쟁에도 선한 면이 있고, 이를 처리하는 민사재판에도 선한 면이 있다.’ 이하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제10계명을 여러 방면에서 분석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우리들의 답을 모색해 보고자 합니다.
2. 제10계명의 주관적 해석과 한계 - ‘탐심을 없애라’
가. ‘네 이웃의 소유를 / 탐하지 말라!’
십계명 중의 마지막 제10계명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0:17)”는 내용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타인의 재물(財物)을 뺏거나 훔치는 행동(行動)은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8계명에 부딪혀서, 타인의 아내를 훔치는 행동은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에 부딪혀서, 하나님의 법정에서나 세상의 법정에서나 형사처벌을 받게 됩니다. ‘타인의 소유’를 훔치는 실제 행동 없이 내심(內心)으로만 타인의 소유에 대해서 탐심을 품고 욕심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제10계명을 위반한 심판대상으로 되지만, 세상의 법정에서는 형사처벌을 받지 않는 도덕규범(道德規範) 위반에 해당됩니다.
타인(他人)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도덕규범’의 정당성 자체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견이나 도전의 여지가 없습니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선(善)의 영역’이 있고 ‘남의 것을 탐하는 악(惡)의 영역’이 따로 있으며 그 둘 사이의 경계(境界)가 38선처럼 분명(分明)하다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만 ‘내 것으로 만족하는 선의 세계’에만 머물고 금을 넘어 ‘탐심이라는 악의 세계’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도록, 주관적(主觀的) 의지와 능력을 강하게 하는 문제만 남게 됩니다.
나. 우리는 탐심을 버릴 수 있나?
이 관점에서는 대체로 ‘선과 악, 의로움과 불의함, 법과 불법, 좋은 선택(순종)과 나쁜 선택(불순종)의 경계’가 선명(鮮明)합니다. 탐하는 자는 악한 가해자이고, 탐함을 당하는 ‘타인(이웃)’은 선하고 억울한 피해자로 됩니다. 그러므로 제10계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구약에서는 율법의 억지력으로, 신약에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의 정욕을 억제하고 선한 의지를 강화시키는 ‘주관적 처방’이 유일하고도 충분한 처방이 됩니다. 우리가 배운 대로 율법의 힘만으로는 우리의 죄와 탐심을 벗어날 수 없다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 성령의 은혜로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의 탐심에서 해방되고 이 세상의 재물에 대한 다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해결책이 제시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 일이 잘 되지를 않고, 우리의 경험상 앞으로도 그렇게 잘 될 것 같지 않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구원을 받았다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도 막상 자신이 재산적 민사분쟁에 임할 때에는 절대 비기독교인보다 온순한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개신교의 연합단체를 자임하는 한기총은 거의 매년 총회장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 송사를 벌이고, 교단들은 총회 때마다 총회 결의의 효력을 다투고 있으며, 많은 개별교회의 목회자와 신도들도 또한 열심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에게 분노하며 재판을 벌이고 있습니다. 교회 송사에서는 쌍방 당사자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주장의 근거로 붙잡고 내세우며 싸우니, 싸우는 양쪽 모두한테 유리한 말씀을 들려주셔야 하는 하나님의 입장은 참으로 안쓰럽고 고달프기 그지없습니다.
이처럼 재물과 권리를 둘러싼 세상분쟁이 멈추지 않는 것은 아직도 죄의 힘이 강하고 우리의 성령충만이 약한 것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충만을 극대화해서 세상의 재물과 영화에 대한 집착과 사랑으로부터 깨끗하게 벗어나자는 더욱 독실하고 헌신적인 해결책이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힘들어 보이고,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 세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도저히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그 결과 이 모든 논의는 오히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교회에서는 열심히 봉사하지만 세상에서는 대충 가능한대로 착하게 살아보자’는 타협적 신앙 실천관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잘 안 되는 것을, 너무 열심히 하자고 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처럼 생각하고 아예 쉽게 포기를 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3. 제10계명의 객관적 해석 - ‘이것은 누구의 소유인가’
가. 제10계명의 문리(文理) 해석 (이웃의 소유를 + 탐하지 말라)
이 지점에서 저는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계명을 주관적 규범으로 보고 지키자는 접근법에는 다소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을 다시 제기합니다.
