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은, 동, 철 등의 불에 견딜만한 모든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다만 정결하게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하게 할 것이며 불에 견지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민수기 31장 22-23절)
블랙베리, HTC, 화웨이, 그리고 샤오미
요즘 중국산 스마트폰 샤오미(小米)가 화제이다. 샤오미는 한자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은 쌀, 쌀톨, 또는 좁쌀을 의미하는 아주 겸손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중국산 1세대 스마트폰 선배인 화웨이나 ZTE 는 물론이고 세계1,2위의 삼성전자의 갤럭시나 애플의 아이폰을 넘어 2014년 2사분기 중국내 판매량 1위에 오른 돌풍의 주인공이다. 어떤 조사기관은 2분기 중국 1위, 다른 시장조사기관은 아직 2위라고 평가하지만, 어쨌든 샤오미의 돌풍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가 스마트폰 분야에서 세계적 리더로 부상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스마트폰의 아이콘 애플의 아이폰이 등장한 후, 지금으로부터 5년전인 2009년 4사분기의 스마트폰 경쟁에서 삼성은 세계시장 2.8%의 초라한 실적을 거두었다. 노키아, 블랙베리(RIM), 애플, HTC에 이어 모토롤라와 5,6위를 다툴 때였다.
노키아와 모토롤라는 전통적인 일반폰(스마트폰이 나오기 이전의 음성과 문자만 되는 전화기로 기본 기능만 되는 전화기라고 하여 피처폰으로 불린다) 세계시장 1위의 저력으로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려고 하는 시기였고, 캐나다의 대표적인 기업이자 캐나다 국민들의 자존심이었던 림(RIM)은 오바마폰으로 더 잘 알려진 블랙베리로 탁월한 보안기능과 기업용 소프트웨어를 앞세워 새로운 강자로 나서고 있었던 때였다. 애플은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으나 IBM호환기에 밀려서 디자이너나 매니아 시장에만 머물던 컴퓨터 회사였지만, 대성공을 거둔 아이팟이라는 MP3기기에 통신기능을 추가하여 고급 스마트폰 시장을 개척했다. 그리고 HTC는 대만의 벤처로서 제2의 애플을 노리고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었으며 뒤이어 화웨이등 여러 중국 스마트폰 업체들이 등장하던 국면이었다.
당시 언론과 시장은 스마트폰의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에서 한국기업의 몰락을 예견했고, 애플과 HTC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리라 추측했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 핸드폰 시장의 독보적인 강자 노키아는 시장에서 퇴출 당하고 있고, 수퍼 루키로 찬사를 받던 림, HTC는 낙오하고 있으며, 위기를 맞았던 삼성은 애플의 적수로 스마트폰 세계시장 1위를 탈환하였다. 하지만 영광도 잠시, 스마트폰 시장의 포화로 시장성장률이 낮아지고, 중국산 스마트폰 기업의 대량 출현으로, 어떤 기업도 스마트폰 시장에서 영원한 강자의 길을 유지할 수 없다는 참으로 험하고 어려운 시기를 삼성전자가 겪고 있다. 이런 때에, 우리는 다시금 '혁신'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컴펙, 델, 사이월드, 그리고 페이스 북
필자가 IMF가 일어나기 직전인 1997년 가을학기에 해외 경영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을 때, 마케팅과 전략 수업시간에는 미국의 컴퓨터회사 컴팩(Compac)을 성공사례로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컴팩은 거인 IBM에 맞서서 개인용 컴퓨터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해 12월 한국에서 IMF사태가 터졌다. 그래서 필자는 공부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2년간 회사 근무를 했다. 그러다가 2000년 1월 다시 복학하여 2학기를 다녔다. 이때 교수님들은 2년전의 콤팩의 성공사례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대신 델(Dell)이라는 회사의 성공사례를 힘주어 강의하시고 계셨다. 그런데 필자가 졸업한 후에도 한동안 잘나가던 델은 이제 어떤 뉴스에서 찾아 보기가 어렵다. 주지하다시피 미국 PC사업의 본류였던 IBM은 PC부문을 중국의 Lenovo에 매각하고 손을 완전히 떼고 말았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한때 우리나라를 휩쓸고 지나간 싸이월드의 인기는 지금의 카카오톡 이상이었다. 주위의 많은 학생들이 '싸이질'을 하면서 시간을 많이 뺏겨서 정작 공부는 소홀히한다고 부모님들에게 꾸중을 듣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던 싸이월드는 어느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 오히려 이보다 훨씬 뒤에 나타난 Facebook이나 Twitter등 SNS가 엄청난 속도와 파급력으로 승승 장구를 하고 있다. 또한 세계 최초의 무료 국제전화였던 다이얼패드(Dialpad)가 성공신화를 쓰는가 했더니, 후발의 Skype라는 글로벌 무료전화 회사에 가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왜 이렇게 먼저 아이디어를 내고 먼저 만든 좋은 서비스들이 글로벌 시장으로까지 성장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일까?
