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돌아왔다. 유월절 맞이 예루살렘 방문은 사마리아를 통해 고향땅 갈릴리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마감되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마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환영하듯이 예수님을 환영한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청년이 예루살렘에서 주목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는 사실에 갈릴리 사람들은 신이 났다. 비주류 지역인 갈릴리도 지도자를 배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를 칭송하는 군중들은 넘쳐났지만, 예수님은 외로웠다. 예수님과 진심으로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 앞에 어떤 귀족이 등장한다. 그의 복장과 매너에는 남다른 풍모가 있었다. 한 눈에도 중요한 인물로 보였다. 사람들은 왕의 신하가 왔다고 쑥덕거렸다. 그의 옷은 빛났지만,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는 말한다.
“선생님, 저는 조금 떨어진 가버나움에서 왔습니다. 제 아들이 심한 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얼마 살지 못할 듯 합니다. 저희 집에 같이 가실 수 있을까요? 함께 가서 아이의 병을 고쳐 주세요.”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즉답하지 않는다.
“여기 모인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과 참다운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갈릴리 사람들은 구경꾼들처럼 제가 무슨 일하는지 지켜보기만 해요.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면, 하나님을 믿겠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기적을 베풀지 않겠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신하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간절함을 담아 말한다.
“제발 함께 가주세요! 예수님이 함께 가지 않으면, 제 아들은 죽고 말 거에요.”
예수님은 그 관리에게 담담하게 말한다.
“집으로 돌아가세요. 당신의 아들이 살아났으니까요.”
그 차분한 음성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짜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아들이 살아났다는 예수님의 말에 믿음이 갔기 때문이다. 그가 살아났다고 하면, 살아났을 것이라는 점에 의문이 없었다. 그는 예수님의 말에서 생명과 힘을 느꼈다. 그 말에 예수님의 존재가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걸음을 집으로 돌렸다. 멀리서 그의 종이 헐래 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말한다.
“아드님이 살아 나셨습니다!”
관리는 안도했다. 그는 다시 종에게 묻는다.
“언제쯤 살아났는가?”
종은 대답한다.
“어제 오후 한 시경에 열이 내렸습니다.”
그 시간은 예수님이 아들이 살아났다고 말한 순간이었다. 예수님의 말대로 아들이 살아났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 기적보다 더 놀라운 기적은 그와 예수님의 만남에 있었다. 그의 마음이 예수님의 내면과 접촉된 것이었다. 예수님이 ‘아들이 살아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순간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 그 말이 그의 마음 속에 스며들어 그의 존재가 되었다. 그는 예수님이 그의 가족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예수님과 자신 사이에 둘만 아는 은밀한 공간이 생긴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만이 예수님의 따스함, 아픔, 사랑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분의 마음이 느껴지는 만큼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 소망,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믿음, 소망, 사랑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뿌듯함이 그의 마음을 채웠고, 방긋 웃으며 그를 맞아줄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아들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그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음과 고통은 예수님을 만나는 통로다. 아픔은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열게 한다. 그 열린 틈으로 예수님의 사랑이 스며든다.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다. 그 경험은 믿음을 선사하고, 새로운 소망을 불어넣고, 사랑을 느끼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외적인 기적에 감탄한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따스한 대화 속에서 은밀하게 시작된다.
* 이 글에 대한 권한은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3, No.12, 2015년 12월, 박현욱,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