‘탐심을 버리자’는 율법의 주관적 구호만으로 우리는 탐심을 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성령충만을 넘치도록 받는다 해도, 우리가 세상을 버리고 출가해서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모든 활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는 이상,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집(물권)과 임금(채권)과 이런저런 권리를 열심히 취득하고 지켜야 하며, 그 과정에서 수시로 내 옆의 동료, 이웃과 부딪치고 다투는 일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적당히’ 탐심을 버리는 것은 여러모로 신앙적으로나 세상적으로나 우리의 인생을 윤택하게 하지만, 만일 우리가 ‘완전히’ 탐심을 버린다면 우리는 경제적으로 무장해제된 상태가 되어 총탄이 빗발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모하고 지나치게 탐심을 버리고 양보만 한다면, 그것 자체가 거꾸로 타인이 부당한 탐심을 추구하는 것을 무제한하게 방치함으로써 오히려 악을 조장(助長)하는 죄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성령이 극도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도 어느 정도는 탐심을 유지하는 것이 좋을 수도 있습니다.
문리적으로 「네 이웃의 것을 / 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은 「탐하지 말라」는 주관적인 명령의 동사(動詞)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고, 「네 이웃의 것을」이라는 객관적인 목적어(目的語)까지 포함합니다. 제10계명을 위반하기 위해서는 ‘⓵ 타인의 소유를 + ⓶ 탐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요건사실을 모두 충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제10계명은 ‘탐내지 말라’는 주관적 명령과 함께 ‘이웃의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규명하라’는 객관적 명령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제10계명을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서는 ‘⓵ 타인(이웃)의 소유가 맞는가’라는 1번 문제와 ‘⓶ 탐하지 말라’는 2번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합니다.
수학적 개념을 빌려 말한다면, 보통 우리는 ‘이웃의 것’이라는 객관적 요소를 이미 확정된 상수(常數, constant)로, ‘탐하지 말라’는 주관적 요소를 변동 가능한 변수(變數, variable)로 생각하면서 제10계명의 해석에 접근합니다. 제10계명의 문제를 「(이미 확정된) 타인(이웃)의 소유」에 관해서 그것을 「탐할 것인가? 탐하지 말 것인가?」 라는 2번 문제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문제를 푸는 것이지요.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웃의 것, 이웃의 소유’라는 1번 문제는 세상 속에서 전혀 확정된 사실, 상수(常數)가 아닙니다. 존재론적으로도 그렇지 않고, 인식론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다.
이 계명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과 객관적인 해석이 결합되면, 우리는 세상의 많은 재물과 권리 중 우리가 탐내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지켜야 할 것(탐낼 것)은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분별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탐심을 없애야 할 대상’이 줄어들면 우리가 주관적으로 탐심을 없애는 일도 훨씬 더 쉬워집니다. 우리가 제10계명을 2번 문제로만 생각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탐하지 말라’로 읽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따라 행할 수 없는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10계명을 1번문제와 2번문제의 두 개로 함께 생각해서 ‘탐할 것(지킬 것)은 탐하고(지키고) / 탐하지 말 것은 탐내지 않는다’는 방향으로 해석하면, 제10계명은 우리가 감당할 만한 미션 파서블(Mission possible)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나. 유혹의 탐심 vs. ‘판단(判斷)의 탐심’ – 선악과와 제10계명
선악과를 따먹고 지금까지 대를 이어 고생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제10계명의 1번 문제, 즉 「내 앞에 있는 ‘어떤 것’이 ‘이웃의 것(other’s belonging)’인지 ‘나의 것(my belonging)’인지를 판단(判斷)하는 문제」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제10계명에 관한 우리의 고민 중 더 큰 부분은 오히려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를 생각하고 밝혀내는 문제입니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탐심을 버리든지, 적당히 양보를 하든지, 상대방의 탐욕을 조장하는 악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 내 것을 열심히 지키든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들고 있다고 해서 내 것이라는 보장이 없고, 타인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꼭 남의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점입니다. 이기심과 탐욕은 ‘탐하는 마음’에도 있지만, ‘이것은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라고 하는 ‘판단(判斷)작용’ 자체에 더 크게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을 탐하는 사람’은 죄책감을 갖습니다. 