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많은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들 답한다.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사람들마다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속세적이든 아니면 내세적이든 행복에 대한 염원은 비슷한 것 같다.
행복을 정의하는 간단한 방정식이 하나 있다. 성취가 클수록 그리고 욕구가 적을수록 행복은 커진다고 한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욕구를 극대화하도록 부추기는 사회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출시하고 미디어 광고를 통해 구매욕구를 자극함으로써 불필요한 것조차 소모하게 만들고 있다. 기업들은 새로운 것을 누가 먼저 개발해서 출시하느냐 하는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회경제학적 관점에서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세계 경제의 과잉생산과 과잉소비가 만들어낸 불균형과 불안정은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박한 행복조차 송두리째 앗아갈 개연성이 높다. 과잉생산과 과잉소비는 인간의 욕망이 자아낸 씨줄과 날줄이다. 지인 중에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더 최신의 핸드폰을 사용하고, 더 좋은 차를 굴리며, 아이들을 더 좋은 학원에 보내며, 더 큰 집에서 살기 위해 죽어라고 일하고 있다고. 불평 어린 얘기일 수도 있으나 행복의 기준을 잡는데 있어 이 얘기가 시사하는 바는 크다. “행복을 추구함에 있어 이렇게 많은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고 이렇게 많은 소모를 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면 삶의 습관과 삶의 방식을 조금이라도 바꾸어 행복지수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온 과거로 잠시 돌아가 보면, 물질적 풍요는 지금과 비할 바가 안되지만 정신적 행복 지수는 그 시절이 더 높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물질적 풍요를 잃게 되면 더 이상 정신적 행복을 누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물질적 풍요를 정신적 행복으로 연결시켜 주는 구조가 필요할 것이다. 스스로의 욕구를 줄여나가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 가장 선두에 서야 할 것 같다. 즉 자신의 욕구를 줄이는 것이 첫 번째 행복의 기준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산유적지에서] 소비와 절제의 균형은 어디인가?
사람들의 행복에 있어 중요한 또 하나의 기준은 관계의 건전성과 지속성일 것이다. 무리를 이루고 사는 인간의 속성상 관계는 행복한 삶의 기본조건일 수 밖에 없다. 학교, 직장, 종교, 마을, 동창모임 등 누구나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이러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게 된다. 공동체 내에서 관계를 잘 풀어가기 위해서는 상대를 배려하고 먼저 베푸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초년병 시절 약간 모자란 듯 살아가라는 어느 선배의 얘기와 가장 좋은 財테크는 ‘友’테크라는 지인의 말이 불현듯 생각나는데, 이것 역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얘기이다. 같이 밥먹고 나면 구두끈을 매거나 화장실로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과 먼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는 사람은 나중에 분명히 다른 대접을 받게 된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다. 먼저 베풀 때 행복은 더 커지고 그 행복을 서로 나누어 가지게 되며 인간관계도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다.
[남양주의 한 카페에서] 뒷주머니 지갑을 먼저 꺼내어 보자
또 하나의 행복의 기준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일 것이다. 파스칼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지 않는 것보다 유익이 크다는 것을 간단히 증명한 바 있다. 종교생활을 통한 심리적 안정이 가져다 주는 행복은 욕구를 줄여 자족하거나 인간관계를 잘 맺는 데서 오는 행복과는 또 다른 차원의 행복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크게 줄여주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긍정적 사고를 하게 해 준다. 믿음의 수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누구나 이러한 행복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기도하는 여인]
행복은 그를 찾는 자에게 다가온다. 절제와 베품과 믿음의 세가지 가치기준만 가져도 많은 행복들이 친구처럼 찾아올 것이라 믿으며 글을 맺는다.
* 이 저술의 저작권은 도서출판 아포리아에 있습니다. copyrights@aporia.co.kr ([Otium Sanctum] Aporia Review of Books, Vol.2, No.3, 2014년 4월, 이재호, SK 이노베이션 글로벌팀장