국내의 작은 성공에 저 멀리 세계시장에서 밀려오는 새 물결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위기를 감지했다면, 처음의 혁신과 업계의 주도적 역할을 바탕으로 글로벌 세력과 연합하거나, 오히려 M&A 딜로 활용하면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옴니아와 갤럭시, 초코렛폰과 G폰
2008년 7월 11일은 애플이 앱스토어를 오픈한 날이다. 그동안 절찬리에 판매하던 아이팟을 시장 모수로 하여 552개의 앱으로 시작한 애플의 앱스토어는 아이폰3G의 발표와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한달 만에 앱수 1만개로 늘어나면서 아이폰3G 판매도 급격히 늘어나고, 지금은 전체 앱수가 백만 개로 구글의 구글플레이와 함께 스마프폰과 스마트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미국에서 2008년 6월15일 출시한 애플의 아이폰3가 여러 논란 끝에 한국에 들어온 날은 2009년 11월 28일이다. 기존의 통신 시장 보호법령과 국내 주요 통신사와의 협력으로 보호받던 무선통신 시장이 완전 개방된 것이다. 우리 정서에 맞고 우리지형에 잘 맞던 통신기기는 이제 디자인과 무선통신(Wifi)의 개방 그리고 앱스토어로 요약된 '양면시장'의 등장으로 오랫동안 군림해 왔던 '단면시장'의 강자들은 사상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애플 아이폰3의 한국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대항마로 내세운 옴니아1,2 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윈도우 모바일7을 이용하여 만든 스마트폰이었다. 스펙상 기능은 필요한 모든 것을 두루 갖추어 아주 좋았다. 그러나 실제 사용에 있어서는 속도가 느리고, 잘 잡히지 않는 와이파이 속도와 손가락이 아닌 펜 전용 터치 인식 방식, 게다가 턱없이 부족한 애플리케이션(앱)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회사와 연구진의 각고의 성능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아이폰과는 경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삼성전자는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과감히 모바일윈도우 OS를 포기하고 그 당시만 해도 성공이 불확실 했던 안드로이드 OS를 채택했다. 그리고는 바로 안드로이드폰을 내놓고 지속적으로 개선에 개선을 거듭하여 일반폰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핸드폰시장 세계 1위를 스마트폰을 통해서 이루었다. 옴니아라는 전지전능한 이름의 스마트폰이 적당히(?) 성공했으면 이러한 과감한 전략의 변경은 없었을 것이다. 마치 스마트폰 성공회의론과 시기상조론을 견지했던 G사가 당시 일반폰 분야에서 '초코렛폰'을 통해 좋은 판매 실적을 내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G사는 스마트폰에는 관심을 덜 두었기에, 이후 5년여 동안 이 시장에서 고생을 하다가 이제 겨우 G3폰으로 명예회복의 전기를 만들었다.