그러나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을 꽉 붙잡고 사는 사람’은 죄의식조차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까 ‘남의 것을 보고 침을 꿀꺽 하는 사람(유혹의 탐심)’보다, ‘저거(이거)는 내거야! 손도 대지 마!’라고 하면서 물건에 침을 바르는 사람(판단의 탐심)이 사실은 하나님 보시기에 더 큰 악당, 더 크게 제10계명을 어기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관적) 유혹의 탐심’에 못지 않게 ‘(객관적) 판단의 탐심’이 심각한 죄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배운 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과실을 따먹고 / 타인과 세상과 하나님과 세상의 재화에 대해서/ 불완전하고 교만하고 이기적인 선악 판단을 마구 해대는 것」이 인간의 원죄입니다. 「분명한 남의 것, 타인귀속성이 분명해 보이는 것, 내 것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서 우리는 사돈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신체적 증상을 다소 겪을 뿐, 결사적으로 그것을 뺏고 싶은 탐심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욕심을 내봐야 내 것이 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의 것인지 내 것인지 조금 애매한 것 / 내 것 같기도 하고 남의 것 같기도 한 것 / 저것이 남의 것이 아니고 나의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사실적·역사적·법률적·논리적·철학적·이념적 근거’가 조금이라도 있는 것」에 대해서 우리의 정신과 판단력은 극도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서, 먼저 나에게 유리한 ‘판단’을 하고 그 뒤에는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교회의 권리분쟁들에서는 이 ‘판단(判斷)’의 작용과 활동이 일반 분쟁의 경우보다 훨씬 강력하고 승(乘)합니다. 그래서 ‘거칠지만 수줍게’ 싸우는 일반인의 분쟁에 비해서, ‘고상하지만 교만하게’ 싸우는 종교적 분쟁은, 하나님 앞에서 더 극렬하고 극악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세상에 대한 제10계명의 처방 - 질문들에 대한 답변
가. 탐심을 포기하는 것 (윤리적 처방) – 누구의 것인지 권리의 귀속이 명명백백한 경우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이 집이 누구의 집인지 이 물건이 누구의 물건인지가 분명한 경우가 있습니다. 논리적,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이것은 현장의 당사자들이 분명히 느낌으로 압니다. 이 경우는 괜히 남을 시기를 하거나 복통으로 몸부림칠 필요 없이, 제10계명의 후반부 ‘탐하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서 깨끗하게 탐심을 버리고 마음의 평정을 찾는 것이 뚜렷한 처방이 될 것입니다.
나. 논쟁을 벌이고 정확한 판단을 구하는 것 (권리분쟁의 제도적 보장) – 누구의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
제10계명의 전반부,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 이웃의 것인가 나의 것인가?’에서 걸리는 경우입니다. ‘잘 모르겠는 것’을 대충 찍고 일방적인 판단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면적인 평강이 없는 외형적인 평화는 사실은 독재와 억압일 가능성이 큽니다. 의견이 다르고 판단이 다를 때, 분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악이고, 분쟁할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오히려 선한 일이며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과 정의를 이루는 길일 수 있습니다. 세속 헌법이 보장하는 재판받을 권리,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모두 이러한 권리분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제도입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제10계명은, ‘이웃의 것인지 아닌지 따져보는’ 논쟁과 분쟁을 거친 후에야 그 계명의 실질적 정당성과 실효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세상의 재물은 별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땅의 집과 재물이 하나님보다 앞서는 맘몬의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도 ‘땅의 양식을 구하는 일’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필연이라면, ‘그 양식의 정당하고 정의로운 배분을 다투고 구하는 일’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일’이 중요한 방편이자 일부분을 구성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양식에 관한 권리분쟁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예수님 주신 기도의 한 부분이고, 우리가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터전을 만드는 일의 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땅 위의 삶과 관련된 재산과 권리에 관하여,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이웃의 소유인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규명하기 위해서 진행하는 권리 분쟁과 다툼과 논쟁은 하나님 앞에서 죄나 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제10계명의 절반인 ‘이웃의 소유를’이라는 부분에 대한 정당한 실천의 항목이라 할 것입니다.
