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 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누가복음』 2장 19절 (표준새번역)
1.
누가복음 2장 19절에 등장하는 “모두 자기 마음에 두다"(symballo en autos kardia)라는 문구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겠다. ‘모두 마음에 두다’와 ‘되새기다’라는 뜻의 ‘symballo’는 신약에서 총 6번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동시에 비교하고 분석하는 행동을 뜻한다. 이 단어가 구약에 등장하는 ‘zakar’(기억하다)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단어가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던 초대 기독교인들의 ‘symbolon’이라는 별명과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구절은 마리아가 무언가를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곰곰이 반추해보는 행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는' 구체적인 행위를 암시한다.
그 다음 문제는 목적어다. ‘이 모든 말’(pas rhema tauta)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때 누가가 사용하는 ‘말’(rhema)이라는 단어는 주지하다시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전달되었거나 체화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즉 기록되거나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logos)과는 일정 정도의 차별성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한다. 마치 유대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 경험했던 ‘하나님의 이야기’(haggadah)를 기억(zakar)하듯, 마리아가 ‘고이 간직한(syntereo)’ 하나님의 약속 또는 징표들은 무엇을 말할까?
그것은 바로 “사람들은 목자들이 그들에게 전하는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의미한다.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은혜’(누가, 1:26-38),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알게 된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님의 비밀(누가, 1:39-45), 스스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부른 노래 속에 등장하는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누가, 1:46-56),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힐 수 밖에 없었던’ 구세주의 탄생에 얽힌 역설적인 상황(누가, 2:7), 이 모든 것을 목자들이 전해준 말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이렇듯 마리아의 ‘곰곰이 되새기는’ 행위를 이해한 후, 우리는 한 가지 너무나도 상식적인 질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과연 누가 이렇게 엄청난 ‘하나님의 약속’을 곰곰이 되새기고만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단순히 개인적인 영달이나 성공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리도 기다리던 ‘메시아의 탄생’과 관련된 일을 말이다. 그것도 자기의 몸을 통해 이루어질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누가 침묵할 수 있을까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직접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고 주문하셔도, 스스로에게 생긴 기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내달렸을 것이다. ‘눈이 밝아지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온 지역에 퍼뜨린” 두 소경들처럼 ‘예수의 기적’을 동네방네에 전했을 것이다(마태 9:29-30). 물론 아무도 이런 행동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뜨거운 마음으로 전하는 사람들처럼, 그 누구도 자기에게 행해진 하나님의 은혜를 타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무척 자연스럽고, 아울러 인간이라면 누구나 응당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자도 살리셨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다짐하시기를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하신 이유를 곧 알게 된다(마태 9:22).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하신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조심하셨는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게 되는 것이다(마태 9:22). 바로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이 그것을 믿고 따르는 인간들을 오만하게 만들 수 있다는 하나님만의 혜안이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침묵 속에 담겨 있는 것이다(마가 8:11-13).
‘표적’(semeion)은 곧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다는 확신을 손쉽게 가져다 줄 징표다. 성경에서 이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선민’이자 ‘참 신앙인’으로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자부한 바리새인들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요구에 담긴 신앙인의 오만함을 깊이 탄식하시고 이들을 떠나 ‘건너편’(peran)으로 가셨다(마가 8:13). 또한 바로 이러한 표적이 무리지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에게 “억지로 [예수님]을 모셔다가 왕(basileus)으로 삼으려고”하는 욕심을 불러 일으켰고(요한 6:15), 바로 이러한 표적들이 자기 자신들만의 신앙적 확신에 휩싸인 사람들에게는 동일한 예수님을 “잡으려고” 성전 경비들을 보내게 만들었다(요한 7:32).
3.
무리가 모여들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poneros genea)다.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semeion)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누가 11:29). 과연 예수님께서는 ‘불신앙의 세대’를 한탄하신 것일까? 혹시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를 자기들의 신앙 속에서 각색하고, 그러한 각색도 모자라서 자기들의 확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려는 ‘신앙인’들의 행태를 탄식하신 것은 아닐까?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 도움을 주셨고, 고침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고, 남의 눈을 피해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먼저 스스로가 ‘구세주’이심을 밝히셨던 예수님, 그분은 오늘도 내일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다(요한 4:26).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가슴은 참으로 복이 있다”는 말 속에 담겨진 인간적 신앙이 가져올 위험성에 그 누구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신다(누가 11:27). 그러기에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주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logos theos)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makarois)”고 가르치신다(누가 11:28). 그리고 수없이 자주 ‘귀(ous) 있는 사람이 되라고’ 충고하신다. 표적을 보고 오만해지지도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따르는 사람이 되라고 주문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인’도 자기도 모르게 불신앙의 열매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례 요한이 말한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누가 3:9).
그래서 마리아의 ‘되새기는’ 태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미친 사람이라는 소릴 듣더라도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면, 마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분연히 떨치고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곰곰이 되새기며’ 하나님의 시간(kairos)을 기다려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이미 그녀의 귀는 이런 시간을 기다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열려 있었을 것이고,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고 따르도록’ 오래 전부터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공생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 어떤 연유에서도 메시아의 탄생이 대중에게 노출되도록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시간이 오기까지, 세대의 권력자들의 눈에 예수님의 성장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가는 우리에게 마리아의 신앙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마리아의 ‘마음에 두는’ 신앙이 누가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사무치게 만든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ivew of Books, Vol.1, No.1, 2013년 9월, 아포리아 편집부, Diagogai)
[이 게시물은 아포리아님에 의해 2013-09-06 04:53:38 사상노트/고전 다시보기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