앞서의 IMF때에 그랬듯이, 현재의 위기와 큰 문제가 없으면 개인이든 회사이든 혁신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혁신은 더 이상 지킬 것도 잃을 것도 없을 때 일어나는 것 같다. 더 나빠질 것이 없을 때 기존의 습관이나 환경을 거슬러 결단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바뀌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 때 바뀌지 않을 사람도 회사도 없을 것이다. 결단코 잘 나갈 때는 그 누구도 혁신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장둔화는 새로운 혁신을 위한 가장 좋은 시기고, 동일한 의미에서 위기와 어려움을 혁신의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일 것이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무엇이든지 얻을 수 있었다.” - 2014년 후기 졸업 서울대 졸업생 대표 권은진씨
"정해지고 약속된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거꾸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깨달음은 대학에서 얻은 가장 값진 가르침 중 하나입니다.”
2014년 8월 28일, 제68회 서울대 후기 학위수여식에서 졸업생 대표 연설자로 나선 권은진씨의 말이다.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에서 철학과 미학, 심리학 등을 공부한 그는 정답 없는 세상에서 많이도 헤맸고 그 과정에서 남긴 좌절과 희망의 기억이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어려운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사교육을 받지 않고서도 장학생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성장 배경, 2009년 처음 출범해 당시로선 아무 방향도 준비도 없었던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한 뒤 자신만의 전공을 개척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는 오히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는 서울대에 개설된 다양한 전공과목을 융합해 “인문소통학”이라는 자신만의 전공을 만들었다. 이는 2개 이상의 학문을 융합한 교과 과정을 학생 스스로 구성해 전공으로 이수하는 “학생설계전공제도”를 갖고 있는 자유전공학부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제도는 필자가 15여년 전 MBA 유학생 시절 학교가 일방적으로 정해준 과정이 아니라 본인에게 필요한 과목만을 선택하여 골라서 듣던 "학생설계전공(Student Design)”을 떠올리게 해서 더욱 감회가 새로웠다.
"아무것도 없으니 이제 무엇이든 해보라고 말씀하신 교수님들과 아무것도 없으니 뭐든 하면 우리가 최초라며 자극을 주는 친구들을 만났다.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이미 주어진 것이 많았다면 겪지 않아도 되었을 팍팍한 현실을 견디며 자랐다"
그렇다. 그녀의 성공과 혁신의 동기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집안도 가난하고 학교에서도 처음 시작하는 과여서 선배도, 기준도, 족보도 없다는 처지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계기를 주었을 것이다. 또 다양한 인턴활동과 수 백시간의 봉사활동을 거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의미 있는 경험을 쌓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유복한 가정이나 여유있는 환경에서 자란 학생들은 좀처럼 갖출 수 없는 환경이 던져준 설물이다.
가난이나 실패한 뒤에 더 이상 버릴 것도 남은 것도 없는 상황, 여기에서 우리는 이웃의 성공사례나 이루었던 것을 넘어서 새로운 결정과 시스템으로 점프하기도 한다. 물론 반대로 새로운 사업을 최초로 시도해서 잘 나가가다 어느 순간 꼬꾸러 지기도 한다.
혼자 똑똑해서는 살아 남을 수 없다
옴니아(Omnia)는 모든걸 다 갖추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 갖추었어도 고객이 사용하기 불편하거나 이용하기가 어려우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수 있었다. 기능의 완벽성 보다는 외부 자원이나 고객의 자원을 연합하여 사용할수 있는 다소 부족한 그룻이 낫다. 기기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지금의 삼성전자의 갤럭시나 LG전자의 G폰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실패를 경험하고 겨우 일어나 성공 뒤에 안주하다가 추월 당하고, 쓰러졌다가 다시 포기 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 정상이었다가 다시 맞은 안팎의 위기는 새롭게 출발하는 절호의 기회이고 신이 내린 선물이다. 가장 어려울 때, 지금이 다르게 출발할 가장 좋은 때이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9, 2014년 9월, 권강현, 서강대 교수/전(前) 삼성전자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