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 -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의 민사재판) - 살인하지 말라(제6계명), 도둑질하지 말라(제7계명)의 보완적 실천
사람들이 땅 위에서 땀 흘려 일하여 양식을 구하다가 그 양식을 먹고 누릴 권리가 위기에 닥치면, 사람들은 갑자기 겁을 먹고 난폭해 집니다. 여기에 ‘이 먹이와 집이 나의 것인가 너의 것인가’에 대한 서로간의 판단마저 엇갈리게 되면, 한 사람은 뺏긴 것에 대한 분노로, 반대쪽 사람은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온 정신이 가득 차게 됩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형제 간 이웃 간의 싸움, 옆집 사람과 땅의 경계를 두고 싸우는 일, 위 논과 아래 논 간에 물꼬(수로)에 관한 분쟁은 역사적으로 수많은 폭력과 살상을 불러왔습니다. 더 독한 사람은 사람을 해치고, 덜 독한 사람은 상대방의 곡식을 훔치고 빼앗습니다.
이처럼 땅위의 권리 분쟁이 불가피하거나 필요한 것일 때, 이 분쟁을 판단능력과 감정통제능력이 미약한 개별 인간들의 손에 다 맡겨 놓으면, 서로가 서로를 판단하고 해치는 무한싸움으로 전개됩니다. 이 경우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세상은 예수님 재림 시까지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권리 분쟁이 인명의 살상과 재판의 강탈로 나가지 않도록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과 법률(율법)을 주시고 동시에 재판제도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화평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하는 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이웃과 이웃 사이를 화평케 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가장 극렬한 수준의 권리분쟁을 끌어들여 평화적인 절차를 통해서 권리의 귀속에 관한 판단을 제공하고, 권리의 집행까지도 평화적인 질서 속에서 이루도록 하는’ 민사재판 제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간의 악으로 얼룩지게 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빼앗는 폭력을 억제하고 세상의 평화와 이웃 간의 화평을 유지하게 하는, ‘이웃 사랑의 중요한 제도적 보장’입니다.
그러므로 민사재판은 인간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다룬다고 하여 곧바로 악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아야’ 하나님도 열심히 믿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세상의 죄와 욕심도 벗어버리고 이 땅에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면서, 예수님 다시 오시는 날의 영화도 바랄 수 있으니, 「권리분쟁과 민사재판을 통해서 땅 위의 삶과 땅 위의 싸움을 화평하게 다루는 일」은 하나님 앞에 믿음의 일로서 충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방법과 모양으로 사인간의 재산적 분쟁을 다루고 해결하는 직업들은, 단지 돈싸움의 협력자나 거간이 아니라 ‘화평케 하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는 팔복의 한 항목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 나의 소유와 남의 소유를 교만하게 판단하지 말라 (판단의 겸손성- 선악과의 억제)
교만하고 이기적인 입장에서 ‘이웃의 소유’를 판단하는 사람들, ‘내가 남의 것을 가지고 있거나 탐내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나의 것을 탐내는 사람들을 완강하게 미워하고 단죄하는 사람들’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다소 유복하고 완고한 기독교인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입니다. 나의 소유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때, 나의 것을 위협하는 다른 주장들을 배척하고 나의 재산권을 강경하게 지켜내려는 ‘고슴도치’ 같은 태도가 ‘과연 하나님 앞에 향기롭고 아름다운 것인가’라는 문제입니다. 21세기의 오늘 미국이나 우리나라의 개신교 일부가 정치적으로 보수우파의 전진기지처럼 행동하고, 인간이 만든 제도 중의 하나에 불과한 자본주의와 성장주의를 우상시하고 절대화하며 하나님처럼 섬기는 태도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나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이기적인 계명으로 바꾸어,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을 이웃에 대한 증오의 계명으로 사용하는 심각한 죄악이 들어 있지 않은가 도전합니다.
‘나의 것, 나의 재물을 탐하는 자’에 대한 싸움은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지만, 믿는 사람으로서는 거기에 한계를 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요한1서 2장 15절의 말씀처럼, 세상의 자본과 재물은 우리 삶의 수단(手段)이지 목적(目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남을 판단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공동번역)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해석하고 적용함에 있어서, 우리는 선악과를 함부로 따먹었다가 하나님에게 크게 혼나고 그리고 나서도 일용할 양식 먹듯 매일매일 선악 판단을 하는 우리의 죄성을 항상 인식하고, 내 속의 교만과 이기심으로 함부로 다른 사람(이웃)을 정죄하고 나에게 유리한 판단을 내세우는 교만함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속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계명을 뒤집어 이웃을 핍박하는데 사용하는 우리의 죄악를 심판하고 다루실 것입니다.
마. 나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는 성령의 법 (제10계명의 한계와 극복) - 궁극적 소유자는 누구인가?
계명과 율법은 땅의 일을 관리합니다. 이웃 사이의 권리분쟁을 다루는 제10계명은 우리가 사는 땅의 세상에서 사람들 사이의 폭력을 억제하고 이웃 간의 화평을 도모하는 하나님의 법률(율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적으로 ‘재물과 재물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배분적 정의를 도모해서, 세상을 유지하고 세상의 때이른 멸망을 방지하는’ 수세적, 방어적 성격의 제도입니다. 이것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인간의 죄성이 팽팽한 긴장 속에 유지되는 현재의 평형상태(equilibrium), 현상(status quo)를 유지하는데 그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원리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主祈禱文) 중 ‘하나님 나라의 분배 원리’는 다섯 번째 기도, ‘나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는 법’(마태복음 6:12)입니다. 구약의 제10계명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가 「내 것은 나에게, 이웃의 것은 이웃에게 돌리라는 배분적 정의」의 세계라면,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기도 ‘빚진 자를 사하여 주는 법’은 「나의 것을 고집하지 않고 이웃에게 돌려주는 은혜(사랑)적 정의」의 세계입니다.
물론 타인의 빚을 탕감해 주기 위해서는, 내가 채권자인지 상대방이 채권자인지, 우선 ‘누구의 것인지를 가려내는’ 제10계명의 원리에 따라서 나의 것 너의 것이 분명해 져야 합니다. 그래야 채권자가 채무자(빚진 자)를 용서해 주는 일이 이루어질 수 있지, 채무자(빚진 자)가 착각하여 자기를 채권자로 알고 거꾸로 진짜 채권자에게 ‘내가 네 빚을 사하여 주노라’면서 엉터리 행세를 부리는 희극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5. 맺으며
땀 흘려 애쓰면서도 살기가 힘든 이 세상에서, 사람이 나의 재산(채권)을 포기하고 채무자를 사하여 주면서 재산적 손해를 감수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가장 뚜렷한 지혜는, 땅 위의 집과 재물과 권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가 살아나가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소유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원칙이 될 것입니다. 이러면 우리가 우리의 소유에 대해서 적절한 책임감을 가짐과 동시에 그 소유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법적으로 ‘나의 소유’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나의 형제인 이웃에게 그 소유를 조금 나누어주거나 포기하더라도 아까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다」는 생각,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우리들 땅의 인생들을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법,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며, 세상을 화평케 하라’는 십계명 중 제10계명이 제시하는 목표지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i) 내 것이 아님이 분명(分明)한 것은 탐내지 말고, (ii) 내 것인지 남의 것인지 주관적(主觀的)으로 애매한 것은 권리분쟁과 민사재판 등을 통해서 그것이 누구의 소유인지 밝히거나 판단을 받은 후, 평화롭게 집행하거나, 나보다 약한 상대방에게 나의 권리 일부를 양보함으로서 세상의 평화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10계명의 해석과 관련하여 특히 세상을 불안하고 위험하게 하는 것은 「도대체 나의 것인지 남의 것인지 객관적(客觀的)으로 분명치 않고, 두 개의 대립된 의견과 가치관이 모두 근거가 있어서 어느 한쪽도 항복할 수가 없는 경우」입니다. 앞에서 본 계층 간의 대립과 같이 ‘다르지만, 틀리지는 않은’ 영역입니다. 보통 이러한 당파적 대립과 갈등은 승부를 내지 못하고 세상의 끝까지 가니, 이 영역은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제10계명조차 분명한 힘을 쓰기 어려운 사각지대(死角地帶)입니다. 이 영역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답은 세상의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내 것을 집착하지 않고 양보하는 주기도문의 해결책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 원칙을 무시하고 오히려 교리적 도그마에 집착하여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돌아보라는 하나님 말씀을 경홀히 여기고 세상의 물신주의와 성공주의를 절대시하고 숭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입니다. 적어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미시적 생활에서나, 정치적 의사표현의 생활에서나 거시적인 경제생활에서 「내 것을 알되 내 것을 고집하지 않고 이웃에게 양보하는 하나님의 법, 즉 빚진 자를 사하여 주는 원리」에 따라 생각하고 행할 수 있어야 하고, 이것이 세상의 법과 세상의 다툼 속에서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펼쳐나가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4, 2014년 4월, 이병주,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